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샹다메리 전투
“부르셨습니까, 콘도티에레.”
원래는 트랑카벨의 가신으로 제10 연대의 부연대장이지만, 드 누아에 훈련 교관으로 파견된 이후 백작을 비롯한 드 누아 사람들의 신임을 받아 남부 연대를 지휘하고 있는 기즈 드 콜롬브.
“호출을 받았습니다, 콘도티에레.”
슈토르히 연대의 수석 중대장으로, 동료인 모리츠와 첼레스티나가 떠나있는 상황에서 연대장 대리를 맡은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
“명령 받들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지빌링엔 ‘피 흘리는 흑곰’ 반 연대의 지휘관 에르만 슈피리.
“네에, 저도 왔어요, 콘도티에레.”
현재 블랑독 연맹군의 수석 포술장으로 포병대를 지휘하고 있던 첼레스티나 델 캄포브레소.
모두 지휘소에 도착해서는, 진지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첼레스티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긴 했지만.
내 호출을 받은 그들이 지휘부로 모였다. 반대로 말하면, 지휘관이 부대를 떠날 수 있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은 아닌 부대들만 불려왔다는 것이다. 기병 부대를 제외한 현재 이 전장의 예비 전력들이다. 그래서 반격한다면 이들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기병 부대들은 현재 전투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도저히 뺄 수 없다. 북부 전선, 좌익 쪽에서 벌어진 대규모 기병전에서 크게 승리했음에도 여전히 기병 전력은 적이 우위이며, 배치된 숫자를 줄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기병은 기병으로 막아야 하니까. 아까 적 기병들이 후방에 난입했던 것을 추가 기병 예비대 투입 없이 막아낸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 슈토르히 연대가 유인책을 잘 썼고, 적이 냉큼 걸려준 덕분이었지. 후방에 난입한 적 기병이 그냥 돌아다니기만 해도 아군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고 만다. 아니, 엘랑키아 기사 1천 기가 후방에서 난리 치고 있는데 그거 두고 전쟁하라고? 절대 불가능하다.
그런 관계로 기병 예비대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반격에는 쓸 수 없었다.
“으흠, 그럼 지금부터···.”
지금은 한창 전투 중, 시간이 없다.
“반격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작전 개시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최대한 빨리 준비해야 합니다.”
이 말을 할까 말까··· 1초 고민했다.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을까? 이게 뭔 개소리냐고 생각할까? 그래도 의도 전달에 도움이 될까? 에라 모르겠다, 해버리자.
“목표는 적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질렀다. 기즈는 전체적인 표정은 변화가 없으나 눈을 크게 떴다. 루트비히는 반대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를 일그러뜨린다. 에르만은 얼굴이 더더욱 굳으며 입술을 깨문다. 첼레스티나는 활짝 웃으면서 눈을 반짝거린다.
나는 적을 뒤집어 놓을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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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임명한 성전군 사령관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은 우익으로부터의 보고를 받고 얼굴을 구겼다. 패배의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마렘 드 모르뷔셀 연대장 각하께서는 무사히 퇴각하셨으나, 모트랭 드 블레르봉 연대장 각하께서 실종되셨다고 합니다.”
“실종? 전사하신 건가?”
“당시 연대 지휘부가 적에게 기습당해 여타 부대와 단절되었다고 합니다!”
“으음··· 알겠네.”
그렇다면 아마도 전사, 혹은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요행히 탈출했다면 부하들이 모르지는 않았겠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샹다메리 언덕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기에 에티엔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냥 대규모 기병대가 우르르 적 후방으로 몰려갔다가, 몇 분 동안 교전이 벌어지고, 다시 우르르 퇴각하는 것으로 보였다. 처음에 갑자기 적 후방에 다수의 아군 기병이 나타났을 때는 이대로 전투가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흥분도 했었지만···.
“혹시 이렇다 할 아군의 전과는 없다?”
“제가 알기로, 적 포병의 일부를 무력화 시켰다고 합니다. 다른 보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알겠네.”
어느 부대를 무너뜨렸다거나, 혹은 지휘관을 전사시켰다는 등의 전공이 있었다면, 무안해서라도 보고에 포함했겠지. 안타깝게도 그런 건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포병의 일부 무력화라··· 애매하기 그지없는 전과였다. 적어도 포병 일부를 죽였으니, 초반의 압도적인 포격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일지. 하지만 치열한 백병전이 시작된 이후 적의 포대가 활약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갑자기 성전군 우익 기병 지휘관, 마렘 드 모르뷔셀 공작에 대한 강한 분노가 치솟았다. 분명 기다리라고 했는데! 어째서 먼저 공격한 것인가! 전투 중이라 어쩔 수 없지만, 차후 이 폭거에 대해서는 분명 질책해야 한다. 아니 공격을 했으면 성과라도 내던가! 적어도 반대편의 좌익과 동시에 움직였다면 교전 자체에서 패배했더라도 전술적인 이득은 분명 볼 수 있었다. 그걸 무모하게 나서서 이렇게 된 것이다.
“휴우··· 우익 기병의 병력 피해는 어느 정도지?”
“한 번 병력이 흩어졌다가 복귀하고 있어서 정확히는 알기 어렵습니다만··· 대략 삼 분의 일 정도는 돌아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정도 병력이 남아 있다면 적도 승리의 기세를 살려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반대로, 상황에 따라서 한 번 더 공격을 시도해 볼 수도 있겠다. 물론 두 명의 연대장 중 한 명이 실종된 상황에서 무리한 명령을 피해야겠지만. 어설프게 공격했다가 괜히 손해만 입고 적의 기세만 올려준 마렘 공작에게 짜증이 난다.
물론 이런 것으로 ‘처벌’을 할 수는 없다. 에티엔이 사령관으로서 명령을 내리고 가이드를 줄 수 있지만, 본대를 떠난 상황에서 지휘는 기병 지휘관의 고유 권한이다. 특히 이번처럼 언덕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막강한 세력을 가진 공작가의 주인이니 어쩔 수 없다는 점도 있겠지.
은근히 근위기병대장인 또 다른 연대장,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을 질투하는 것 같았는데 그 자리를 빼앗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에티엔 공작님, 우익의 피해가 심대한 상황입니까? 그렇다면 저희 연대가 가겠습니다.”
마지막 예비 연대, 아퀴오슈 연대를 지휘하는 후미엔 드 아퀴오슈 소 후작이 침착하지만, 의무감과 자신감 넘치는 투로 말했다.
“아닙니다, 후미엔 공. 후미엔 공은 여기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해주셔야 합니다.”
“무엇이든 시켜주십시오!”
에티엔은 자신보다 살짝 연상인 이 소 후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마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특별히 세력상이나 경제적으로 얽혀 대립하는 가문도 없었기에 두루두루 잘 지내는 성격 좋은 명사의 전형이었다.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야 아직 미지수이지만, 사랑하고 존경하는 연대장의 지휘라면 병사들도 용감히 따라주겠지.
다만 그를 마지막으로 남긴 이유는 그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아퀴오슈 연대가 성전군의 모든 보병 연대 중 최약체로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미엔 본인에게야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질적으로 보내 수적으로 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마도 본인도 알고는 있겠지.
“아군은 중앙에서 시종일관 우세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병력 면에서 거의 두 배 가까이나 되니까요.”
“맞습니다. 다만 외람됩니다만··· 적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적은 잘 싸우고 있지만 결국 균열이 생길 것입니다. 수적 열세라는 한계가 오겠죠. 그렇게 균열이 생기면, 후미엔 소 후작의 연대가 그 시점을 놓치지 않고 돌파해야 합니다.”
“오오! 맡겨만 주십시오!”
후미엔의 귀족다운 얼굴에 살짝 홍조가 맺힌다. 역시, 아무리 침착한 인물이라고 해도 본질은 젊은 귀족 청년이다. 엘랑키아의 모든 귀족 가문의 시작은 군사 귀족, 즉 기사들이다. 승리의 주역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을 리가 없겠지.
방금은 일부러 후미엔 소 후작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만 했지만, 거짓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양 측면의 견제 공격을 통해 적을 소모하게 하고, 돌파한다면 좋지만 그렇지는 않더라도 고착시킨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적군의 예비대는 소모될 테고, 대응 능력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팔다리가 옭아 매인 적군을 중앙 돌파로 붕괴시킨다. 이것이 계획이었다.
아마도 서로 전멸을 각오하고 난타전을 벌이는 것보다 더 적은 희생으로 전투를 끝내는 방법일 것이다. 이걸 통해서 많은 포로를 잡고, 트랑카벨 가문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낸다. 그렇게 블랑독 토벌전을 조기 종전시키는 것이 엘랑키아 왕실의 큰 그림이기도 했고.
현재 우익 기병대의 실수로 약간 삐그덕 거리기는 했으나, 계획의 골자에 문제가 생긴 정도는 아니다. 지금도 약간이지만 우세하다. 이 약간의 우세를 유지하면서 확고하게 만든다.
에티엔 드 크레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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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시발... 존나게 많구만.”
누군가가 욕설을 섞어가며 감탄했다.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 다른 데보다 두툼하고 높은 흙벽으로 보호받는 방어 진지에는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공포. 기대감. 자신감. 낭패감. 희열. 거부감.
전투를 앞두면 원래 별생각이 다 든다. 마치 전투에 들어가면 더 이상 생각을 못 하니까, 미리 생각을 다 해두려는 것처럼.
슬슬 경험을 쌓아 베테랑이 되면 외부 자극에도 둔감해지게 된다. 그런데도 가끔 특별하게 생각이 많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적이 심하게 많은 경우이다.
네그라타 연대의 중대장, 알론소 요페로 페레데즈는 자신의 꼴이 우습다고 생각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성전군 포로를 잡는 임무를 안고 적 코앞에서 건물 벽을 기어오르던 때도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날, 마을에서 성전군의 선발대를 기습해 백병전을 벌였던 때 다쳤던 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린다.
나름 전장에서 잔뼈가 굵어졌다고 느꼈지만... 역시 ‘존나게 많은’ 적 앞에서는 생각이 복잡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의 눈앞에는 정말로 적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뻗어 옷깃에 달린 작은 이파리 모양의 금속을 만지작거렸다. 트랑카벨 단엽장이라는 이름의 훈장이다. 얼마 전의 야간 기습전에서 벽을 올라 크게 활약했던 돌격대가 포상받을 때, 콘도티에레에게 직접 받았다. 함께 받았던 약간의 포상금은 부하들 술 사주느라 몽땅 써버렸지만, 훈장은 남았다. 이걸 만질 때마다 왠지 마음이 둥실둥실해지는 기이한 기분이었다.
“이번에 또 공을 세우고 살아남으면 이게 쌍엽장이 되는 겁니다.”
옆에서 부하 병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옷깃에도 같은 단엽장이 붙어있었다. 함께 벽을 기어올랐던 동료이다.
“그렇지. 나는 일단 받을 테니까 너도 노력하라고.”
“이번에는 후방에서 지휘하셔야죠. 저희가 티는 안 내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아십니까? 중대장님이 맨날 앞에서 싸우시니 말입니다.”
“안 죽을 거니까 괜찮아.”
실없는 농담에 주변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 보충된 인원을 포함해 약 160명의 중대원들. 하지만 눈앞에서 몰려오는 적들은 1000명은 확실히 넘어 보인다.
알론소와 중대원들이 배치된 곳은, 전열의 오른쪽 끝인 네그라타 연대의 방어 구역에서도 끝이다. 말 그대로 끝의 끝, 모든 아군이 왼쪽에 있었으며, 그들의 오른쪽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중요한 지점인 만큼, 물방울 모양의 방어 진지는 강화되어 있었다. 해자는 깊고 흙벽은 높다. 각도도 주의 깊게 파여 있어서 흙벽 꼭대기에서 총을 겨누면 딱 해자 밑바닥이 보인다.
만약 적이 우회하려 하면 트랑카벨 군의 포병대가 측면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모서리에 돌출이 된 진지인 만큼, 최소 두 방향에서의 적을 감당해야 했고, 그 적의 숫자가 엄청났다. 이럴 줄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새카맣게 몰려오는 갑주 차림의 엘랑키아 보병들을 보니 좀 질리기는 한다.
“적이 온다! 사격 준비! 불 꺼트린 놈은 없지!”
“무기 점검해! 모서리 지키는 녀석들 조심해라!”
장교들이 외치는 소리가 참호선을 따라 울려 퍼졌다. 총병들이 흙벽 바로 뒤편에 쪼그려 앉거나 반쯤 엎드린 자세로 화승을 점검하고 있었다. 적군이 첫 번째 해자, 100미터 거리에 도착했다.
“명령 전에는 사격하지 않는다!”
미카토 역시 주변에 외치며, 자신에게 배당된 화승총을 들어 입으로 훅 불었다. 바람을 맞은 화승의 불씨가 빨갛게 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