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27화 (127/556)

20-25. 샹다메리 전투

“흐읍!”

“뭐, 뭐야 이 새끼!”

에르만 슈피리가 포병 진지 안쪽으로 뛰어들자, 빛나는 흉갑을 입은 적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에르만 역시 대응해 여러 차례 검이 부딪혔다. 둘이 가까이 얽혀 서로 투구가 부딪히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서로 치명타를 입히는 데는 실패했다. 비슷한 실력을 갖춘 자들이 서로 충분히 중장갑을 입고 부딪히면 이렇게 된다.

잠시 적과 떨어진 에르만은 숨을 고른다. 상대가 칼날을 손바닥으로 받치고 겨누는 자세를 취한다. 거리를 유지해서 싸울 모양이었다. 이건 1:1 결투가 아니다. 굳이 적을 쓰러뜨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무리해서 적을 쓰러뜨렸다가 힘을 다 빼서 녹초가 되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전투에서 활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전투에 나서는 풋내기 용병들에게 항상 하는 이유가 ‘눈앞의 적을 못 죽인다고 전투 지는 거 아니다’라는 것이다. 부대의 일원으로 유지되고, 대열의 한구석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적 한 명 죽이는 것보다 몇 배나 중요하다.

“이야아아!”

“저희도 왔습니다!”

여기저기서 부하들이 포대를 넘어온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전장을 가로질러 온, 말 그대로 피 흘리는 흑곰들이 속속 그들의 지휘관 에르만 슈피리의 곁에 합류하고 있었다. 에르만과 호각이었던 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포대에는 포대 수비병들이 함께하고 있을 겁니다. 화약 무기를 가지고 포대로 들어오지 못할 테니, 포대 외곽에 총병들이 있을 테고 포대 안쪽에는 화약 무기가 없을 겁니다.’

콘도티에레의 말이 생각났다. 확실히 허름해 보이는 편한 복장의 포병들 사이로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을 입은 포대 수비병들은 눈에 확 띄었다.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항복해라! 그게 싫다면 물러나라!”

에르만이 외쳤다. 지빌링엔 반 연대가 숫자가 적다고는 해도, 천 명 단위 정규 연대보다 적다는 것이지, 포대 수비병 수십 명과 비교하면 압도적이다. 살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면 아무래도 의지가 약해질 것이다.

“개소리하지 마!”

적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에르만 역시 맞상대한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포대를 넘어 들어온 동료들이 한꺼번에 적을 노린다. 거듭 말하지만 일 대 일의 결투가 아니다. 적을 죽이고 내가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다. 다른 적병들도 덤벼들지만 이제 수적으로 비교가 안 된다.

“크허억!”

“흐으으읍!”

숫자에 밀려 바닥에 주저앉은 적의 흉갑을, 짧게 잡은 미늘창을 내려찍는 아군 병사의 무기 끝이 관통했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갑주 표면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순식간이었다. 포대 수비병들은 모두 제법 훈련된 싸움꾼들이었지만 지빌링엔들이 숫자로 밀어붙이자 잠시도 버티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사람이 쓰러지고 비명이 오가며 피가 튀었다. 1분도 되지 않아 포대는 정리되었다. 포대 외부에서 버티던 소수의 적 총병들도 마찬가지이다.

‘포대 수비병들은 특별히 선발된 정예들입니다. 하지만 그들만 제압하면 일반 포수들은 쉽게 항복하거나 도망칠 겁니다.’

죽을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싸운 적병들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에르만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에르만 자신도, 지빌링엔의 다른 병사들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짧았지만 격렬한 전투를 마친 부하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그들의 부릅뜬 눈에 맺힌 감정이 복잡해 보인다.

“항복해라! 아니면 도망쳐라!”

어쩔줄 몰라하는 포수들을 보며, 에르만이 외친다.

“그래 도망쳐 임마!”

“여기서 죽을 거야? 어!”

다른 용병들 역시 위압적으로 고함을 지른다.

“어이 너!”

“에, 예엣!”

“저기 멀리 나무 보이지? 저기까지 뛰어가라! 쉬어도 되지만 멈추면 안 돼!”

“예, 옛!”

“가라! 뒤돌아보면 가만 안 둔다!”

“흐이익!”

에르만이 가까이에서 부들부들 떨던 소년 포수에게 윽박지르고 밀치자, 온 힘을 다해 뛰어간다. 그 모습을 보자 망설이던 자들도 손에 들고 있던 장전봉이며, 양동이 등을 팽개치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도망치면 죽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인지, 살 구석이 생겼다고 생각하자 행동은 빨랐다.

‘포수들을 너무 압박하면 자폭할지도 모릅니다··· 동료들을 잃어 원한이 있겠지만, 전투에서 이기는 법을 택해주세요.’

콘도티에레가 걱정스럽게 말해주었던 것도 이해는 되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팔다리를 잃었던 동료들, 산탄에 맞아 끔찍한 꼴이 된 동료들. 생각하면 포수건 뭐건 잔인하게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무력화된 포수들을 학살해봤자 승리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서로가 자신의 의무에 충실할 뿐이다.

“알골! 알골 있나?”

“여기 있습니다!”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군! 포를 살펴보고, 쓸 수 있는 건 재방열해 주게.”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 지원군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못은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그건 마지막 순간에, 알아서 판단해주게. 그때는 내가 명령을 내리지 못할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대장.”

이번에 임시 포술장을 맡은 알골 딘다르트가 다시 대포에 달라붙는 것을 보면서, 에르만은 몸을 돌려 포대 외곽으로 움직인다. 최악의 경우, 포의 점화구에 나무 못을 박아 무력화 시킨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에게 몇 발 정도 먹여줄 시간은 충분히 있다.

흙이 담긴 바구니와 나무통 너머로 대열을 갖추고 접근하고 있는 적 보병부대를 바라본다. 너무 가깝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한 발은 쏠 수 있을까. 서둘러 달려오느라 절반 이상이 장창도 버리고 왔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포수들은 준비하고, 나머지는 방어를 준비한다! 다행히 엄폐물은 충분하니까 좀 옮기자고.”

“알겠습니다!”

지빌링엔 용병들이 흙 바구니를 밀고 당기며 옮기기 시작했다. 적어도 적 사격에 대한 방어는 충분할 것 같다. 그 뒤에서 나머지 보병들이 대열을 갖추고 싸울 준비를 한다. 장창 대부분을 두고 왔기에 맞싸움은 불가능하다. 최대한 움직이기 불편하게 장애물들을 늘어 놓고 적의 공세를 기다린다. 장창 대열은 일부 핵심 부위를 지키고, 나머지는 없이 적의 공격을 지연해야 한다.

적 한가운데에 돌입해서 포대를 점거한다. 그리고 포를 돌려 적을 저격하며, 역으로 아군이 점거한 포대를 지킨다.

이게 콘도티에레에게 받은 임무의 전부였다. 콘도티에레는 약속했다. 그렇게 오랫동안은 아닐 것이다. 조금만 버티면 전장에 변화가 생길 테니, 그때 까지 살아남아 달라는 것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 버리고 도망칠 수 있는 선택지는 이번에는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에르만은 오히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빌링엔은 처음부터 도망이란 선택지는 고르지 않습니다.’

조금도,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명령에 따라 나아가고, 명령에 따라 물러선다. 물론 불필요한 개죽음을 당한다면 억울하겠지만, 왠지 이 눈앞의 불안한 표정을 한 콘도티에레의 명령을 따르면 개죽음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들었다.

피 흘리는 흑곰이라는 지빌링엔 용병의 이명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작 자신들도 잘 모른다. 하지만 자칭을 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부르기 시작해서 정착하게 된 별명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에르만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그룬발트 선제후의 이야기이다. 선제후 간의 내전에서, 배신당한 어느 선제후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요새에 고립된 선제후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가신들은 배신하거나 도망쳐 상태를 관망했다. 시시각각 적이 다가오는 가운데, 선제후의 곁에는 최근 고용 계약한 지빌링엔 용병들이 도착했다.

‘여기까지 와 주어서 고맙다. 하지만 더 이상 지불할 돈이 없다. 나도 곧 떠날 것이다. 그대들도 물러나서 안전을 찾아라.’

라는 선제후의 솔직한 말에도 불구하고 지빌링엔 용병들은 남았다.

‘선금은 받았으니, 그 동안은 선제후님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400명의 지빌링엔들이 요새를 지키기 시작했다. 경쟁 선제후의 군대는 1만이 넘는 대군이었으며, 공방전은 8일 동안 계속되었다. 압도적인 적의 공세에도 물러섬이 없었기에, 오히려 공격하는 포위군 사이에서 이탈자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이 벌어진 8일은 선제후가 자신의 지지자들을 다시 규합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요새 하나 점령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경쟁 선제후에 대해 지지는 급락해서 순식간에 반전이 이루어졌다. 선제후의 군대는 다시 일어섰으며, 삽시간에 경쟁 선제후를 무찌르는 데 성공했다.

지빌링엔들이 지키던 요새로 돌아온 선제후는 살아남은 용병들과, 그렇지 못한 용병들 모두의 앞에서 통곡했다. 오만한 종족, 엘프 선제후가 인간들 앞에서 그렇게 감정을 내보이는 일이 흔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400명의 용병들은 8일간의 전투 끝에, 87명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 87명은 큰 보상을 받았으며, 피를 흘리면서도 요새의 성문을 지키는 흑곰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이것이 ‘피 흘리는 흑곰’ 이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르만은 전율을 느꼈었다. 자신이 그런 용맹한 전사들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것에도 자부심을 느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알게 된 현실은 처참했다. 피 흘리는 흑곰의 명성은 옛말이 되었으며, 지빌링엔 지방 귀족 간의 대립이 심해져, 정상적인 1개 연대마저 편성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고향에서는 겨울마다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잘하면 그런 비참한 현실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 흘리는 흑곰 연대를 과거의 전설이 아닌 현실로 끄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르만 뿐 아니라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이야기였다.

“적이 다가온다, 전투 준비! 포병대가 준비할 때까지 시간을 번다!”

에르만이 외쳤다. 중견 장교들이 각자 자신의 수비 영역을 다시 점검한다.

작전 지시받을 때, ‘시간을 얼마나 벌어야 합니까?’ 라고 콘도티에레에게 물어볼까 했었다. 하지만 굳이 질문하지 않았었다.

그야, 필요한 만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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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 깃발입니다, 콘도티에레! 지빌링엔 반 연대가 완전한 포대 함락에 성공했네요!”

“결국 해냈구나!”

첼레스티나의 포병대와 트랑카벨 보병 연대들이 만들어 준 틈으로, 무서운 기세로 달려나가던 지빌링엔들의 뒷모습은 나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포병 진지까지 함락할 줄은 몰랐다. 적이 포대 수비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인지, 확실한 것은 의표를 찌른 성공이었다.

포대를 완벽히 함락하고 노획한 포를 사용할 수 있다면 청색 깃발을.

포대를 함락했으나 노획한 포를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면 적색 깃발을.

포대를 함락했으나 점령을 유지할 수 없다면 황색 깃발을 올리기로 했었다.

청색이 올라왔으니, 단기간에 점령했으며 포들도 대부분 온전한 상태라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포병 진지 뒤에서 똘똘 뭉쳐서 노획한 포와 함께 저항한다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신경을 써서 그런지, 눈가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있었다. 또 최악의 경우가 생각이 난다. 이번 반격이 실패한다면 어째야 하나. 사지로 나간 드 누아 병사들과, 지빌링엔 용병은 어떻게 구해야 하나.

분명 위험한 임무에 정규 트랑카벨 군이 아니라 동맹군과 용병들을 활용했다는 비난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절했기에, 가장 역할에 맞는 부대를 파견한 것이다.

성공한다. 성공하면, 다 문제가 없어진다. 위험한 장소에 나간 병사들도 다시 다 안전하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실 부관, 슈토르히 연대의 준비 상태는?”

“준비 완료 연락이 아까 왔습니다. 저··· 콘도티에레, 슈토르히 연대가 언제나 만전 상태라는 것은 콘도티에레께서 더 잘 아시지 않으시나요?”

“...내가 실언했군요.”

그랬다. 항상 만전인 녀석들이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총알 다 쓴 척 하면서, 적 기병 부대 하나를 날려 버릴 정도로 말이다.

“전령! 슈토르히 연대에 반격 작전 개시!”

“슈토르히 연대에 반격 작전 개시! 전달하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지금까지는 예고편이었다. 이제 진짜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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