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07화 (107/556)

20-5. 샹다메리 전투

어떻게 해야 티 안 나게 적을 샹다메리 부근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 나는 병력 위장을 시도했다. 일부 연대에 일부러 행군 속도를 늦추거나 남쪽으로 크게 우회하게 했다. 이렇게 하면 당연히, 적이 보기에 아군의 명확한 숫자를 파악하거나 전력을 예측하기 힘들어진다. 특히 행군에서 낙오된 연대가 뻔히 보이면 전군이 모이기 전에 공격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고.

다음으로는 일부 연대를 더 북쪽으로 행군시켰다. 아군의 최종 목표 지점을 헛갈리게 하는 것이다. 어차피 이런 평원지대, 병력을 숨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다만 ‘내일, 혹은 며칠 후에 이 병력이 어디쯤 있을까’를 헛갈리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여태 속여먹은 적들에게 미안하지만, 정말 엄청 많이 써먹기도 했었지.

이래도 안 속아? 그럼 최후의 수단인 ‘더 북쪽에 전열 만들기’가 있다. 주력부대를 북쪽으로 행군시키는 것이다. 물론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래서 ‘야, 내가 너 본진 먹으러 가는데 안 막냐? 서로 본진 바꾸기로 할까?’ 하면서 배짱을 튕기는 거지. 그래서 적이 오면 그 자리에서 싸울 것처럼 대열을 짜는 척한다. 척하다가, 슬금슬금 후퇴해서 샹다메리 부근에서 적을 맞이한다는 시나리오.

다만 이 마지막 방식은 급격하고 반복적인 행군 및 방향 전환이 필요, 즉 뺑이를 쳐야 하기에 병력 피로도가 상당하다. 게다가 자칫 잘못하면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적에게 뒷덜미를 잡혀서 애매한 포지션에서 전투가 시작될 위험성도 있었다.

여태 경험한 지휘관 중, 특히 지도 위에서 전술 전략을 읽어낼 수 있다며 자부심을 가지는 놈들이 이걸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란한 기동이고 뭐고 그걸 실행하는 병사들이 인간이고, 체력도 정신력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다. 가령, 사흘 전 행군 속도와 지금의 행군 속도가 똑같으리라 생각한다거나. 아니 당연히, 사흘 내내 뺑이를 쳤는데 지쳐서 둔해졌고, 물도 식량도 많이 소모했으니 그거 수급하느라 시간도 낭비되지.

이걸 고려 못하면 지도 위의 배치와 실제 병력의 위치가 어긋나고, 나처럼 약아 빠진 놈한테 전선 뚫려서 군대 말아먹는 거다. 실제 전장에 나가서 병사들 상태가 어떤지는 항상 파악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안 들어 먹는 놈들이 꼭 있어요.

아무튼 나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포지션을 취하면서, 병사들의 체력 소모는 최소화하는 상황을 마련하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는데···.

내 걱정은 다행히 금세 해결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유인책을 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주력이 샹다메리 부근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적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겁해서, 일부러 행군 속도를 늦춰놓은 연대들에 빨리 정상 행군 속도로 복귀하라고 전령을 보내야 했을 정도이다. 아니 내가 무슨 부모의 원수라도 되나 싶어질 정도였다.

그렇게 적군은 우리 북동쪽, 대략 사흘 걸리는 거리 정도에 위치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무서운 기세라고는 해도, 전열을 무너뜨리고 낙오병을 방치하는 그런 강행군은 물론 아니다. 마치 도도한 강물처럼, 도저히 막을 수 없어 보이는 대군의 행군일 뿐이다. 아마 도착 직후 전투 대열도 고려해서 행군 순서를 결정했겠지. 슬슬 멀리 지평선 부근에 적의 선발대인 경기병 부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유인책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때려치우고, 천천히 배치 준비부터 했다. 적과 비교하면 열세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1만 5천에 달하는 대군이다. 아무렇게나 배치해서 싸움이 되지는 않는다. 아군의 후미가 도착하는 것은 최대 이틀 후, 하루의 시간이 있다지만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에는 참호와 같은 야전 축성은 하지 않는다. 남동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서 늘어선 돌담을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전 축성은 아군의 방어력은 올리지만 기동성을 제한하기 때문에, 기동전이 되기 쉬운 이런 개활지에서의 전투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이 전투는 틀어박혀서 우주 방어만 해서는 이길 수 없는 전투라고 예상했다.

대신 여기저기 무너진 돌담을 최대한 수리하기로 했다. 성인 허리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는 돌담이지만, 생각보다 사격전에서 훌륭한 엄폐를 제공할 것이다. 병사들은 부지런히 주변에서 돌을 주워 나르고 있었다.

“콘도티에레, 제16 몽세나 보병 연대가 도착했어요! 한 시간 이내로 전선에 투입할 수 있다고 하네요!”

“아 그래? 예상보다 빨랐네. 서둘러서 왔구나. 곧바로 오지 말고, 후위에서 잠시 휴식을 주도록 해.”

“네에, 콘도티에레!”

시간이 흐르면서 병력이 속속 집결하고 있었다. 이건 적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적 주력이 점점 가까워지는 가운데 단순한 정찰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지평선을 넘나드는 기병대의 숫자도 많아진다.

거듭 주의해서 말하지만, 잘 운용되는 엘랑키아 기병대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적절한 화기의 지원을 받은 엘랑키아 중장기병들은 창병 방진이고 뭐고 뚫어버릴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막연히 화력이나 지형적으로 유리하다고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게 이것 때문이다.

“첼레스티나, 제7 기병 연대와 제8 기병 연대에 예정대로 대응하라고 전령을 보내 줘.”

“네에, 콘도티에레!”

“정말 아무리 조심해도 모자라지 않으니까!”

“네에! 똑똑히 전할게요!”

내가 우리 기병대에게 주문한 것은, 적 기병이 아군 방어선 후방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전투를 준비하는 보병의 후방이 기병에게 위협당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고, 정보 문제도 컸다. 우리가 최전열 뒤에 숨겨 놓은 병력과 장비를 포함한 이런저런 것들 말이지.

다만 적들 역시 대규모 기병전을 각오한 위력 정찰까지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끊임없이 애매한 거리에서 오며 가며 아군의 신경을 건드린다. 적 기병 지휘관이 누군지 몰라도 기병 좀 써 본 인간은 분명하다. 설마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 알고 보면 기병 운용의 귀재였나? 나우데사의 북방전쟁에서 보병들은 요새를 포위하느라 꼼짝 못 하는 와중에 양측의 기병들끼리 전초전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다니 거기서 배운 전술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후 벌어질 전투에서 적 기병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움직일 가능성도 생각해야겠다.

결국 양측에서는 총성 한 발도 울리지 않는다. 서로가 똑똑히 볼 수 있는 거리. 화승총의 사거리는 닿지 않는다. 한쪽이 작정하고 돌격한다면 교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므로 결코 안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긴장된다.

이거 말 그대로 폭풍전야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지만, 그래도 잘못되면 어쩌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콘도티에레, 후위의 드 누아 기병대에서도 연락이 왔네요!”

“엇, 그래? 설마, 안 좋은 소식인가?”

“네에에? 아니에요오! 좋은 소식! 드 레뮤즈 백작군, 움직임 없음!”

“하아, 다행이다.”

“네에··· 콘도티에레, 요즘 너무 피곤해 보여요오···.”

그렇네··· 내가 요새 좀 피곤해져서 예민해지긴 했다.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기에 드 누아 기병대 일부를 접경지대에 파견해 놓고 있었다. 다행히 가스텔 백작의 말대로, 드 레뮤즈 영지군은 상당한 병력을 소집해놓고 드 누아 백작령과의 접경지대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거기서 뭘 하나 궁금해질 정도인데.

가스텔 백작은 진실을 말했고,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번 전투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은 일단 드 레뮤즈 백작군이 뒤통수를 치고 올 가능성은 배제하도록 하자. 그것까지 고려해서 시뮬레이션하다가 머리 터지겠다.

지금은 정면의 국왕군만 생각하자. 사실 이 적만 해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내 머릿속에서 지만, 슬슬 병력 배치는 확정이 되었다. 포병만 빼고.

###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은 휘하의 군대를 이끄는 귀족들의 호전성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적당한 수준의 전의를 유지하는 것은 좋으나, 자칫하다가는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국왕 다고베르 2세의 위광과, 에티엔 자신의 유력한 공작위라는 방파제가 있기는 하지만. 언제 그 방파제를 뚫고 귀족들의 불만, 혹은 욕망이 터져 나올지 모른다고 형님 폐하가 몇 번이나 당부했었다.

적군의 북쪽을 향한 진격은 실로 아픈 곳을 찌른 것이 분명했다. 얼마 전 약탈 사건으로 인해 은근히 미안함과 다시는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던 국왕군으로서는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귀족들이 들끓었다. 어째서 출전을 좀 더 빨리하지 못했냐는 성토도 있었다. 법황군이 공격해서, 트랑카벨 군의 주력이 북동쪽을 향했을 때 공격했으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거야 당신네 귀족들 상당수가 봄이 되자마자 서둘러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지!’라는 말이 턱 밑 까지 나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아군은 신명도 왕명도 가지고 있다, 우세한 병력으로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뭐···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성전군 사령부에는 온갖 종류의 욕망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솔직하고도 절박한 욕망은 ‘법황군보다 빨리 로데브 강 남쪽을 점령해야 한다.’ 단순하고도 당연한 형태로 발현되었다.

이들은 어중간한 세력을 가진 소귀족이나, 계승권이 없는 대귀족의 차남 이하, 혹은 서자들이다. 개개인의 힘은 대단하지 않을지 몰라도 숫자가 많았다. 게다가 빚을 져서라도 착실하게 무장하고, 휘하 병력도 꾸려서 왔기에 대귀족 영지군에 이어 두 번째 주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력이다.

이들의 유일한 희망은 이번 성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 와중에 전공을 세워 블랑독 남부, 즉 ‘트랑카벨의 옛 영토’를 분봉 받는 것이다. 이들 중 몇몇, 혹은 대부분은 전쟁 중 크게 공을 세워 카르카냑이나 델레망드와 같은 북부에서도 부유하기로 유명한 도시의 자작이 되어 금의환향하는 꿈을 꾸고 있으리라.

아마 대부분은 트랑카벨 가문의 부 대부분이 무역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이겠지만. 사실 에티엔 입장에서도 대체 트랑카벨 가문은 어디서 그런 미스테리어스할 정도로 엄청난 부를 얻어냈는지 믿기 힘들 정도긴 하다. 그래도 최소한 블랑독 전역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포도주를 외국에 내다 파는 수완이 없다면 그저 그런 포도주 생산 거점 정도로 끝나고 말 것이다.

아무튼 카르카냑이나 델레망드의 자작을 꿈꾸는 이들의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은 법황군이 포르망제 성과 주변 영지들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법황군이 먼저 점령한다 = 완전히 파괴되어서 폐허만 남는다는 공식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트랑카벨 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풍요로운 블랑독 남부를 점령, 혹은 약탈하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

에티엔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자신은 과연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 역시 결전을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도권을 가지고 확실하게 적을 약화할 자신 또한 있었다. 왜냐하면 시간은 적의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생역전을 원하는 귀족들 생각대로 법황군이 로데브 강을 건너도록 방치한다면 트랑카벨 군은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당연히 에티엔도 그런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적을 괴롭히고 주도권을 빼앗을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냥 지금의 전력으로만 싸워도 우위라고 생각은 하지만··· 트랑카벨 가문과 직접 싸워본 이들의 진심 어린, 어쩌면 귀기 어린 이상한 고평가도 신경이 쓰였다.

‘트랑카벨은··· 보기보다 강할지 모르오. 싸우게 된다면 부디 흔적도 없이 없애 주시길 빌겠소이다. 우리 드 레뮤즈 군이 싸울 일 없도록 말이오.’

마지막으로 배웅할 때,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지나가는 농담처럼 했던 말이었다.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지만, 그 태도가 묘하게 기억에 남았다. 정말, 죽어도 싸우기 싫다는 그 태도.

‘미안하네만, 트랑카벨의 후계자에게 앞으로 적대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네. 물론 내 마음은 자네를 응원하지만 말일세. 그리고 부디 조심하게, 트랑카벨 군은 그냥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란 말이네. 섣불리 덤볐다가 심장이 멈췄던 내가 하는 말이니까 기억해주면 좋겠군.’

참모로 종군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던, 친구 카렐 드 상포리앙의 태도 역시 묘했다. 어딘가 슬퍼 보이면서도 단호한 태도. 당시에는 믿을만한 친구와 전장에 함께 나가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었지만··· 역시 그 말투에는 뭔가가 있었다.

확실히 어딘가 걸리는 것은 있다.

그렇지만 이걸 ‘근거’로 삼을 수는 없었다. 바로 전투에 나서자고 아우성치는 휘하 귀족들에게 ‘내 기분이 나쁘니 미루도록 하자’고 했다가는··· 진짜 폭동이 나고 모처럼 집결시킨 군대가 쪼개질지도 모른다.

‘엘랑키아는 시작부터 잘못된 나라야. 귀족 놈들이 왕실 무서운 줄 모르지. 내 손자 대 즈음에는 왕이 귀족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목표야.’

경애하는 다고베르 2세 형님 폐하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항상 귀족들을 휘어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가끔은 져 주면서 결정적인 목표를 향해 잘 유도해야 한다는 말도 했었다.

아마도 지금이 그럴 때로 생각되었다.

“공작 각하! 방금 정찰에서 귀환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베리브 경!”

국왕의 근위기병대장,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이 두루마리 지도 몇 개를 가지고 에티엔의 사령부 막사에 도착했다.

“혹시 적과의 교전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여러 차례 도발을 시도했으나 절대로 자신들이 정한 선 이상으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사격도 마찬가지 반응입니다.”

북방전쟁을 직접 지휘했던 다고베르 2세는 베리브 자작을 ‘베리브 경이 없으면 내 군대는 장님이나 다름없다’라고 극찬했었다. 실제로 기병 지휘관으로서의 베리브는 전투 또한 베테랑이었지만, 휘하의 기병들을 풀어 정보를 수집하거나 그 정보를 취합해 올바른 결론을 내리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그가 실패했다면, 어느 누구를 보냈어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적 역시 결전을 결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지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으흠, 볼까요.”

베리브는 여러 가지 표식이 칠해진 지도 몇 장을 연달아 펼쳤다.

“이 언덕··· 이름이 뭐죠?”

“샹다메리 언덕입니다.”

샹다메리 전투의 배치도가 에티엔의 머릿속에서도 생생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