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96화 (96/556)

18-3. 요새 도시 벨모제

###

엘랑키아 중부에는 브와이유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다. 4개의 크고 작은 강줄기가 들어오며, 다시 5개의 크고 작은 강줄기가 되어 나가는 이 호수는 주변에 펼쳐진 대평원에 물을 공급하는 곡창지대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호수에는 다종다양한 물고기도 살고 있어서 나름의 어업도 발전한 풍요로운 곳이다.

바로 이곳, 아름다운 호반 도시 브와이유가 엘랑키아 국왕이 소집한 성전군의 집결지이다. 봄이 되자 사방에서 귀족들이 이끄는 병력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남쪽의 개활지에는 수천의 병사들이 훈련받고 있었다. 여러 귀족의 영지군들은 훈련도도, 주무기도, 싸우는 방식도 제각각이었기에 재편성 및 표준화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전력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적은 상당한 수준의 장비와 훈련도를 갖춘 것으로 보이는 트랑카벨 영지군이 주력이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덤볐다가는 어떻게 되는지는 작년 가을의 ‘기사도 연합’이 쓴맛을 보며 증명했었다.

엘랑키아 성전군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사령관인 에티엘 드 크레이 공작이 나이는 어려도 지휘관 교육을 착실히 받은 데다가 북방 전쟁에 참여해 착실하게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일부러 국왕 다고베르 2세가 파견한 왕실군의 베테랑 교관들이 빈틈없이 병사들을 교련하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비교적 오랫동안 전쟁 없이 풍요로운 세월을 보냈던 엘랑키아 중부 출신의 귀족군 신병들은 적절한 훈련을 받으면서 강군이 될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원래 가끔 오가는 곡물상들이 아니면 비교적 조용했던 농업 도시 브와이유는 군인과 귀족들로 바글바글했다. 귀족들은 씀씀이도 컸고, 군인들 역시 임금 상당한 부분을 써 버렸기 때문에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이런 시끌벅적한 중앙 관청가의 어느 방에서, 두 사람의 귀족이 만나 회담하고 있었다.

“...지금 말씀은, 레뮤즈에 집결한 군세는 성전군 주력부대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시겠다는 겁니까?”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 미심쩍다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이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의 잘생긴 청년 귀족은 최근 격무로 인해서인지 조금 피곤해 보인다.

“그렇소이다. 우리 드 레뮤즈 가문은 이 성전을 기회로, 항상 말을 듣지 않은 ‘가신’인 트랑카벨 가문과의 해묵은 원한을 청산할 생각이외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느릿느릿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한다. 살집이 포동포동한 남부 최대의 실력자 역시, 피부에 윤기가 없다. 단순히 피곤하기 때문인지 다른 원인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결심하셨다니 응원하고 싶군요. 아무튼 ‘가신’ 트랑카벨 가문은 400년 넘게 귀하의 가문에 대항해 오지 않았습니까?”

“흥, 그 지저분한 역사는 이번에 끝낼 것이오. 바로 이 라몽의 손으로 말이지.”

에티엔의 말투는 일견 정중했으나, ‘400년 넘게 관리도 못 한 가문이 어떻게 가신이냐’고 비꼬고 있었다. 라몽 역시 행간의 뜻을 이해했으나 굳이 감정을 드러내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희 성전군에 합류하고 말을 나란히 하여 트랑카벨의 영토로 진격하면 될 일 아닌가요? 백작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선봉의 자리를 양보해 드릴 생각입니다.”

“바로 대문을 마주하고 있는 적을 무시하고 적지로 진격할 수는 없지. 우리 가문은 또 다른 숙적을 우선 제압하고, 서쪽에서 트랑카벨을 공격하겠소.”

라몽이 서슴지 않고 ‘대문을 마주하고 있는 적’이라 칭한 상대는 물론 드 누아 백작령이다.

“병력을 소집해 공격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럼 빈말을 했겠소? 모든 가신 가문에 소집령이 내려졌소이다. 만약에 소집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왕명을 거부한 것으로 간주해 처벌할 생각이고.”

“흐음··· 그러시군요.”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본다.

공작과 백작, 단순히 공후백자남의 위계만을 따진다면야 당연히 드 크레이 가문이 높다. 하지만 가문의 격을 따진다면 엘랑키아 건국의 8대명가 중 하나인 드 레뮤즈가 전혀 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가문의 힘을 따진다면, 드 레뮤즈 가문이 압도적이다.

드 크레이 공작가는 유서 깊은 왕실 귀족으로, 오랫동안 왕가와 통혼해 왔기에 중앙 정부에 강력한 커넥션이 있다. 심지어 혈통상 드 크레이 가문 출신의 엘랑키아 국왕도 있을 정도이다. 영토도 풍요로운 사와르 강 유역이기는 하지만 아주 넓은 편은 아니다.

그에 비해서 드 레뮤즈는 전통적인 남부 엘랑키아의 강자이다. 엘랑키아 건국시의 8대 명가라는 이야기는, 사실상 남부의 통치를 엘랑키아 건국 왕으로부터 위임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치하는 영토의 넓이나, 인구의 숫자나, 풍요로움이나 대귀족이 많은 엘랑키아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다. 가신으로 딸린 작위만 해도 자작이 셋, 남작이 아홉이다. 그런 넓은 영토와 힘을 바탕으로, 멀리 중북부 베르마유에 있는 왕실과 거의 관계하지 않으며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드 누아 가문과는 선대 때부터 잘 지내고 계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 아니겠소. 아버님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셨으나, 트랑카벨을 중심으로 한 이단의 군세에 합류하였으니. 왕명에 의해 역적이 된 자를 치려 하는 데 문제라도 있소?”

“아아, 아닙니다. 오히려 왕명을 충직하게 지키려 하시는 모습에 감탄을 금하기 어렵군요.”

“드 레뮤즈는 멀리 남쪽 변경을 지키며 언제나 충성을 바쳐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오. 영광스러운 국왕 폐하의 군대가 라솔 왕국에 패배하던 순간에도 말이오.”

선대 국왕이 도발한 라솔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이스키비르 강 너머의 영토를 전쟁배상금으로 내주면서 손해를 본 것은 드 누아 뿐은 아니었다. 전체 영토가 훨씬 넓어 티가 덜 났을 뿐이지 드 레뮤즈 백작가도 적지 않은 영토를 뜯겼다.

“백작께서도 아시겠지만, 모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한 사실이고··· 그래서 드 레뮤즈는 익숙한 전장에서 싸우려 하는 것이오. 물론 병량 수송과 같은 지원 업무는 성실히 수행하도록 하겠소이다.”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멀리 남쪽에서 전쟁해야 하는 입장이라, 솔직히 걱정됐습니다.”

“뭐, 엘랑키아 최대의 곡창인 브와이유에서 블랑독까지 멀어야 얼마나 멀다고···.”

에티엔은 조금 고민하는 것 같았으나, 더 이상 설득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언뜻 보면 라몽 백작의 주장이 이치에서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싫다는 군대를 억지로 끌고 와 보아야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자 그럼, 드 레뮤즈 백작가는 어느 정도 규모의 병력을 소집하셨습니까?”

“본가와 가신들의 병력을 포함해 약 7천이오. 현재로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하오만.”

“7천이나··· 역시 엘랑키아 8대 귀족 중 필두이신 드 레뮤즈 답군요.”

진심으로 에티엔은 감탄했다. 백작령 하나가 7천이라는 병력을 동원하는 것도 대단한 숫자이지만, 심지어 이는 상당한 여력을 남긴 숫자이다. 아마 이듬해 농업 생산량에 지장을 줄 정도 짜내기 동원에 들어간다면 1만을 훌쩍 넘는 병력도 동원할 수 있으리라 예상된다. 역시 드 레뮤즈 백작가는 트랑카벨과의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력이었다.

...하물며, 혹시라도 드 레뮤즈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결과가 된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엘랑키아 남부와 북부는 사이가 썩 좋지 않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냥 서로 떨어지게 놓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라몽 백작님. 드 레뮤즈 백작군의 건투를 기원하겠습니다. 저는 나머지 성전군을 이끌고 출전하도록 하지요. 각자의 전장에서 전공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오, 에티엔 공작. 귀군의 활약을 기대하겠소이다.”

두 사람의 회담은 그렇게 끝났다. 에티엔 공작도, 라몽 백작도, 서로에게서 나름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기는 했다. 서로가 보는 방향이나,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은 서로가 인지하고 있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일단 지금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지만.

###

“어이, 조심해! 좀 더 오른쪽으로!”

“거기, 거기에 내리면 돼.”

흙과 돌을 잔뜩 실은 마차가 도착하자, 남자들이 삽으로 퍼 내리기 시작한다. 언뜻 보면 평범한 공사 현장이지만, 특이한 점은 작업하는 남자들이 평범한 인부가 아니라 군인들이라는 점이다.

“휴우, 잠깐 쉬자.”

“예, 소 자작님.”

라마엘 드 레도쿠르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았다. 아직 날씨는 서늘하지만, 흙과 돌, 나무와 풀더미를 옮기는 중노동에 땀이 났다. 다행히 슬슬 고된 노동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늪지대로 흘러드는 수로의 방향을 틀어 물을 최대한 뺀 후, 나무 장대로 말라가는 진흙 바닥의 깊이를 잰다. 그리고 흙과 돌로 늪지대를 채우고 단단하게 다진다. 현재 그들이 하는 작업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천 명이 넘는 장정들이 달라붙어 하다 보니 순식간이다.

늪지대에 어지럽게 자란, 말라서 땔감으로 쓰는 것 외에는 상품 가치가 없어 보이는 나무와 축축한 늪지대로 가득했던 지역이 서서히 단단하게 땅을 디딜 수 있는 평지가 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움직이기 어려운 늪지대였건만, 현재는 대군이 기동하기에 모자람 없는 든든한 땅이다.

레도쿠르 자작가의 후계자인 라마엘 드 레도쿠르는 얼마 전, 400명의 가병들을 이끌고 드 레뮤즈 영지군에 합류했다. 아직 소집 기한이 되려면 한참 남았지만 ‘영주님의 소집령에 잠시도 늦을 수 없다, 선발대를 이끌고 먼저 가 레도쿠르 가문은 언제나 레뮤즈를 섬기고 있음을 보여드려라!’라는 아버지의 엄명에 서둘러 달려온 것이다. 레도쿠르 가문은 몇 년 전에 심각한 들불로 인해 수입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위 군주인 드 레뮤즈 백작가의 지원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적이 있는지라, 유난히 충성심이 강한 편이었다.

다만 레뮤즈 성에 도착하자,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반응은 ‘뭐 하러 이렇게 일찍 왔냐’였다. 겉으로야 충성심을 칭찬해줬긴 하지만 말이다. 출전의 각오를 다지고 왔거늘, 너무나 평화로운 레뮤즈 성 주변에서 시간을 죽이기도 뭣해서 임무를 자청했다. 그랬더니 백작가의 선발대와 함께 ‘늪지대 진격로 개척’ 임무에 투입되었다.

왕가의 역적이자 이단인 트랑카벨 가문과, 거기 가세한 드 누아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진격로를 만드는 것은 좋았다. 분명, 상대가 예상하지 못하는 루트를 통한 공세는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고향에서 아버지에게 배운 전술에서도 이런 점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위화감이 드는 점이 있다.

아무리 대군의 기동로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해도 이렇게나 광범위한 영역을 개척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었다. 물론 이번이 첫 출전인 햇병아리인 자신보다 라몽 백작이 전술 전략에 대해서는 잘 알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마치 늪지대 전체를 메워 버리려는 기세이다. 공격로가 될 특정 지점만 작업해도, 아니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 누아 백작령까지는 꽤 먼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에 라몽 백작을 만나게 되면 한번 물어보고, 자신의 의견을 건의해야 하지 않···.

“저기 마차가 옵니다! 모두 여섯 대!”

“자, 휴식 끝! 또 한 번 힘내자고?”

“알겠습니다!”

또 일거리가 온다. 우선은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처리하고 보자. 우선은 저쪽에서 고생하는 가신들을 도와주러 가야겠다. 드 레도쿠르 가문의 후계자인 라마엘 소 자작은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