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샹다메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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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텔 드 누아 백작은 드 레뮤즈 백작가 저택의 내실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이 업무를 보는 집무실이나, 방문자를 만나는 응접실이 아니라 저택의 안쪽, 집안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내실이다.
문 너머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 고통을 억지로 참는 듯한 앓는 소리와 뭔가 가구가 넘어지는 듯한 우당탕 소리가 들린다. 주변에 선 하인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어쩔 줄 몰라 하지만, 가스텔 백작의 얼굴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평온하다. 익숙한 것인지, 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인지.
얼마 후, 안쪽 문이 열리며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모습을 드러낸다. 창백하고 윤기 없는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해 보인다. 많이 힘든지, 가스텔 맞은편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는다.
“오랜만이오, 백작. 잘 지내셨소?”
“이런 시기에 대체 누가 잘 지낸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잔뜩 심술이 난 듯한 라몽의 말에, 가스텔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나저나 우리 전쟁 중인 것 아닌가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허허, 전쟁 중일수록 이야기는 더 많이 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가스텔은 상대방의 얼굴을 살핀다. 윤기 없는 피부에는 땀이 맺혀있다. 명문 백작가의 주인답게, 격식을 갖춘 복장이지만 목 부근에 빠져나온 옷깃이 심하게 구겨져 있는 것을 보면, 옷을 입고 몸싸움이라도 한 것 같다. 표정은 억지로 평온을 가장하려고 노력하는 듯 하나, 뺨이 묘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요새 괜찮은 거요?”
“좋지 않을 건 또 뭔가요.”
“아니 얼굴을 보니 좀 좋지 않아 보이길래. 좀 더 심해진 것 같구려.”
“뭐,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원래 이랬으니까요.”
“의사에게는 보여 보았소?”
“죄다 쓸모없는 놈들이란 사실만 다시 확인했죠!”
가스텔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연다. 분명 거절할 것 같지만, 권하기라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트랑카벨의 영애가 주디칼리에서 공부해온 실력 있는 의사라 하더이다. 우리 가신들도 여럿 치료받았는데, 성녀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대단하다고 하니 라몽 공도 한 번 치료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소?”
“트랑카벨의 인간이 내 몸에 손을 대게 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가슴을 갈라 이 빌어먹을 심장을 뽑아내고 말지!”
예상대로, 매우 격렬한 반응이다. 대체 이 이웃 영주는 트랑카벨 가문을 왜 그렇게도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는 생각도 든다.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아직도 라몽의 속은 알기 힘들었다.
“뭐 싫으면 할 수 없고. 그나저나, 성전군이란 자들은 겪어보니 좀 어떤 것 같소?”
“갑자기 ‘동맹군’의 정보를 팔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허허, 라몽 공이 동맹이라 생각하신다면야 그러면 안 되겠지. 미안하군, 라몽 공의 신의에 대해서는 나만큼 굳게 믿는 사람이 어딨겠소. 실언이었소이다.”
라몽이 얼굴을 찡그린다. 가스텔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고.
“...뭐 변변찮은 놈들이지요. 하지만 자신만만해 보였고, 나름의 준비는 해 온 것으로 보이더군요.”
“최근에 사고가 있었다던데?”
“통제도 못 하면서 몸뚱이만 불린 군대가 항상 그렇죠! 말단 놈들이 우리 마을을 약탈한 거요!”
“허어··· 어처구니가 없구먼.”
“내 말이요. 불쌍한 촌장 늙은이가 맞아 죽었고,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자 우리 영민들이 화가 나서 성전군의 보급 마차를 습격하는 바람에 큰 일이 될 뻔했지요.”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지, 얼굴이 뻘겋게 변한 라몽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평소에도 말투가 아름다운 편은 아니지만, 정말로 화가 나면 태도로 알 수 있었다.
“뭐··· 일을 저지른 놈들은 몽땅 붙잡아다가 목을 매달기는 했고, 피해도 보상한다고 해서 잘 넘어가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빨리 트랑카벨 군과 서로 싸워서 공멸이나 해 버리면 좋겠군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조만간 전투가 벌어질 것 같더이다. 그 장소는 드 레뮤즈 백작령의 어딘가가 될 수도 있고.”
“아니, 넓어터진 블랑독 초원에서나 싸울 것이지!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는! 몽땅 지옥에라도 떨어질 것이지, 쯧!”
라몽이 씩씩거린다. 엄밀히 따지자면야, 그는, 드 레뮤즈 백작가는 이번 이단 토벌 성전의 중요한 당사자이다. 이론상, 영토 내에 이단이 창궐한 것은 그의 책임이기도 하니까. 억지로 성전에 참여 당했다고는 해도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한편 드 레뮤즈 백작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넓은 블랑독의 대부분은 단 한 번도 드 레뮤즈의 권역이었던 적이 없다. 오히려 블랑독의 패권 다툼이라며 서로 전쟁한 것이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걸 인제 와서 관리를 못 했다고 하면 열 받는 일이지.
“드 누아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드 레뮤즈 영지군은 나름 성실하게 전쟁을 준비하는 모양인 것 같더이다”
“잠시 잊으신 것 같은데, 지금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허헛, 물론 그렇지. 부디 접경하고 있는 늪지대가 피로 물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요.”
“흥, 그따위 땅, 누가 탐내기나 하겠나요.”
“자, 드 레뮤즈 군은 ‘누구’와 싸울 생각이오?”
가스텔의 질문에,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라몽은 잠시 말이 없다. 또다시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무언가 계산하는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볼 뿐이다.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지금까지와 달리 낮게 깔려있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영지를 물려받았다면 할 일은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예를 들자면?”
“그저 ‘내 영토’를 지킬 뿐이죠. 처음부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요.”
“허허, 그렇구먼.”
“왕권이든 종교든, 대의든 정의든 상관 안 합니다. 다 가져다 붙이는 듣기 좋은 구실일 뿐이고···. 죄다 지옥에나 떨어질 것이지.”
“라몽 공의 지옥은 제법 유쾌한 장소이겠구려.”
“그렇게 좋아 보이면 지옥에 같이 가시든가!”
“허허허허!”
라몽이 짜증을 부리자 가스텔이 즐거운 듯 웃는다.
“아무튼 나는 절대로 좌시하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블랑독의 나머지 땅을 지지든 볶든, 어떻게 되어도 상관은 없지만요. 드 레뮤즈는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할 것이고요.”
“물론 그래야지. 잘 알겠소.”
“두고 보시죠. 드 레뮤즈는 절대로 이용만 당하고 살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야지. 조상님들 생각해서라도.”
“가스텔 백작님도 조심하시죠. 성전군 놈들 열받긴 하지만, 꽤 강한 건 분명해요. 요즘 드 누아 군도 꽤 강해진 것 같지만.”
“충고 고맙네. 조심하도록 하지.”
라몽은 갑자기 몸이 불편한지 숨을 몰아 쉬기 시작한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고 눈에는 핏발이 선다. 헐떡대며 목에 손을 가져가자 놀란 가스텔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하인들이 달려온다.
“아니, 괜찮아!”
하지만 라몽이 팔을 들어 저지한다. 하인들의 창백한 얼굴에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표정이 어린다.
“이거··· 내가 괜히 무리하게 한 것은 아닌가 싶군. 미안하네.”
“다 이 몸뚱이가 빌어먹을 탓이지, 백작님 잘못은 없네요.”
많이 힘든지, 라몽이 힘 빠진 목소리로 몸을 의자 깊이 묻는다.
“만약에 레뮤즈 영토 안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어디일까요?”
“흠···.”
가스텔은 의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한다. 레뮤즈 성까지 찾아오면서 전장에 될 만한 곳을 몇 군데 찾아보기는 했었다.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었는데··· 역시 기억에 남는 장소가 한 군데 있었다.
“내가 작전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 확답은 못 하겠지만, 한 군데 추측이 가는 곳이 있기는 하오. 분명 이름이··· 샹다메리였나?”
“샹다메리?”
라몽은 잠시 머릿속에서 그 이름이 붙은 장소가 어디인지 찾아보는 것 같다.
“그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군요.”
“주변이 온통 평지인데 혼자 언덕 위에 있어서 인상이 깊었소이다.”
“분명 레도쿠르 자작의 영토일 텐데···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전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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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독 서부의 약간 건조하지만 넓은 초원에 언덕 하나가 불쑥 솟아있다. 샹다메리라 불리는 언덕. 그다지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사방에 사람 키보다 높은 언덕도 하나 없는 드넓은 개활지이다 보니 유독 눈에 뜨인다.
언덕의 형태는 특이하다. 바위와 흙이 적절히 섞여 만들어진 언덕은 완만하게 비탈지다가, 꼭대기 부분은 넓고 평평하다. 마치 거인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탁자의 형상이다. 언덕의 북쪽 면은 절벽에 가깝게 가파르지만, 나머지는 완만하다. 가장 경사가 낮은 서쪽으로 길이 통하고 있었다.
꼭대기의 평평한 부분에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의 이름은 언덕과 같이 샹다메리라고 한다. 과거에는 가축을 키웠던 공간인지 모서리를 따라 낮은 돌담이 이어져 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 고만고만한 집만 몇 채 지어져 있는 상황이다. 그중 그나마 가장 큰 이층집 안에는 한 소녀가 가방 두 개와 씨름하고 있었다.
릴리 드 레도쿠르는 끙끙대며 자기 소지품이 담긴 가방을 옮기고 있었다. 겨울을 보냈던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평원을 달리는 바람에 뼈까지 시릴 때도 있었지만, 2층 자신의 방에서 내려다보면 저 지평선 끝까지 탁 트인 광경이 너무나도 좋았다. 매일 일과를 마치고 따뜻한 불가에서 책을 읽던 하루하루가 앞으로도 생각이 날 것 같다. 다만 지금은, 그 좋았던 겨울 동안 읽었던 책들이 짐이 되어 아직 10살인 어린 소녀의 팔과 어깨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아가씨 준비 되셨어요? 도와드릴까요?”
“아니야, 괜찮아! 내려갈게!”
마당에서 하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릴리는 굳이 이사를 준비하느라 바쁜 하인의 손을 빌릴 생각이 없었다. 다시 힘을 내어 책으로 가득한 가방을 끌어당긴다. 이사 때문에 모든 짐을 끌어내 옮긴 집 안이 살풍경하게 낯설었다.
사실 그녀는 샹다메리 마을을 떠나기 싫었다. 하지만 전쟁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레뮤즈 성으로 옮겨야 한다고만 들었다. 아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늑장을 부렸지만,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 레뮤즈는 백작님이 사는 도시로, 아주 큰 도시지만, 소녀 입장에서는 끝장나게 지겨운 곳이기도 했다. 자유로운 자작가의 생활과 달리,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야 하는 레뮤즈 성에서의 생활은 재미가 없었다.
차라리 큰 도시로 가야 한다면, 남쪽의 카르카냑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의 오빠인 라마엘 드 레도쿠르의 말에 따르면 블랑독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한다. 게다가 가장 좋은 포도주가 난다고도 했다. 릴리는 아직 어려서 술은 못 마시지만,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된다면 카르카냑에서 마시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항상 그녀에게 잘해주었던 오빠는 얼마 전, 전쟁을 해야 한다며 아버지의 명으로 출정했다. 보고 싶었다.
전쟁이 빨리 끝나야, 다시 샹다메리에서 평화롭게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을 텐데.
“영차!”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자꾸 바닥에 닿았다. 소녀는 더 이상 들어 올리는 것은 포기하고, 현관으로 질질 끌면서 나아간다. 밖에서도 이사 준비로 분주한지 어수선한 소리가 들린다. 어지럽게 말발굽 소리도 들리고.
“나 나왔어!”
끙끙대며 현관으로 나온 릴리는 무거운 가방을 끙끙대며 들어 올리며 헉헉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대견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며 짐을 받아 줄 하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마당 한 편에 모여서 불안한 표정으로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털썩, 와르르. 기껏 여기까지 힘들게 들고 온 가방이 바닥에 부딪히며 열렸다. 안에서 책이 쏟아진다.
“아···.”
릴리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분명 조금 전 까지 이삿짐을 옮길 마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마당이 거대한 말을 탄 기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시커먼 철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기병들.
그중 하나가 릴리를 발견했다. 말에서 내리더니 성큼성큼 다가온다. 정오의 햇빛으로 그림자 진, 투구 아래 얼굴에서 눈의 흰자위만 희번덕거리게 보인다.
“아··· 아아...!”
뭔가 말을 하고 싶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다시 집 안으로 도망치고 싶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기사가 손을 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