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샹다메리 전투
“세상에!”
멀리 대열 너머, 적 후방에서 벌어진 연대급 보병 대열 간의 전투가 일단락되었다. 나의 고용주 가문의 후계자이자 임시 부관인 아실 트랑카벨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놀란다.
“적이 대열을 무너뜨리고 도망치고 있어요, 콘도티에레! 슈토르히 연대는 역시 무적이네요! 이, 이게 말이 되나요? 역시 콘도티에레께서 기른 무적의 연대!”
아실의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창백한 미소년의 얼굴에 홍조가 깃든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뢰 가득한 미소로 대답해준다.
하지만 내 입꼬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왜냐면 나도 놀랐거든! 뭐지 슈토르히? 나도 실전에서 보는 것은 오랜만이기는 한데, 뭐 하는 놈들이야? 왜 저렇게 강해? 정말 밥 먹고 전쟁 연습만 했냐? 와 진짜 말이 안 나오네.
“5분 만에 적 연대를 패퇴시켰습니다! 무기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은 처음 봐요, 콘도티에레!”
비슷한 숫자의 보병 부대를 제대로 교전이 시작되고 5분 만에 패퇴시키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기는 하다. 아직 풋내기 사령관이기는 해도 참관을 포함해 전투 경험 밀도로 따지면 어지간한 베테랑 수준인 아실도 이런 장면은 보지 못했을 테지.
원래 창병과 총병을 주축으로 한 보병 연대 편성을 쓰는 이유는 ‘안정성’ 때문이다. 중대 단위로 총병과 창병을 섞기도 하고, 방패병이나 미늘창병, 혹은 양손검병 같은 보조 병력을 섞기도 하는 등 지역이나 부대, 혹은 지휘관 특성에 따라 구조가 천차만별이다. 연대 병력 숫자도 적게는 우리 트랑카벨 정규 연대처럼 천 명 정도에서 5천 명 수준까지 다 다르다. 하지만 모두가 추구하는 바는 ‘안정성’이다.
충분히 훈련받고 기강이 잡힌(그리고 적당한 급료가 지급된) 보병 연대는 이 시대에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병종을 상대로 대응한 싸움이 가능하다. 창병은 모든 공격을 받아낼 수 있으며, 총병은 모든 적에게 치명상을 안겨줄 수 있으니까. 적이 보병이든 기병이든, 총격이든 포격이든 감내하고 싸울 수 있는 게 창과 총으로 이루어진 사각 대형이다. 심지어 전투가 완전히 기울어 패배가 확정된 순간에도 전투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니까.
두 배가 넘는 그룬발트 기병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내고 또 막아내서 결국 살아남은 그로이엔펠트 용병 연대의 전설이 있다. 아군이 거의 궤멸한 상황에서도 이틀 넘게 잠도 안 자고 슬금슬금 도망쳐 과도한 명성을 얻어 버린 우리 슈토르히 연대의 경우도 그렇겠다.
근본적으로 준비된 보병 대열은 잘 무너지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완전히 포위해서 항복시키거나, 배치 실수 등으로 대열 내부에 기병 돌입을 막지 못했다거나, 화력을 집중해서 50퍼센트에 가까운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거나 등등 ‘특이한 상황’이 있긴 하지만, 특이한 상황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으니 특이한 상황이겠지.
아니 그런데··· 아무리 포병 지원이 있었다고는 해도 일단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적을 뚝딱 무너뜨려 버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뭐 적 부대도 내외적으로 문제가 있긴 했겠지. 생각보다 포격 지원에 의한 피해가 컸을 수도 있고, 지휘관들이 제 역할을 못 했거나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중이떠중이 모은 징집 민병대도 아니고, 무려 엘랑키아 국왕의 이름으로 편성한 연대가 무기까지 팽개치고 도망간다? 그것도 5분 만에?
···루트비히가 대체 적에게 무슨 지옥을 보여준 것일까.
선임 중대장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는 내가 수전증 핑계로 슈토르히를 떠난 이후 쭈욱 전투 지휘를 맡아오고 있었다. 본인이 나선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겠지. 아마 이의를 말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을까?
사실상 용병단 대표를 담당하던 모리츠는 보기에는 맨손으로 적을 찢어버리게 생긴 거한이지만, 의외로 상당한 행정가이다. 그 때문에 연대의 보급과 장비를 책임지고 계약처를 정하며 고용주와 협의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 물론 전투 지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이론상 아실이나 내가 지휘해야 하는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를 대리로 지휘하고 있으니까.
크레시미르는 카리스마 있는 얼굴 마담격 선임 중대장이지만 복잡한 전술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지휘를 맡기되, 한 번 신뢰하면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 위험한 임무에는 항상 솔선하고, 병사들 앞에서 항상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보병 연대라는 정교한 전쟁 기계가 제 역할을 하며 굴러갈 수 있도록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오래 함께해온 내가 보기에 운이 엄청 좋다! 나는 아직도 이 녀석이 어떻게 큰 부상 없이 여태껏 살아있는지 모르겠어.
첼레스티나는 사격 무기의 천재이다.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슈토르히 총병 선임 중대장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거든. 지금도 아군 전체의 포병대를 지휘하는 수석 포술장 역할을 하고 있고. 그런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물론 내가 임명한 것도 있지만 훈련을 거치면서 모두 첼레스티나의 귀신 같은 거리 감각과 조준 능력을 봐 왔으니까 그렇다. 게다가 이 천재 선임 중대장은, 자기가 아는 걸 남에게 가르치는 것도 꽤 잘한다. 말하는 방식이 좀 괴상하긴 한데.
···다만 이런저런 심각한 단점들이 조금 있다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다. 뭐 자기 시야가 닿는 부분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장악하지만, 그 밖으로만 나가면 장님이나 다름없다는 점이 그렇지. 그녀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독립된 기동 부대를 맡길 수는 없을 것 같다. 맡겼다가 부대 이끌고 주디칼리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아···.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루트비히는 우리 슈토르히 연대에 어울리지 않는 모범적인 지휘관이다. 전체적으로 규율이 느슨한 편인 슈토르히의 군기 반장이기도 하고, 특별히 못 하는 것 없이 모든 영역을 다 잘한다. 가장 보조적인 포병을 담당하는 선임 중대장이 되었다는 건 다른 분야에 특출난 멤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술적인 부분에서 내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는 녀석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는, 지금 기준으로는 다소 전위적인 편성과 전술을 깊이 공감해주고, 실무자로서 현실에 구현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이다. 슈토르히 연대가 묘기와도 같은 화력 운영이 가능한 것은, 구성원 전원이 상당한 숙련병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역시 우두머리가 루트비히라는 이유가 크지 않을까?
방금 적 보병 부대를 무너뜨리는 과정에 대해서도 대략 짐작이 간다. 마주한 적 부대의 내구력을 10이라고 가정하자. 이는 게임에서 HP와도 비슷해서, 내구력이 존재하는 동안은 일정 수준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다. 물론 숫자가 줄어들수록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1000명짜리 부대가 700명이 된다고 전투력도 딱 70퍼센트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다만 게임의 HP와 다른 점은, 한 번에 큰 피해를 입으면 부대가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1의 피해를 10회 받으면 부대는 계속 이겨내며 마지막까지 싸울 수 있다. 하지만 3이나 4의 피해를 한 번에 입는다면? 대개 그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하거나 붕괴 직전의 상태에 몰린다. 충분한 병력 숫자가 그래서 중요하다. 이 내구력이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늘려주니까.
이 ‘3이나 4의 피해’를 한 번에 입힐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내 부대 운영의 핵심이다. 최대한 빨리 타격을 입혀 적을 붕괴시키거나 퇴각시키면 당연히 아군의 누적 피해도 줄어들게 된다. 트랑카벨 정규 연대도 이를 기준으로 훈련받고 있고 나름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보유한 자원을 다 쏟아부어서 화력을 집중했는데, 그게 1이나 2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피해밖에 입히지 못한 경우이다.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필살기를 쓰는 격인데. 필살기는 말 그대로 적을 ‘반드시 죽이니까’ 필살기다. 그런데 못 죽였다? 바로 아군에 위기가 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당연히 장기전을 감안하고 화력 투사 계획을 새롭게 수립해야지.
이 미묘한 판단을 루트비히는 굉장히 잘한다. 아마 적에게는 악몽이었을 것이다. 시작하자마자 전열을 뜯어내다시피 날려버리는 무시무시한 피해를 주고, 뒤이어서 숙련 창병 밀집 대형이 진출한다. 보통 창병이 적을 맞이하는 탱커, 총병이 적을 쓰러뜨리는 딜러 포지션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창병 사이의 숙련도 차이가 크면 창병의 딜도 무시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방어도 공격도 가능한 ‘딜탱’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가 5분 만의 전열 붕괴였으리라고 추측한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확한 과정은 보지 못했지만, 이건 정말 안 봐도 풀 컬러 영상처럼 눈 앞에 그려지는 일이니까.
슈토르히는 잠시 걱정을 놓아도 될 것 같다. 측익에서 되돌아간 적 기병이 후방에 진출한 우리 보병 부대들을 공격하려는 것 같기는 하지만, 슈토르히라면 막아 줄 것이다. 마치 블랙홀처럼 적의 전력을 빨아들이면서, 피해를 강요하고 적의 작전 계획을 너덜너덜하게 만들 것이다. 전에도 그래 주었던 것처럼.
함께 진출한 드 누아 남부 연대나 지빌링엔 반 연대 역시 자기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 슈토르히의 승리는 이 둘의 승리이기도 하다. 남부 연대는 자신들보다 좀 더 많은 적군을 멋지게 붙잡아 슈토르히 연대에의 압박을 줄였으며, 지빌링엔은 포병 진지를 점령했다. 포격 지원도 고마운 일이지만, 이는 슈토르히 연대의 대열에 쏟아질 수 있었던 적의 포화를 사전 차단한 대단한 전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조금 더 방치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들이 중앙의 적진 한가운데에서 깽판을 쳐 주었기 때문에 양 측면의 기병 압박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는 것은 대치하고 있던 아군도 임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실 부관, 제10 연대, 모리츠에게 전령!”
“옛, 제10 연대에 전령!”
“대형을 유지하며 샹다메리 언덕을 우회해 적 측면을 위협하라. 이후 역할은 판단에 맡긴다!”
“대형을 유지하며 샹다메리 언덕을 우회해 적 측면을 위협할 것. 이후 역할은 판단에 맡긴다!”
“그렇게 전달!”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적 기병을 막느라 큰 역할을 해준 측면의 트랑카벨 최선임 연대,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도 공세에 포함한다. 샹다메리 언덕 너머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므로 다소 걱정되긴 하지만 모리츠라면 잘해 주겠지.
제10 연대가 샹다메리 언덕을 우회해 적의 측면을 위협한다. 남은 적 기병은 어떻게 할까?
무시하고 계속 측면을 노릴까? 대치하고 있는 아군 기병은 절대 만만치 않다. 보병의 지원이 사라진다고 해도 단시간에 무너질 일은 없을 것이다.
우회하는 제10 연대를 공격한다? 그래도 트랑카벨 최선임 부대에 모리츠가 지휘하는 부대이다. 장담하는데, 비슷한 숫자의 기병으로는 공멸이라도 각오하지 않는 한 유효한 피해를 줄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도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긴 하지. 하지만 기병도 아니고 보병이 우회하는데 그거 방치했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최소한 적장의 기병 지휘관으로서의 커리어는 끝장날 것이다.
자, 선택지가 세 개다. 다른 게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이상 변변한 게 없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더 고민하고, 최악의 선택을 하도록 해라.
좌익은 이 정도로 충분히 안정화되었다. 사실 지금 걱정이 되는 것은 우익이다. 현재 네그라타 연대는 세 배의 적을 상대로 피투성이 싸움을 하고 있으니까. 더 큰 문제는 당장 지원해줄 부대가 없다는 것이다.
예비대는 기병 뿐인데 방어 진지에서의 끔찍한 참호전에 기병을 밀어 넣을 수는 없다. 냉혹하게 말하자면, 네그라타가 무너지도록 놔두고 해자와 방벽이 뒤얽힌 방어선을 돌파한 적이 평지에서 새롭게 대열을 준비할 때 그걸 공격하는 게 낫다.
내가 지원책을 고민하는 동안, 보조 부관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콘도티에레! 우익의 제8 연대의 마브리엘 마슈레 연대장님이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래? 무슨 내용이지?”
“읽을게요! 네그라타 연대의 측면이 위험해 보여, 용기병 중대 하나를 지원대로 파견함, 이상입니다!”
“아, 괜찮은 판단이네!”
확실히 용기병들은 기병대의 보조 역할도 하지만, 본질은 ‘말 탄 보병’이다. 말을 타고 움직여 보병이 필요한 위치로 빨리 이동하는 게 중요하니까. 참호가 얽히고설킨 방어 진지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를 발견하자 굳이 확인하지 않고 병력부터 파견한 것은 좋은 판단이다. 암, 연대장이라면 그 정도 자율권은 행사할 수 있어야지.
게다가··· 제8 연대의 용기병 중대 중에는 ‘그 부대’가 있다. 블랑독 북부의 다브농 방앗간에서의 혈전을 버텨낸 부대가 말이다. 중대장이 사망하는 와중에도 용감히 싸워 많은 피난민을 구해 훈장을 받았었다. 중대장 사망 이후로는 성전군의 침공에 가족과 고향을 잃어버린 남작이 지휘를 이어받았던가. 분명 이름이 로용이었지. 남작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별 대우를 거부하고 소대장으로 남아있던 것이 인상깊던 장교였는데.
“어느 부대가 갔는지는 안 나와 있어?”
“네··· 그 내용은 없습니다, 콘도티에레!”
“음, 알겠다.”
모두가 힘든 싸움을 하고 있지만, 네그라타 연대는 특히 그럴 것이다. 내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자라나서 굵은 뿌리를 뻗어 적 대열을 부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