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5. 샹다메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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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한다. 긴장하지 마.”
“예, 예에에, 예엣!”
바로 옆에 있는 소대장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슈토르히 연대 소속, 돌격대에서 덩치는 가장 크지만 가장 나중에 입대한 막내인 고프릭 벨장은 얼빠진 대답을 했다. 주변의 동료들 사이에서 살짝 웃음이 번진다.
“뭘 그리 긴장했어?”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 우리가 훨씬 강해.”
“예엡!”
고프릭에게는 첫 실전이나 다름없다. 물론 지금까지 슈토르히 연대를 따라다니면서 실전 속에 있었기는 하다.
그렇지만 함께하기만 했을 뿐, 실질적으로 적과 무기를 마주하거나 맨 앞줄에서 싸웠던 것은 아니다. 믿음직한 슈토르히의 창병과 총병들이 만든 장벽 안쪽에서 안전하게 머물렀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기병에게 습격당하기 직전, 방치되어있던 적 포대를 점거했을 때 잠시 돌격대가 선두에 나서기는 했다. 하지만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에 완전히 질린 적군이 그대로 포병 진지를 포기하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결국 고프릭과 돌격대는 버려진 포대를 점거했을 뿐.
지금 슈토르히 연대가 상대하고 있는 적 기병대가 지금까지와 달리 강적이라는 것은 전쟁 초보인 고프릭도 알 수 있다.
아니 애초에 슈토르히 상대로 이렇게 오래 버티는 적이 처음이었으니까, 바보라도 알 수 있겠다.
“온다! 다들 훈련대로!”
눈앞에서 우왕좌왕하던 총병 대열이 좌우로 확 갈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로 하듯, 적 기병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제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은, 3개 열로 늘어서 방패를 앞세우고 기다리는 돌격병들이다. 적들은 돌격병의 방패 대열을 보고 조금 놀란 것 같다. 최근, 엘랑키아 내부에서는 방패병을 보기가 어려웠을 테니까.
슈토르히 돌격병은 상체를 다 가릴 정도로 커다랗고 쇠로 보강한 방패가 필수 장비이다. 엄청나게 무거워서, 어지간히 힘이 좋지 않으면 들기도 어렵다. 주 무기는 기사들이 쓰는 장검에 비해 짧지만, 폭이 넓은 묵직한 검이다.
방패병은 근접 백병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공성전이나 진지전과 같은 좁은 전장에서 강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진형 유지와 화력 투사전에서 결정적으로 창병이나 총병을 전혀 도울 수 없다.
그런데도 높은 숙련도와 전술 이해도가 필요하다. 잘 만들어진 방패는 상당히 비싸다.
그래서 지형이 복잡한 라솔이나, 숲과 늪지대가 많은 그룬발트 남부 지역에서나 아직 명맥을 이어간다. 평야가 대부분인 엘랑키아나, 보병의 숙련도가 낮은 편인 나우데사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엘랑키아 기사들에게 낯설게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방패병이 도태된 이유는 명확하다. ‘평균적인 상황’에서는 창병과 총병이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슈토르히가 돌격병이라는 이름으로 방패병을 쓰는 이유도 명확하다. ‘특정한 상황’에서는 창병과 총병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모두 앉아!”
“앉아아아!”
선임 중대장 크레시미르의 외침에, 밀집 대형을 이룬 돌격병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는다. 3열로 이루어진 방패의 벽이 갑자기 낮아진다.
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총병들이다. 갑자기 낯선 상황에 직면한 엘랑키아 기병들이 이번에야말로 멈칫한다.
총병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평소보다 거리가 가깝다.
기병은 위치가 높고 덩치도 커서 좋은 표적이다.
기병과의 사이를 돌격대가 지켜주고 있어 심리적으로 안정적이다.
평균적인 총병에 비해 명중률도 높고 연사 속도도 빠른 슈토르히의 명사수들이다.
“쏴라!”
타타타타탕!
평소보다 조금 더 정확한 납탄의 폭풍이 기병대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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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윽!”
“멈추지 마! 멈추지 마라!”
“기습이다! 주의해!”
기병이 총에 맞았다.
빛나는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당당한 엘랑키아의 기사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망가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서 등자에 다리가 걸린 채로 질질 끌려다닌다.
돌격해오느라 지친 데다 흥분해서 거품을 물고 있던 군마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랐다. 등을 누르고 있던 묵직함이 사라졌다. 주인이면서 함께 훈련한 파트너이기도 한 인간의 명령이 더 이상 전달되지 않는다.
눈앞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무서운 불꽃이 번쩍번쩍한다. 명백히 악의를 가진 인간들이 이상한 둥근 철판을 흔들며 고함을 질러대고 있다.
당연하지만 패닉에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뿐이 아니다.
말이 총에 맞았다.
엘랑키아 북부의 오래된 농장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특별한 관리를 받으며 군마로 키워진 좋은 혈통의 암말이다. 주인에게는 온순하고 충성스러우며 체력도 좋다.
몇 년 전 현재의 주인에게 팔려 가 여러 차례 전투에도 참여한 적 있는 베테랑 군마이다.
가슴 근육을 뚫고 들어온 납탄이 심장 근처에 이르렀다.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바람에 자세가 무너지며 쓰러진다.
관성을 이기지 못한 기병이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올라 흙바닥에 거꾸로 떨어져 목이 부러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숨이 끊어진 것은 말과 그 주인이 거의 동시였다.
살아서 공황 상태로 날뛰는 인간과 말. 살아는 있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인간과 말. 죽어버린 말과 인간의 시체가 마구 뒤섞인 아비규환이 기병대의 선두에서 벌어졌다.
기병 돌격에서 항상 조심해야 하는 점은, 밀집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절한 밀집도와 후속 전력은 돌파력과 전투 지속 능력을 크게 올려준다. 기병 돌격에서는 기병 개개인의 전투 능력도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보병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압도적인 충격력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병이나 보병이나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와중에도 이 격차는 명백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 밀집도를 너무 빽빽하게 올리면? 선두 기병들이 다수 쓰러지면 문제가 생긴다. 인간보다 훨씬 커다란 말의 사체가 후속하는 동료를 막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엘랑키아의 근위기병대장인 베리브 드 퐁투베나 그 휘하 지휘관들이 이걸 모를 리는 없다. 심지어 베테랑 기병들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따로 명령이 없어도 알아서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너무 좋은 기회였으니까. 좁지만, 저기만 돌파하면 이 끈질긴 슈토르히 연대를 끝장낼 수 있는 약점이었으니까.
아니, ‘그렇게 보였으니까’ 이겠다.
“으윽, 밀지 마!”
“돌격을 멈추지 마라! 측면이다! 측면으로 돌아!”
“적 대열 내부를 장악··· 으윽!”
“창병이다! 멈추면 안 돼!”
선두에서는 엄청난 정확도와 연사 속도로 근거리에서 저격당해 시체가 쌓여간다. 후방에서는 꾸역꾸역 계속해서 밀려 들어온다. 측면에서는 혼란에 빠진 줄만 알았던 창병들이 어느새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새 침입해온 기병들을 가두는 보병의 울타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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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타탕!
숙련된 슈토르히 사수들은 평균적인 사수의 두 배가 넘는 엄청난 속도로 사격을 이어 나간다.
총기 내부 청소는 2~3발에 한 번씩만 한다. 바닥에 개머리판 끝을 두드리는 방식으로 화약 다지는 시간을 최소화한다. 총강 내부에 탄약 찌꺼기가 심하게 쌓였을 때는 탄약포를 완전히 까서 납탄만 넣어 마찰을 줄인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아주 조금씩 아낀 시간이 불벼락이 되어 이미 초주검이 된 적군에게 쏟아진다.
사격 구령? 그런 것은 필요 없다. 숙련된 사수에게는 사격 시작 명령과 종료 명령만이 필요하다. 사격 속도와 명중률을 저하할 수 있는 모든 문제는 경험과 실력으로 극복해버린다. 탄매로 새카맣게 변한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자, 또 한명이 기병이 피를 뿌리며 허공을 날아 땅바닥에 처박힌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때가 되었다. 돌격대 선임 중대장 크레시미르 두브람이 후방 총병들의 사격을 멈추게 했다. 양팔을 교차하여 흔들며 고함을 지른다.
역시 숙련된 총병들이라, 단 한 번의 명령으로 칼로 자른 듯 사격이 멈춘다. 장전이 완료된 총병은 총구를 하늘로 향한 채 대기하고, 나머지는 태연하게 하던 동작을 이어 나간다.
전투 와중 잠깐의 여유 시간이다. 허리춤에 끼워 놓았던 담배를 꺼내 화승의 불을 옮겨붙이는 총병도 있다. 화약 무기를 쓰는 와중에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일반적인 총병 부대에서는 욕먹을 짓이다. 하지만 수 백 번은 해봤다는 듯, 무척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크레시미르는 부하 돌격대원들에게 재차 명령한다.
“슈토르히 돌격대, 일어서!”
“일어서어어어!”
쪼그려 앉아있던 돌격병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높은 숙련도를 보여주듯, 방패벽의 선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 차례다!”
“예엣!”
“가자! 돌격이다아!”
“돌겨어어억!”
돌격대가 대열을 무너뜨리고 일제히 뛰쳐나간다. 방패를 앞세우고, 날카로운 칼끝을 겨눈 상태로. 더 이상 방어적인 방패 벽 대열을 갖출 필요가 없다.
이제는 그들이 공격자이며, 사냥꾼이다.
그들과 목표인 기병의 무리 사이에는 시체 무더기가 있다.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인 인간과 말들. 악착같이 돌파를 시도하던 이들의 흔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접근 과정에서 총에 맞아 쓰러졌다. 드물게 돌격대의 방패 벽에 도달한 기병들도 말에서 끌려 내려와 죽임을 당했다.
본의 아니게 이렇게 쌓여버린 시체는 기병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운 장애물이 되었다. 너무 좁은 장소에서 너무 많은 이들이 쓰러졌다. 기병 활동에 적합하지 않은 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에 비교하면 산개대형으로 돌격하는 슈토르히 돌격대는 거리낌이 없다. 때로는 비켜나고, 때로는 뛰어넘으며 거침없이 다가간다. 이미 돌격력을 잃어버리고 제자리에 멈추거나 같은 위치를 빙빙 돌고만 있는 엘랑키아 기병들이 갑작스러운 돌격에 놀라 지르는 고함이 들려온다.
“돌겨억!”
“이야아아!”
“우아아아아!”
그 후방에 유독 툭 튀어나온 거대한 실루엣이 있다. 남달리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고프릭이다. 다만 그는 신병이니 대열 한가운데 대기이다. 선배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눈으로 보고 나서 참여해도 늦지 않다는 이유이다.
커다란 방패를 든 돌격대가 위협적인 고함을 지르며 마구 달라붙는다. 때로는 방패로 때리기도 한다. 말은 군마로서의 받은 훈련과, 짐승으로서의 본능 사이에서 갈등한다.
자연스럽게 위협에서 멀어지려 한다. 발길질해서 위협적인 상대를 떨어뜨리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위에 탄 기병은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역시 패닉에 빠지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적은 가까워지는데 말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고 적을 견제하기 위해 양팔이 벌어진다. 돌격대 병사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을 찔러 올린다. 날카로운 칼끝이 겨드랑이 아래쪽을 보호하기 위해 촘촘하게 엮인 사슬을 뚫고 들어간다.
카가가각, 우드득!
“그아아악!
기병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지자, 큰 상처가 없는 말은 날뛰면서 동료들을 치고 달아나 버린다. 단 한 번의 찌르기로 적을 쓰러뜨린 돌격병은 다시 방패를 당겨 상체를 가린 자세로 다음 적을 찾는다.
그 병사를 노리고, 바로 뒤편의 기병이 권총을 겨눈다. 권총의 총구를 마주한 총병의 눈이 긴장으로 커진다. 아무리 쇠를 씌운 방패라고 해도 이 거리에서 발사된 권총은 막기 어렵다.
탕!
하지만 미처 권총이 발사되기도 전에 총탄이 기병의 흉갑을 뚫는다. 상처와 입으로 피를 뿜으며 기병의 권총은 헛되게 허공으로 발사된다.
돌격병의 바로 뒤를 따라온 총병이 아군의 머리 너머로 엄호 사격을 한 것이다. 딱히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니다. 약속한 행동도 아니다. 그냥 슈토르히는 원래 그렇게 싸워오고 있었다.
구원받은 돌격병은 딱히 고맙다는 기색도 없이 다음 적을 찾아 나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은 얼마든지 있다. ‘울타리’에 갇힌 기병은 아직 많이 남았다.
고마움은 나중에 살아남으면 술집에서 갚으면 된다. 자신이 저격으로 구했다며 술을 사라는 총병이 몇 명이나 나오겠지만.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다 사주는 것이다. 선불로 받은 놈들은 더 잘 지켜주겠지.
돌격대 병사는 다시 함성을 지르며 동료들과 대열을 맞춰 전진한다. 이제 적은 멈춰있을 뿐 아니라,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어떤가 고프릭! 할 만한가?”
“예, 예옛! 중대장님, 그, 어떻게, 아니! 저···.”
“푸하하하하! 자네 정말 너무 긴장했군!”
어쩔 줄 모르며 선임들의 뒤를 따르던 고프릭의 방패에 자신의 방패로 탁 소리가 나게 부딪히며, 신임 중대장 크레시미르가 말을 걸자 고프릭이 다시 한번 어버버한다.
“괜찮아! 이렇게 부대를 잘 따라가고 있는 것만 해도 충분해.”
“그그그··· 그렇,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의 부대다! 그래서 비로소 강해지는 거야. 우리 돌격대도, 주변의 슈토르히 연대도 말이지!”
고프릭은 방패 위로 불안한 눈을 내밀고 주변을 살핀다. 돌격대의 선임병들이 차츰차츰 적을 쓰러뜨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기세를 올려 마구 돌진한 것으로 보였지만 완전한 혼전은 아니다. 느슨하게나마 대열 끄트머리의 ‘선’은 유지되고 있다. 아마 돌격대 병사들의 어깨를 따라 연결한다면 삐뚤빼뚤하지만 완전한 하나의 선이 완성될 것이다.
“으아악 비켜!”
“허억!”
그 때, 용케 포위망을 뚫고 나온 것인지, 적 기병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온다. 돌격이라기보다는 패주에 가깝다. 공포에 질린 얼굴, 딱히 공격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갈 곳을 몰라 방황하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썩어도 엘랑키아의 기사, 혼란 통에도 고프릭을 발견하자 검을 치켜든다. 그의 곁을 스치듯 지나가며 검을 휘두를 생각인 것 같다.
“이런 조심하게 고프···.”
“우아아아아아아아악!”
터엉!
당황한 고프릭이 그대로 방패를 휘둘렀다. 막 옆을 지나가려던 군마의 머리에 명중해 굉장한 소리가 난다. 말의 눈이 뒤집히더니 그대로 수그리듯 주저앉는다.
“흐이이익! 악!”
그 바람에 몸이 뒤집혀 허공으로 날아오른 엘랑키아 기사가 흙바닥에 처박힌다. 그 역시 눈이 뒤집혀 혀를 내밀고 입가에 거품이 흐른다. 기절한 것이다.
“허억! 허억! 흐으으···.”
“와··· 내가 뭘 본거지? 말을 한 방에 기절시켰어? 그것도 방패로!”
“으으··· 으, 죄송합니다.”
“아니 뭐가 죄송해, 자네 정말 대단하구만 고프릭!”
크레시미르가 고프릭의 등짝을 두드린다. 쇠로 된 장갑이 갑옷에 부딪혀 탕탕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