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샹다메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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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브라소 드 마르지엘 남작은 상대의 목에 검을 겨누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상했다. 전에 없이 빠른 돌격을 하고 격렬한 백병전을 벌이기는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숨이 찼다.
“항복··· 해라!”
짧은 문장 하나를 똑바로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하, 항복하오! 항복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얼굴을 찡그리고 다급하게 외치는 상대는 스무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새파란 청년 장교이다. 이토록 치열한 전투 와중에도 유독 특출나게 단정하고 화려한 모습이라 표적으로 삼았다. 중간을 가로막는 적 하나를 죽이고, 둘을 낙마시켰다. 막 도망치려던 상대를 붙잡아 방금 같이 바닥을 구른 참이다. 덕분에 상대방의 깔끔하게 정돈된 하나로 묶은 머리 타래와 리본 장식, 은쟁반처럼 빛나는 흉갑이 흙투성이였다.
“아아, 좋다. 귀하를 포로로 잡은 사람은 드 마르지엘의 남작, 브라소이다.”
“드 블레르봉 백작의 장남, 모트랭이오. 그런데··· 브라소 남작, 당신 괜찮으시오?”
“물론 멀쩡하지!”
“그런데... 우리는 대체 왜 같은 문답을 두 번 하는 것이오···.”
“어···.”
브라소는 눈만 끔뻑거리며 ‘이유 있는 항변’을 하는 포로를 내려다보았다. 같은 문답을 두 번 했다고? 지끈거리는 머리는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다. 내가 방금 뭘 했더라.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돌진해서 치열하게 싸운 것은 기억이 나는데···. 몇 명이랑 싸웠지?
“뭐 좋다! 총 내놔라!”
“여, 여기 있소.”
남작은 다 포기한 듯, 권총의 손잡이 부분을 내민다. 백작가의 장남, 왕이 소집한 군대의 연대장이 사용할 법한 아름다운 권총이다. 연갈색의 나무 부분은 마치 오래 묵은 악기에서 봄 직한 고요한 광택이 느껴지고, 금속 부분에는 굳이 무기에 넣어야 하나 싶은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패턴이 조각되어 있었다.
“오오 이것이···.”
총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가문의 명검이니 영웅의 투구니 하는 전통적인 무기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는 브라소의 눈에도 상당히 훌륭해 보이는 무기이다. 방금 발사되었기 때문인지 화약 냄새가 물씬 풍기며, 달아오른 총열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항복하고 무기를 맡겼으니, 아, 안전을 요구하오. 드 블레르봉 백작가는 넓은 영토를 가진 대귀족이오! 아버...아버님께 요청하면 몸값을 내 주실 것이오.”
“귀하는 브라소 드 마르지엘의 포로니까, 안정을 보장하지.”
“알겠소··· 통제에 따르리다.”
브라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목에 대고 겨누고 있던 검을 회수했다. 모트랭은 안심한 것인지, 포기한 것인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뭐 인제 와서 얌전히 항복하는 것 말고는 방법도 없었다.
허를 찌른 드 누아의 중장기병 돌격이 워낙 신속했기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뒤늦게 대응하겠다고 본대 병력의 일부를 뺐다가 오히려 중앙을 돌파당했다.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그 시점에서 모트랭의 연대는 붕괴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키며 싸우던 가신 기사단도 거의 전멸했다. 권총이 아니라 기병창에 당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현실이었다.
“대장님! 상처 괜찮으십니까?”
한 손에는 권총을 들고 검을 검집으로 되돌리던 브라소를 발견한 부하 한 명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물론 괜찮지. 자네들은?”
“아니 괜찮지 않아 보이시는데요··· 눈은 보이십니까?”
“으음···.”
“실례하겠습니다!”
부하 기사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브라소의 투구를 벗긴다. 얼굴을 제외한 머리 전체를 가리는 투구의 왼쪽이, 마치 엄청나게 힘이 센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패여 있었다. 변형된 납탄이 파고들었던 흔적이다.
“머리에서 피가 엄청나게 나옵니다. 붕대를 감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어깨와 가슴이 뻐근하다. 주변에는 온통 시체들과, 포로를 붙잡거나 상처를 입은 동료를 수습하는 드 누아와 트랑카벨 가문의 기병들만 보였다. 적은 진작에 연대장을 버리고 후퇴해 멀리 달아나고 있다.
이번에는 해냈다! 라는 감각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린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지만, 중요한 계단을 하나 올랐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총도 얻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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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의 주 전선에서 여전히 치열한 창벽 대결과 총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북쪽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기병전은 왕실군의 판정패로, 기세 좋게 돌입해왔던 왕실군의 2개 기병 연대가 적지 않은 피해를 보고 후퇴했다.
그에 비해서 남쪽, 블랑독 연맹군의 우측 방어선 쪽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네그라타 연대가 건설해놓은 철통과도 같은 방어선이 전투 시작을 지연하고 있었다.
왕실군 리모제 연대의 지휘관인 도니 드 리모제 백작은 적군이 건설해놓은 야전축성 방어선을 살펴보며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변방이기는 하지만, 엘랑키아의 영토 내에서 이런 전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백작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선택권 없는 미래에 염증을 느껴 고향을 떠났었다. 반평생을 타국의 전장에서 살다가, 어느 날 아버지와 형이 열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바라지도 않았던 백작위를 계승했었다. 그 후로 그의 이력을 알게 된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에게 등용되어 왕실군의 보병 지휘관으로 많은 활약을 하는 그였다. 타국의 전장에서 용병 생활 도중 경험한 전술들을 재건된 엘랑키아 군대를 위해 사용했었다.
하지만 공성전도 아니고 야전에서 이 수준의 참호선이라니. 어지럽게 이어지는 해자와, 거기서 파낸 흙을 쌓아 올린 방어벽이 굳건해 보인다. 강력한 기병을 보유하고 있기에 주로 공세적인 기동전을 많이 하는 엘랑키아 군 대부분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다.
문득 주디칼리 용병 시절에 몇 번 만났었던 용병대장이 생각났다. 별명이 삽질왕이었다. 전쟁만 했다 하면 삽질부터 해서 참호와 흙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하들 역시 싸움은 몰라도 삽질에는 전문가였기에 몇 시간만 주면 평지에서도 부대 전체가 들어갈 요새를 만들어 버리고는 했었다. 방어뿐 아니라 공격할 때도 적 요새 주변에 방어선을 건설하고 들어앉아 버리는 식의 ‘공격형 방어 전술’을 사용해 상대를 괴롭히곤 한 것이다.
전술이 상대가 싫어할 법한 일을 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따르자면 상당히 충실한 전술가였다. 전쟁만 하면 장기전, 지구전이 되었기에 그를 상대해야 하는 적들은 대체로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컨셉에 잡아먹혔다고 해야 할지, 방어선 건설에 집착하던 그는 결국 어느 강변에서의 전투에서 중요한 시간을 삽질하다 날린 덕분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다. 강 남쪽에 아무도 지나가지 못할 완벽한 방어선을 건설하는 사이, 적은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강을 건너 고용주의 심장부로 진격했다. 결국 전쟁에서 패배한 삽질왕은 파산했다고 한다. 전사가 아니라 파산이라니, 참으로 주디칼리의 용병다운 최후였다.
“도니 백작님, 저희 병사들은 언제라도 준비가 되었습니다!”
마르체 드 라베르뉴, 명목상 이번 측면 공격의 주공을 맡은 라베르뉴 연대의 지휘관인 젊은 소 백작이 안달이 난다는 듯 말했다. 준비되기는, 전혀 준비가 안 됐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니가 대답한다.
“이런 진지 싸움에서는 계획을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작정 병력을 밀어 넣었다가는 불필요한 희생을 초래합니다.”
“하지만 시간도 무한정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 라베르뉴의 중장병들이 선두에 서겠습니다!”
이 무모하고 호승심 넘치는 젊은 연대장의 말도 일리는 있다. 준비를 하면야 좋겠지만 시간이 무한은 아니다. 중앙에서는 주력부대가 치열한 힘 싸움 중이며, 반대편인 우익의 기병대 역시 이미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침착한 편인 도니 역시 좀 짜증이 났다. 어째서 자신들의 보병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기병 단독으로 선제공격을 가한 것인지.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희 리모제 연대가 측면 공격하며 지원하겠습니다.”
“좋습니다, 5분 후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배치를 서두르지요.”
미로처럼 엮인 방어선에는 분명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이 있다. 방어선 돌파는 퍼즐 풀기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의외로 약점을 잘 공략하면 허무하게 무너지기도 한다. 결국 지키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어 측에서도 그것을 알기에 약점을 숨기려 위장한다. 그래서 약점인 줄 알고 공격해보니 실은 미끼인 죽음의 공간이었다 하는 경우도 많다. 가 보지 않고는 모른다. 이 경우는 미안하지만, 라베르뉴 연대의 공격에 반응하는 적을 보며 약점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겠다.
다행히 라베르뉴의 젊은 연대장은 계속 재촉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협조적이고, 병력은 아군이 압도적이다. 게다가 총병 비율이 높아 좁은 참호선에서의 총격전에도 자신이 있다. 대열을 붕괴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 방어선의 특징은 강점이면서 약점이라는 것이다.
강점인 이유는 당연히 수준 높은 야전축성을 통해서 수비하는 측의 전투력을 극대화 시킨다는 점이다.
약점인 이유는 이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돌파하는 순간, 적의 후방이 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내기해도 좋았다. 적은 2차 방어선을 구축할 병력은 절대로 없다. 그렇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병력의 피해는 없을 완전한 우회를 택하지 않고 굳이 방어선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가 지휘하는 리모제 연대의 병력이 방어선의 끄트머리 쪽에 전개하고 있었다. 충분한 예비대를 남기고, 방어선을 돌파해 버릴 각오로 송곳처럼 종심이 깊은 돌격대를 몇 개 편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한 이 남부 전선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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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티에레, 제7 기병 연대가 재집결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음, 알았어.”
보조 부관 에밀리아의 보고를 들으면서, 나는 다시금 주변을 살피며 혹시 놓친 것이 없는지를 확인한다. 적을 격퇴하기는 했지만, 차츰 전방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들으며 아군의 피해 역시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좌익이 승리했다고는 하나,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다. 피해를 많이 줬고, 기세를 얻었으며, 주도권을 가져온 대단한 승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애초부터 열세였던 전장, 적의 상당수는 살아 돌아갔고 재집결하고 있다. 여전히 천명 단위의 강력한 엘랑키아 기사단이다. 그래서 이겼다고 병력을 뺄 수도 없다.
가령, 기병 별동대의 포병대 강습은 첼레스티나와 포병들의 용감한 방어, 그리고 지빌링엔 용병들의 적시 원군으로 잘 격퇴하기는 했다. 하지만 전투 도중 화약을 포함한 물자 상당수가 유실되었으며 대포도 여러 대가 고장이 났다. 발사시의 반동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포가는 대충 수리로 떼워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렇듯 승리했지만, 우리 전력 역시 많이 감소한 것이다. 계속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벌어진 전투를 되짚어보자면, 아군이 잘한 것도 있지만 적이 실수했거나, 그냥 운이 좋았던 일도 많다.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아찔한 경우도 많다는 것이지.
적의 첫 기병 연대가 욕심부리지 않고, 슈토르히가 아니라 제10 보병 연대의 측면 혹은 모서리에 공격했다면 잘 버틸 수 있었을까. 때로는 단순한 전면공세가 가장 위험한 법이다.
혹은 두 기병 연대가 파스칼의 제7 기병 연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면 상황이 더 어려웠을 수도 있다. 아마 최후의 최후의 예비대인 제31 정찰 연대까지도 투입했어야 했겠지.
마지막 드 누아 기병대의 지휘부 돌격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전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먼저 철수했던 적 기병이 돌아와 다시 상황이 위태로워졌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위험한 경우의 수를 피할 수 있었다. 실로 천운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안 그래도 생각할 '미래의 경우의 수'만 따져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제10 보병 연대의 모리츠 연대장 대행으로 부터의 보고입니다!"
"오, 모리츠가? 무슨 내용이지?"
"앞서 교전에서 모두 133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합니다. 적의 연대장급 지휘관이 포함되어 있으며, 제10 연대가 인계 받아 사령부로 이송한다고 합니다."
"연대장을 잡았어? 정말 대 혼란이었구나...."
포위 섬멸도 아닌데 지휘관급이 포로로 잡히다니, 분명 지휘관까지 백병전에 휘말린 상황이겠지. 크게 이기긴 크게 이긴 모양이다. 공을 세운 병사들은 다 포상을 받아야겠지.
그 때, 전령의 보고를 받은 아실이 외친다.
"네그라타, 우익의 네그라타 연대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콘도티에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