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3. 샹다메리 전투
엘랑키아 왕국의 근위기병대장, 베리브 드 퐁티브는 고민하고 있었다.
“베리브 자작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저희는 언제라도 공격의 선봉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니, 저희 드 드로스타니 가문의 기사들을 믿어 주십시오!”
“결단만 내려 주십시오!”
그놈의 결단 결단. 베리브는 잠시 염증을 느꼈다. 기병 지휘관은 외로운 자리였다. 전장의 모든 지휘관이 그렇겠지만, 기병 부대를 이끌어야 하는 지휘관은 특히나 그렇다.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판단자의 통찰력이나 지식, 경험과 같은 고정 요소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정보와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공격해 승리의 영광을 가져오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기병 지휘관은 유난히 이 두 가지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반평생을 기병으로 복무하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점이다.
첫째로 기동력 때문에 아군의 가장 외곽에서 이동하는 만큼, 정보를 직접 수집해야 하는 상황이다. 누가 챙겨다 주는 정보가 없다. 가끔은 불필요한 정보가 과도하게 많거나 모순되기도 한다. 판단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가장 전황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경우의 수 따위를 가정해 볼 시간 따위는 없다. 그래서 때로는 직관에 의존해 병력을 움직여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최소 수백 명, 많으면 1만 명 이상의 목숨을 감 하나만 믿고 사지로 보내야 하는 때도 있다는 것이다.
처음 여섯 명의 경기병들을 이끄는 정찰 기병대의 대장이 되었을 때도 그랬다.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의 기병대를 총괄하는 입장인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 엘랑키아는 기병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가장 위대한 기사였던 선조에게 바치는 일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엘랑키아 기사의 힘으로 승리를!”
“오오오오! 맞습니다!”
시끄럽게 떠드는 주변 귀족들의 외침은 별 도움은 되지 않지만, 크게 방해도 되지 않는다. 권한만 있고 책임은 지지 않는 자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항상 경험했기에 익숙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휘하 지휘관이나 참모들이 전해주는 중요한 보고만 흘리지 않으면 된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베리브 휘하의 귀족 기사들’만 해도 태반이 그보다 위계가 높은 명문가 출신들이다. 물론 국왕에게 임명받은 근위기병대장이라는 직위가 있기에 함부로 대하는 자들은 없고, 상당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성가신 일이다.
“지휘관들을 소집해 주게. 직접 공격을 준비한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드디어 공격이군요!”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부하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한숨을 쉰다. 지금 힘이 넘치는 엘랑키아 기사 중 몇이나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보병이라면 좀 더 안전한 위치에 배치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기병은 그런 것도 없다.
이들은 아마 전장이 얼마나 가혹한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몇 명은 머리로는 알고 있기는 하겠지. 그러나 자신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쟁취할 전공에 정신이 팔려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어찌 보면, 첫 출전에서 겁을 먹어 얼어 있느니 자신만만한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훈련했고, 기병대의 일원으로 부끄럽지 않은 용맹한 기사들이니까.
‘귀족 기사는 너무 많이 죽이면 안 되네. 최대한 살려서 돌아오시게나.’
‘어째서입니까?’
‘그들이 귀족 사회의 일원이고, 사회 지도층의 일부이기 때문이네. 왕실이든, 지방 정부든 자기 역할을 해야 할 인재들이니까.’
‘...결원이 많이 생기면 큰일이겠습니다.’
출전 직전에 국왕 다고베르 2세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난다.
‘그것도 있고, 한꺼번에 귀족들이 많이 죽어버리면 상속 문제가 복잡해지네. 큰 재산과 영지가 이리저리 오가면서 나름 질서 잡힌 귀족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꼬여버리게 된다네.’
‘허어··· 말단 귀족인 저는 상상도 못 한 일입니다.’
‘자네도 곧 백작이 될 테니 남의 일이 아니네. 자네 아들들이 겪을 일이야.’
아직 어린 작은 아들은 가문의 영지에 머물고 있었고, 큰아들은 명예로운 왕실군의 일원으로 다고베르 2세 페하를 모시고 있었다. 언젠가 그 아이들이 ‘드 퐁투베 백작’이 된다 생각하니, 다소 감정적으로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백작이 되려면 주군인 엘랑키아 왕실에 그만큼의 공헌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블랑독의 정복과 같은 것 말이다.
“지휘관들이 집합했습니다!”
“좋아. 지금부터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모두 특별히 주의해 주시지요.”
조금 더 노력해서 백작이 되면 이 애매한 말투도 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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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들 대체 뭐야!”
“달라붙지 못하게 해! 쏴버려!”
성전군의 기병 분견대 지휘관 디타레 드 카울은 부하들의 외침을 말고삐를 당겼다. 전장에서 150미터 이상 떨어진 장소에 직속 기병들과 함께 말을 세웠다.
정강이가 따끔거렸다. 내려다보니 단단한 가죽으로 된 장화 표면에 칼자국이 나 있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에 경화 가죽 장화가 아니었다면 정강이 근육을 다쳐 제대로 말을 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몇 명이나 당했나?”
“여섯이 당했습니다!”
“빌어먹을! 어처구니가 없군!”
직속 기병 33명 중 6명이나 당했다. 무리해서 적이 도사리고 있는 포병 진지 안쪽으로 돌입하려 하다가 실패한 대가였다.
이 거지꼴의 부대는 대체 뭐 하는 놈들인지, 솔직히 얕잡아 본 것이 사실이다. 운 좋게 적 후방 침투에 성공하기는 했으나 그 대가로 고립된 놈들. 기껏해야 적장이 시간 끌기용의 버림 말로 던진 뜨내기 용병들이라 생각했다. 보나마나 적당히 저항하는 시늉만 하다가 항복하겠거니라고 생각했고.
뻐엉! 뻥!
“빌어먹을 저 대포 좀 어떻게!”
“정말 집요한 놈들입니다.”
포성을 듣자 화가 벌컥 났다. 저 미친놈들은 사방을 공격당하는 와중에도 멀리 떨어진 적, 즉 디타레가 속한 퐁투베 연대 본대를 포격하고 있었다. 한두 발씩 띄엄띄엄 쏘고 있어서 더 짜증이 났다. 실질적으로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떠나서 포격을 저지 못하는 한, 디타레의 체면과 평가는 한도 끝도 없이 내려갈 것이다. 차라리 자신들, 디타레의 분견대를 향해 쏘란 말이다!
“장전하고 다시 간다!”
“알겠습니다!”
두 자루의 권총을 차례대로 장전한다. 몇 명은 원래 없었는지, 전투 중 권총을 잃어버렸는지 한 자루밖에 안 보인다. 기병의 권총은 절대적인 근접전 우위를 보장해준다. 빠르고 위치가 높은 데다가 갑옷으로 잘 보호되기까지 하는 기병이다. 명중하면 확실하게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권총까지 들고 있으면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그게 기병 돌격력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저 빌어먹을 자식들은 변변한 무기도 없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좁혀온다. 겁이 없는 것도 있겠지만 좁은 장소에서의 대기병 전술에 익숙한 것 같다. 디타레의 장화에 난 상처도 그렇다. 적은 비스듬한 사각으로 접근해 바짝 붙어서 단검으로 공격해 왔던 것이다. 정말 이가 갈리는 놈들이다.
치륜식 권총은 총열이 짧은 만큼 장전이 좀 더 빠르다. 하지만 말 위라는 특성상, 말도 잘 다루고 총도 익숙하지 않으면 장전이 아주 어려워진다.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화약을 다지고 총알을 밀어 넣는다. 교전 중 사격 기회는 많이 오지 않는다. 그만큼 공들여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에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열쇠 형태의 스패너로 바퀴 축을 감아 돌리면 끼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돌아가며 스프링에 압력이 쌓인다. 딸깍 소리가 들려 고정될 때까지 바퀴를 돌리고 나면 고운 화약을 화문에 채워 넣고 덮개를 닫는다.
이게 화승총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화승을 쓰지 않기에 불씨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발사 직전까지 점화구 부분에 덮개가 있기에 바람이 불어도 고운 점화용 화약이 날아가지 않는다. 그 때문에 기병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준비됐으면 가자!”
“옛!”
최대한 가까이에서 적 방어진지를 돌며 적의 시선을 끌고 사격으로 적을 약화시켜야 한다. 권총 한 자루는 오른손에 들고, 나머지 한 자루는 고삐를 잡은 왼손에 든다. 말이 속도를 올리자 적이 틀어박힌 포병 진지가 점점 가까워진다.
조금 전에는 무리해서 진지 안으로 진입하려다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저항이 상당히 완강하다. 그렇다면, 주변을 돌면서 우월한 화력을 이용해 최대한 피해를 주면 될 뿐이다.
인제 보니 방어 진지 주변에 기병들의 시체, 즉 디타레의 부하들 시체가 적지 않게 보인다. 거지꼴의 용병대와 교전하며 비슷한 교환비를 가져가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최대한 빨리 제압하고, 저 정신이 나간 포격을 막아야 한다.
“각자 판단하에 사격하고, 앞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명령하기 전에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디타레의 부하들은 모두 숙련된 기병들이다. 대귀족 집안 자제들처럼 끝내주는 최고급 갑주와 군마로 무장한 번쩍번쩍한 기사는 아니더라도, 모두 충분히 효율적인 갑주를 입고, 괜찮은 군마를 탄 기병들이다. 대륙의 평균적인 기병들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말에다 박는 자식들아! 이리로 들어와 봐!”
“기사님들이 칼싸움은 무서워서 못 하냐!”
흙을 담은 나무통 너머에 숨은 적병들이 외쳐대는 저열한 도발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물론 적도 총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것만 조심하면 다른 무기는 포병 진지 외곽에서 벗어나 있다면 이쪽에 닿지 않는다. 지속해서 거리를 두고 총격전만 한다면 이쪽이 유리하다.
뻐엉!
빌어먹을, 또 포탄 한 발이 발사되었다. 설마 적은 진지 안쪽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띄엄띄엄 포탄을 발사하는 것인가? 라고 디타레가 생각했지만, 실은 단순히 지빌링엔 용병단의 임시 포수들이 숙련도가 낮고 혼란 통에 사격 통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어쨌든, 이 알골 딘다르트와 수하 포수들의 서툰 포격은 효과야 어떻든 성전군의 신경을 제대로 긁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탕! 탕!
적진 쪽에서 하얀 연기가 띄엄띄엄 떠오르며 총알이 날아온다. 적의 총병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 제대로 된 교대사격 대열을 갖출 물량은 나오지 않는다. 맞으면 안 죽는 것은 아니지만 전투에 익숙한 기병 대열을 막을 정도는 아니다.
타탕! 탕! 탕!
거리가 25미터 정도까지 줄어들자 기병들도 사격을 시작한다. 하얀 연기를 뚫고 기병들이 달린다. 기겁한 적이 최대한 몸을 숨긴다. 어차피 서로 명중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다. 총열도 짧고, 흔들리는 말 위에서 사격하니 아마 기병 쪽의 명중률이 더 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리와 기동성을 유지하며 그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바로 총기병이다.
디타레는 비스듬한 전방 방향으로 권총을 뻗었다. 흔들리는 가늠쇠 너머로 한 무리의 적군, 지빌링엔 용병들이 보인다. 두 명은 황급히 꽂을대로 총구를 쑤시고 있었고 한 명은 이쪽을 손가락질하며 뭐라 고함을 지르고 있다.
마상 사격은 말의 출렁임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흔들림을 허리 아래에서 잡아준다는 느낌으로, 상체를 고정하고 팔을 쭉 편다. 말의 다음 걸음이 바닥을 디뎌 새로운 흔들림이 생겨나기 직전, 방아쇠를 당긴다.
방아쇠에 가해진 작은 힘으로 고정쇠가 풀리고, 스프링에 잔뜩 축적되어있던 힘이 풀려나면서 철로 된 바퀴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거의 동시에 점화구 덮개가 튕기듯 벗겨진다. 덮개가 벗겨지자마자 격철에 물려있던 황철광이 돌아가는 바퀴에 요란하게 마찰하며 불꽃을 튀긴다. 불꽃의 일부가 화문을 채우고 있던 고운 화약에 점화, 총열을 채우고 있던 장약에 불씨를 전달한다.
타앙!
권총 장약의 폭발은 좀 더 빠르고 간결하다. 권총이나 대포에 비해서 총신이 짧은 권총의 구조상, 탄환에 폭발력을 전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 때문에 가장 입자가 곱고 점화가 빠른 화약을 사용하게 된다. 총구를 벗어난 탄환은 안정되지 않고 다소 상하로 요동치기는 하였으나, 무사히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지빌링엔 용병의 흉갑을 뚫었다. 디타레는 확실하게 표적인 적병이 피를 뿌리며 상체가 뒤로 젖혀지는 것을 확인했다.
"흐으윽!"
이번에는 그의 바로 뒤에서, 비명과 함께 뭔가가 바닥에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가 이빨이 꽉 물린다. 지독한 소모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적을 약화하고 포격을 막아야 한다.
뻐엉!
약을 올리기라도 하듯, 또다시 포탄 한 발이 발사되었다. 젠장할, 빌어먹을! 디타레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죽든 살든, 여기서 끝장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 반대편에서 굉장한 고함과, 한꺼번에 콩을 볶는 듯한 엄청난 총소리가 울린다.
"뭐지? 무슨 일이야?"
"대장님, 본대입니다! 본대가 돌입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사실이었다. 마치 거대한 뱀처럼도 보이는 장대한 엘랑키아 기병의 물결이 슈토르히 연대 창병들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