21-2. 승리의 여파
군주 가문인 드 레뮤즈의 소집령에 응해서, 400여 명의 가병을 이끌고 종군 중이던 드 레도쿠르 자작 가문의 후계자 라마엘은 당황스러움을 숨기기 힘들었다. 갑자기 ‘전방’에 찾아온 주군이 철수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처, 철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안타깝지만 더 이상의 공세를 지속할 수는 없어졌다네. 지금은 병력을 수습해 영토와 영민들을 보호할 때가 되었네.”
“고, 공세 말씀이십니까?”
공세? 아군이 공세를 지속하고 있었나? 라마엘은 더더욱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한동안 흙만 파서 날랐던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백작님! 당연히 백작님의 지시에 따를 생각입니다.”
“고맙네. 자네나 자네 아버지나, 레도쿠르 가문에게는 계속해서 신세를 지는군.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그, 그런 말씀은 당치도 않습니다!”
송구스러운 마음에 라마엘은 고개를 조아렸다. 최근 들어 주군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지시에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지만 충성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와 병사들은 모두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었고, 세심하게 관리되었다. 다치거나 질병에 걸린 이들은 곧바로 치료받을 수 있었다. 식사의 질과 양도 나쁘지 않았다. 조금씩 진척되는 공세··· ‘진격로 개척’ 작업도 나름 보람이 있었다.
다만··· 전에 생각했던 종군의 의무와 조금 달랐을 뿐이다.
"혹시 갑자기 `공세`를 포기하게 되는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최근 소식에 의하면 중앙에서 보낸 이단 토벌군이 트랑카벨 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했다고 하오."
"토벌군... 국왕 폐하의 군대가 말입니까?"
"그렇소. 그래서 나 역시, 본인과 가신들의 영토를 우선적으로 지킬 수밖에 없구려."
"그럴 수가... 알겠습니다! 백작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이제 다시 갑옷을 입고 창을 잡을 차례겠군."
"그렇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흙투성이가 된 라마엘 드 레도쿠르와 동료들이 호전적인 함성을 지른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가신들의 기세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른팔을 들어 보인다. 함성이 더욱 커진다.
라몽으로서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애들, 약 2천 명의 혈기 왕성한 기사와 병사들은 말하자면 가문의 일원, 식구나 다름없는 이들이다.
샹다메리 전투의 승패가 전해진 이후, 매일같이 귀찮게 하던 날파리들이 싹 사라졌다. 날파리들이란 물론, 왕실에서 편성한 성전군에 미처 참여하지 못한 지각생들이다. 그들은 매일 같이 찾아와서는, 드 레뮤즈의 군대를 이끌고 트랑카벨의 영토로 진격할 것을 건의해왔다.
라몽 백작은 그게 정말 싫었다. 앞장서서 쳐들어가거나, 새로운 연합군을 편성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면서. 남에게 선봉을 맡기고 자기는 뒤를 따르겠다는 썩어빠진 근성이 말이다.
그렇게나 열성이 있었다면 진작 준비해서 국왕의 원정군에나 참여하지 그랬나. 물론 그랬다면 샹다메리에서 트랑카벨 군대에 박살이 났겠지만.
아무튼 그러던 놈들은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각종 핑계를 대며 자기 영토로 돌아가 버렸다. 머저리들.
트랑카벨 가문도 이가 갈리도록 싫지만, 이런 멍청한 귀족들은 더욱 혐오스럽다. 트랑카벨 놈들은 적어도 자기네에게 득이 될 일은 직접 한다. 물론 그것도 씹어먹을 정도로 싫은 이유 중 하나이지만 말이다. 벼락 맞을 놈들.
그나저나 이번 전투에서 이긴 적장은 누구일까.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샹다메리 전투의 전말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하게 알고 있는 편이다. 아니, 당사자들을 제외하고 가장 잘 알고 있는 인간일 것이다. 일단 그의 영토 안쪽에서 벌어진 사건이니까. 다수의 정보원이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피기도 했다.
솔직히 이번 전투가 트랑카벨 가문에게 파멸의 시작일 것으로 예상했다. 전투에서 이기든 지든 피할 수 없는 파멸.
패배했다면 물론 미래가 없다. 다시는 엘랑키아의 대군을 막을 병력을 재건하지 못하리라. 자연 방어선인 로데브 강을 건너면 곧바로 트랑카벨의 핵심부, 카르카냑이다.
승리했다면? 그래도 밝은 미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무튼 성전군은 2만에 가까운 대군이다. 피해 없이 이길 수 없을리가 없다. 피투성이 승리를 했다면? 이미 지척에 국왕군과 동등하거나 더 많은 법황군이 다가와 있다.
결과적으로 이긴 게 이긴 게 아니게 된다.
하지만 전투 경과 보고서를 자세히 받아본 결과로는 트랑카벨에게 있어 이상적인 결과가 분명했다. 전투가 참혹한 살륙전이 되어 불필요한 사상자가 나오기 전에 끝내버렸다.
의도한 사항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서로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자신들의 이득은 극대화 한 것이 분명하다.
적을 너무 많이 죽였어도 문제가 된다. 국왕의 분노와 귀족들의 복수심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큰일이 된다. 엘랑키아는 강국이다. 전력을 다하지 않기에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국왕이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경제적 부담을 생각하지 않고 대군을 동원한다? 블랑독은 단 한 순간도 버틸 수 없다.
하지만 현재 결과는 `우연히도`. 매우 우연하게도 국왕이나 귀족 계급이나 딱 이성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영역이다. 포로도 많이 잡았으니 향후 협상에서도 유리하게 이끌고 갈 수 있겠지.
라몽은 조직에 있어서 개인보다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잘 만들어진 조직이라면, 일정한 수준 이상의 경험과 자질을 가진 인간이라면 같은 결과물을 낼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군대도 마찬가지이다. 특출난 개인의 능력에 의존해야 힘을 발휘하는 군대는 절대 좋은 조직이 아니다. 모든 인간, 심지어 자신을 포함한 지휘관조차도 조직을 위한 부품이다. 부품에 문제가 생겨 다른 부품으로 갈아 끼워도 동등한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좋은 조직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트랑카벨 군은 흥미로운 조직이다.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조직이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다. 과연 특출난 개인의 모임은 잘 구성된 조직보다 우월할 수 있는가?
오랜만에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는 한다. 한 번쯤 만나서 이야기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트랑카벨은 싫다. 나중에 드 누아 백작을 만나게 되면 물어나 봐야지.
문득 성전군에 자신이, 드 레뮤즈 가문이 소집한 7천 명의 병력이 참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트랑카벨은, 그 대단하다는 용병 지휘관은 두 배의 병력도 문제없이 물리칠 수 있었을까?
반대로, 드 누아 백작의 말대로 드 레뮤즈 백작가가 블랑독의 편을 들어 연합군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생각해보았다. 이 경우, 수적으로 호각 이상이 될 테니 분명....
아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럴 일은 없다. 라몽 백작은 상상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최근 정신병이 생겼나, 상상하기도 싫은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트랑카벨은 불구대천의 적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할 일은 절대 없다.
암, 없고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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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독 중북부에 외로이 버티고 있는 요새 마을, 아넥시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고 있었다.
"정말이야? 우리 편이 이겼다고!"
"참말로 성녀님이 직접 이끄는 군대가 국왕 나으리의 군대를 눌러 준 것이 맞는가?"
"아 그렇다니까요! 왕실의 잘난 기사님들이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도망쳤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신께서 도우셨구나!"
"아 성녀님이 직접 전장에 나가셨다는데! 사도들도 힘을 내서 싸웠지 않겠나!"
샹다메리 승리의 소식이 조금 늦게나마 도착한 것이다.
이제 주민들의 피난도 끝나고, 블랑독 북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린 상황에서 오가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아넥시에 남은 이들은 여기에 뼈를 묻기로 결정한 상태였으니 딱히 떠나는 이들도 없었고.
마구간에 있는 십여 마리의 말을 이용해 가끔씩 마을 밖으로 떠나는 정찰병들이 필요한 물자들과 함께 소식을 가져올 뿐이다. 대부분의 소식은 우울한 소식들이다.
법황이 보낸 성전군의 선봉대가 어디까지 이르렀다. 아넥시까지는 며칠 거리이다.
어느 마을에서 이단 재판이 벌어졌다. 혹독한 고문 끝에 정순파 신앙을 버리지 못한 이들 몇 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어느 정착지가 파괴되고 주민들이 벌거벗은 채로 추방되었다. 죄목은 참된 신앙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다.
당연히 각오는 했지만, 적들이 하루하루 가까워져 오는 것은 피를 말리는 소식들이었다. 어중간하게 시간이 주어지기에 자꾸 불안한 상상을 하게 된다. 전쟁 준비에 몰두하려고 해도 이미 어지간한 준비는 다 해놨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날아온 승전보이다. 그것도 소규모 접전 따위가 아니라, 국왕이 직접 보낸 수만의 군대를 격파한 소식이다! 오랜 농성에 지쳐있던 아넥시 주민들, 혹은 외부인들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루옹 씨! 소식 들으셨어요? 성녀님이 이끄시는 트랑카벨의 군대가 엘랑키아 국왕 나으리가 보낸 5만 대군을 무찔렀대요!"
"허허헛! 설마 국왕 나으리가 보낸 군대라고 해도 5만 명이나 되었으려고?"
"아 사람들이 다 진짜라고 한다니까요!"
"허허허허!"
아넥시 전투, 이제는 앞에 `1차`가 붙어야 할지도 모르는 전투 직전부터 아넥시 주민 대표를 맡는 루옹은 과장된 소문을 전달하는 청년의 말에 껄껄거리며 웃었다.
다소 과장이 있어도 좋았다. 최근 침울했던 아넥시에 다시 활기가 돌아온 것이 기쁠 뿐이다. 어차피 성녀님과 콘도티에레가 격파해서 블랑독에서 쫓겨난 군대이다. 다시 볼 일이 없으니, 5만이면 어떻고 10만이면 어떤가?
"성전군 놈들, 생각보다 별것 아닌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넥시는 이미 한 번 이긴 적이 있지요?"
"그럼! 성녀님이 직접 지킨 도시다! 한 번 지켜주신 도시를, 우리 성도들이 이어서 지키는 것이 당연하지."
이미 이단으로 분류된 정순파 신도들이 대부분 남쪽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걱정했던 무자비한 파괴나 학살은 없었다. 하지만 군수물자 징발을 빙자한 약탈에 대한 소식은 끊임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또한 간혹 신앙에 대한 고집 때문이든, 단순한 무지 때문이든 고향에 남아있던 정순파 신도들은 끔찍한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루옹 역시, 만약 살아서 적의 손에 잡힌다면 편하게 죽지는 못할 것으로 각오는 하고 있었다.
"아... 루옹 씨. 그 사람은 어떻게 하지요?"
"누구 말이냐?"
"그, 얼마 전에 감옥에 갇힌 성직자 말입니다. 진짜 성직자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그 사람."
루옹은 잠시 생각한다. 얼마 전, 수비전을 돕겠다며 각종 무기를 잔뜩 가지고 찾아왔던 성직자. 방어 교회의 일원이라나 뭐라나.
"아직 약정한 날이 되지 않았으니 그때 까지는 기다려 보자."
"알겠습니다, 루옹 씨."
청년이 나가자, 루옹은 멀리 북쪽 지평선을 바라본다. 저 너머 어딘가에 그들을 잡아 죽이려 하는 성전군 일당들이 몰려오고 있겠지.
얼마 전 새벽에 정체 불명의 기병 무리가 북쪽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있었다. 조만간 아넥시에서도 전투가 벌어질 것은 분명했다.
"신이시여, 당신의 성녀와, 당신의 도시와, 당신의 성도들을 보호해주소서."
짧게 기도를 마친다. 그로서는 자신들의 신과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의 신이 어떻게 다른지는 모른다. 하지만 소중한 것이 있기에 무기를 들었다.
있는 힘껏 싸우고, 요새를 지킬 수 없다면 적어도 지키지 못한 성벽 위에 쓸모없는 늙은 몸을 누이자.
그것이 이 늙은 민병 지도자의 각오였다. 어설프게 살겠다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형틀에 걸리는 것은 죽어도 사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