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06화 (106/556)

20-4. 샹다메리 전투

가까이 다가온 기사가 커다란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어찌나 큰지, 아직 10살 소녀인 릴리 드 레도쿠르의 얼굴이 다 가려질 지경이었다.

“히··· 히익!”

겁에 질려 도망치지도 못하는 릴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눈가가 눈물로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다 지나간다. 가기 싫다고, 귀찮다고 투정 부리며 피난이 늦어졌었다. 자기 때문에 하인들도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더 빨리 준비할 수 있었고, 짐도 빨리 챙길 수 있었는데. 한발 먼저 레뮤즈 성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 아빠도 생각났다. 무엇보다 지금 전쟁터에 나가서 백작님을 도와서 싸우고 있을 오빠가 보고 싶었다.

열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면서도, 항상 릴리의 입장에 맞춰주었던 자상한 오빠. 소녀에게 있어서 항상 동경의 대상이며, ‘어른’의 기준이 되었던 사람이다.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기···.”

“흐으윽, 잘못했어요! 흐윽, 흑!”

칼자국투성이인 기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릴리는 결국 머리를 감싸 쥐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와 뺨을 적시고, 모처럼 꺼내 입은 외출복의 옷깃을 적셨다.

“어.... 저기···.”

“뭐야? 누가 애를 울렸어? 대장님이 민폐 끼치지 말라고 특별히 주의하라고 하셨잖아?”

“아니··· 책더미를 쏟았길래 주워주려고 했지···.”

“또 너냐? 너 얼굴이 무섭게 생기긴 했어.”

“음, 그런 얼굴로 갑자기 들이밀면 애가 우는 게 당연하지.”

“뭐가 무섭다는 거야!”

병사들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마당에 모여있던 하인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가 달려온다.

“어이구, 아가씨이!”

하녀장이 얼른 달려와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릴리를 안아 올린다.

“어이구 아가씨, 누가 우리 아가씨를? 자자, 얼른 그쳐요. 뚝!”

“으허허헝! 으흑, 흐어어엉!”

하녀의 몸을 꽉 끌어안은 소녀가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모두가 얼어붙는다. 병사들이 장승처럼 서서 꼼짝도 못 하고 있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뒤에서 장교가 다가온다.

“거기 무슨 일이지? 우리 병사들이 뭔가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아뇨, 아뇨, 저희 아가씨가 놀라신 모양이네요.”

“아··· 죄송합니다. 저희는 트랑카벨의 제31 정찰연대 소속입니다. 저는 중대장 엘리스토프 마르크릭이라고 합니다. 혹시 책임자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에구··· 책임자라고 해도, 여기서 제일 높은 분이 우리 아가씨인데···. 다들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어가지구.”

“흐허어어엉!”

실로 혼란 그 자체인 상황이다. 중대장 엘리스토프는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샹다메리 마을의 영주는 어느 분이신가요?”

“우리 영주님은 레도쿠르 자작님이시죠···. 여기 릴리 아가씨가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님의 따님이네요.”

“그렇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피난을 준비하고 계신다면, 옮길 짐은 없습니까? 저희가 돕도록 하겠습니다.”

“에구구··· 창고에 짐이 좀 남긴 했는데···.”

“알겠습니다. 거기 너희 넷, 가서 도와드려라. 주민분들 말씀 잘 듣고.”

“옛, 중대장님!”

병사들이 마차 쪽으로 후다닥 달려간다. 중대장 엘리스토프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언덕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그냥 좁은 언덕 정도로 보였는데, 접근하면서 보니 비탈이 은근히 가팔라서 그냥 오르기는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위에 올라와서 보니 오랫동안 다져진 단단한 지반에 건물들 사이의 공간도 제법 널찍하다. 왜 갑자기 샹다메리 마을을 확보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저기··· 여기서 전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조만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서둘러서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시는 것을 권장해 드리고 싶습니다.”

“에그머니··· 서둘러야겠네. 아가씨, 이제 괜찮으세요?”

“...웅, 괜찮아.”

“그럼 저두 짐 좀 챙기러 가도 되겠지요?”

“응, 울어서 미안해.”

릴리는 조금 새침한 표정으로 바닥에 내려섰다. 여전히 얼굴은 눈물 자국 범벅이기는 하지만.

“아이고오, 우리 아가씨 어른이 다 됐네! 그리고 병사님들도 손님인데, 차라도 한 잔 끓여서 드려야지!”

“앗, 저희는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침 아궁이에 불을 안 껐거든요! 우리 집안 사람들도 목 좀 축여야 하니깐,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뭐라 할 틈도 없이 호들갑을 떨던 하녀장이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릴리는 하녀장을 따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다. 엘리스토프와 릴리의 눈이 마주쳤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함이 감돈다.

“저, 드 레도쿠르 자작가의 영애님이라고 하셨지요?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는데 손수건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엘리스토프가 하얀 무명 손수건을 내민다. 눈물 자국이라는 말을 들은 릴리의 얼굴이 빨갛게 변한다. 무명 손수건을 들어 세수하듯 쓱싹쓱싹 눈물 자국을 닦는다. 얼굴에 묻어난 얼룩을 보더니 울상이 된다.

“아··· 괜찮으시면 손수건을 잠시 보관해 주시겠습니까?”

“흠흠··· 그럼 세탁하고 돌려드리도록 할게요.”

방금전까지 울음을 터뜨렸든 릴리는 어느덧 의젓한 귀족 아가씨로 돌아와 있었다. 엘리스토프 입장에서는 억지로 어른 흉내를 내는 동생을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을 참아야 했지만.

“경께서는 성함이?”

“저는 엘리스토프 마르크릭이라고 합니다, 드 레도쿠르 자작영애.”

“제 이름은 릴리라고 해요. 엘리스토프 경, 귀경은 어느 곳의 귀족이신가요?”

“아··· 마르크릭 가문은 귀족이 아닙니다. 대대로 카르카냑의 필경사를 맡아 왔습니다.”

“카르카냑!”

갑자기 아는 지명이 나오자, 릴리가 크게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내, 귀족 아가씨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고 깨달았는지 얼굴이 빨갛게 변한다.

“오라버니께서 카르카냑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셨어요.”

“물론입니다. 카르카냑에는 모두 일곱 개의 거리가 있는데 전부 나름의 멋이 있습니다.”

“거리가 일곱개나···! 흠흠, 그렇군요.”

“언젠가, 카르카냑을 방문하시면 분명 그 아름다움에 기뻐하시게 될 거로 생각합니다.”

릴리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평화로운 시절이었으면 지금이라도 아버지에게 이야기해서 방문할 수 있었을 텐데, 시기가 이래서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호, 혹시 엘리스토프 경은 라마엘 드 레도쿠르 경의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의 곁에서 함께 싸우고 있다고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저는 드 레도쿠르 가문의 분들은 아직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여기서 벌어지는 전투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흐음··· 드 레뮤즈 백작군에 합류해 계신다면 아마 이번 전투에는 참여하시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에에··· 그런가요···.”

어쩐지 아쉬워 보이는 얼굴이다.

“안타깝게도··· 저희 트랑카벨 가문과 드 레뮤즈 가문은 서로 적대하는 입장이라, 이번에는 드 레도쿠르의 소 자작님과 전장에서 만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저, 적대? 트랑카벨은 적인가요!”

소녀의 눈이 커지며,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 애처롭게 꽉 쥔 주먹을 가슴 앞에 모은다.

“드 레도쿠르 가문으로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큭, 신사적인 분이라 마음을 놓고 말았군요! 안타깝지만, 드 레도쿠르의 여식으로서 아버님이나 오라버니의 적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하··· 그거 안타까운 일이네요.”

릴리 드 레도쿠르는 다시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총총걸음으로 멀어져간다. 엘리스토프는 고향의 어린 여동생이 생각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부디, 이번 전쟁에서 이 소녀가 마음을 다치는 일이 없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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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샹다메리 마을이에요, 콘도티에레!”

“오오, 저기구나. 정말 가스텔 백작님의 편지에서처럼 밥상처럼 생겼네.”

“네에, 정말이네요!”

우리, 블랑독 영지군의 사령부는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와 함께 샹다메리 부근에 먼저 도착했다. 내가 평소보다 좀 더 급하게 전장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도착한 이유는 당연히 지형을 확실하게 봐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기동 자체가 남쪽으로 행군하고 있을 국왕군을 유인하는 목적도 있기 때문에, 본대는 느긋하게 오고 있었다. 적에게 확실하게 보여줘야 하니까.

“이런 지형은 저도 처음 보네요. 블랑독은 완전히 평평한 초원 아니면 바위산만 있는 줄 알았어요.”

“네에? 아쥬흐 양도 이 쪽은 오신 적 없어요?”

“그야···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은 왠지 트랑카벨 가문을 질색하셔서요.”

“아앗, 그렇네요오···.”

“이렇게 군대까지 이끌고 온 것을 아시면, 무척이나 화를 내시겠는데요?”

“트랑카벨 가문의 혈통으로서가 아니라 의무대장으로 왔다고 하면··· 안 통하려나요?”

카르카냑에서 비밀리에 라몽 백작을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뭔가 사방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노린다는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 같았지. 이야기 들어보면 똑똑한 사람인 것 같은데 말이야. 정말로 과대망상증인가? 정신병이라는 것은 본인에게는 절박한 질병이더라도, 제삼자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일도 있으니까. 음, 그렇다면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드네.

우리는 서둘러 샹다메리의 비탈을 올랐다. 이미 선발대로 보낸 가벼운 차림의 추적기병들이 주변을 확보해놓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음, 과연 지형이 방어에 유리하네. 서쪽으로 완만하게 도는 비탈길을 통해서가 아니면 맨몸으로 주변에서 오르기는 쉽지 않겠는데. 특히 기병은 절대 못 오를 것 같고. 방어하기 정말 좋은 지형인데, 왜 아무도 요새를 짓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원래 드 레뮤즈 백작의 영토에서는 전쟁이 별로 벌어지지 않았던가? 주변의 역사를 완벽하게는 모르니···.

그리고 완만한 서쪽으로 둘러 내려온 길이 남동쪽으로 쭉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서 쌓여있는 돌담이 또 상당한 이점이다. 과거에 목초지를 구분하던 역할이었다고 하더라.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서 상당한 부분이 무너지거나 유실되어 있지만, 이런 돌벽은 정말 생각보다 굉장한 엄폐물이 되어준다.

“지형은 어때 보이시나요, 콘도티에레?”

“으흠··· 더 돌아다녀 봐야 알겠지만, 여기 상당히 괜찮아 보이는데?”

“네에, 저도 그래 보여요!”

특히 북쪽, 혹은 동쪽에서 올 적을 맞이해야 하는 군대로서 아주 좋아 보인다. 물론 샹다메리 언덕 자체는 매우 좁아서 보병 중대 몇 개 올라가면 가득 찰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저기서 꾸준히 적 진형을 관측할 수 있는 데다가 한쪽 측면이나 ㄱ 형태 대형의 모서리를 맡긴다 생각하면 굉장한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전의 몇몇 전투, 가령 여울목의 전투에서도 왼쪽 측면 모서리에 돌로 지은 건물을 요새화해서 버텼더니 적의 공세를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는데, 이런 언덕은 그 몇 배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어 보인다.

특히 이번에는 전쟁 시작하고 처음으로, 결집한 트랑카벨 영지군의 포병 전력을 선보인다. 물론 지금까지 포병 전력이 꾸준하게 전투에 사용되었고 많은 전과를 거두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다수의 연대가 한 군데 모이고, 각 연대가 보유한 포병 전력이 집결하는 것은 처음이니까.

여기는 정말 마음에 드는 전장이다. 압도적인 정보의 우위, 상당한 지형의 우위가 보장된다. 그러면서도 탁 트여 있어서 대군의 배치가 가능하고 전략적으로도 아군의 배후 지역이 멀지 않다. 전진과 후퇴가 빠르고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지.

단점? 물론 심각한 단점이 있다. 그렇게 완벽하게 각종 전술요소와 지형지물을 고려하여 배치해 놓으면··· 적이 과연 공격해 주긴 할까 하는 것이다!

당연히 적도 유리한 상황에서 싸우고 싶어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꾸 방어시설 이야기했는데, 기초적인 야전 축성을 통한 참호나 울타리만 해도 생각보다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안에 들어가 단단히 준비하고 있으면 그걸 몰아내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과 시간 낭비가 발생한다. 그냥 허리 높이밖에 오지 않는 나무 울타리만 해도, 적 포화 앞에서 돌파하게 된다면 울타리를 넘고 무너진 진형을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너무나도 큰 손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각종 방어설비를 바리바리 설치해 놓았는데, 적이 공격하지 않는다면? 다 쓰레기가 되거나, 심지어 아군의 이동을 방해하는 부정적 요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도 언덕 위에 완벽한 우주방어 준비를 해 놓고, 포대 배치까지 마쳤는데 적이 공격해주질 않아서 무시하고 진격해버리는 적을 허겁지겁 쫓아가다 망한 전투도 있고···.

결국 상대에게 ‘이거 공격할 만한데?’라는 생각하게 하는 데는 포장이 필요하다. 우리 방어선이 생각만큼 단단하지는 않아요, 우리 병력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아요, 하는 포장 말이다. 이걸 위해서 일부러 병력을 분산시키기도 하고 각종 역정보 공작을 걸기도 한다. 심지어 ‘아 우리가 너무 강해서 적이 공격해오지 않으면 어떡하지?’를 고민하다 패배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는, 내가 경험한 이전 세계에도, 이번 세계에도 잔뜩 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국왕이 보낸 성전군의 지휘관,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은 우리 군을 어떻게 평가할까.

차차 알아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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