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요새 도시 벨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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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용 드 말리크는 두방망이질하는 심장을 억누르며 의연히 서 있기 위해서 노력했다. 정말 많은 감정이 그의 심장을 통과해 지나가고 있었다.
뿌듯함.
트랑카벨 전군의 최선두에서 적과 싸우고 피난민들을 구해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만약, 제8 벨모제 기병 연대, 제7 중대의 활약이 없었다면 300명이 넘는 무고한 피난민들은 창고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가 쓰고 있는, 올리브 잎으로 엮어낸 관을 선물한 것은 그가 다브농 방앗간에서 발견해서 구해낸 어린아이이다. 그 아이 이외에도, 대부분이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가 대부분인 피난민들이 제7 중대를 찾아 감사를 전할 때 가슴 벅찬 뿌듯함을 느꼈다.
슬픔.
사실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할 이는 따로 있었다. 그웬넬 드 리스바쥬 중대장. 용기병 중대를 지휘해 몇 배나 되는 적에 맞서 용맹하게 싸우던 그웬넬은 결국 전투 중에 숨을 거두었다. 지금도 마치 자는 듯이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던 최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끄러움.
다브농 방앗간 전투에서의 전공을 인정 받아 그웬넬의 뒤를 이어 중대장으로 임명받고, 트랑카벨 쌍엽장을 수여 받았다. 단순히 제7 중대의 일원으로 싸웠다는 것 뿐 아니다. 그웬넬 드 리스바쥬 중대장이 중상을 입은 후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며 여러 차례나 적과 직접 검을 부딪치고 싸워 격퇴한 전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수천 명이나 되는 동료들이나 민간인들 사이에 대표로 나가 상을 받는 것은 역시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로용 드 말리크 남작님. 당신의 용맹한 싸움 덕에, 우리 블랑독 연맹군이 면목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블랑독 연맹의 맹주인 트랑카벨 가문의 일원으로서, 남작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행사의 마지막에, 아쥬흐 트랑카벨과 악수했을 때는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뭐라고 대답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자네가 정말 자랑스럽네. 아니, 자네라면 해낼 줄 알았지.”
드물게도 미소를 지으며 자기 양 팔을 붙잡고 거칠게 흔드는 옛 친구, 로베르 드 나뵈프를 보며 그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일찌감치 트랑카벨 영지군에 합류하여 어느새 연대장까지 되었던 친구. 영민들을 이끌고 피난하던 길에 만났던 일이 생각난다.
“자네가 부럽네. 정말 부러워.”
그렇게 말하는 로베르의 눈이 단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석같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름대로 명예욕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연대장이 아니던가! 어째서 자신을 부러워하는지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행사는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축하 행사라기보다는, 오랜 전쟁 준비로 지쳐있는 주민들을 위한 볼거리 제공 복지에 가까웠다. 또한 힘들게 블랑독을 가로질러 벨모제에 도착한 피난민들을 위로하는 의미도 있었고 말이다. 대부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향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는 시대에, 블랑독 북부에서 벨모제에 이르는 피난길은 많은 이들에게 일생일대의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일부 공을 세운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의 장병들에게 특식이 주어지고 훈장과 약간의 상금을 주기는 했다. 그러나 카르카냑에서 했던 대대적인 개선식과 비슷한 행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확실히 효과는 있는 것 같다. 행사에 참여한 군인들도, 이들을 지켜보는 주민들 누구에게서도 그늘을 볼 수 없다. 이들은 앞으로 전쟁이 격화되면 힘든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승리하리라는 것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대로 돌아와, 타브농의 혈전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다. 오늘은 상금으로 중대원들 저녁 회식시켜야겠다고 생각한다.
문득 피난길에 같은 날, 카르카냑에 도착해서 모병소에도 함께 갔던 덩치 고프릭이 생각난다. 곰처럼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이처럼 순박하던 친구. 잘 지내고 있으려나. 워낙에 성실하고 힘이 좋은 친구이니 어느 부대에 가서도 사랑받으며 잘 지내고 있으리라.
재산도 권력도 없는 시골 귀족 막내아들로 태어나 세상 무서운줄 모르던 자신도, 어느새 이 전장에 적응해서 중대장이 되지 않았던가. 고프릭은 보기보다 의지도 강한 친구이니 분명 자신의 역할을 다하리라.
부디 무사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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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지나니 뤼나메르 교차로에서의 치열했던 전투에서 얻어낸 성과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투가 끝난 직후에야 ‘아니 뭐 얻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들 열심히 싸웠지? 이게 양측 합쳐서 5천이 넘는 병력이 싸울 일이었나?’라는 현자 타임 비슷한 것이 닥쳐왔었다.
하지만 다브농 방앗간 전투에 이어서 두 차례의 전투 모두가 형태야 어떻든 피난민들을 지키는 지연전에 가까웠고, 나름 치열했으며 결과적으로 승리까지 했다는 사실은 어떤 파발보다도 빠른 소문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항상 고맙게도 협력해주는 친구들이 새로운 소식을 가져다주었네요. 이번에는 좋은 소식들이네요.”
“상인 네트워크의 정보인가요?”
“흐음··· 상인 네트워크라니, 뭔가요? 마치 처음부터 정보 목적으로 뭔가를 꾸몄다는 느낌이잖아요. 저희 친구들은 그냥 평소처럼 활동하는데, 정보라는 상품을 추가로 취급할 뿐이라구요.”
나는 또 말실수를 했나 싶었지만, 벨모제에서 오랜만에 만난 아쥬흐는 요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인다. 오늘도 기분이 좋은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무척 친절하다.
“블랑독 북부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전투 결과가 주변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고 해요.”
“허어, 그렇군요.”
“예상하셨겠지만, 블랑독 연맹은 더욱 단단해졌어요. 새로이 참가를 원하는 지방 귀족들도 늘어났고요. 아무래도···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네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겼고, 적은 패배했다. 하지만 적의 초기 공세, 즉 포르망제 성의 함락에서 성전군은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말았다.
아무리 힘이 정의이고 사람 목숨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는 전쟁통이라고 해도 선이라는 것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수비군도 아니고 민간인들을 2천 명 이상이나 학살해 버렸으니, 인명이 경시되는 시대라고 해도 보통 일은 아니지. 아마 적당히 중립을 취하려고 했던 영주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나로서야 이렇게 서로 뒤 없이 치열하게 섬멸전으로 들어가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지만.
“그리고 블랑독 ‘외부’로도 같은 소식이 퍼졌어요. 무슨 소식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흐음··· 글쎄요?”
“엘랑키아 전역에, 사실 이 전쟁이 정의로운 성전이 아닌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론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해요.”
“아···.”
이건 미처 생각을 못했네.
하긴 귀족 양반들, 역겹도록 선택적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명예에 죽고 사는 인간들이지. 자기네 이득을 위해서 희생자가 나오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인간들이 많겠지만, 도시나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전쟁에 나서는 것은 일단 거부감이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땅 먹고 돈 벌겠다고 하는 게 전쟁인데, 부동산은 다 파괴하고 주민도 죽여버리면 그거 전쟁 뭐 하려 하냐!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지.
그리고 아직 가슴 속에는 뜨거운 종교적 열정이 타오르는 놈들도 있을 텐데··· 이를테면 베르마유 대성전에서 성전 참여에 이름 적고 연애하러 떠났다던 젊은 귀족들이라던가 말이다. 얘들은 더더욱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과 엮이는 것을 꺼리겠지.
“한가지는 기대할 만하네요.”
“어떤 점이죠?”
“엘랑키아 국왕이 보낸 귀족 중심의 성전군과, 법황이 보낸 광신도와 용병 중심의 성전군이 서로 협력하지 못할 겁니다.”
“호오···.”
역시 아쥬흐는 기뻐 보인다. 명석한 그녀가 여기까지 생각을 못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짐작을 나에게서도 확인하니까 기분이 좋은 모양이지. 사실 나도 긴가민가할 때 누가 내 생각을 대신 말해주면 엄청 기분 좋거든.
“원래 고매하신 귀족 나으리들과, 탐욕스러운 용병 나부랭이들은 물과 기름처럼 잘 어울리지 못하거든요.”
“우리는 천박한 귀족 나부랭이와, 고매하신 용병 나으리라서 잘 어울리나 보네요?”
“앗, 그런 의미는 아니구요···.”
“쿡쿡, 미안해요, 콘도티에레 에트. 그런데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딴지 걸고 싶어지잖아요?”
“하하···.”
뭐, 아쥬흐가 즐거워하면 된 거지.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성전 참여를 서원하고, 주신에게 봉헌하는 책에게 이름까지 썼으니 물리지는 못하겠죠. 뭣보다 그걸로 동네방네 자랑도 했을 테고 연애까지 했다니까요. 그래도 법황 측의 성전군과는 거리를 두게 될 거라 예상합니다.”
“전에도 국왕과 법황이 협력하긴 힘들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는 했었네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서로 협력할 구석은 없어지고 있네요. 이거 이대로 가면 서로 원수가 될지도요?”
지금도 국왕군은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법황이 보낸 성전군만 블랑독 북방에서 분탕질 치다가 두들겨 맞은 상황이 아닌가. 이미 불협화음이 선명하게 들리고 있는 거지. 애초에 블랑독 이단 토벌이 법황군에게는 본 목적이고, 국왕군에게는 구실이니까.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들을... 우리가 도와 줄 방법이 있나 모르겠어요."
"계획이 있으십니까?"
"후후, 찾아볼게요."
아쥬흐의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차가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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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우아아아악!”
그 시각, 멀리 북쪽.
타비뇽 부근의 성전군 숙영지의 어딘가에서는 도저히 인간의 것으로는 들리지 않은 고함이 울리고 있었다.
“잡아! 거기 잡아!”
“뼈 뒤틀린다! 뒤틀린다고! 어깨 고정해!”
“원장님! 저희입니다, 정신 차리세요!”
근육질 거한의 반쯤 벌거벗은 몸이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거한의 몸은 상처투성이이다. 피부에는 멀쩡한 부분이 그렇지 않은 부분보다 적다. 불에 덴 상처, 찢어져 꿰맨 상처, 뭉개져서 뒤틀린 상처. 하지만 그 오래된 흉터 위로 새로운 상처가 수두룩하다. 마치, 피부 위에 공간이 없어 흉터 위에 새로운 상처가 난 모양이다. 어떻게든 상처 부위를 막기 위해 감겨있던 붕대는 몸부림치는 바람에 반 이상이 벗겨져 있다.
“네부카디 원장님! 원장님!”
수도복을 입은 남자들이 결사적으로 거한을 침대에 고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침대가 부서져라 삐거덕거리고, 덩치가 만만치 않은 수도사들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몸부림이 심해질수록, 그나마 아물어가던 상처에서 새롭게 피가 흘러나온다.
“크헉, 커억!”
“수도원장님 제발···.”
그들의 고통은 쉬이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섯 명이 수도사들이 네부카디의 몸을 눌러 고정하는 동안, 두 명의 수도사가 서둘러 상처를 치료한다.
“끄으으윽! 크아아아아그아악!”
“왼쪽 어깨 잡아!”
상처투성이 몸에 난 상처들은 가벼운 생채기도 있기는 하지만, 문외한이 보아도 한눈에 중상임을 알 수 있는 상처들이 가득하다.
갈비뼈 바로 아래를 관통한 것으로 보이는 총알 자국.
손등을 거의 절반 정도 잘라낼 정도로 깊게 남은 칼자국.
피부 여기저기에 기이한 각도로 불쑥불쑥 튀어나온 뼛조각들과, 내출혈로 인해 시퍼렇게 변하고 부어오른 신체 일부들은 심각한 복합 골절이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정말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상처이다.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수도사의 몸 주변에서 하얀빛이 피어오른다. 분명한 기프트 사용 반응이다. 귀하디귀한 것으로 알려진 치료 계열 기프티드, 스피리티가 둘이나 붙어있다는 방증이다.
4대 원소와 자연현상을 다루는 엘리멘탈리 Elementalii.
목재와 금속, 직물 등 재료와 화학 작용을 다루는 아키텍티 Architectii.
인간의 영혼과 신체, 빛과 그림자를 다루는 스피리티 Spiritii.
아마 스피리티들이 붙어서 끊임없이 기프트를 사용한 치료를 하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가 분명하다.
“그오오옥, 끄아아아악!”
“잡아, 잡으라고!”
팔이 기괴한 각도로 뒤틀리며 우드득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옆구리의 상처를 치료하던 스피리티가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찼다. 간신히 맞춰 넣었던 뼈가 다시 부러지고 상처가 벌어졌다. 이렇게 몸부림쳐서야 어떤 치료를 해도 의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상처의 통증 때문에 몸부림치는 것으로 생각했다. 모두가 보자마자 그렇게 생각할 만큼 상처가 위중하고 고통스러워 보였으니까.
그 때문에 의료를 담당한 수도사들은 마약성 진통제를 달여 그들이 존경하는 수도원장의 정신을 잠시 신체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얌전히 잠들어 있는 사이에 전신을 고쳐내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가장 큰 실수였다. 미약하나마 남아있던 이성은, 고통에 괴로워하며 신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닌, 오히려 억지로 움직이려 하는 신체를 억누르는 작용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통 작용으로 이성이 완전히 사라지자, 네부카디는 말 그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자기 몸을 상처 입혀가면서 말이다.
"기야아아아악!"
기괴한 고함은 쉬지 않고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