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21화 (121/556)

20-19. 샹다메리 전투

네그라타의 중대장, 알론소 요페로 페레데즈는 마지막으로 화승총을 점검한다. 특별히 지휘할 일이 생기기 전에는 그도 한 명의 총병으로 방어선을 지킬 예정이다. 적을 코앞에 둔 상황이지만, 전투 직전 미카토 연대장과 간부 회의에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난다.

“방금 콘도티에레에게 물러서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보고하고 왔다.”

“그럼요... 물러서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죠.”

중대장들을 비롯한 중견 지휘관들 사이에서 메마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트랑카벨 가문에도 우리 활약을 제대로 보여주자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아야지.”

“생각해보면 특별히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빚이 있으면 빨리 갚아버려야 직성이 풀려서.”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브롱보카쥬에서 트랑카벨 군에게 혼이 빠지도록 얻어터지고 항복한 이후, 당시 단장이었던 타르벤도에게 배신당했을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트랑카벨 가문이 관대한 제안을 해 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목숨줄을 틀어 잡혔으니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할 말이 없었는데··· 오히려 트랑카벨에 고용된 이후 대우가 더 좋아졌다. 식사의 질이 좋아졌고 일부가 공제되긴 했지만, 봉급도 꼬박꼬박 지급되고 있었다. 채무도 차근차근 갚아 나가고 있다. 용병단 재건 직후 부실했던 무기도 꽤 공급이 돼서 무장도 충실하다.

뭔가 예상했던 것과 좀 달랐다. 보통 항복한 병력은 제대로 아군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대가를 치르지 않나? 그 때문에 린치든 위험한 자살 임무든 각오하고 있었는데···. 뭐 특별한 요구를 받은 적이 있어야지.

정찰 나가서 공 세웠다고 훈장도 똑같이 줄 때는 솔직히 놀랐다. 공을 빼앗기고 다른 놈이 훈장 받아 갔어도 더러워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용병으로 전장에 나가면 고용주의 직계 지휘관이나 병력에게 공을 빼앗기는 일은 흔한 일이고. 돈만 제때 받으면 그런 욕심쟁이들에게 전공 나눠주는 것 정도야 참을 만했지.

그런데 어쩐지 이번에는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좀 불편했다. 미카토 연대장이 말하는 ‘빚은 갚아버려야 직성이 풀린다’라는 말도 약간 공감이 갔고 말이다. 아, 물론 단순히 금전 관계의 빚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심리적인 부분이 더 크다. 이번에 공을 세우면 그런 불편한 마음도 사라지겠지. 역시 당당해지려면 공을 더 세울 수밖에 없다.

“사격 준비이!”

전방 총병 지휘관의 구령이 알론소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지독하게도 많은 적들이 두 번째 해자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 가까운 해자까지는 50미터, 아주 적절한 사격 거리다. 엄지손가락으로 격철을 당기고 수직으로 세운다. 불붙은 화승을 끼운 곡선 형태의 쇠막대가 찰칵 소리와 함께 젖혀진다.

얼마 전, 엘랑키아 군 정찰대와의 전투에서 노획한 이 최신식 화승총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격철의 이단 잠금장치를 통해 오발 사고를 줄인데다가, 방아쇠의 압력이나 점화 타이밍 등등이 모두 완벽했다.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나간다.

하지만 총병 지휘관은 조금 더 기다릴 생각인 모양이다. 알론소가 생각하기에도 좋은 판단이다. 해자에 적이 더 꽉꽉 들어찰 때까지 기다려야지. 처음 해자를 설치할 때 각도를 잘 맞춰 놓았기 때문에, 흙벽 위에서 해자 바닥까지는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구덩이가 이동만 방해하지, 엄폐물 역할은 못 하도록 주의해서 파 놓았다는 말이다.

“조준!”

수직으로 서 있던 총들이 일제히 적을 향한다. 알론소 역시 개머리판을 어깨에 단단히 붙이고 뺨을 기댄다. 그의 오른쪽 눈과 해자에 바글거리는 적 사이에 총열이 일자를 이루도록 겨눈다. 누구를 조준할까. 날이 구불구불한 장검을 들고, 주황색의 화려한 어깨띠를 걸치고 있는 갑옷 차림의 적을 노려본다.

“쏴라!”

타타타타탕!

눈 앞에서 불이 번쩍 일어나며, 요란한 소리, 매캐한 냄새,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가 청각, 후각, 시각을 동시에 마비시킨다. 하지만 익숙한 일이다. 들리든 말든 보이든 말든 상관없다.

얼얼한 어깨로 반사적으로 총을 세로로 세우고 탄약 가방에서 탄약포를 꺼내 이빨로 뜯는다. 화약 특유의 씁쓸하고 짭짤한 맛이 이젠 미각도 마비시키겠지. 뜯어낸 탄약포를 총구에 부어 넣는다. 아직 2발 째니 첫 총신 청소는 생략한다. 꽂을대를 밀어 넣어 화약을 다진다. 겸사겸사 총신 내부에 남아 까끌까끌한 이전 사격에서 남은 찌꺼기들도 같이 눌러준다. 이 정도면 아직 명중률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은 경험으로 안다.

타타탕! 타탕!

퍼퍽, 퍽! 휙! 파악!

적군 총병이 반격을 한 모양이다. 납탄이 흙벽에 박히고 머리 주변으로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살짝 어깨를 움츠리기는 했지만, 신속한 재장전 동작에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다.

다음으로 종이에 감싸인 총알을 탄약포째로 쑤셔 넣는다. 쑤셔 넣은 종이는 총신 내부를 더럽히는 그을음과 찌꺼기의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총신을 꽉 막아 총탄이 충분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시 뽑아낸 꽂을대를 총구 아래의 보관 구멍에 끼워 넣고 양손으로 잡는다.

잠시 주변을 돌아본다. 알론소는 중대장이니까, 눈앞의 적만 상대할 수는 없다. 일부러 다지지 않아서 무너지기 쉽게 만든 흙벽의 비탈을 기어오르려 악전고투하는 적병들 너머로 재장전을 열심히 하는 총병들이 보인다. 아직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고, 특별히 적이 심하게 몰렸거나 위험해 보이는 방어선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뭐야, 빗맞았네?”

하필이면, 알론소가 노렸던 주황색 어깨띠의 적이 멀쩡하게 살아서 흙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참 운도 좋은 놈이다. 다시 총을 들어 적을 겨눈다. 적이 이쪽을 보더니 뭐라 외치며 상체를 낮춘다.

탕!

“크윽! 젠장.”

이런 또 빗나갔다. 연이은 실수에 알론소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설마 총구 청소를 생략해서 그런가? 아무리 총구가 더럽다고 해도, 설마 이 거리에서 또 빗나가다니. 잠깐 상체를 낮췄던 적은 자기 몸에 총이 맞지 않았음을 확인하더니 이를 드러내며 빠르게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알론소는 총을 기대어 세운 후, 허리에서 검을 꺼내고, 왼손으로는 허리띠 뒤편에 고정해놓은 단검의 감촉을 확인한다. 적이 흙벽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면 바로 찌를 준비를 한다.

타앙!

“커허억!”

겨우 3미터쯤 남았을까, 적의 땀으로 젖은 얼굴과 적갈색 수염이 생생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적의 흉갑에 손가락 두 개쯤은 들어갈 구멍이 갑자기 생기더니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다. 잠깐 움찔거리나 싶더니, 그대로 얼굴을 흙벽에 묻고 쓰러진다. 옆에서 누군가가 쏴버린 모양이다. 힘이 빠진 시체가 그대로 흙벽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다가 멈춘다.

“잘했다.”

“예, 중대장님.”

옆에서 총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입으로 훅 불어낸 총병이 씨익 웃으며 재장전을 시작한다. 꽂을대를 꺼내 총구에 쑤셔 넣는···.

퍼억!

“그으으윽!”

총병의 상체가 휙 돌아가더니 옆으로 뭐가 후두둑 쏟아진다.

“아··· 아 시발··· 하아···.”

씨익 웃던 표정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대로, 한쪽 입가가 엉망으로 일그러진 총병이 그대로 축축한 흙바닥 위에 고꾸라진다. 즉사였다. 고통은 없었던 것 같다. 조금만 아래쪽에 맞았어도, 목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1분 정도는 고통받다 죽었겠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쓰러진 총병의 옷깃에서 빛나는 트랑카벨 단엽장이 보인다. 이제 공을 세워 쌍엽장을 달 수는 없겠지. 얼마 전 엘랑키아 군의 정찰대를 기습했을 때 함께 벽을 기어올랐던 베테랑 총병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과는 브롱보카쥬에서도 같이 싸웠었다. 그때는 아직 중대장이 아니었지만. 너끈히 신병 두 명 분의 역할은 하는 고참병이 순식간에 목숨이 끊어졌다.

“으아아아!”

의미 없는 고함을 지르며, 알론소는 다시 총을 잡아 들었다. 지금은 눈을 감겨주는 것도 사치다. 일단 한발 먼저 쏘고, 적 모가지도 몇 명 딴 다음에 마주하도록 하자. 적 무리가 슬슬 흙벽 위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백병전이 시작된다. 누군가가 휘두른 미늘창이 흙과 적병의 피를 동시에 퍼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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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계획입니다.”

나는 둘러선 네 명의 지휘관급 장교들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다. 적을 뒤집어 놓는 계획 말이다.

이번 계획은 나름 정교하고도 협력이 필요한 작전이다. 사실 작전은 복잡할수록 실패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 내 평소 생각이라서, 이런 계획은 정말 실행하기 싫지만···. 불리한 병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결국 리스크를 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에는 분명히 성공할 수 있다.

“각자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문제는 작전을 실행하는 지휘관들이 어떻게 판단하느냐겠지. 성공을 믿지 않으면 과감한 작전은 포기하고 안전책을 펴는 게 나을 수 있으니까.

“과감한 작전이군요. 저로서는 판단할 능력은 없습니다만, 이 이상으로 좋은 계획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드 누아 남부 연대장 대행, 기즈 드 콜롬브가 침착하게 말했다. 소수의 교관들만 데리고 드 누아 영지로 파견되어, 배타적인 기사와 병사들을 훈련하고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이다.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명령을 주시면 따를 뿐입니다. 피 흘리는 흑곰은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빌링엔 반 연대장, 에르만 슈피리가 다소 창백한 얼굴로, 하지만 신뢰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에, 저도 따를 거예요. 실패할 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콘도티에레의 전술이니까요!”

수석 포술장 첼레스티나가 언제나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주며 말했다. 참 고마운 일이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불안해하는 동료들 또한 안심하게 해주고는 하니까.

“으음··· 저 역시 이견은 없습니다. 슈토르히 연대를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저보다 콘도티에레께서 더 잘 아실 테고요.”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군인이라기보다는, 깐깐한 공무원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기는 슈토르히 연대의 선임 중대장,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가 대답한다. 다정한 얼굴로 안경을 쓰윽 밀어 올리는 모습이 뭔가 악역 같은 느낌이다.

“허나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물어보게.”

“이 작전을 실행하려면··· 콘도티에레께서 적절한 타이밍이 올 때까지 기다리셔야 할 것 같다 보았습니다.”

“으음··· 그렇지.”

“그럼 그 시기가 올 때까지, 예비 보병 병력의 거의 전부인 저희가 여기 묶여 있어야 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확실히 예리한 지적이다. 예비대는 놀고 있어서 예비대가 아니지. 전방에서 싸우는 아군을 지켜보며, 필요에 따라 지원하거나 교대해 줘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하지만 아무리 반격 작전이라고는 해도, 이를 위해 예비대 대부분을 투입 대기 시킨다는 것은 그동안 예비대 없이 전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비대가 없는 지휘관은 전투의 구경꾼일 뿐이다.

“그때 까지 전방 부대가 버텨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31연대가 도와줘야겠지만.”

“주 전선의 트랑카벨 보병 연대들은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콘도티에레, 우익의 용병들도 괜찮겠습니까?”

루트비히가 살짝 내 쪽으로 상체를 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그들이 겁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능력 이상의 일을 맡긴다면 그건 그들에게도 안된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흐음···.”

네그라타 연대가 갑자기 겁에 질려서 도망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압도적인 적과 마주해 전열 붕괴 위기에 처한다면 끝까지 버티지 않고 포기해 아군을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의지와, 멋진 축성 기술을 믿어 보자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 역시, 머리속으로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네그라타 연대가 예상만큼 활약하지 못한다면··· 중간에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면 어쩌지?

정말 최악의 경우라도, 그 거미줄처럼 파 놓은 참호선이 시간을 끌어 줄 것이다. 설령 적이 돌파하더라도, 다시 평지에서 싸울 수 있는 진형을 구축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러면 최대한 병력을 살려서 후퇴할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의 전쟁은 정말 지옥이 되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방어선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미카토의 호언장담이 생각났다. 아직 적이었던 시절이지만, 브롱보카쥬에서의 용맹한 모습도 말이다. 부디 그 모습을 샹다메리에서도 보여주리라 믿는다.

“저도 물론 콘도티에레의 판단을 믿습니다.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트비히는 시원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슬쩍 숙였다. 원래 이런 녀석이다. 악마의 대변인이라고 하는 역할. 항상 부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나에게 건의한다. 나로서도 그의 시각을 공유하고 다시 한번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판단을 내리면, 절대적으로 내 판단을 신뢰해준다.

“루트비히 선임 중대장 말대로, 정확한 타이밍에 실수 없이 실행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시 명령이 있을 때까지, 각자 작전을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나는 지휘관들을 각자 부대로 돌려보냈다. 이제 남은 것은 내 판단뿐이다. 내가 어떻게 판단하든, 저들은 내 명령을 따른다. 내가 판단을 잘못 내린다면 무의미하게 많은 희생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갑자기 손이 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꽉 잡았다.

최근 손 떨림은 거의 진정된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손이 떨렸다. 하지만 3초? 5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멈춘다. 다행이다. 최근에는 전방에서 총질할 일은 없었다만 그래도 역시 손 떨림은 불안하다.

나는 전장의 모습을 다시 한번 눈에 담는다. 이제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

때를 기다리자. 그리고 나서, 적진을 뒤집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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