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샹다메리 전투
###
“수고했어, 첼레스티나!”
“네에··· 힘들었어요오···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는 거기가 원래 자리라는 듯, 내 바로 옆에 와서 선다. 조금 전, 엘랑키아 최강의 포병대를 지휘하던 진지하고 의연한 모습은 흔적도 없다. 그 급격한 변화에 아실과 에밀리아는 조금 놀란 모습이지만, 뭐, 이게 첼레스티나 다운 모습이지.
“오늘은 첼레스티나는 수석 포술장이니까, 포병대 재정비가 끝나면 곧바로 돌아가야 해.”
“네에, 콘도티에레.”
뭐가 그리 좋은지, 활짝 웃는다. 포병 지휘관은 실제로 전장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사령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보병이나 기병에 비해서 낮은 계급의 포병 장교도 사령부에 자주 드나들게 된다. 주디칼리 쪽에서는 포병 장교가 높은 분들에게 눈도장 자주 찍는 출세 루트라 생각되는 경향이 있지만···.
약삭빠르게 출셋길을 달리는 첼레스티나라고? 그런 게 존재한다면 내가 좀 보고 싶네.
“아실 자작님, 에밀리아, 오늘은 부관 대신 잘 부탁해요오!”
“맡겨 주세요. 첼레스티나.”
“저, 저도요!”
아실과 에밀리아가 열정적으로 대답한다. 특히 에밀리아는 눈을 빛내며 첼레스티나를 바라본다. 아마도 이 소녀는 첼레스티나를 일종의 롤 모델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시커먼 남자들만 바글거리는 병영에서 드문 여자 군인이며, 뭐든 척척 해내는 모습이 인상이 깊었나보지. ...그래도 장점만 배워야 해, 길치 같은 건 배우면 안 돼.
“아앗, 콘도티에레! 적군이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네요!”
그래 이런 장점. 첼레스티나는 가끔 정신을 놓고 있는 것 같아도, 시야가 360도라도 되는 듯, 다른 일을 하면서도 특이상황 발생을 잊지 않는다. 특히 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내 시야 밖의 일을 잘 챙겨준다. 물론 결국에는 내가 봤겠지만, 아무래도 몇 초 더 늦었겠지.
적군이 전 전선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병력이 더 많으니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예상한바, 사령부에서 직접 명령을 내릴 필요는 없다. 전방 지휘관들이, 그리고 자기 역할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병사들이 힘을 내주는 한, 아군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병력 여유가 있는 적장,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은 분명 측면을 공격해서 압박을 늘리려고 하겠지. 자, 어느 쪽이냐. 왼쪽? 오른쪽? 양쪽 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도 목적이 있겠지. 어느 쪽이든 나름의 대응 준비는 갖춰져 있다.
현재 차례대로 적군이 아군 전열에 도달해서 거의 모든 전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카가가각! 카칵!
타탁, 탁!
장창과 장창이 얽히는 창병 전투에서는 생각보다 큰 소음이 발생한다. 무수히 많은 단단한 창대가 서로 부딪히고 밀어내는 소리가 굉장하다. 하나하나의 소리는 그다지 시끄럽지 않지만, 수백 자루의 장창이 서로 부딪치는 것이다. 게다가 적군을 죽이거나 아군을 지키려는 결의가 담긴 부딪힘이니 상상 이상으로 격렬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소한 전열은 서로 갑주를 입고 있었으므로 정작 치명상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창끝을 흉갑이나 투구에 찔러 부딪혀 봐야 까가가각 하는 소름 끼치는 쇠 긁는 소리와 함께 미끄러져 나갈 뿐이다. 대부분 쇠로 된 장갑이나, 최소한 두꺼운 가죽 장갑으로 보호받고 있기에 창대를 잡은 손가락도 다치게 하기 쉽지 않다. 움직이기 편하게 접히는 관절이 있는 허벅지 부분도 마찬가지.
갑주로 보호되지 않는 부분은 어깨와 팔꿈치 사이의 팔뚝 정도. 그리고 얼굴, 그리고 목이다. 하지만 무거운 장창을 들고 잔뜩 힘이 들어간 근육을 뚫기는 힘들기에 팔뚝 역시 긁힌 상처 이상을 입히기는 쉽지 않다. 얼굴? 눈이라도 찌르지 않는 이상 얼굴도 의외로 치명상을 입히기 어렵다. 목이 가장 위험하지만··· 서로 같은 길이의 창을 들고 있다면 자신도 어딘가 찔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목을 찌르긴 어렵다. 그것도 몇 미터나 밖에서는.
결국 장창 밀집 대형 사이의 전투는 서로의 장창이 얽히고 격렬하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고착 상태가 유지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밀집 대형의 숫자가 가져다주는 질량의 차이가 영향을 미친다. 조금씩이라도 사상자가 누적되고, 더 많은 장창이 선두 및 측면 전투에 참여하면서 진형이 밀려나는 것이다.
“쏴라!”
타타탕! 타탕!
이를 극복하는 것이 언제나 창병과 함께하는 총병들의 지원 사격이다. 적 창병을 쏴서 전열에 가해지는 압박을 줄일 것인지, 적 총병을 쏴서 적의 살상 능력을 줄일 것인지도 총병 지휘자의 판단이 매우 중요하다. 반대로 말하면, 적에게 먹음직한 표적으로 노출이 되어 창병들에 가해지는 피해를 줄이는 것도 역할 중 하나이다. 내가 쏜 이상, 맞지 않을 수는 없다.
“크윽, 악!”
“허억!”
총탄을 날려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적의 사격이 쏟아진다. 납탄이 소름이 끼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휙휙 날아온다. 용감하지만 운이 없었던 병사 몇 명이 비명과 함께 쓰러지자, 나머지 병사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공포로 떨릴지언정, 그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다. 훈련에서 배운 대로 할 뿐이다. 단호한 움직임으로 총구를 통해 화약을 부어 넣고, 꽂을대로 총알을 밀어 넣는다. 이 동작이 빠를수록 사격을 덜 당하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창병과 총병들이 무시무시한 악의와 죽음을 쏟아내는 사이에는, 작지만 더 치열하고 참혹한 작은 전장이 존재한다.
“죽어 이 새끼야!”
“으으윽!”
일어서 고개를 들면, 어지럽게 오가는 창에 찔리거나 총탄에 맞는다. 그래서 얽힌 창벽 아래에서 쪼그려 앉거나 엎드린 소수 병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가 있다. 특별히 이 싸움을 위해서 훈련받는 병력은 없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싸움이다. 창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쥐새끼처럼 기어서 접근해오는 적을 그대로 놔뒀다가는 자칫 전열의 창병들이 치명적인 피해를 본다.
“하앗! 죽어!”
“컥!”
서로 뒤얽힌 격렬한 몸싸움 끝에 단검이 누군가의 목에 꽂힌다. 피를 뿜어내던 적이 축 늘어지자, 몸싸움 통에 얻어맞아 만신창이가 된 병사가 다음 상대를 찾는다.
단검 외에도 권총, 곤봉 등 짧은 무기를 휘두르며 병사들이 얽힌다. 여기 참여하는 이들은 접근하는 적의 위협에 창을 포기한 전열의 창병, 창벽 사이로 대피했던 총병, 전열의 지휘 장교 등이다. 흙투성이가 된 이들이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견제한다.
이런 치열한 싸움이 거듭되며 양측의 대열이 점점 치열하게 맞물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령관으로서 지금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병사들을 믿고, 기다리고, 다음 수를 준비한다.
사령관의 역할은 적의 다음 수를 예상하고 파악하며, 실제로 실행됐을 때 파훼하는 것이다.
###
탕!
“윽!”
방아쇠를 당기자, 화염과 연기가 피어오르며 납탄이 날아간다. 상처가 생기고 피가 튄다. 언덕을 기어오르던 적군이 상체를 벌렁 뒤집으며 굴러떨어진다. 드 누아 남부 연대의 엽병 중대장 메르클랑 나브룰은 잠시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다음 탄약포를 이빨로 뜯었다.
원래 드 누아 영지에서 산지기를 하던 메르클랑은 잠시 현재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그의 주무기는 활과 화살이었다. 솔직히 표적을 맞히는 것이라면 지금도 총보다 활이 훨씬 자신이 있다. 하지만 활은 갑옷을 입은 적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 또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이스키비르 강 건너 알코라즈 남작의 용병들과 사투를 벌이던 중, 처음으로 화승총이라는 무기의 사용법을 배우게 됐었다. 당시에는 총과 활의 혼용이었는데, 지금은 그의 산지기 부하 동료들도 모두 총기의 전문가가 되어있다. 활만큼은 아니지만 사람 크기의 표적을 맞히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엘랑키아 국왕의 군대와 적대해 싸우고 있다! 생전 드 누아 영지의 숲과 들판을 벗어난 적 없었던 자신이 말이다. 게다가 이번 전투에는 대열의 최 좌익을 지킨다는 중책을 맡았다. 샹다메리 언덕을 지키는 약 300명 드 누아 보병대의 지휘관이다.
“윽, 펫, 펫!”
바로 근처에서 자신과 같이 장전하던 어린 산지기가 탄약포를 뜯다가 너무 깊게 물었는지 입술에 화약을 묻히고 침을 뱉고 있었다.
“이봐, 조심해. 화약은 박쥐 똥으로 만드니까.”
“으윽, 퉷, 정말입니까?”
“그래. 너도 참여하지 않았어? 동굴에서 흙 퍼다가 날랐었잖아.”
“아··· 그게··· 화약 재료였나요! 아 이런, 퉷 퉷!”
어린 산지기는 소름이 끼친다는 표정을 지르며 ‘박쥐 똥’이 묻은 혀를 내밀었다. 메르클랑은 킥킥거리며 장전을 마무리했다. 농담은 해도, 손은 쉬지 않는다.
현재 적에게 노출된 샹다메리 언덕의 동쪽 사면은 걸어서 올라가기에는 다소 가파르다. 반대로 말하면, 자세를 낮추든 네 발로 오르든 하면 어떻게든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성전군이 개미떼처럼 잔뜩 달라붙어서 올라오고 있었다. 일일이 총으로 쏴서 다 떨어뜨릴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가끔 비탈을 끝까지 다 오른 적들이 나온다. 사격만큼이나 백병전에도 전문가인 숲지기 출신 엽병들에게 붙잡혀 금방 제압당하긴 했지만, 이제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창병! 도와줘!”
언덕 위에는 드 누아 남부 연대에서 지원하러 온 60명 정도의 창병들이 있었다. 전투가 격화되고 기어오르는 적들이 늘어나자, 이들을 투입했다.
“어어? 으아악!”
막 언덕 위로 고개를 내밀던 적이 코 앞에 들이대진 창을 피하려다가 그대로 미끄러진다. 바닥까지 굴러떨어지진 않았다. 힘들게 올라간 언덕 꼭대기에서 밀려난 것에 쌍욕을 뱉으며 다시 기어오른다.
창병 중 몇 명은 언덕 가장자리까지 가서, 창을 짧게 잡고 찌르거나 휘둘러 기어오르는 적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노력한다.
“언덕 끝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
메르클랑이 다급하게 말했다. 언덕 아래쪽에 많지는 않지만, 적 총병들이 있었다. 뭐 하던 놈들인지는 몰라도 사격이 제법 정확했다. 엽병들도 노출을 최소화했지만, 몇 명이 맞아서 죽거나 상처를 입었다.
탕!
“크악!”
아니나 다를까, 창을 찔러대던 창병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진다.
“이런! 괜찮아?”
투구가 벗겨지며 뒤로 나동그라진 병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헐떡거린다. 메르클랑은 창병의 목덜미를 붙잡고 담벼락 바로 아래까지 끌어당겨 옮겼다.
“와, 이거···.”
흉갑 오른편에 비스듬한 세로로, 손가락 굵기만 하게 파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놀랍게도 갑옷이 총탄을 튕겨 낸 것이다! 장인의 손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갑옷에, 적절한 각도로 날아온 총알이라는 우연이 겹쳐서 생긴 일이다.
“진짜네, 이 거리에서 갑옷이 총알을 튕겨내기도 하는구나. 자네 괜찮아?”
“으으윽···.”
나동그라진 투구를 건네주며 묻자, 병사가 양쪽 어깨를 움직여 보더니 상체를 일으킨다.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흉갑을 내려다보더니 손가락으로 파인 자국을 만져본다.
“배를 엄청 두들겨 맞은 것같이 아프긴 하지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운 엄청 좋았구만! 앞으로도 조심해!”
메르클랑의 팔을 잡은 창병이 일어난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무기가 없다. 총에 맞는 순간 언덕 아래로 창이 떨어진 것이다. 욕을 하면서 허리띠에서 보조 무기를 꺼낸다. 끝에 쇠를 씌운 곤봉이다.
“잠시 우리와 함께 두더지 잡기를 해야겠네.”
창병, 이제는 곤봉병이 된 병사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메르클랑은 주위를 둘러본다. 다행히 병사들이 정말 잘 싸워주고 있었다. 하지만 올라오는 적병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직은 감당할 수준이긴 하다. 창병들이 언덕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내미는 적을 상대로 창을 찌르기만 해도, 적의 공세를 상당히 늦출 수 있었다.
꽈과광!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창고로 사용되던 석조 건물에서 엄청난 흙먼지와 함께 돌 조각이 사방으로 날아 오르고 있었다.
잠시 메르클랑의 생각이 정지된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으아아악!”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화약 통 부터 꺼내!”
“너 대가리에서 피가 철철 나는데!”
“시팔, 알았으니까 통부터 옮겨!”
포격이었다. 적의 공성포 포격이 언덕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트랑카벨 군의 집중 포격에 잠시 무력화되고, 전열에서 백병전이 시작되면서 표적을 잃은 공성포들이 노출된 언덕 위를 향해 포격을 시작한 것이다. 순례자 보병들의 공격은 동쪽 사면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노출된 남쪽 사면과 건물들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대포병 사격에 처절하게 패배했던 오명을 반납하겠다는 듯, 상당히 정확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위험하다! 예비 탄약들은 건물 밖으로 옮겨!”
“알겠습니다!”
메르클랑은 잠시 전방을 떠나 명령을 내린다. 포격이 계속된다면 오히려 전방 쪽이 안전할 것 같았다. 후위 병력들이 서둘러 화약이 담긴 상자들을 옮긴다. 총이 주무기인 엽병들에게 만약에라도 화약이 떨어지면 큰일이다.
명령을 내리며 스스로도 탄약포가 잔뜩 담겨있는 나무 상자를 하나 안전한 장소로 옮긴다. 옮기면서 문득, 언덕의 남쪽이 눈에 들어온다. 자기도 모르게 전율이 느껴졌다. 양측 합쳐서 2만이 넘는 대군이 격돌하고 있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각형의 창병 대형들 사이를 총병들이 채우고 있고, 쉴 새 없이 총성이 울리며 하얀 화약 연기가 피어오른다.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고 있는 전장이란 멀리서 보면 이리도 아름다운 것인가.
콰광!
물론 메르클랑이 서 있는 이 언덕도 전장의 일부이다. 또 포탄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다행히 언덕 위가 아니라, 언덕 측면에 충돌한 모양이다. 굉장한 흙먼지가 일어나고 부르르하는 진동이 발을 통해 느껴졌다. 발걸음을 빨리 해서 새로운 집결지에 화약 통을 내려놓는다.
“다섯 군데로 화약을 나눠 놓자! 혹시라도 포탄이 여기 떨어지면 큰일이니까.”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온종일이라도 싸울 수 있는 막대한 양의 화약이다. 혹시라도 잃어버리면 큰일이다.
“메르클랑 중대장님! 연대 본부에서 전령입니다!”
“머? 무슨 일이지?”
한참 탄약 옮기는 것을 돕다가 뒤를 바라보니, 전령이 낯선 이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포탄이 덜어지자 겁에 질린 듯한 그들은 아무리 봐도 군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