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샹다메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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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한창인 가운데, 샹다메리 언덕 북쪽 사면 쪽에서는 지루한 대치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투 초반만 해도 언덕을 오리려는 성전군 보병들과, 이를 막으려는 드 누아군 엽병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었지만, 지금은 그저 대치만 하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언덕의 비탈에는 수 많은 시체와 핏자국이 널려있었다. 시체 중에는 공격해 올라가던 성전군 뿐 아니라, 드 누아군으로 보이는 시체도 꽤 많이 섞여 있어서 언덕 가장자리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를 말해주고 있었다. 언덕 끄트머리에서 목숨을 잃거나 저격에 당한 드 누아 군 병사들이 비탈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양측이 모두 지친데다가, 언덕을 오르던 성전군 경보병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것이다.
애초에 이 경보병들,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 등 지휘부에게 ‘성전군 순례자 보병’으로 칭해지는 자들은 안일한 마음으로 참여한 자들이 많았다. 아주 먼 이역만리에서 벌어지는 그림자 성전이나 이교도를 상대로 한 성전에는 참여할 엄두를 못 낸다. 그런데 모국인 엘랑키아 어딘가에서 성전이 벌어진다? 게다가 법황이 소집하고 국왕도 공인한 진짜배기 성전이다? 나도 성전에 참여했다는 커리어 한번 따 보자. 천국행 티켓 하나 얻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김에 모인 자들이 꽤 많았던 것이다.
어이없는 사실은, 그 와중에도 이런 마인드로 참여한 자들은 법황의 군대에 합류한 경우가 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법황이 발급하는 천국행 티켓이, 국왕이 발급한 티켓보다 더 공신력 있다 생각한 것인지··· 어쩐지 그렇게 생각한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현재 샹다메리 언덕 북쪽 비탈에서 대치하고 있는 자들은 지친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이 전쟁을 얕보고 참여했다. 법황이 소집하고 엘랑키아 국왕이 참여를 독려한 전쟁. 평소에는 이름 들어보기도 힘든 훌륭하신 공작님과 백작님들이 쟁쟁한 기사님들을 이끌고 참전한다. 그 대군의 틈바구니에 줄을 잘 서려고 했는데.
어차피 이기는 전쟁에 잘 끼어들어서 공짜로 천국행 티켓도 얻어보고, 잘해서 공을 세워 인생 역전도 해보자는 그런 생각이었는데. 어느 마을에나 멀리 다른 고장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공을 세워, 영주님이 내리신 금화를 잔뜩 가지고 돌아온 친척 아저씨의 이야기는 있는 법이니까. 자매품으로 혼전 중에 위험에 빠진 어느 귀족님의 장남을 구해 큰 상을 받고 돌아온 이야기도 있고 말이다. 어차피 이상한 이단 믿는 시골 촌놈들 때려잡는 일이니, 전자보다는 후자 가능성이 크다 생각했겠다.
그런데 실제로 전장에 참여해보니 이게 생각 같지 않다. 적군은 겉으로 보기에도 잘 먹고 잘 입어서 위풍당당하고 숫자도 많았다. 적진에 가까이 다가가자 정신이 홀랑 날아갈 정도의 화력이 쏟아진다. 맨 앞에서 허세를 부리며 거드럭대던 놈들은 벌써 총에 맞아 쓰러졌다. 헉헉대며 언덕을 몇 번이나 올라봤지만,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적은 이단 믿는 어리석은 시골 촌놈들이 아니었다. 무장도 잘 되고 싸움도 잘하는 전문적인 전사들이었다.
그렇다고 기사님들이나, 멋지게 갑옷을 차려입은 귀족의 병사님들이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빽빽한 대열을 지어 전장 한가운데서 싸우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포탄이 날 때마다 몇 명씩 팔다리가 끊어져 나간다. 그 무시무시한 지옥에서 어떻게 버티는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들만 위험한 장소에 몰아넣고 안전한 후방에 있다면 도망쳤을 텐데, 그런 건 또 아니니 어정쩡한 상황이 되었다. 그들이 아직도 언덕 아래에 머물며 전선 유지는 하는 것은 이렇게 버티다 보면 ‘높으신 분들이’ 어떻게든 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애매한 생각으로 버틸 수 있는 전장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갑자기 언덕 비탈 위쪽에 모습을 드러낸 이단자들의 무리가 일제사격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타타타탕! 타타탕!
“으윽!”
“아악! 맞았어어!”
“흐아악! 시발!”
불안하지만 일말의 기대감은 버리지 않은 상태로 언덕 아래에 머물던 병사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2열 발사!”
타타타타탕! 타타탕!
탕탕! 타타탕!
5초도 지나기 전에, 곧바로 2차 사격이 쏟아진다. 우왕좌왕하며 몰려있는 대열에 쏟아진 사격이라 훨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갑자기 이리저리 움직이며 병력 밀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상자가 더 많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했다. 가뜩이나 예상과 달리 격렬하고 지지부진한 전투에서 마음이 떠나있던 뜨내기 순례자 병사들이 대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자! 드 누아를 위해서!”
“돌겨억!”
“우와아아아아아!”
언덕 위에서 방금 총을 쏜 적군이 역으로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총병과 돌격병이 교대하는 것도 아니다. 총을 쏜 엽병들이 그대로 비탈을 달려 내려오는 것이다. 등 뒤로 총을 메고 다른 무기를 꺼내 달려오는가 하면, 방금 발사해 하얀 연기가 폴폴 풍겨오르는 총을 그대로 휘두르며 달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재장전 따위를 위해 멈추지 않는다. 총병과 근접 병력을 교대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명확한 혼성 돌격부대의 운영 방법이다.
“이야아아아!”
“죽어 새끼야!”
“으윽, 크악!”
언덕을 달려 내려가는 엽병들의 선두에 그 지휘관인 메르클랑 나브룰이 있는 건 당연했다. 최근 사비를 들여가며 화약을 사 사격 연습을 했고, 방금도 적 전령으로 추정되는 기병을 저격하는 등 명사수가 되었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의 본질이 숲지기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드 누아의 광활한 숲을 지키는 소수의 숲지기는 활을 다루는 명수였지만, 근본적으로 육박전의 전문가이다. 애초에 숲속이라는 상황 자체가 피아간의 교전 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다. 울창한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니까, 전투가 벌어지면 가까운 거리가 되는 것이고.
최근에는 산개대형으로 아군의 측면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경우가 많았고, 이번에도 방어시설에 의존해 적을 막는 임무였다. 이제 비로소 반격을 시작하는 아군의 선봉이 되었다.
“으어어어! 으아악!”
반은 뛰고 반은 미끄러지며 비탈을 달려 내려온 메르클랑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적 병사를 검으로 내리쳤다. 적은 어떻게든 막아냈다. 몇 번 검이 부딪히자 적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 하나,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물러난다.
메르클랑이 보니 특이한 복장의 적이었다. 머리를 감싸는 투구, 몸통을 지키는 흉갑, 허벅지를 덮는 대퇴갑이 모두 다른 양식이다. 평범하게 귀 부위를 덮는 쇠로 된 투구는 아무 장식이 없고 정수리가 둥그스름한 구형이다. 여러 개의 철판을 층층이 쌓아 올리듯 정교하게 짜 맞춘 대퇴갑은 훨씬 고급품으로 보였으며 거울처럼 윤이 났다. 마지막으로 흉갑은 금박을 상감한 고급품이었는데, 오랫동안 사용되어 표면이 벗겨지고 부분마다 떨어져 나갔는데도 여전히 화려하게 보였다.
갑옷을 훔친 건지, 따로 산 건지, 전장에서 노획한 것인지 셋 다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돈을 모아 장비를 조금씩 업그레이드하는 떠돌이 용병 중에서는 흔한 모습이지만 메르클랑으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다. 아무튼 메르클랑이 위협하며 한 걸음 더 다가서자,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나버린다.
“으아아악!”
“어어?”
어처구니가 없는 모습이다. 부대가 완전히 무너진 것도 아니고, 백병전 상황도 크게 불리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도망쳐버릴 줄은 몰랐다. 그저 무기만 몇 번 부딪혔을 뿐인데. 메르클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하들 역시 비슷하게 잘 싸우고 있었다. 적군은 거의 싸우는 척만 하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숫자가 더 많은 적을 향해, 결사의 각오를 하고 돌격해온 엽병들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쉽게 첫 승리를 얻어냈다.
사실 적당히 이기는 전투에 얹혀가겠다 정도로만 생각하던 성전군 뜨내기 보병들을 상대로, 자신들이 전군의 선두라 생각하며, 우리가 뚫어내지 못하면 후속하는 아군이 다 죽는다며 독기를 품고 돌격해온 드 누아 엽병들이 압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숫자만 많았던 적군이 도망치자, 엽병들은 가느다란 띠 형태로 언덕 아래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확보했다!”
“천천히 와 천천히!”
언덕 비탈을 따라, 키의 몇 배나 되는 긴 장창을 든 드 누아 창병들이 조심조심 내려오고 있었다. 언덕 남쪽에 배치되어 있었던 드 누아 남부 연대 주력 병력이 언덕을 통과해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반격의 선봉이다! 죽어도 버틴다!”
“옛!”
팽팽하던 샹다메리 전투에 이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서로 힘 싸움을 하는 상황, 측후방에 갑자기 완편인데다 체력도 팔팔한 1개 연대가 전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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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각하, 저희가 즉각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만, 후미엔 소 후작!”
“무슨 일입니까?”
“적이 노리는 것이 더 있을 것 같습니다. 병력을 나누어 주십시오.”
“그럼 병력의 절반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대응이 늦어버렸다. 서둘러 사령부로 보낸 전령이 중간에 저격당한 것은 성전군 우익 기병대의 지휘관, 마렘 드 모르뷔셀 공작에게도 역시 보고되었다. 그래서 곧바로 다음 전령을 파견하기는 했으나, 저격을 걱정해 크게 우회해서 도착하는 바람에 연락이 늦고 말았다. 보고받은 사령관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 전황을 살필 무렵, 언덕 위의 적군이 이미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언덕 아래를 지키고 있던 순례자 보병들이 그대로 무너져 달아났다. 말 그대로 혼비백산의 전장이탈이다. 어차피 사령부로서도 특별한 전력으로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형편없는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다소 실패는 있었다고 해도, 성전군은 시종일관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중앙도 그렇고, 새로이 공격을 시작한 좌익 대군의 승리는 결정적이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전장이 넓어지고 교전이 격렬해질수록 우세한 병력이라는 성전군의 강점은 빛을 발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 진행되었다면 말이지만.
이제 전선의 균형은 무너졌다. 적은 압도적 병력 차이로 위기에 처한 측면에 병력을 증원하지 않았다. 설마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인가? 혹은 무너지기 전에 전투를 끝낼 자신이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건, 여력이 남은 병력을 반격에 쓰겠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아마, 그 반격은 저 언덕을 통한 병력 이동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반격을 위해 출동하던 예비대, 아퀴오슈 연대의 절반을 남기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망설이게 된다. 이대로 공격을 계속할 것인가. 혹은 잠시 공세를 늦추고 예비 병력을 확충할 것인가. 에티엔은 잠시 이마에 손을 대고 이마를 찌푸렸다. 공세를 늦추는 건 적에게 이득이 되는 행위가 아닐까? 병력을 전선에 빼서 여유를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의 여유가 적에게도 생긴다는 것이다.
“레스펜스 연대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무슨 내용이지?”
“현재 측면에 적이 전개 중! 사령부에서 대응하지 않으면 후퇴하겠다! 이상입니다.”
갑자기 짜증이 확 난다. 레스펜스 연대는 전방의 주력 전열에서 가장 오른쪽을 담당하고 있는 부대였다. 한참 팽팽한 이 와중에 갑자기 병력을 빼버리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지휘관인 르므완 드 레스펜스 후작은 영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었다. 법황의 이단 토벌령이 발령된 직후에 서둘러 병력을 모아 트랑카벨 령을 침공했었다던가? 당시에 졸렬한 지휘로 패배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복수를 위해서인지 상당히 열성적이기에 좋게 보려 했지만··· 정말 불필요한 말을 해서 미움받는 타입이다.
“르므완 드 레스펜스 후작에게 전달하게. 사령부에서 알아서 대응하겠다. 레스펜스 연대는 전방의 적에게 집중할 것! 이상!”
“알겠습니다, 공작님!”
전령이 서둘러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에티엔은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갑자기 측면에 새로운 부대가 나타나 배치를 시작했으니, 전방의 중견 지휘관으로서는 예민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그만큼, 이번 갑작스러운 적의 배치 기동은 아군을 흔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원래 사람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 보다 일어날지 모르는 일을 더 두려워하는 법이다. 여전히 유리한 상황인데도 ‘앞으로 위협적일지도 모르는’ 일에 겁을 먹는 모습이라니. 에티엔 자신도 좀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지금까지의 전례를 보면 적은 기묘한 계책을 써서 상대를 흔들고, 작은 차이를 크게 벌려버리는 전술을 주로 썼었다. 일부러 우직하게 힘으로 싸우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애초에 약점 잡힐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한 점도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자. 적은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패하는 열세이다. 그러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잡혀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서 에티엔 드 크레이는 대군의 지휘관이며, 현 상황을 유지하기만 하면 이긴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예비대가 필요하다.
“전령을 여기로! 양 측면 기병대에 전령을 보낸다!”
“어느 쪽 말씀이십니까?”
“양쪽 모두!”
“알겠습니다, 공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