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3. 뤼나메르 교차로
라모리 스텐던은 고개를 흔들어 판단을 흐리는 사소한 생각들을 떨쳐버린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지휘관으로서의 라모리는 감정적인 인간은 아니다. 특히 희노애락과 같은 일반적인 감정은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호승심만은 누구보다 강하다. 전쟁은 딱히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고, 용병이라는 직업상 일로 하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취미생활을 한다고 해야 할지. 강하고 특이해 보이는 적이 있다면 싸워보고 싶어 하는 점이다.
망상을 떨쳐내고 직면한 사실, 신뢰하는 부하인 울터 콜린스가 보낸 쪽지를 다시 살핀다. 네 항목의 깨알 같은 글씨가 꼼꼼한 주인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이것만으로도 라모리는 전장의 상황을 절반은 이해할 수 있었다.
- 적 보병은 블랑독 북부의 귀족군과 농민병을 중심으로, 에크테인 산맥의 광부 및 지빌링엔 용병으로 이루어짐
결국 북방의 떨거지들이 다 모였다는 뜻이다. 네부카디 수도원장에게 내어 준 선발대 병력 역시 떨거지라는 점에서는 막상막하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주변에서는 가장 큰 도시라는 포르망제 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었다.
그런데 또 약탈하고 학살하고··· 보통 미친놈들이 아니라는 생각이야 들었지만 뭐, 그로 인해 발생한 혼란이 성전군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최소한 이제 안 떠난 놈들은 협조적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겠지.
- 적 기병은 트랑카벨 가문의 기병으로, 약 1천 명 규모로 다수의 화기로 무장했음에 유의, 특히 8문의 대포를 보유
블랑독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라는 트랑카벨이 부유한 상인 가문이라는 사실은 파악했다. 그 부유함을 바탕으로 상당한 병력을 편성했다고 하던데··· 화기로 무장한 대군이라면 좀 껄끄럽긴 하다. 과거 주디칼리에서 부유한 상업 도시 군대를 상대했던 일이 기억난다. 기병대에 8문의 대포라니, 적은 제정신인가. 어지간히도 화력에 집착하는 지휘관인 모양이지.
그나저나 기병뿐이라면, 아직 보병은 도착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트랑카벨 가문의 영역 밖으로는 기병만 파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 추가로 좀 더 작은 규모의 적 기병이 우회한 것으로 보임, 네부카디 수도원장의 병력과 교전
방금 떨거지 선발대를 격파한 수백 기 정도의 기병대를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 현재 아군, 본인의 기병과 자프론의 보병은 서쪽으로 퇴각 중, 병력 손해는 약 2할
손해가 크지 않다는 것은 다행이다. 2할이라니··· 아직 전투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니까 다행이라 해야 할지. 당연히 이길 것으로 생각하고 심복을 파견한 것인데 이렇게 되니 조금 아쉽기는 하다.
이전에 받았던 보고와 종합하자면···.
그가 보냈던 병력은 완벽히 패배했다. 네부카디의 선발대는 완전히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으며, 신뢰하는 울터와 자프론의 병력은 약 2할의 피해를 당하고 전장 이탈 중.
언덕 위의 적군은 기세는 대단하다만 아무리 봐도 초라해 보인다. 북부의 귀족군? 이미 한 번 고향을 잃고 도망친 패잔병들이 아닌가? 지빌링엔 용병? 이들이 왜 여기 있는지는 몰라도 한물간 퇴물들에 숫자도 뻔하겠지. 광부와 농민병들은···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네부카디의 선발대가 아무리 뜨내기라고 해도 병력은 2~3배는 되었을 터, 이렇게까지 박살이 난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신뢰하는 직속 부대를 두 개 파견한 것도 어차피 이길 전투라면 경험도 쌓아주고 만약의 변수도 제거할 의도였지, 설마 패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언덕 위의 적군에게 뭔가 특별한 어드밴티지가 있다는 이야기겠다.
생각보다 강력한 정예군?
훌륭한 방어용 야전 축성?
전장을 조율하는 유능한 지휘관?
지금 상황으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직접 군을 맞대본 울터나 자프론이라면 적절한 의견을 줄 수 있겠다만.
아니면··· 지금 직접 언덕을 공격해본다면 어떨까?
라모리는 호승심 가득한 눈으로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적장이 모습을 드러내 인사를 할 리는 없었다. 애초에 얼굴도 모르는데 적장이 나타난들 알아볼 수도 없을 테고.
전투라는 것은 대화 이상으로 깊은 교류나 다름없다. 한 번 부대를 부딪쳐 보면, 상대의 특성을 알 수 있다. 그건 부대 구석구석까지 통제가 되는 훌륭한 지휘관일수록 명확하고.
게다가 군을 이끄는 사령관으로서 라모리 스텐던은 그걸 이해하고 분석하여 약점을 파내는 데 강점이 있었다. 반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면서, 같은 상대에게 절대로 두 번 지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이다. 한 번 싸웠던 상대는 완벽하게 파악한다. 그게 그의 강점이다.
아, 어쩌면 이미 전장에서 만난 용병 지휘관일 수도 있겠다. 이런 변경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뛰어난 지휘관이 탄생했다기보다는, 어디서 외부 지휘관을 초빙했을 가능성이 크겠지. 실제로 그런 소문도 있었고.
“지원군이 도착했다!”
“지원군이 도착했어! 와아아아아!”
갑자기 언덕 위 적군의 기세가 오른다.
“허어···.”
지원군 도착이라니, 멋진 타이밍이구나. 이제는 선택지가 없다. 그나마 승리의 실마리라면 언덕 위의 적군이 거듭된 전투에 시달려 지쳐버린 상황이라는 것이었는데···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지원군이 도착했다면 힘들겠다. 적도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라며 악착같이 싸울 테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만약에라도 이미 언덕에 공격을 시작했는데 지원군이 도착했으면 꼴이 우스워질 뻔했다. 후퇴도 못 하고 이득도 없는 싸움에 빠져들 뻔하지 않았나. 온 힘을 다해 싸운다면 지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귀중한 직속 부대를 허무하게 잃어버리는 것은 사절이다.
애초에 이기든 지든 아무 의미도 없는 조우전이다. 쓸데없이 규모만 컸다. 어쩌다 보니 휘하 병력을 파견하고, 자신까지 직접 오게 되었지만. 이게 다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이 하도 난리를 쳐서 그랬지. 아, 그러고 보니 네부카디라는 굉장한 외모를 가진 수도원장은 어디에 있는 거지? 혹시 죽었다면 또 속이 쓰린데 말이다.
“가능한 만큼 병력을 수습하고, 네부카디 수도원장의 소재를 확인하라.”
“예, 사령관!”
“자프론과 울터의 안전이 확인되면 타비뇽으로 돌아간다. 일단 여기서 대기한다. 긴장은 풀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라모리는 마지막으로, 혹시라도 적장이 승리에 취해 선제공격을 가해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겠지. 불리한 전투를 여기까지 끌어온, 용의주도한 인물이니까.
양측 지휘관이 더 이상의 교전은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치열했던 뤼나메르 교차로의 전투가 마무리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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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이쪽이야!”
예정보다 조금 빨리, 부상병 치료를 시작한다. 물론 최전방의 병력은 여전히 철통경계를 하는 와중이다. 일부 병력을 차출해서 부상병들을 옮긴다.
전쟁터에서의 부상은 자상이나 골절이 많다. 이런 상처는 최대한 빨리 기초적인 조처를 해주면 목숨을 잃거나 신체 일부를 잃어버리는 문제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전방 배치는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적이 공격해오지는 않을까요?”
로이작 드 포르망제가 걱정스럽다는 듯 묻는다. 포르망제 가문의 하급 가신들과 민병들이 앞장서서 부상병들을 옮기고 치료하고 있었기에 그가 감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적장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네요. 이제 얻을 게 없으니까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을 점령한 것은 저들이 아닙니까.”
“....”
“압니다. 원통하고, 속이 타들어 가시겠죠. 하지만 지금은 냉정하게 다음 수를 계산할 때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성을 되찾는 그때 까지, 함께 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콘도티에레.”
로이작이나 드 포르망제 가문의 다른 가신들이 결사항전을 주장할까 봐 다소 걱정이 됐었다. 전투에서 이기든 지든, 살아남은 이들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는 조율해야 한다. 그래야 패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승리의 이득을 극대화할 수 있다. 왜, ‘이기지 말아야 할 전투에서 이기는 바람에 전쟁에서 졌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닌가? 아무튼 뭐 비슷한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작은 남작 가문의 힘은 객관적으로 보면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 하물며 영토까지 잃은 지금 남은 병력은 여기 남은 소수가 전부, 앞으로 병력 유지조차 어려운 상황이겠지.
하지만 이들은 성전군의 침입에 가문의 명운을 걸고 맞섰던 최초의 가문이다. 고향을 잃은 비슷한 처지의 많은 블랑독 주민들에게 공감대를 줄 수 있는 가문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계산적으로 보이지만, 그래서 로이작 드 포르망제는 앞으로의 전쟁에 필요한 인물이다.
이 전쟁을 계속하고 승리하려면 블랑독 내부의 결속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순히 군사력으로 충돌해 하루아침에 승패가 갈리는 형태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어라? 적이 후퇴해요, 콘도티에레!”
“흠, 그렇겠지. 여기서 더 싸워서 얻을 게 없을 테니까.”
“전부 콘도티에레의 생각대로 되었네요!”
적들이 후퇴한다. 전투에서 싸웠던 보병과 기병 연대가 우선 북쪽으로 퇴각하고, 새로 도착했던 지원군들이 후위를 지키는 듯 잠시 머물다가 차례대로 퇴각한다. 어휴, 다행이다. 겉으로는 쿨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아 진짜, 여기서 더 싸우면 안 돼. 화약도 간당간당하고, 병사들의 체력도 한계니까. 그리고··· 내 신경도 이제 한계야··· 아아, 갑자기 배가 고프다. 머리를 너무 썼어.
“아. 첼레스티나, 열심히 행군해오고 있는 드 누아 북부 연대에는 미안하지만, 전령을 보내서 천천히 오라고 해. 전투가 끝났으니까.”
“네에, 전령! 드 누아 북부 연대에게, 전투가 끝났으니 정상 행군 속도로 돌아갈 것!”
“응, 좋아. 그리고 ‘드 누아 군의 등장에 적이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했다, 내가 감사하더라’라고 추가해줘.”
“네에, 알았어요 콘도티에레!”
내가 보기에 적 지원군의 숫자는 상당했고, 이미 전장에 들어와 있는 용병들과 비슷한 수준의 병력이라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감사하다는 말은 빈말이 전혀 아니다. 정말로 그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기에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했을 것이다. 정말 오늘 불과 몇십 분 차이로 전황이 얼마나 뒤집힌 것인지, 정신이 다 없네.
우선 전방 지휘관들인 로이작 드 포르망제와 에르만 슈피리, 쾨트 발도를 불러 모았다. 힘든 전투였다. 잠시라도 휴식을 줘야 하니까. 전투가 끝난 것으로 판단하고 휴식을 명령하자 다들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렇게 힘차 보였지만 다들 한계에 몰려 있었다.
오늘의 승리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무엇을 얻었을까. 일단 블랑독 북부에서 적의 진격을 멈추게 했고, 선두에서 분탕질을 치던 떨거지들 숫자를 대폭 줄인 것 정도? 이렇게까지 힘들게 싸웠어야 했던 전투인지도 모르겠고··· 어찌어찌 서로 지원군들이 도착하고 맞물리다 보니 전투가 규모도 커지고 격렬해졌었네.
“잠시 휴식하고, 나머지 병력과 합류하면 남쪽으로 귀환합니다. 아, 몇몇 분들께는 귀환은 아니겠네요. 하지만 함께 가서 보급하고 병력도 재정비해야 하니까요. 피난민들도 그렇고요.”
“어, 어디로 갑니까?”
“로데브 북쪽에 트랑카벨 가문의 거점은 한 곳이 있습니다.”
로데브 강 북쪽의 유일한 트랑카벨 가문 소속의 자작령. 강력한 요새이자, 향후 블랑독에서 벌일 군사작전을 위한 대량의 군수물자가 저장된 보급기지이다.
“벨모제로 갑니다.”
오랜만에 톨마르 마슈레 영감님을 만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