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승리의 여파
###
샹다메리 전투가 끝나고 며칠 후.
어느 늦은 시각. 엘랑키아 왕국의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는 집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시야가 침침하여 서류의 작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뜬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과로를 해서 그런지도 알 수 없었다.
“흐으음···.”
짜증과 초조함으로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우데사의 누르베이크 지방에서 올라온 절인 청어가 담긴 통의 물량이 300개 인지 500개 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우데사의 서기관놈이 알아보기 힘들게 글씨를 썼다.
게다가 가격으로 추측하기도 애매했다. 만약에 300통이라면 구매 담당자는 배임 혹은 횡령을 조사받아야 할 지경이다. 반대로 500통이라면 훌륭한 거래임을 칭찬하고 훈장을 줘야 할 일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놈의 생선 쪼가리가 300통이든 500통이든 무슨 상관이야!”
뮈르텔은 마침내 알아보기를 포기하고 서류를 다시 탁자 위에 던졌다. 생선이 300통이든 500통이든 엘랑키아 왕국이 굴러가는 데엔 아무 상관이 없기야 하겠다.
상관이 없지만 사실 상관이 있었다. 일정 금액 이상의 금액이 출납되는 모든 건을 관리하겠다고 결정했던 것은 다름아닌 뮈르텔 자신이었으니까.
그조차도 일이 너무 많아 ‘특정 금액 이상’ 혹은 ‘군수에 관련된’이라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에서 엘랑키아 정부가 처리해야 할 일의 대부분은 두가지 조건 모두에 해당되었다.
최근 라솔 왕국과의 국경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 라솔 왕국의 제후국 중 하나인 타라트라바가 블랑독의 성전에 끼어들고 싶어 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당연히 엘랑키아 입장에서는 절대로 원치 않는 개입이다.
그런가 하면 그룬발트 역시 드디어 25년 만에 황제가 정해질 모양이라는 말이 있었다. 다시 제국이 하나가 된다면 넘쳐나는 힘은 그동안 신경을 쓰지 못한 엘랑키아와의 국경선으로 몰릴지도 몰랐다.
거기에 멀리 남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블랑독 전쟁까지. 이 모든 일들이 뮈르텔 재상의 수면시간을 줄이는 주범들이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었기에 등한시할 수도 없었고.
창문을 내다보니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최근에는 잠도 왕궁의 별실에서 자다 보니, 언제 집에 돌아갔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서류를 들어 올린다. 이럴 시간이 없다. 결국 자신이, 그것도 오늘 해야 할 일들이다.
“재, 재상님! 재상님!”
다시 일에 집중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다. 다시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게 되는 이유는, 낮에는 사방에서 자신을 찾아대기 때문이었다.
“들어오게.”
업무를 방해받아 짜증이 났지만, 표출은 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부하들이 자신에게 보고 올리는 것을 꺼리게 된다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마침 집중도 안 되던 상황이었다. 마침 외부 업무 직후에 다시 집중이 잘 될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환은 가죽으로 된 커다란 두루마리 함을 안고 있었다. 얼굴은 왠지 긴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쪽 블랑독의 전선에서 올라온··· 서신입니다.”
“그래? 브와이유에서 말인가?”
“아, 아닙니다.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오, 어서 줘 보게나.”
성전군의 보급 기지인 브와이유에서는 막대한 보급 소요로 인해 끊임없이 연락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령관인 에티엔으로부터의 서신이라니? 설마 예정보다 빨리 블랑독 평정이 끝났나?
엘랑키아 정부에 엄청난 부담을 발생시키고 있었던 성전, 블랑독 전쟁이 끝난다면 그보다 좋을 것은 없었다. 뮈르텔은 편지를 넘겨받아 잘 봉인된 편지를 뜯는다.
“흐으음··· 음.”
편지를 읽는 뮈르텔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중간 정도를 읽었을 때, 뮈르텔은 대기하고 있던 사환을 불렀다.
“지금 몇 시지? 당장 국왕 폐하를 알현해야겠네.”
“방금 자정이 지났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신하로서 큰 결례지만 어쩔 수 없겠군. 즉시 궁내부에 알리게!”
“아, 알겠습니다 재상님!”
사환을 보낸 후, 뮈르텔은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편지는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보고서였다.
내용은 물론 블랑독에서 벌어진 대재앙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꼼꼼한 성격인 에티엔다운 내용이었다. 무슨 일하려 했고,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다.
그 잘 정리된 내용이 하나같이 재상의 속을 뒤집어 놓는 내용들이었다는 것이 문제지만.
이 대재앙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뮈르텔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
“이게 도대체··· 어떻게!”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드 팔라스 2세는 정말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갑자기 자다가 불려나와 경황이 없어 보였으나, 뮈르텔의 요약 보고를 받고 나서는 한참 아무 말도 없이 방 안을 돌아다니기만 한다.
“믿을 수가 없군··· 블랑독으로 진군시킨 군대는 결코 약한 병력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룬발트나 라솔의 국경 분쟁이 보내도 충분했을 수준의 군대입니다.”
“블랑독을 빨리 재정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판단했기에 그리 하였던 것인데···.”
자칫하다가 법황이 보낸 성전군에게 짓밟히기라도 하면 블랑독은 폐허가 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더 이상 방치하면, 외국 군대, 특히 라솔의 군대가 종교를 앞세워서 침입할 가능성이 있었다.
빠르게 점령한다면, 엘랑키아 북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비옥한 블랑독 전역을 왕실의 직할 영지로 삼을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부유한 상인 집안으로 해외에도 유명한 트랑카벨 가문의 금화 역시도 왕실의 금고를 채워 줄 예정이었다.
아니, 그렇게 되었어야만 했다.
전쟁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전황이 지지부진해지는 상황까지는 생각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법황의 성전군에 앞서서 선수를 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패배했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것만 봐서는···.”
다고베르 2세가 탁자 위에 에티엔의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피해가 적지 않았다.
보병과 기병 모두 재건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연대들이 있었다. 부대란 공장에서 마구 찍어내는 물건이 아니다. 병사와 무기가 있어도 조직이 없으면 부대로서 기능을 못 하니까.
하지만 전투하다 보면 피해는 누적되기 마련이고, 병력과 다른 자원을 보충해 전투력을 유지한다. 그런데 때로는 피해가 너무 커서, 부대를 재건하느니 해산시키는 게 나은 일도 생긴다. 그런 상황에 닥쳤다는 것은 병력에 막대한 피해가 있거나, 지휘부에 사상자가 많거나, 둘 다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죽거나 행방불명된 대귀족 가문 소속의 인물들만 보아도··· 실로 엄청난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적의 상태는? 그에 상당한 피해를 줬을까?
“보고서만 봐서는 구체적인 상황을 알기 어렵습니다. 아마 늦어도 이틀 내로는 참모 장교들이 도착해서 상세한 보고를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최대한 빨리 중요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령만이 온 것이다. 거기에 이 정도 자세한 정보를 담았다는 것은 역시 에티엔이구나 싶기는 하지만.
“내일, 아니 지금 바로 전쟁 회의를 소집해주세요, 재상.”
“...알겠습니다.”
전쟁 회의는 엘랑키아 왕실의 비상설 조직 중 하나로, 전쟁 중 설치되는 국왕 직속의 전략 조언 기관이다. 단순한 참모 본부 기능을 넘어서 때로는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지휘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다만 이번 블랑독 원정은 성전이라는 특이한 상황에,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엘랑키아의 한 지방에 대한 통합 전쟁이기에 국왕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때문에 엘랑키아 전쟁 회의도 소집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왕실군은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슬슬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오랜만에 휴가를 간 녀석들에게 미안하게 됐네···.”
다고베르 2세는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벽에 걸린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가로 세로가 2.5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엘랑키아의 지도. 그의 눈이 지도의 왼쪽과 오른쪽을 바쁘게 살핀다.
뮈르텔은 국왕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왕실군은 아니지만, 어쨌든 중앙에서 파견한 군대가 지방 정권 통합 전쟁에서 패배했다. 완전히 끝장난 것은 아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웃들에게는 잘못된 신호가 될 수 있으니까.
이거 자칫하면···.
엘랑키아 정부 입장에서는 ‘블랑독의 이단’들을 응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블랑독의 이단은 패배해야 한다.
하지만 엘랑키아 왕실 이외의 상대에게 패배하면 안 된다. 이율배반적인 생각이지만, 재상 뮈르텔에게는 그것이 현실이었다.
###
카르카냑에 있는 트랑카벨 저택의 응접실에서는, 가문의 주인 아롱드 트랑카벨이 낯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상으로 이번 분기의 배당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서면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소이다. 항상 고맙구려.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시니, 우리 손녀가 폐를 끼치고 있소이다."
"아닙니다, 아롱드 경. 저희 철면 은행에서는 언제나 고객님의 요구에 완벽하게 대응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있습니다."
"허허, 하지만 수천 명의 용병을 바다 건너로 수송하는 게 은행의 일은 아니지 않소?"
"고객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일이 저희 일이지요."
"허허, 그것 참. 이래서 다들 철면 은행, 철면 은행 하는구려."
단정한 바가지 머리를 한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철면 은행의 지점장, 빈첸조는 특유의 가느다란 눈으로 대화 상대인 노인, 아롱드 트랑카벨을 빈틈없이 살피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경영 관련 실무자인 아쥬흐 트랑카벨과 만나왔기에, 트랑카벨의 가주인 이 노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좋은 포도주`라는 상품만 가졌을 뿐, 경험도 지식도 연줄도 없는 상황에서 주디칼리 시장을 개척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그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보통 좋은 상품, 혹은 그 상품을 생산할 능력만 있는 생산자가 시장에 진입하면 결과는 뻔하다. 이미 유통망을 쥐고 있는 상인들에게 부가적인 이득은 탈탈 털리고 상품의 시장 가치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푼돈이나 쥐게 마련이다.
그에 비해 젊은 시절의 아롱드는 어떤 확신을 두고 공격적으로 시장을 개척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주디칼리에서 그룬발트에 이르는 거대한 포도주 유통망이다.
물론 지금이야 사람 좋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빈첸조도 인정한 수완가인 아쥬흐 트랑카벨을 키워 낸 인간이다. 보통 사람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트랑카벨 가문의 승리 소식도 듣고 가게 되어서 기쁩니다."
"허허, 그건 나도 그렇소이다."
"이번에도 분명 에트라는 이름의 콘도티에레께서 총 지휘를 맡으셨다지요?"
"그렇지! 에트야말로 우리 가문의 보배요!"
다소 경계하는 듯 보였던 아롱드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손녀인 아쥬흐를 칭찬할 때보다도 밝아진 것 같다.
"아하... 혹시 아롱드 어르신께서는 에트 경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까?"
"허헛, 대체 누가 그놈 속을 잘 안다고 하겠소? 카르카냑을 줄 테니 가문에 들어오라고 해도 거절한 놈인데!"
"네? 서, 설마... 이 카르카냑 영지 말입니까?"
"아 그렇다니까! 하기야, 그 녀석이라면 손에 넣고자 했으면 카르카냑 정도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겠지만."
이 말에는 말 그대로 ‘철면’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듯한, 빈첸조 지점장의 접대용 미소도 조금은 흔들렸다. 평생 확신을 가져온 잣대가 흔들렸을 때의 반응이었다.
"...흥미로운 사람이군요. 혹시 어르신께서 알고 계시는 에트 경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을까요?"
"허어... 어떤 이유요? 의심해서 미안하지만, 에트는 트랑카벨 가문에 은인 같은 존재라서 말이오."
"투자 대상으로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아, 투자 대상! 에트가 이기면 돈을 버시는 거요?"
"맞습니다."
"푸하하하, 그렇다면 같은 입장이라고 해도 좋겠군. 이 노인네의 술 상대해 준다면야 못 해 줄 건 없겠소이다."
"마침 접대용으로 좋은 술을 몇 병 가지고 있습니다. 어르신께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하하하, 그럼 철면 은행의 지점장께 한 잔 받아볼까?"
본래 술자리란, 단순히 친목만을 도모하는 자리는 아니다. 한쪽이 내주는 정보만큼, 반대쪽도 자신을 내보여야 하는 것이다. 아롱드도, 빈첸조도 이는 잘 알고 있다.
다만 오늘의 술자리는 평소보다 좀 더 단순한 친목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