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샹다메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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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독 연맹군 우익, 네그라타 용병 연대가 배치된 방어선에서의 전투는 점점 격화되어가고 있었다.
전투가 격화된 가장 큰 원인은 공격 측인 성전군이 ‘자신이 가진 진정한 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힘이란, 숫자라는 원초적이고도 절대적인 우위를 말하는 것이다.
약점인 척 유인하는 참호선 구조, 미로와도 같은 방어 배치, 들어오는 순간 십자포화에 당할 수밖에 없는 화력 교집점 등등. 분명 훌륭한 방어 수단들이고, 실제로 얼마 전 까지는 나름의 역할을 하던 요소들이다. 허나, 3배라는 압도적인 숫자 아래서는 모두 소용이 없다. 아니, 소용이 없는 정도까지는 아니나 그 효과가 많이 희석되는 수밖에 없었다. 사방을 개미 떼처럼 새카맣게 뒤덮고 몰려오는 적의 존재는 이미 그 비주얼만으로도 기절할 지경의 공포를 불러온다.
아무리 잘 설계된 방어선이라 할지라도 끝없이 몰려오는 적에게는 무의미했다. 해자의 가장 깊은 바닥부터, 흙벽의 가장 높은 꼭대기까지 가득 채운 적에게는 말이다. 모든 방향에서 적을 맞이해야 하는 수비군으로서는 아주 약간 험한 전장에 불과했다. 적의 진입을 방해하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니까.
타타타탕!
“이쪽에 총병! 적 총병이다!”
“쏴버려! 발사!”
“끄아아아아아!”
타탕! 탕! 탕!
“창병대 버텨! 적이 계속 몰려온다!”
“으으윽, 이거 좀 잡아 봐!”
“지휘부에 알려! 남쪽에서도 적이다! 남쪽 통로에도 적이라고!”
“으아아악!”
타타탕! 타탕탕!
몇 명이 나란히 서면 어깨가 부딪히는 좁아터진 참호 안에서, 사실상 총구가 빤히 보이는 무자비한 총격전, 피할 공간도 없이 마구 찔러대는 무의미한 창병 간의 밀치기 대결, 축축한 바닥을 굴러대며 서로 주먹질을 하거나 단검을 찔러대는 치열한 난타전까지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방어선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네그라타 용병대의 결의도 상당하지만, 국왕군 보병 연대의 구성원들 역시 절대 만만치는 않다. 양측의 훈련도나 장비의 질은 호각이었다. 네그라타 측은 전문적인 용병단의 효율적인 구성과 장비에, 트랑카벨 가문과 계약 이후 부족한 장비들을 꾸준히 보충해 주었기에 아쉬운 점은 거의 없었다. 한편 국왕군 역시, 엘랑키아 중부와 북부의 부자 귀족들이 자진해서 편성한 병력을 기반으로 하기에 질적으로 전혀 부족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국왕군 측이 새로 소집되어 훈련받은 신병이 많기는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장교들이나 훈련했던 교관들이 북방전쟁 등 실전을 겪은 왕실군의 베테랑 출신들이 많았다. 병사들의 수준 또한, 어중이떠중이 농부들을 모은 징집군이 아니라 귀족 가문이 가려 뽑은 지원병에 직접 무기를 들고 나선 하급 귀족들도 섞여 있다. 실로 전쟁의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효율적인 군대이다. 아마도 대륙의 어느 군대를 상대해도 밀리지 않을 정강한 군대일 것이다. 거기다 성전군 특유의 높은 사기와 자신감도 추가된다.
아마 평범한 민병대 수준의 별 장점 없는 보병대가 상대였다면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이면, 서로 운이 없게도 비슷한 수준의 강군 끼리 부딪힌 상황이다. 이 때문에 양측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더더욱 치열한 피투성이 전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알론소 중대장, 화약 가져가겠습니다!”
“그래, 몇 명 다쳤어?”
“셋 다쳤습니다!”
“그래 알겠다. 지금 남쪽이 정신이 없으니 조금만 버텨!”
“알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가장 치열한 곳은 정해져 있었다. 블랑독 연맹군 전선의 우측 끝, 그중에서도 끝의 끝인 물방울 모양의 방어지점. 바로 알론소 요페로 페레데즈가 지휘하는 중대였다.
다른 지역의 병력 비율이 적 셋에 아군 하나라면, 이 지역은 적 일곱, 여덟에 아군 하나 수준이다. 그나마 방어 시설이 좀 더 신경을 써서 건설되어 있다고는 하나···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는 겨우 위안이 되는 수준이었다.
“남쪽은? 어떻게 됐지?”
“가장 외곽 전선을 포기하고 안쪽으로 후퇴했습니다.”
“다행이네!”
“하지만··· 뒤에 남은 녀석들이 있습니다.”
“빌어먹을!”
알론소가 나지막하게 욕을 하며 군화 굽으로 바닥을 찼다. 새로 파헤친 지 얼마 되지 않은 흙바닥은 푹신해서 소리도 나지 않는다.
“우리가 끝이다! 여기가 무너지면 옆을 지켜줄 아군은 없다고.”
“압니다. 중대장. 최대한 버텨보겠습니다!”
다른 지역은 이 중으로 방어선을 만들어 놓았으나, 가장 격전이 예상되는 남쪽 끄트머리는 삼중 방어선이다. 가장 바깥쪽은 애초에 무너질 것을 가정한 외부 거점이다. 이곳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적의 측면이 노출되고, 더 후방의 진지에서 쏘는 화력으로 피해를 감수하는 구조이다. 하지만 겨우 중대 단위가 보유한 총기의 숫자로 줄 수 있는 피해는 한계가 있었다.
콰아앙!
“으아앗, 시발! 뭐지? 설마 포격인가?”
“포격 소리는··· 아닙니다!”
“우리 탄약고는 무사한가?”
“으··· 탄약고도 아닙니다 중대장. 전방에서 화, 화약이 폭발했습니다!”
방어 진지의 남쪽 끄트머리에서 화염이 섞인 흙먼지가 높게 치솟고 있었다. 알론소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별로 먼 위치도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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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네그라타 연대 소속의 병사가 끄트머리가 부러진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심하게 지친 것인지, 피를 많이 흘러서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인지, 칼을 휘두를 때마다 몸이 휘청거린다. 심하게 맞았는지 얼굴 상태는 엉망이고, 곱슬머리는 피를 머금어 축축한 상태이다.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사방으로 핏방울을 뿌렸다.
“으아아아! 들어와 봐! 들어와 보라고! 개자식들아!”
“야, 포위해! 포위해!”
“덤벼보라고오!”
“그냥 뒤져 이단자 새끼야!”
그 주변에는 성전군 소속의 병사 몇 명이 거리를 두고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분명 거의 다 잡았는데, 마지막 발악이 거세서 숨통을 끊어 놓지를 못하고 있었다. 서로의 욕설만 오가고, 약점을 찾는지 움찔움찔 움직여보지만, 결정적인 타이밍을 잡기 힘들다.
지친 병사가 잠깐 무기를 크게 휘둘러 휘청인 사이, 오른쪽 뒤편 비스듬한 방향에서 적병 하나가 달려들었다. 검을 뻗어 갑옷으로 보호되지 못하는 허벅지 뒤편을 찔렀다.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휘두르던 병사가 한쪽 무릎을 꿇자, 사방에서 일제히 달려들어 난도질한다. 조금 전까지 발악하던 병사가 단말마를 토해내더니 순식간에 시체가 된다. 끝이 부러져 뭉툭해진 검이, 그제서야 피에 젖은 손에서 떨어진다.
“하 시발, 독하네! 이 자식들.”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야?”
“이단 새끼들이 다 그렇지.”
엉망진창 상태의 시체가 되어 움직이지 않는 적을 보며, 욕설 섞인 감탄을 내뱉는다. 이제 간신히 전투 초입인데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썼다. 몸을 많이 쓰는 전투에서 체력 관리를 똑바로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까딱 방심하다가는 평소의 기량을 선보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눈먼 총에 맞아 죽는 것도 억울하지만, 하필 재수가 없게 힘 빠진 상태에 기습당해서 목숨을 잃는다면 그 이상으로 억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냥 밖에서 보기에도 적의 방어선은 꽤 험하고 깊어 보인다. 공격군이 처한 상황은 첩첩산중이나 다름없다.
“하··· 잠깐만 쉬다가 더 가 보자.”
“어라, 잠깐만. 이 새끼 살아 있는데?”
“누구? 허어 산송장이네.”
인제 보니, 참호선 구석에는 피투성이 생존자 하나가 앉아있었다. 초점을 잃은 듯한 눈이 마주치자, 목숨을 끊어놓기 위해서인지 두 명이 접근했다. 움찔하며 움직이자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두 발이나 맞았는데.”
“이건 뭐 그냥 둬도 죽겠구만.”
생존자의 흉갑에는 근거리에서 화승총에 관통당한 자국이 두 개나 남아있었다. 충분히 힘이 남아있는 탄환에 맞으면 구멍이 크게 뚫리고 피가 밖으로도 튀며, 피격흔 주변에 실처럼 금이 간다. 금속이 가진 피로 한계를 넘는 충격이 가해졌을 때의 특징이다.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누가 봐도 살 수 없는 심각한 중상이다.
겉으로는 말끔해 보이는 상처라도, 뱃속은 엉망일 것이다. 단단한 철제 흉갑을 부수며 엉망으로 일그러져 변형한 납탄이 복부의 피부를 찢고 내장을 헤집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조각조각이나 손톱보다 작게 부서진 갑옷 조각이 작은 칼날처럼 피부에 박혀 엄청난 출혈을 내고 있을 것이다. 허리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걸쭉한 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피와 침이 섞여 질척하게 흘러 내리는 입가가 갑자기 이상하게 일그러진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치이익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은 장갑을 낀 손으로 뜨거운 단검을 잡았기 때문이다. 화톳불에 박아 두었는지, 끝이 빨갛게 백열될 정도로 달아오른 단검의 손잡이는 얇은 가죽 장갑을 끼었다고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울 것이다. 어쩌면 손바닥을 태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새끼 뭐 하는 거야!”
“으아앗!”
피투성이 생존자는 그대로 뜨겁게 달아오른 단검을 옆에 있던 작달막한 나무통에 꽂았다. 나무 틈으로 들어간 뜨겁게 달아오른 단검의 끝이 안에 들어있던 가루에 닿았다. 화약이었다.
“크흐흐흐··· 커헉, 여기는 못 지나간다!”
“막아 시발!”
콰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주변을 휩쓸었다. 화염에 흙먼지, 부서진 무기와 피가 뒤섞인 끔찍한 폭풍이 확 일었다가 가라앉았을 때는 근처에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질척질척한 피가 엉망으로 파헤쳐진 흙에 뒤섞여 소름이 끼치는 늪지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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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굳은 얼굴로 우익 쪽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소리만 들어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네그라타 연대가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지 걱정이 됐다.
조금 전에는 총소리 사이에서 대량의 화약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소리도 들렸다. 좁아터진 통로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진지전에서는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화승총을 쏘려면 점화를 위한 불이 필요하고, 이 때문에 여기저기 화로를 두는데 이게 자칫 실수하면 큰 사고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일부러 옆에 총기를 가지지 않은 관리병을 배치하는 평소에서도 간혹 사고가 터지는데, 전투 중에는 말할 것도 없다. 가끔은 사망한 총병이 화로 위로 쓰러지면서, 가지고 있던 화약이 점화되는 참혹한 경우도 생긴다. 이번에는 어떤 경우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휩쓸린 아군이 없기를 바란다.
잠시 전령과 이야기하던 아실이 나에게 다가와 보고한다.
“지빌링엔 연대에서 보고! 돌격대 선발이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으음··· 좋아.”
방금 전, 포병대의 첼레스티나도 준비 완료 보고를 해왔다.
내가 반격을 위해 특별한 명령을 내린 부대는 모두 네 개. 첼레스티나가 지휘하는 포병대와, 방금 보고가 올라온 지빌링엔 반 연대, 샹다메리 언덕 근처에 배치된 드 누아 남부 연대, 그리고 바로 슈토르히 연대이다.
아무래도 규모가 크고 위치를 잘 잡아야 하는 드 누아 남부 연대와 슈토르히 연대의 준비가 늦어지고 있었다. 아니, 객관적으로 봐서 늦었다거나 할 타이밍은 아직 아니었다. 아주 중요한 반격 작전이니 충분한 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설프게 준비해 실전에서 삐끗한다면 실행하지 않는 게 더 나으니까.
나는 마지막까지 머리를 굴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체크하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작전을 중지할 수도 있으니까, 그 전 까지는 모든 판단 기준을 열어두어야 한다. 내 명령 하나에 1만이 넘는 목숨이 무의미하게 날아갈 수도 있다.
내 직업, 총사령관이란 사람을 죽이는 게 일이다. 정확히는 사람을 죽이게 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지. 아군을 이용해 적을 죽이게 하며, 그 과정에 아군도 많이 죽게 만든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므로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의미하게 사상자만 많이 나오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위선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원래 그런 것이다. 냉정하게, 우리 병사들을 장기판의 말로 봐도 그렇고, 이후의 전쟁을 위한 자본으로 봐도 당연히 최대한 많이 살려야 하는 것이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보고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