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샹다메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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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토 대장! 사령부에서 전령입니다!”
“콘도티에레가?”
네그라타 용병 연대의 지휘관인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는 사령부에서 보내온 명령서를 받아서 들었다.
- 정면의 적 예비대가 측면으로 우회하기 시작
- 병력은 네그라타 연대의 2.5배 이상으로 파악됨
- 우회하는 적은 포병과 기병으로 대응하겠음
- 네그라타의 용전분투를 기원
네 줄의 명령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미카토는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차오름을 느꼈다.
“전령에게 전달! ‘네그라타는 방어선을 포기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이상!”
“넷, ‘네그라타는 방어선을 포기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잘, 들었습니다!”
전령이 돌아가고, 미카토는 자기 부하들 쪽을 돌아본다.
이번 전투에서 트랑카벨 영지군을 중심으로 한 블랑독 연맹군은 야전 축성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건 네그라타 연대에는 예외였다. 각 연대의 방어 구역이 지정된 이후, 전투 대형의 오른쪽 끝을 지키도록 지시받은 네그라타 연대는 선물을 받았었다.
바로 600자루의 삽, 산더미 같은 나무판자와 말뚝이었다. 전투가 아니라 공사 용품들을 잔뜩 받은 미카토는 희열을 느꼈다. 콘도티에레는 자신들, 한때 적이었던 네그라타 연대의 장기를 제대로 봐주고 있었다. ‘한때 적이었다가 트랑카벨 가문의 자비로 살아남았다’라는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 네그라타 연대 소속의 용병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평지가 많은 엘랑키아 왕국의 영토와 달리, 산과 골짜기, 숲과 늪으로 가득한 라솔 왕국에서 주로 활동해온 네그라타 용병단이다. 험한 지형 탓에 병력의 기동로가 심하게 제한된다. 그러면 자연히 서로 요지에 눌러앉게 되고 수많은 방어 진지를 구축하게 되어 전투의 형태도 진지 빼앗기 싸움이 된다. 결국 이 지역에서 싸우다 보면 창질, 총질만큼이나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삽질이다.
콘도티에레가 알박기 요새화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준다. 덕분에 교대로 진행한 방어선 공사는 조금 전, 포격전이 진행되던 시기까지도 이어졌다. 블랑독 연맹군 주 전선의 오른쪽 끝인 벨로통 농장을 왼쪽 끝으로 한 네그라타 연대의 방어선은 두 겹의 해자와 흙벽, 촘촘히 박힌 뾰족한 말뚝을 가진 요새가 되었다. 이제 적군은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 절대로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네그라타 연대를 전멸시키더라도 말이다.
벨로통 농장의 반쯤 무너진 석조 건물들에는 화승총 사수들이 들어갔으며, 그 사이의 좁은 공간에는 소수의 창병과 미늘창병이 들어가 백병전에 대비했고 주변에 해자를 파 두툼한 흙벽을 만들어 강화했다.
그 남쪽의 개활지는 이제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있었다. 해자의 가장 깊은 곳과 흙벽의 가장 높은 곳의 차이가 3미터가 넘었다. 흙벽을 넘으려는 적은 이쪽 창병들에게 가로막히며, 총병들에게 교차 사격을 당하도록 주의 깊게 만들어졌다. 보병은 물론이고 기병도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의 숫자가 훨씬 많더라도 이러면 전투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고.
“엘랑키아 평지에서만 싸워 본 놈들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을 보여주는 거다!”
“예엡!”
여기저기서 각 지역을 맡은 중견 지휘관들이 부하들을 배치하면서 철저하게 방어선을 준비하고 있다.
한마디로 벨로통 농장을 한쪽 축으로 하여, 커다란 반달 형태의 지역이 온갖 방어 시설과 네그라타 용병들로 가득해졌다. 아마도 지금 블랑독 연맹군에 속한 연대들 중, 이런 변칙적인 전술이 가능한 부대는 네그라타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카토는 자부심을 느꼈다.
“용전분투를 기원하신다는데, 해 드려야지 뭐.”
“그거 우리 평소에도 하던 거 아닙니까?”
“그것도 그렇네.”
참모 장교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웃는다.
현재 고용주인 트랑카벨 가문과의 계약 관계의 천칭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쯤에서 고용주의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활약해서 인정받지 않으면 곤란하다.
“마지막으로 방어선에 미흡한 부분이 없는지 한 번만 검토해보자! 전투 벌어지면 하고 싶어도 못 하니까.”
“알겠습니다. 단장님!”
갑자기 누나인 누에세바가 생각났다.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살한, 선대 네그라타 용병단장이자 알코라즈 남작이었던 타르벤도의 아내였다가, 지금은 팔자에도 없는 남작령의 섭정이 되어 미카토 대신 혼란스러운 알코라즈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다. 참 미카토 자신이나, 누나인 누에세바나 갑자기 ‘귀족’이 되어 호강을 하는 건지, 고생을 하는 건지. 아무튼 지금은 그만두고 싶어도 못 두는 상황이겠다.
아무튼 죽어도 이 방어선은 못 넘어간다고 다시 되새기는 미카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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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티에레, 적 보병 연대 2개가 우리 우익 쪽에 전개하고 있습니다. 곧 공격하지 않을까요?”
“음··· 그렇겠지요으음.”
아 또 존댓말 썼네. 전투 상황에는 반말 써야 하는데. 아무튼 2개 연대라. 규모도 커서 대략 5천 명. 네그라타 연대는 블랑독 연맹군 소속의 보병 연대 중 가장 규모가 커서 1800명이지만··· 그래도 2.5배이다. 아까 네그라타 연대로 전령 보낼 때만 해도 잘못 본 거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아까 망원경으로 보니까 거의 알박기 수준으로 엄청나게 땅을 파헤쳐 놨던데, 만약에 적이 공격해오지 않으면 방어 진지에서 도로 꺼내서 재배치해야 하니 시간이 걸리겠다 싶었는데. 정확히 그리로 적이, 그것도 압도적인 숫자로 몰려드니 결과적으로 잘 됐다. 산이 많은 주디칼리 남부 출신 용병대 중에 틈만 나면 참호를 파는 놈들이 있었는데.
“첼레스티나, 포병 준비는 끝났어?”
“네에, 전부 포를 반대로 돌려놓았어요!”
“그래, 우리 후방을 맘대로 돌아다니는 꼴은 못 보지!”
전방에 아군과 적군이 꽉꽉 들어차서 백병전 중이니, 노릴 표적이 없어진 포병대는 혹시라도 후방으로 돌아오는 적이 있다면 뜨거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 포를 반대로 돌려놓았다. 수백명 단위 부대일지라도, 기병이 방어선 안쪽으로 들어오면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특히 아군 보병 대열이 대부분 전 방위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사각 대형이 아니라 더더욱 그렇다. 선 형태의 대형은 전방에 대한 방어력이나 화력은 강해지지만 그만큼 측후방을 잘 지켜줘야 한다.
“좌익 쪽 적 기병은 움직임이 없어?”
“방금 좌우로 전개한 이후로 움직임이 없습니다, 콘도티에레!”
“네에, 아주 돌격할 생각이 가득한데 참고 있는 것 같아요오!”
첼레스티나가 적 배치의 형세를 보더니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적 기병은 아군 좌측방 멀찍이서 폭이 얕고 가로로 긴 대열을 몇 개나 만들고 있었다. 화약 무기의 공격에 다소 피해를 보더라도 충격력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공격적인 대형이다. 분명 돌격하고 싶지만, 반대편의 보병들이 공격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대기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나라도 그렇겠다. 대략 3천 기의 기병대, 거기다 그 주력은 이름 높은 엘랑키아의 기사들이다. 돌격하면 어느 한 부대 정도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겠다. 심하면 전면적인 전열 붕괴겠지···. 아무리 화약이 전장의 주인공이 되고 기병이 한물이 갔다지만, 강력한 중기병의 집중 돌격은 그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다행히 준비되어 있으니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겠지만.
으음, 차라리 진작 공격해왔다면··· 전력으로 격파하고 반대편의 적을 상대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하아, 저렇게 대놓고 공격 대형을 만들고 대기라니. 포탄이라도 몇 발 쏴주고 싶네.”
“네에··· 어, 콘도티에레? 포가 있잖아요?”
“응? 여기서는 아군에 가려서 각도가··· 아!”
포가 있었다. 제7 기병 연대에 딸린 포가.
아 그걸 왜 잊고 있었을까. 갑자기 멈춰 있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데이터, 새로운 가능성이 입력되었다. 잠시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서 몇 가지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본다. 내가 이렇게 하면, 적은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겠지. 그렇다면 아군은 이렇게 하고···. 그럭저럭 8개 정도의 경우의 수가 돌아갔을 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안 되겠다, 쏩시다.
“아실 부관, 전령!”
“넵, 전령!”
“제7 기병 연대에 전령, 기마 견인 포병을 전개, 전방의 적 기병을 포격할 것. 아군 본대 포병의 포각을 가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 이상!”
“제7 기병 연대에, 기마 견인 포병을 전개, 전방의 적 기병을 포격할 것! 아군 본대 포병의 포각을 가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
“좋아, 전달!”
첼레스티나가 융통성 있게, 내 명령을 더 짧고 명확하게 줄여 전달한다면, 아실은 완벽하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복창하고 전달한다. 어느 쪽이든 훌륭한 참모 장교의 자질이 보인다.
“에밀리아, 전령!”
“예! 전령!”
“슈토르히 연대에 전령, 본대 포병의 포각을 가리지 않게 조심할 것! 적 기병이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커트할 것, 이상!”
“슈토르히 연대에, 본대 포병의 포각을 가리지 않게 조심! 적 기병이 더 안쪽 난입 시 커트할 것!”
“좋아, 부탁한다!”
한편 에밀리아는 첼레스티나에 가깝다. 모리츠에게 배워서 그런가? 슈토르히 스타일일지도 모르겠다. 키가 작은 소녀 부관이 토토토토 뛰어가더니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전령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 참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장면이다.
좌익 쪽, 북부 전선에서는 우리 쪽이 먼저 선공을 가했다. 전술은 마치 바둑과 같다. 내가 한 수를 두었으니, 적이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 한다. 다만, 실제 바둑과 다른 점은 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두 수, 세 수를 한꺼번에 둘 수도 있고, 심지어는 내 차례가 오지 않고 꽁꽁 묶인 상태에서 세 수, 네 수를 얻어맞고 끝장이 나 버리는 때도 있다.
그리되지 않도록 사고력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아무리 작은 움직임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전령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목표 부대로 달려간다.
이제 곧 시작된다. 우리 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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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군 우익 기병대의 지휘관, 마렘 드 모르뷔셀 공작은 전투 대형을 갖추고 공격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단자 군대의 빈약한 좌익을 깨부수고 돌입하고 싶었지만, 명령은 명령이다. 반대편, 남부 전선의 느려 터진 보병들이 공격 준비를 완료할 때까지는 대기하라는 명령이었다.
“남쪽의 준비는 아직인가!”
“송구하옵니다, 공작님. 아마도 남쪽의 적 보병들이 견고한 방어 진지를 건설하여, 공격 배치가 늦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으으음! 진작에 공격했다면, 우리가 그 후방을 위협해 몰아냈을 수도 있었을 것을!”
적의 기병은 명백하게 열세인데다 분산배치 되어 있었다. 다 합치면 숫자는 좀 더 많을지 몰라도 어설픈 기마 총병 따위가 섞여 있어 마렘의 전력보다 명백하게 열세였으며, 그나마도 분산배치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진작에 양 측면의 기병들이 나서 측면을 공격했다면 적 후방은 아군의 것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니 짜증을 참기 어려웠다.
탕! 탕!
타탕!
전방에서는 빈약하고도 별 볼 일 없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첨병으로 내보낸 뜨내기 기병들이 나름 공을 세워보겠다고 열심히 사각 대형을 취한 적 보병들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빈약한 무기로 보병들을 공격하면서, 발끈한 끝에 나오는 일제사격을 도발하는 것이다. 장전이 되지 않은 보병 부대는 말 그대로 기병의 밥이다. 아무리 창벽이 단단한들, 딱 붙어서 쏴대는 권총 사격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적 총병들은 기강이 잘 잡힌 것인지 전혀 도발에 응하지 않는다. 간혹가다 뜨내기 기병들이 쏘는 총에 사상자가 나오면서도 절대로 총을 겨누지 않는다. 오로지 소수의 담당 사수들만에 대열 앞에 나와서 대응 사격을 가할 뿐이다. 전부 훈련 받은 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광경이, 다렘 공작에게는 극도로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신성한 전장을 더럽히는 역겨운 존재들. 조만간 고귀한 엘랑키아 기사단이 전장의 오물들을 정리하고 승리를 쟁취하리라.
퍼엉! 펑!
쾅!
“으아아악!”
갑자기 귀를 찢는 소음과 함께, 고함과 구슬픈 말의 비명이 울렸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주변의 말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렘의 애마 역시, 어깨를 움찔한다. 저 앞쪽, 흙먼지가 치솟으며 기병 두 명이 말과 함께 쓰러져 있는 것이 보인다.
“뭐지? 무슨 일인가?”
“적의 포격입니다, 공작님!”
“포격? 적 포병이 여기까지 온 것인가?”
“저쪽, 적 기병 사이에 말이 끄는 작은 포가 있었습니다!”
“뭐라고!”
분노가 치솟았다. 관자놀이의 혈관 굵게 도드라진다. 기병대가 포를 끌고 다닌다고? 그것도 지금까지 숨겨 놓았다가 기습적으로 발사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돌격 준비! 전투 준비 신호를!”
“공작님, 아직 좌익 쪽 아군 보병이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에티엔 사령관 각하의 명령에는···.”
“사령관은 ‘적극적인 선제공격’을 금지한 것이다! 적이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아, 알겠습니다. 공작님. 전투 준비 신호를 보내라!”
기수들이 크게 깃발을 휘두르며 대기 중인 기병대 사이를 달린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긴장이 잠시 풀어져 있던 기병대가 다시 전투 태세를 되찾는다. 건드리면 그대로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기운. 믿음직한 엘랑키아 기사단의 모습이다! 이게 전쟁이다! 이게 기사단이다!
“후우···.”
잠시 심호흡을 한다. 성전군 우익 기병대 지휘관, 다렘 드 모르뷔셀 공작이 허리에서 검을 뽑아낸다. 각종 보석으로 치장된 가문의 명검이 햇빛을 반사에 빛을 뿌린다.
“전군···.”
칼끝이 태양을 찌르려는 듯 하늘을 향했다가···.
“돌격!”
빠른 속도로 전방을 향한다. 나팔수가 길고 날카로운 돌격 신호를 보낸다.
“돌격!”
“가자!”
“앞으로!”
엘랑키아 기병대가 지축을 흔들며 달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