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요새 도시 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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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모제에 있는 마슈레 가문의 저택에서는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트랑카벨 가문을 충성스럽게 섬겨온 마슈레 가문의 저택은 크기는 했지만, 마치 병영과도 같은 살풍경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연대장 마브리엘 도련님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며!”
“우리의 안전한 귀환도 축하하며!”
“와하하하하하!”
술잔이 부서져라 부딪치고, 건장한 남자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넓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상석에 앉은 가문의 주인, 벨모제 성주 톨마르 마슈레와 그 오른편에 앉은 장남 마브리엘 마슈레 이외에 30명이 넘는 남자들이 웃고 떠들면서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현재 트랑카벨 영지군의 장교들이지만, 마슈레 가문의 종사들이기도 했다. 종사란 봉건 체계의 하급 기사들과 유사한 신분이지만, 주어진 영토는 없고 대신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섬기는 가문으로부터 봉급을 받는 이들을 말한다.
원래 마슈레 가문은 과거 트랑카벨 영지군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무력을 책임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전쟁을 준비하며 영지군을 완전히 새로 편성하기 전에는 중기병이나 중보병으로 복무하던 종사들이, 신생 트랑카벨 군에서 장교로 바뀌었을 뿐이다.
가주 벨모제 성주 톨마르, 장남 제8 벨모제 기병 연대장 마브리엘, 제7 카르카냑 기병 연대에서 중대장을 하는 차남 가스파르까지, 현재 군 내부에서 가장 세력이 큰 군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주군 트랑카벨 가문과 깊은 관계는 남들은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이다. 애초에 병사 하나하나가 트랑카벨 가문에 충성 서약을 했을 뿐, 전혀 지휘관의 사병이 아닌 특성상 장교 몇 명의 역심으로 뒤집힐 관계가 아니기도 하지만 말이다.
마슈레 가문 남자들이 즐겁게 떠들고 마시는 만찬에 참가한 유일한 외부인이 한 명 있다. 로베르 드 나뵈프,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의 지휘관이다. 같은 연대장으로서 마브리엘에게 초대받았고 영지군의 큰 어른인 톨마르에게도 인사를 할 겸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와, 잔뜩 취해서 떠드는 마슈레 가문의 종사들 중에는 로베르의 휘하 장교도 일부 있었다. 그렇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리가 마무리된 후, 로베르는 시간이 늦었다며 인사를 하고 만류하는 부하들에게 너무 늦게까지는 마시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마슈레 저택을 나왔다. 밤이 되어 조용해진 거리를 걸어 자신의 숙소를 향한다.
오늘은 분명 즐거웠다. 음식도 맛있었고 술도 좋았으며, 새로운 마슈레 가문 사람들과의 만남도 나름 보람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 쪽에 이상하게 무거운 것이 자리하는 것이다.
아마도, 썩 유쾌하지 못했던 성장기의 기억. 그것이 화목한 마슈레 집안의 모습을 보자 자극받아 떠올랐기 때문이다.
로베르의 아버지, 선대 나뵈프 경은 게으른 한량이었다. 검술과 기마술은 제법 뛰어나 젊었을 때는 다른 지역의 귀족들이 주최하는 토너먼트에 나가 활약한 적도 있다고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저 아무것도 안하는 게으른 인간이었다.
나뵈프 영지는 정말 작고 가난했다. 하지만 선대 나뵈프 경은 발전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착취도 하지 않았다. 수입도 뻔했기 때문에 용케도 굶지 않고 살아갔구나 싶어질 정도이다. 만약에 작황이 좋지 않아 영민들이 굶으면, 나뵈프 부자도 함께 굶어야 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살았었다.
그렇게 세상과 어떤 상호작용도 없이 살아가는 듯한 아버지지만, 가끔 술만 들어가면 욕하는 대상이 있었다.
바로 트랑카벨 가문이었다.
몇 대 전인지도 모를 조상이 트랑카벨 가문에 패배해 쫓겨났고, 이 척박한 영지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자신이 가난하게 산다는 논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트랑카벨 말고는 원망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트랑카벨만 욕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뭐, 그 영향 때문에 자신도 아주 최근까지, 성녀님과 콘도티에레에게 구원받기 전까지는 트랑카벨에 이유 없는 반감을 품고 살았었다.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배운 것이 그것이었으니.
자칫 척박한 영지에 틀어박혀서 얌전하긴 하지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자랄 뻔했던 로베르를 구해줬던 것은 다름 아닌 이웃의 말리크 남작이었다. 함께 공부하거나, 검술과 승마술을 배우고, 가끔은 연극을 보는 등 문화생활을 하기도 했다. 로용 드 말리크와 친해졌던 것도 그 무렵이다.
그렇게 죽은 듯 살아가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다. 아마 누군가의 결혼식이었던가, 축제날에 찾아가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술에 취해 졸면서 돌아오던 선대 나뵈프 경은 말에서 떨어졌는지 목이 부러져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과연 이 전쟁이 끝나고 트랑카벨 군을 떠나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다행히도 몇 안 되는 영민들은 남쪽으로 피신시킬 수 있었지만, 로베르에게는 가족도 친척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형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영민들 역시 몽세나 남쪽의 새로운 정착지에서 아주 잘살고 있었다. 나뵈프 영지의 척박한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하기는 할까.
아마도 홀로 나뵈프 영지로 귀환한다면, 아무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홀로 늙고 죽어가려나.
그런 무거운 생각이 든다.
아니,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막연하게나마 앞으로 살아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닐까.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고 피를 많이 흘려 비틀대던 몸으로 말에 올라 차라리 전장에서 죽자고 마음먹었던 시기에는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얻은 것이 있기에, 이제는 잃을까 봐 두려워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라, 로베르 연대장?”
순간,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고 차려 자세를 취한다.
“안녕하십니까, 콘도티에레!”
“시간이 꽤 늦었는데, 어디 다녀오세요? 아, 오늘 톨마르 영감님이 행사하신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콘도티에레.”
“그래요, 다들 체력도 좋으시네요. 아, 불러세워서 미안합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저, 죄송하지만 콘도티에레,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질문이요? 무슨 일이죠?”
말을 걸고, 뒤늦게 후회한다. 아마도 술기운이 이런 용기를 냈으리라 생각된다. 이전, 알코자르 가문과 싸웠던 브롱보카쥬 전투에서 보았던··· 정체불명의 하얀색 선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궁금했지만, 콘도티에레와 독대할 기회가 없었다.
“실은 이전에···.”
로베르는 조심조심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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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나는 로베르 경의 말을 듣고 혼란에 빠졌다.
하얀 선? 눈에 보이는 건지, 냄새로 느껴지는 건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아?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이 선을 따라 달리라는 것처럼 유도당하는 것 같아?
...뭐지 그게. 전혀 모르겠는데.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다. 반듯한 차려 자세로 서서, 다소 망설이는 것 같기는 했지만, 또박또박 설명했다. 오래 고민하던 것을 털어놓는 모양새였다. 말을 다 하더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으음, 이 세계에서 잘 모르겠다는 것들은 대체로 ‘이것’으로 설명이 되긴 한다.
“...혹시 기프트인가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얗게 빛나는 기프트 반응이 없었습니다.”
음, 아니었다. 아니 그럼 대체 뭐지.
“혹시 자주 보나요?”
“음··· 아닙니다. 브롱보카쥬 전투 때 딱 한 번 보았습니다.”
“비슷한 다른 느낌은 없었나요?”
“...제 기억으로는 그렇습니다. 낯선 경험이라서 기억에 남습니다.”
“허어···.”
뭐야 그게, 전혀 모르겠다.
내가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 확신을 가지고 바라보는 로베르의 얼굴이 조금 부담스럽다. 그런데 진짜 모르겠는데··· 기억을 뒤져보지만 비슷한 것을 들어 본 기억조차 없다.
바닥에 가이드 라인이 보인다니··· 이거 무슨 게임에서 퀘스트 숏컷 보여주기도 아니고. 사실 로베르가 주인공이고 내가 엑스트라인 세계관은 아닌가 하는 망상도 해본다. 이건 역시 너무 간 망상이고.
자,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뭐라고 대답해주는 게 좋을까. 일단 로베르가 미쳤다거나 헛것을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응원이 필요하지, 무심하게 저딴 소리를 하는 리더는 집단의 경쟁력을 떨구는 머저리니까.
만약에 이것이 로베르가 가진 어떤 재능의 발현이라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실제로 천재들은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는 방식’이 일반인과 다른 경우가 있다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좀 다르다고 해야 하나. 내가 천재는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전 생에서 들은 케이스들이 몇 개 기억난다.
암기의 천재가 머릿속에 거대한 서랍장을 두는 경우가 있다. 마치 진짜 서랍장이라도 되는 듯, 기억 속의 서랍장에 현재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이다. 그러다 과거의 기억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서랍장을 열어 과거의 기억을 찾아온다고 한다.
...당연히 이해가 안 가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아니, 그게 당연할지도 모르지, 나 같은 범인에게는 말이다. 그런데 확실했던 사실은, 그런 ‘헛소리’를 한 사람은 실제로 암기의 천재였다는 것이다. 단기간에 엄청난 양의 자료를 기억으로 저장하며, 한참 지난 후에도 방금 봤던 것처럼 늘어놓을 수 있는 그런 천재말이다.
그 외에도, 자신의 움직임이 마치 3인칭 시점에서 보는 것처럼 명확하게 느껴진다는 천재 무용수도 있었다. 자기 머릿속 내용을 종이 위에 투영해서, 밑그림도 필요 없이 종이 구석에서부터 그리기 시작해 백지를 채우는 완벽한 그림의 구도를 완성해버리는 천재 화가도 있었지. 보통 사람은 백날 듣고 고민해봐도 그들이 보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로베르는 이런 종류의 특이함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천천히 입을 연다.
“로베르 경이 남들과 다른, 특출난 재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위 천재...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불리는 이들은 세상을 보는 방식, 능력을 이용하는 방식이 보통 사람들과 좀 다르니까요.”
“제가 말입니까?”
“물론··· ‘선이 보인다’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좀··· 지휘관으로서 믿음직하지 못한 경우가 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여러 가지 판단의 조건이 되면 어떨까.
어차피 정찰 연대의 연대장, 700여 기의 기병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부대의 운용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언제 병력을 돌격시키고 언제 후퇴시킬지는 항상 고민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를 위해서 아군과 적군의 위치, 무장도, 화력 등등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이런 상식적인 판단 위에서, 추가적인 검증의 수단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선이 보인다면 말이지만···.
“가령, 다른 모든 상황이 절대로 돌격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상황이라면 선이 보인다고 나아가면 안 되겠지요. 하지만 8할은 긍정이고 2할은 부정인 상황이라면? 굳이 선이 보인다고 하지 않더라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은 있습니다.”
“네···.”
“그런 경우라면, 선이 시키는 대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실제로 선이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징크스처럼 보이는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애초에 선이 보이질 않으니까요, 하하.”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하지만 의외로 로베르는 납득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는 사실 좀 비겁한 논리를 진행했을지도 모른다. 상대의 ‘능력’으로 보이는 것을 긍정해주었을 뿐, 결국 평소대로 행동하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저, 그러시다면 콘도티에레께서는, 남들과 세상이 어떻게 다르게 보이십니까?”
“...네?”
아니 시발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딱히 천재성이 없다니까. 그냥 남들 보는 세상 보고 사는구만. 이런 제기랄, 상태창! 스테이터스 온! 미니맵! 시스템 코올! 거 뭐 하나 떠 주는 거 없나?
“저는 딱히 남다른 능력은 없는 것 같네요.”
“그··· 말씀이 사실이시라면···.”
아니 진짜 그렇다니까···. 오히려 로베르는 꽤 놀란 듯한 표정이다.
“그럼 어떻게 매번 이기시는 겁니까?”
“어··· 글쎄요. 유능한 부하들과 충직한 병사들이 함께해주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음···.”
굳이 말하자면, 질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는 정도의 노력을 하기는 한다. 지금까지 참으로 운 좋게도, 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에는 몰리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콘도티에레.”
“별 도움은 되지 못한 것 같네요.”
“아닙니다 콘도티에레! 이제 비로소 스스로를 조금 믿게 된 것 같습니다. 전부 콘도티에레 덕분입니다!”
“그럼 다행이구요, 하하.”
나는 멋쩍게 웃는다. 뭐 할 말이 없네. 솔직한 말로, 로베르의 재능이 정말이라면 좋겠다. 전설적인 기병 지휘관 중에는 전투 중에 언제 어디로 가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인물이 있었다지? 기병은 워낙 유리로 만든 검과 같아서, 아주 날카롭고 위협적이지만 조금만 실수하면 깨져 버린다. 이걸 귀신같이 잘 다루는 인물이라··· 포병과는 다른 의미로 전장의 신일 것이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콘도티에레!”
그런 탐나는 인물일지도 모르는 기병 연대장이 내 휘하에 있다니, 정말 다행이다. 뭐, 지금까지의 활약을 보면 로베르는 그런 특수 능력 없어도 충분히 훌륭한 기병 연대장이지만 말이다.
...아 뭐 치트 능력 각성 이런 거 없나 나는. 이세계가 참 박하게 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