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샹다메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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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다메리 언덕 너머에 전개하기 시작한 드 누아 남부 연대는 기민했다. 순식간에 인간과 강철과 그리고 나무로 이루어진 장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단단한 인간들의 의지가 그 장벽을 더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사방을 향해 세워진 장창들이 대열의 핵심을 보호하고 모서리에 늘어선 총병들의 가지런한 총구가 접근하는 악의를 차단한다.
드 누아 보병 연대의 전투 대형은 많은 영향을 받은 트랑카벨 정규 보병 연대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다만 차이점은 총병들의 상당수를 유사하면서도 다른 병과인 엽병들이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총병보다 더 가볍게 무장했지만, 더 적극적인 엽병들은 대열의 외곽에서 느슨한 대형을 갖추고 적을 기다린다.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창병들의 보호를 받기 위해 대열 안쪽으로 숨는다. 역으로 언제라도 대열에서 벗어나 적을 추격할 수도 있다. 접근하는 적 기병의 거리감을 애매하게 하고, 필요한 경우 본대를 위한 방패막이도 불사한다.
엽병 부대의 최선두에서 메르클랑 나브룰은 아군의 선봉에 선 이들만의 벅차오르는 자부심을 느꼈다. 멀리서 다가오는 성전군의 보병 부대가 보인다. 단단하게 대열을 짠 적은 느릿느릿하다. 숫자는 드 누아 남부 연대에 비해 훨씬 많아 보이긴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쏴라!”
뻐벙! 쾅! 뻥! 뻐엉!
언덕 위에 배치된 경야포들이 포탄을 쏟아냈다. 제8 벨모제 기병 연대 소속의 기마 견인포들이다. 현재 제8 연대는 대열의 정 반대편, 네그라타 연대의 측면을 지키고 있지만 이들은 전쟁 초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금 전, 적 공성포들이 언덕을 노리고 있었을 때는 잠시 피해 있었다. 필사적으로 포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데는 엽병들도 도왔었다.
그리고 지금 그 보답을 바독 있었다. 그것도 화끈하게.
퍽, 퍼억!
탄착점을 관측하기 위해 순서대로 발사된 포탄 중 처음 두 발은 빗나갔지만, 한 발이 정확하게 접근하는 적 대열 바로 앞에 떨어졌다. 맨 앞에 서 있던 적 병사가 마치 뒤에서 홱 당기기라도 하는 듯 대열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똑똑하게 보인다. 장창 몇 개가 쓰러지거나, 쓰러지려다가 다시 세워진다. 최소한 몇 명은 포탄에 맞아 죽거나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와아, 멋지다!”
“개쩔어!”
“포병대 만세다!”
드 누아 군 대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포병대가 적을 쓸어버리는 만큼, 그들이 직면하는 위험은 감소한다.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거리 화력은 아군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콰콰쾅!
“으아악!”
트랑카벨 군의 경야포가 내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굉음이 샹다메리 언덕을 뒤흔들어 놓았다. 몇 발은 비탈에 파묻혀 의미 없는 흙먼지를 만들어 냈을 뿐이지만, 한 발은 정확히 포병대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으나, 쌓아놓았던 예비 자재와 포탄들이 마치 거인의 구슬치기에라도 당한 듯 엉망으로 무너져 내렸다.
“시팔! 손 멈추지 마! 훈련받았잖아?”
“예, 예엣!”
“우리가 멈추면 보병 애들이 죽어 나간다! 우리 숫자가 더 많아!”
“드 누아 애들에게 겁쟁이 소리 듣진 말자고!”
“포탄 가져와!”
분명히 적 포병이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제 포병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이쪽만 일방적으로 안전하게 때리기만 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요행히 그랬을 뿐이지. 공포로 굳어가는 팔다리를 악을 쓰며 억지로 극복하고 동작을 빠르게 한다. 포구를 청소하고, 화약을 밀어 넣어 다진 다음, 다시 포탄을 넣는다.
“사격 준비 완료!”
“발사!”
콰앙!
굉음과 함께 포탄이 날아간다. 자욱한 포연 속에서 날아간 포탄이 어떤 전과를 냈는지 확인도 못하고 곧바로 다음 포격을 준비한다. 발사시 반동으로 뒤로 밀려난 포가를 밀어 다시 원위치 시키고, 물에 적신 장전봉으로 포구를 청소한다.
성전군 측의 대구경 공성포에 비해서 훨씬 연사가 빠른 소구경 경야포가 끊임없이 사격 싸이클을 돌리자, 분명한 효과가 나타났다. 적 보병이 이동 속도를 올린 것이다. 더 이상 포탄을 뒤집어쓰면 불리하리라 생각했겠다. 하지만 이미 단단하게 결진한 상태에서 속도를 올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대열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이미 대열을 갖추고 기다리는 드 누아 군과 비교하면 약간이나마 불리하게 된다.
“발사!”
뻐어엉!
그러거나 말거나, 포병은 쉬지 않는다. 이런, 이번에는 포탄이 적의 머리를 넘어가 버렸다. 인제 보니 적이 지나온 길에는 점점이 죽거나 죽어가는 병사들이 흔적처럼 남아있다. 그만큼 포병들이 밥값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격 개시!”
타타타타탕!
“으어억!”
“크윽!”
언덕 아래의 보병대열도 사격을 개시했다. 대열을 돌파하려는 드 누아 군과, 이를 막으려는 성전군 보병 연대 사이의 교전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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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티에레, 지빌링엔 반 연대에서 전령입니다!”
“응?”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지빌링엔은 이미 작전 준비가 끝난 게 아니었나? 나는 의아해하면서 몸을 돌렸다.
“혀, 형님, 아니 지빌링엔의 에르만 슈피리가 보냈습니다, 콘도티, 에레!”
지빌링엔 지휘관인 에르만의 어린 종자가 둘둘 말린 종이를 내민다. 역시 전장에 나오기에는 너무 어려 보이는 소년이다. 긴장하여 눈을 부릅뜨고 두 손으로 내민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다. 굳이 편지를 써서 보낸 이유가 있을까, 나는 얼른 종이를 펴서 읽어본다.
- 피 흘리는 흑곰, 돌격 준비 완료
- 어린 동생 스테페네트를 부탁드립니다
“크흠!”
나도 모르게 종이를 확 구겼다. 단 두 줄의 짧은 편지. 굳이 따로 종이에 기록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간결한 내용. 진중에서 쓰였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화약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은 쪽지에서 느껴지는 강한 결의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힘든 용병 생활에 종자로 어린 동생을 데리고 다녔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사령부에 그를 맡긴다.
전원 귀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했다는 것이겠지.
그 의지가 너무 무겁게 다가온다. 자신이 전달한 편지의 내용도,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 종자의 눈망울을 보니 가슴 깊이 뭔가가 북받쳐 올라 잠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지만 그들에게 위험한 돌격을 명령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내 명령에 따라 그들은 돌격을 준비하고 있고, 내 다음 명령에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 것이다. 병력은 겨우 330명, 제대로 된 연대급 병력의 저항에 직면한다면 순식간에 녹아버릴 수도 있다.
그러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기에 세운 작전이다. 머리로는 전부 계산이 선 상황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만에 하나 실패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 소년에게 가족과 동료들을 돌려보내 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으흠, 큼. 잘 받았다. 네 이름이 스테페네트라고?”
“예, 옛? 스테펜··· 아니, 스테페네트 슈피리 맞습니다, 콘, 콘도티에레!”
“그래, 좋은 이름이구나, 기억해둘게. 스테페네트, 귀관은 잠시 사령부에서 아군을 돕도록 해라.”
“네에? 전··· 혀, 형님과···.”
“이쪽도 일손이 부족해서 말이야. 에르만 경도 허락했다.”
“형님이···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에밀리아, 스테페네트와 함께 지내면서 일을 배우도록 해라.”
“네엣, 콘도티에레!”
에밀리아와 스테페네트는 또래로 보인다. 사실 에밀리아가 나이가 더 많지만, 워낙 어려 보이니까. 사실 이런 아이들을 전쟁터로 끌고 오는 것은 못 할 짓이지만···.
“콘도티에레! 제7 연대의 파스칼 드 뒤랑 경의 전령입니다!”
“무슨 일이지?”
“대치중인 적 우익 기병, 물러서는 중! 이상입니다, 콘도티에레!”
...기병이 물러난다? 무슨 일이지? 적의 우익, 즉 아군의 좌익 쪽에서는 한 차례 전투가 있었다. 여러 아군의 활약, 특히 슈토르히 연대의 기지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적의 세력은 막강하다. 그런데 병력을 뺀다?
설마 중앙을 보강하거나, 언덕에서 내려간 드 누아 남부 연대의 후방을 노리는 것인가?
물론 적이 병력을 뺀 만큼, 대치하고 있던 아군 기병 역시 여유가 생기기는 하지만 적의 의도를 미리 읽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지금까지는 적의 중앙과 우익을 분단시키는 역할을 해온 샹다메리 언덕이 이번에는 아군의 시야를 가리게 되었다. 언덕 위의 보병이 관측하든, 좌익의 아군 기병이 관측하든 그 보고가 나에게 도착할 때 즈음이면 이미 적은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전령! 제7 연대에게!”
“넵, 콘도티에레!”
“적 기병과 거리를 유지하며, 자유롭게 움직이게 놔두질 말 것!”
“적 기병과 거리를 유지하며, 자유롭게 움직이게 두지 말 것!”
“좋아!”
“보내겠습니다 콘도티에레!”
한편으로는 아군 보병 부대, 이 경우 모리츠가 지휘하는 제10 보병 연대겠지만, 이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위치로 끌려가서 여전히 수적으로 우위인 적 기병에게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긴 한다. 하지만 이미 노련한 기병 전술가가 된 파스칼 드 뒤랑이라면 잘 대처할 것이다.
적이 수세로 돌아가게 되면 모처럼의 돌파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아군의 측면은 안전해질지 몰라도 서로 이기지 못한 채로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될 것이다. 아군과 적군이 서로 화력을 투사할 뿐인 무의미한 소모전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얻어내는 것 없이 피해만 많이 입는다면 이후의 전쟁을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망설이는 것도 사치일지도 모른다. 나는 결심을 했다.
“에밀리아 부관, 슈토르히 연대에 전령!”
“옙, 콘도티에레!”
“작전 위치로 최대한 빨리 이동해서 준비해줘. 5분 내로 작전 개시!”
“작전 위치로 최대한 빨리 이동 및 준비! 5분 내로 작전 개시!”
“좋아!”
에밀리아와 그 옆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스테페네트가 전령에게 달려간다. 유난히 키가 작은 소년 소녀가 함께 뛰어다니는 모습은 전쟁터만 아니었다면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광경이었겠지만.
“아실 부관, 지빌링엔 반 연대에 전령!”
“옛, 콘도티에레!”
“반격 작전을 개시한다! 피 흘리는 흑곰의 활약을 기대한다!”
“반격 작전을 개시한다! 피 흘리는 흑곰의 활약을 기대한다!”
이제 무를 수 없다. 드 누아 연대는 최악의 경우 다시 언덕 위로 후퇴할 수는 있겠지만, 지빌링엔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적을 비집고 들어가는 결사의 돌격. 중간에 멈추거나 후퇴하면 바로 포위당한다. 아군의 후속 작전이 이어지지 않아도 적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겠지.
나는 지휘관 에르만에게 충분히 설명했다. 어떤 역할이고, 어떤 위험이 있으며, 성공시 아군이 얼마나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지.
그는 기꺼이 하겠다고, 오히려 중요한 일을 맡겨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비겁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처지에 있는 입지가 약한 용병들에게, 그런 임무를 맡겼는데 누가 거절하겠나.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맡기고 실행해야 하는 일이다.
나로서는 최대한 지원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가는 것 말고는 보장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힘내라, 피 흘리는 흑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