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12화 (112/556)

20-10. 샹다메리 전투

“부상병! 부상병 있습니까!”

하얀 앞치마를 한 남자 하나와, 여자 네 명이 언덕 저 멀리서부터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군인 복장은 아니다. 문득 트랑카벨 가문에서 새롭게 의무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대체 이런 위험한 상황에 여기에 왜···.

“어... 저기요, 여긴 위험합니다! 포탄이 떨어지고 있어요!”

“위험하니까 왔지요!”

붕대가 가득 담긴 자루를 안은 간호사가 마주 외쳤다. 대체 무슨 일이지.

“부대장님이 언덕 위에도 군의관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하셔서 왔습니다. 군의관 알체스테 델 나르코입니다.”

“중대장 메르클랑 나브룰 입니다.”

창백한 얼굴에 찐득한 땀을 흘리면서도, 군의관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봐도 전장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부상병을 모아 주세요. 거기 당신! 네, 머리에서 피 나는 분, 와서 치료받아요!”

여자 간호사들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작은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작은 야전 진료소가 만들어졌다.

“언덕 위의 부상병들은 언덕 아래로 내려오기 힘드실 테니, 저희가 왔습니다.”

“어··· 감사합니다.”

“저희가 싸우는 걸 도와드릴 수는 없고요, 부상병 모아주세요. 작은 상처도 싸우기 편하게 일단 치료 받는 게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군의관님!”

“이제 마음 놓고 다치셔도 돼요!”

“리타 간호사! 농담으로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으··· 죄송해요, 군의관님.”

시끌벅적한 진료소를 뒤로하고, 메르클랑은 다시 전방으로 돌아간다. 바로 뒤에 진료소가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힘이 났다.

이러면 안 되지만, 정말로 마음 놓고 다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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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군 사령관 에티엔 드 크레이는 선두의 3개 보병 연대가 적군과 격돌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올봄, 두 달간의 준비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국왕의 성전군 3개 연대는 트랑카벨 군이 쏟아내는 화력을 뚫고 질서정연하게 적진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트랑카벨 보병대를 과소평가하는 시각은 전쟁 전부터 있었다. 포도주가 조금 유명할 뿐, 척박한 변경의 영지. 다소 세력이 있다고는 하나 그 근본은 자작령에 불과. 갑자기 병력을 늘려봐야 숫자만 채운, 훈련도 무장도 빈약한 2류 군대라 보는 시각.

이러한 시각은 그동안 트랑카벨 군이 거둔 승리의 대부분이 방어진지나 지형에 의존해 거둔 결과라는 점도 원인이었다. 엘랑키아 군은 아주 최근에 비슷한 군대와 싸운 적이 있었다. 바로 북방 전쟁의 상대였던 나우데사의 보병이다.

나우데사 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민병대는 각 도시 출신의 자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름대로 열의도 있었고 무장도 생각보다는 잘 되어 있었지만, 야전에서는 엘랑키아 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철저하게 요새나 유리한 지형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나우데사 민병대 정도의 빈약한 병력이라면 이 대규모 보병대열의 돌입만으로 전선이 밀려나면서 승패가 절반은 정해졌을 것이다. 요새에 의존하지 않으면 싸움도 못 하는 겁쟁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트랑카벨 보병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맞서왔다. 수천 개의 창대가 서로 맞물리며 전선을 고정했고, 그 빈자리에서 총병들이 끊임없이 총탄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살상한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 않는다. 많은 엘랑키아 측 지휘관들 입장에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껏 트랑카벨 군이, 블랑독 연맹군이 활약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은 어설픈 군대를 상대로만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국왕군이 출전한 이상 개수일촉, 제대로 손을 쓰는 순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허나 에티엔은 처음부터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전장에서 적을 마주했던 친구, 카렐 드 상포리앙이나 불안한 동맹자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증언도 있었고. 직접 카르카냑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것도 그렇고. 최근 1년간 블랑독에서 있었던 여러 전투에 대한 정보를 종합해본 분석 결과도 그랬다. 절대로 쉽게 보면 안 되는 상대였다.

하지만 씁쓸하다. 성전군의 총지휘관으로서, 적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으로 인정받아 보아야 전혀 기쁘지 않다.

“지원을 보내실 겁니까?”

예비대에 속한 3개 보병 연대 중, 라베르뉴 연대를 지휘하는 마르체 드 라베르뉴 소 백작이 묻는다. 연대장 중 최연소인 이 백작가의 후계자는 이제 막 약관의 나이가 된 어린 젊은 청년이었다.

드 라베르뉴 백작가는 엘랑키아 서부에 광대한 영지를 가진 대영주 가문으로, 드 레뮤즈와 마찬가지로 엘랑키아 건국의 8대 귀족 중 한 가문이다. 엘랑키아 전체의 곡창이자, 양질의 군마를 공급하는 중요한 가문이다. 이번에도 어린 후계자의 첫 출전을 기념하기라도 하는 듯,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보내왔기에 군무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리지만, 연대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애초에 자신의 연대 전체가 드 라베르뉴의 영지군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만 이 마르체라는 후계자는 어리석고 버릇없는 귀족의 전형이었다.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에티엔은 설마 자신도 스무 살에는 저랬었나 하는 자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지금은 보내지 않습니다. 예비대는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에티엔의 단호한 대답에,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하더니 입을 다문다. 어제 작전 회의 때만 해도 유난히 자기 연대를 선봉에 배치하지 않았다고 불만이 많았었다. 분명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승패가 갈려 자기 차례가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현재 팽팽한 최전선을 보자면 코웃음이 나오는 한심함이다.

“그래도 아군의 숫자가 거의 두 배는 되는데··· 트랑카벨 군은 어떻게 저리 팽팽하게 저항하는지요?”

“진형 유지에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한계까지 선형으로 진형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정보대로 총병의 비율이 상당히 높습니다.”

나머지 두 연대장들, 후미엔 드 아퀴오슈 소 후작이 질문하자 도니 드 리모제 백작이 대답한다. 후미엔은 첫 출전은 아니지만, 중견 지휘관으로서는 첫 경험이었다. 그에 비해서 도니는 젊은 시절, 외국에서 용병으로 살다 돌아와 가문을 계승했다는 특이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 대화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은 전장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이대로 전투가 오래 지속된다면 적의 한계가 더 빨리 올 것입니다.”

도니 백작이 에티엔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대로 힘 싸움, 소모전으로 가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아니요. 적에게 시간이나 여유를 주면 안 됩니다. 유리한 아군 병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에티엔의 대답에 도니의 얇은 입술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모셸? 모두가 볼 수 있게 지도를 펼쳐 줘.”

“옛, 공작님!”

종자 모셸이 가죽으로 덧댄 지도를 양손으로 펼친다. 연대장과 참모들의 눈이 지도에 몰린다. 지도에는 샹다메리 언덕을 중심으로 평원의 개략도와, 주요 부대들이 잉크로 그려져 있었다. 전투 개전 시점에 에티엔의 명령으로 모셸이 손으로 작성한 지도이다.

“우익에 배치된 기병에게 언덕을 우회해 적의 측면을 노리며 적을 기만하라고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력은···.”

에티엔이 손가락 끝으로, 전선 남쪽 끝에 그려진 작은 집 모양을 가리켰다.

“남쪽으로 갑니다. 마르체 소 백작, 우회 공격의 선두를 맡겨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공작님!”

마르체 드 라베르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역시 지금까지 계속, 혹시라도 자신이 활약하기 전에 전투가 끝나버리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니 백작님의 리모제 연대는 그 후위로, 라베르뉴 연대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현재 지시상으로는 마르체의 라베르뉴 연대가 주공, 도니의 리모제 연대가 조공이라는 형태이다. 하지만 실제 역할은 반대가 될 것이다. 라베르뉴 연대가 적의 측면 방어를 고착시키는 사이, 자유롭게 풀려난 리모제 연대가 승리의 쐐기를 박게 되겠지. 베테랑 지휘관인 도니를 믿고 내린 명령이다.

“그럼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북쪽으로 우회합니까?”

예비 연대 중 유일하게 명령을 받지 않은 후미엔 드 아퀴오슈가 묻자 에티엔은 고개를 저었다. 북쪽으로의 보병 우회는 없다. 제법 커다란 샹다메리 언덕을 우회하는 동안 전투에서 벗어나게 되며, 시야에서도 차단당한다. 자칫하면 연대 하나가 통째로 전력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후미엔 소 후작님은 후위에서 다른 아군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전열의 아군을 도와 적진 돌파를 하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공작님의 말씀 따르겠습니다.”

후미엔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행히 성격도 좋고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다른 귀족과의 사이도 좋았고. 원래 가문도 훌륭하다 보니 전공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연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정답이었다.

“그럼 좌측 우회 부대의 연대장 두 분은 부대를 이끌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좌측 기병대에 전령을 보내 두 분을 보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두 명의 연대장이 사령부를 떠나 각자의 부대로 말을 달리기 시작한다.

이제 슬슬 서로의 카드를 하나씩 까 보일 타이밍이다. 에티엔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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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정지하라! 모두 멈춰어어!”

전장의 북쪽을 크게 우회하고 있던 성전군 우익 기병대의 지휘관, 마렘 드 모르뷔셀 공작은 샹다메리 언덕의 측면을 지나자 일단 부대를 멈추고 적정을 살핀다.

정면에 보이는 이단자들의 보병 연대가 허겁지겁 창끝의 방향을 이쪽으로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가소로웠다. 제법 훈련을 받고 무장도 잘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 봐야 징집 농민병들로 이루어진 창병대, 정면으로 공격해도 얼마든지 밀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근거리에서 권총 사격을 가하면 버티지 못하고 균열이 일어날 것이며, 그리로 중기병들이 돌격하면 버티지 못한다.

아무튼 지금 마렘이 이끄는 기병대는 후위의 블레르봉 연대와, 편력기사나 ‘말 탄 순례자’등 떨거지들까지 합치면 3천 기가 넘는다. 잘 훈련된 자신의 기병대에 그런 불순물들이 들어가는 것이 싫었지만 이 또한 ‘이끄는 자’인 귀족의 책임이었다.

아무튼 겨우 천 명 남짓한 보병으로 감히 상대할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다. 다만 마렘이 곧바로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 측면에서 이쪽을 노리고 있는 이단자들의 기병 부대가 있었다. 숫자는 마렘이 이끄는 기병대의 절반도 되지 않아 보인다. 그나마도 어수선한 부대 배치 사이에 보이는 경무장의 총병들을 보면 억지로 숫자만 늘렸다는 것이 보였다.

권총은 몰라도 길고 무거운 화승총은 기병전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병의 사격에 비해 명중률도 떨어질뿐더러, 한번 쏘고 나면 백병전에 돌입하는 순간까지 무기를 바꿔 들기도 힘들어 오히려 전투력을 약화하게 된다. 그룬발트의 자유 도시 출신이나, 나우데사의 상인들이 그런 시도를 많이 했었다. 물론 결과는 엘랑키아 기병대의 압승이었다. 트랑카벨 가문도 포도주 장사로 돈을 많이 벌었다더니 비슷한 짓을 하려는 모양이다. 비슷한 시도는 비슷한 결과를 낳겠지.

다음 이유는 바로 사령관인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의 당부이다.

‘남쪽, 좌익 부대가 공세에 나설 때까지는 적을 기만만 할 뿐, 적극적인 선제 공세는 금지합니다.’

사령관의 말이니 따르기는 하지만··· 솔직히 불만이 많았다. 전장은 시시각각 변화하기 마련이며, 승리의 실마리는 있다가도 없어지게 마련이다. 거기 가장 예민한 것이 기병대인데 느려터진 보병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니··· 짐 덩이를 들고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렘 드 모르뷔셀 공작은 기병 지상주의자였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더라도 전장의 주역은 기병이라 생각한다. 보병이나 포병과 같은 병과는 어디까지나 보조 병과이며, 전장의 효율을 위해 구색을 갖추는 존재들이었다. 기병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 ‘전투 초반’에 잠시 활약하는 막노동꾼에 불과했다.

실제로도 전장에서 가문의 기병대를 이끌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실적이 있는 데다가 가문도 명문 공작가였기에, 굳이 반박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만 복합적인 전술을 중요시하는 최근의 엘랑키아 전술가들은 이 기병 애호가 공작을 다소 껄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전투 대형으로! 지휘관을 소집해라.”

“전투 대형으로! 각 부대에 전령을 보낸다! 이쪽으로!”

돌파력을 살리기 위해 깊은 종심으로 적을 뚫어 버릴까, 횡으로 넓게 펼쳐서 사상자를 많이 내는 데 주력하고 최종적으로 포위해 버릴까. 마렘은 잠시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동료 연대장인 블레르봉 가문의 후계자나 휘하 지휘관들과 협의해야 하긴 하겠지만, 그가 명령만 내리면 영광스러운 엘랑키아 기사단의 후예들이 파도처럼 몰려가 적진을 무너뜨릴 것이다.

전령들이 기병 대열 사이로 달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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