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6. 샹다메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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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주! 적 기병이 패주합니다, 콘도티에레!”
“으음!”
아실의 보고에,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해냈다, 슈토르히 녀석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똑똑하게 보였다. 일부러 약점을 노출하고, 적의 공격을 유도한다. 그걸 좁은 공간에 밀어 넣고 철저하게 난타해 무너뜨렸다.
밖에서 보니까 잘 보이지. 장기나 바둑의 경우 내가 하면 잘 안 보이는데, 옆에서 훈수 둘 때는 잘 보이는 것과 같은 걸까? 사실 적이 공격할 만한 곳은 거기가 아니었다. 포병 진지에 발을 걸치고 있는 모서리가 가장 약했으니까. 거기서 빼돌린 병력으로 이중 함정을 설치했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딱 붙어서 어떻게든 뚫어보려고 노력하던 적에게는 그게 안 보였던 모양이다.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외부에서 병력을 지휘하며 슈토르히 연대를 공격하는 상황이었다면?
으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내가 ‘볼 수 있는’ 이유는 말하자면 치트 덕분이다. 무슨 상태창, 미니맵 이런 치트는 아니고. 나는 슈토르히 연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지휘관인 루트비히에 대해서도 잘 안다. 그래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보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머리로는 알아도 상대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지. 솔직히 최후의 최후 순간까지 창병 예비대를 숨긴 것은 무서웠다. 눈앞에 돌격대가 방패 벽 치고 있으니 뚫을 수 있어 보였겠지? 하지만 뒤에는 총병이, 옆에는 창병이 있었다.
하아··· 생각해보니 내가 상대하더라도 정말 강적이겠구나. 슈토르히 연대도 우리 편이고, 루트비히도 내 부하라서 다행이야. 앞으로도 그러길 바란다.
아무튼 정말 힘든 일을 해 주었다. 적의 심장부에서, 가장 강한 적의 부대를 무너뜨렸다.
이제 적은 예비대가 없다. 아군은 슈토르히 연대가 프리로 남았다. 벌써 방심하면 안 되므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승패가 갈렸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콘도티에레! 제10 연대가 샹다메리 언덕을 돌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 모리츠가 서둘러 줬구나!”
“어,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이동했을까요, 콘도티에레!”
“좌익에서 아군 기병들이 적을 잘 상대해 주었으니까, 일시적으로 사각 대형을 풀고 행군 대형으로 빠르게 이동했겠지. 역시 모리츠, 제법이구나.”
“그런 방법이 있군요, 콘도티에레!”
아실의 눈이 감탄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언젠가 트랑카벨 가문을 이어받을 이 소년의 눈에는 이 전장이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언젠가 홀로 트랑카벨 군을 이끌 때 어떤 눈을 하고 있을까.
그것까지 내가 지켜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세상일은 확실히 알 수 없으니까.
“제10연대가 대열을 변경하고 있습니다, 콘도티에레!”
모리츠의 제10 연대가 측면 공격을 시작하면 아직 언덕 끄트머리를 지키고 있는 적 보병 부대 역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드 누아 남부 연대를 상대로 간신히 싸우고 있을 테니까.
그러면 적 후방의 아군 보병 연대는 제10 연대, 드 누아 남부 연대, 슈토르히 연대의 3개 연대나 된다. 거기에 지빌링엔 반 연대가 포함되면··· 적은 절반쯤 앞뒤로 포위당하게 된다.
물론 주 전열의 적 보병 연대는 아직 강력하다. 포위한다고 해서 바둑처럼 자동으로 죽어 주지는 않겠지. 하지만 기동성도 빼앗기고 예비대도 없이 포위된 상태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사람은 이미 일어난 재난보다,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을 더 무서워하게 마련이니까.
다음 대응은 적의 선택에, 그리고 제10 연대가 얼마나 빨리 적을 무너뜨리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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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투베 연대는 운이 없었다. 운이 없었기에, 실제로 당해야 할 재난보다 훨씬 큰 재난을 당했다.
첫째로 운이 없었던 점은 시기와 기세였다.
전투에 진입하는 시점에서 이미 불리한 상황이었다. 적은 대열을 뚫고 들어와 이미 기세를 올릴 대로 올린 상황이었으며, 도움이 될 수 있었던 아군은 이미 패퇴하여 도망쳐버렸다.
둘째로 운이 없었던 점은 그들 어깨에 짊어진 막중한 책임이었다.
국왕의 성전군 최강의 기병이라는 존재감. 그만큼의 자부심.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퐁투베 연대의 선택지를 지워 버렸다.
아무리 강한 전력이라도 ‘절대’는 없다. 하지만 ‘절대로 이겨야 하는 상황’을 강요받는다. 그것도 최대한 빠르게 말이다.
셋째로 운이 없었던 점은··· 연대장이자, 엘랑키아 최고의 기병 전문가인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이 선두에서 공격을 이끌고 있었다는 것이다.
“크으으윽, 커헉!”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은 심한 고통에 신음했다.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허벅지에서 올라왔다. 아니 허벅지뿐만이 아닌 것 같다. 더 아래일 수도. 하지만 무릎보다 아래쪽인지 확신은 가지 않는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설마 잘려 나간 것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최소한 지금처럼 꼼짝도 못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몸을 한 번 뒤틀어 보고, 양팔로 안장을 밀쳐 본다. 끔찍한 고통만 온몸을 훑고 지나갈 뿐,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인지한 직후, 총탄이 날아들면서 잠시 허공을 날았던 것만 기억난다. 바닥에 널브러지고 오랫동안 전장에서 함께 해온 애마가 숨이 끊어진 채 구르며 자기 하반신을 덮쳤다.
제대로 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지휘관인 그가 방관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방관자조차 아니다. 이렇게 누운 자세로는 ‘방관’ 조차 할 수 없으니까.
주변으로 휘하 기병들이 수없이 달려갔다. 요란한 총성이 이어지고, 치열한 전투 소음이 반복되었다. 조금 조용해졌을 때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지나간다.
그제야 깨달았다.
퐁투베 연대는 그가 쓰러진 이후 전혀 통제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그를 지나쳐 달려갔던 부하들은 거의 전멸했겠지. 그러지 않고서는 반대편에서 적 보병들이 저렇게 여유 있게 대열을 갖춰서 오지 못할 테니까.
기병대 운용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은 지휘부를 한 곳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승리를 확신했기에 그런 배려를 하지 못했다.
아마도 연대장인 베리브 자신과 주변의 참모들이 모두 쓰러졌다면··· 휘하의 중견 지휘관들은 혼란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부디 누군가가 자신이 쓰러진 이후 지휘를 맡아주면 좋을 텐데.
머릿속으로 장교들의 면면을 살펴보지만, 딱히 믿음직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병력과 자금을 지원해준 귀족 출신 장교들에게 한 자리씩 주다 보니 연대 지휘부가 불균형한 상태였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해온 휘하 장교들은 그와 함께 쓰러졌거나 포위망 밖에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지휘를 받지 못한 부하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이 된다.
···완전히 당했다. 가장 큰 재난은 베리브 자작 자신의 방심이었다.
“여기도 생존자가 있네.”
“어깨 장식에 금줄이 있어! 지휘관인가?”
“거기 당신, 내 말 들리쇼? 항복하겠소? 싫으면 그냥 목숨 끊어 줄 수도 있고.”
눈앞에 적 병사 세 명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명은 커다란 방패를 들었고, 나머지 한 명은 화승총을 들고 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섯 개의 눈동자에서는 더 이상 분노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치욕이었다. 그들의 태도는 마치 주문된 내역이 맞는지 물어보는 장사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그는 타도해야 할 적조차 아니다.
죽고 싶도록 치욕스럽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패장에게는 패장의 의무가 있으니까.
“퐁투베 기병 연대의 연대장,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이다. 귀관에게 항복하겠다.”
“뭐? 진짜 연대장? 허···.”
“내가 누구에게 항복하는지 알 수 있나? 그리고 귀하의 지휘관과의 면담을 요청하네.”
“에··· 저는 슈토르히 연대의 소대장 넬릭 안젤람이고요. 지휘관님은 지금 바쁘시지만 보고는 올리겠습니다.”
총병이 나름의 예의를 갖추며 말한다. 껄렁껄렁한 태도임은 여전하지만, 베테랑답게 최소한의 전장의 규칙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지만 좀 일으켜 주겠나?”
“아, 다리가 깔리셨나 보네요. 어이, 하나둘 하면 같이 밀어줘.”
“자, 하나둘!”
“크으윽!”
간신히 죽은 애마에서 벗어난 베리브는 일어나려다 다리에서 다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껴 비틀거렸다. 적병들이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이거 잡으시죠.”
부러진 창대에 의지해 간신히 일어선 베리브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산처럼 널브러진 말과 인간의 시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예상은 했으나, 생각보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저, 전투는 끝났나?”
“에··· 아니요. 슬슬 끝나가고는 있습니다. 자작님 부하들은··· 반은 여기서 죽고 반은 도망친 모양이고요.”
“...그렇군.”
그를 ‘감시’하며 그의 말에 대답해주는 넬릭 안젤람은 전투보다도 계급이 높은 적 포로와 함께 있는 것이 더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다. 주변에 군데군데 모여서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는 포로들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방금 베리브와 함께 적진에 뛰어든 기병들을 포위하고 사정없이 학살하던 ‘인간 울타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사각 대형 주변을 가득 채우고 격렬히 공격하던 그의 부하 기병들은 모두 퇴각한 모양이다. 사방에 시체가 쌓여있는데도 적 보병 대열은 여전히 단단해 보인다. 다시 한번 비슷한 공격을 받는다 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베리브는 자신의 부대를 잃었다.
엘랑키아 국왕의 소집에 응해 군인이 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 자작님? 지금 우리 부대 지휘관 루트비히 대장님이 자작님을 뵙겠다 하십니다.”
“...알았네. 으으윽!”
그는 말 없이 자신을 사로잡은 적병의 뒤를 따라 걸으려다가 하마터면 넘이질 뻔했다. 이번에도 넬릭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죄송한데 들것 가져올까요?”
“아 아니네 이대로··· 가도록 하지.”
“하아··· 알겠습니다.”
패장의 조심조심 옮기는 발걸음이 비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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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펜스 연대가 측면부터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퀴오슈 연대의 후미엔 소 후작님의 전령입니다! 적 세력 강대! 위치를 고수할 수 없다! 이상입니다!”
“으아앗! 아퀴오슈 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잇따른 보고가 성전군 사령관,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의 귀를 때렸다.
보고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에티엔 자기 눈으로 다 보고 있었으니까.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이 성전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결정타는 비장의 카드, 해결사라고 생각했던 퐁투베 연대의 붕괴였다. 불과 15분이 안 되는 짧은 교전에서 퐁투베 연대는 완벽히 붕괴했다. 보고가 올라오지 않아 확실히는 알 수 없었으나, 무질서하게 무너진 것을 보면 연대장인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도 전사했을지도 모른다.
더 안 좋았던 것은, 패주하는 기병들이 남쪽과 동쪽으로 무질서하게 달려갔다는 것이다. 아직 싸우고 있는 아군 보병들에게 ‘아군이 무너지고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시각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아까 아퀴오슈 연대의 후위 절반이 무너졌을 때는, 북쪽으로 도망쳤기에 이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공황의 연쇄작용.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확실하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용맹한 병사라도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의연하던 용사가, 불확실한 미래를 멋대로 예상하며 공포에 질려버리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움직여 버린다. 그런 상황, 전면적인 붕괴 상태가 오기 전에 막아야 하는 것이 사령관인 에티엔의 임무이다.
“전령! 루블랭 연대에! 루블랭 연대는 새 방어선의 축이 된다! 공세를 멈추고 측면을 지키며 천천히 후퇴할 것!”
“루블랭 연대는 새 방어선의 축! 공세를 멈추고 측면을 지키며 천천히 후퇴할 것!”
이미 졌다. 이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모두 에티엔 자기 잘못이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 상황에 이랬어야 했는데. 온갖 가정과 후회가 머리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전투가 끝나고도 살아남는다면 반성회 따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
지금은 망해 버린 전장에서 한 명이라도 병력을 더 살려서 빠져나갈 생각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