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90화 (90/556)

17-10. 뤼나메르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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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확인한 것은, 적군 지휘관들이 나름대로 경험이 많고 똑똑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언덕을 올라와 왼편 언덕을 점령했던 적 보병 연대는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그대로 언덕을 통과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언덕을 포기하고 물러선 마브리엘의 제8 기병 연대를 ‘추격’하는 것이다. 잘도 까다로운 선택지를 골랐구나.

당연히 보병으로 기병을 추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유리하면 기병이 싸워주지 않고, 불리하면 더더욱 불리해지는 포지션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는다. 그렇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제8 기병 연대를 주전장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적 보병 역시 묶어두니까 문제가 없지 않냐 싶을 수도 있지만··· 이러면 적 기병이 프리가 된다!

자, 이제부터 잘해야 한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절망적인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자칫 전열 무너지면 다 죽는다!

아군 보병 대열의 좌측 끝은 전투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빌링엔 연대가 지키고 있다. 이들은 용감하고 노련한 용병들이기는 하지만 숫자가 많지 않았기에 부담이 크다. 농민병 예비대를 최대한 배정했지만, 측면으로 적 기병들이 달려 올라오자 상황이 좋지 않아졌다. 지빌링엔 용병들이 보유한 총병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적 기병들이 대담하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나마 측면은 경사가 가팔라 다수의 기병이 한꺼번에 접근하기 어려워 다행이다.

“콘도티에레 대장! 아군이 위험해 보이는데 돕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전장에는 문외한인, 광부 대표 쾨트 발도의 눈에도 전장이 불리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광부들은 최후의 예비대이다. 무엇보다, 다수의 기병을 상대해야 하는 좌측 전선에는 무거운 양손 무기를 주로 다루는 무장 광부 부대의 힘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버틸 만합니다. 동료들을 믿고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몸이 달아있던 무장 광부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전방에서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후방에서 대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 불안하게도 느껴지겠지. 하나같이 어깨가 떡 벌어진 덩치들이, 어설프게나마 노획한 갑옷들을 껴입고, 온갖 흉악한 양손 무기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은 늠름해 보이기도 한다.

“전투 시작되기 직전에 땀 흘려 고생하신 게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때를 기다리지요.”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대장. 필요하시면 바로 말해주시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서는 내가 가진 최강의 근접 충격 보병, 숨겨진 카드가 바로 이들이다. 안 그래도 조만간 등장할 기회가 생기겠지.

“콘도티에레! 후방 후방! 우회하는 적 기병입니다! 비탈에 가려서 이제야 봤어요··· 죄송해요!”

“드디어 왔나!”

적 기병의 주력이 지빌링엔 연대와 혈투를 벌이는 동안, 별동대를 파견한 것이다. 당연하지, 나라도 그랬겠다. 바위가 뒤섞여 접근하기 어려운 측후방 벼랑을 우회해서, 비교적 평탄한 후방으로 접근한다. 기병은 100? 150? 숫자는 많지 않고 무장도 가벼운 편이다. 당연히 중무장한 기병들은 지빌링엔 창병들과 싸워야 하는 전면에 묶여 있겠지! 비교적 가벼운 병력으로 찌르는 것은 당연하다.

“준비! 전투 준비다! 광부 놈들아, 맛을 보여 줄 때가 왔다!”

“또 한 번 쪼개버리자고!”

광부들이 좌우로 늘어선다. 숫자야 광부 부대가 더 많지만 적이 기병이라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우리 후방에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항상 말하지만, 적을 후방에 두고도 강한 군대는 없다.

“이야아아아!”

“덤벼라아!”

“말이랑 같이 피떡을 만들어주마!”

광부들이 기세를 올리며 도발하자, 적 기병은 잠시 멈칫하는 것 같다. 그야, 우회 공격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우회해서 언덕 위로 올라왔더니 험상궂은 덩치들이 무서워 보이는 무기 들고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경기병 부대가 통상적으로 겪을 법한 상황은 아니겠지.

“돌격!”

“간다!”

“와아아아!”

적 기병들은 그대로 대열을 좌우로 벌려서더니 달려들기 시작했다. 광부들 역시 기세는 조금도 밀리지 않고, 마주 고함을 질러댄다. 아마도 적들은 광부들의 덩치나 기세를 보더니 당황했지만, 대기병용으로는 영 애매한 무기들을 보고 싸울 만 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기병들이 속도를 올린다. 권총과 기병도. 항상 트랑카벨 기병대만 봐서 잊고 있었지만, 가볍게 무장한 기병대의 모범적인 무장이다. 권총이나 기병도를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온다. 광부들 역시 고함을 지르지만, 똘똘뭉친상태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병대 지휘관은 정면충돌을 각오한 것 같다. 무게가 날 쪽에 몰린 기병도를 치켜들며 돌진하는 방식은 북방식이다. 기병창만큼은 아니지만, 숙련된 기수의 첫 일격의 위력은 무섭다.

“으아아아아!”

“덤벼 새끼들아!”

양측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가까워진다. 똘똘 뭉쳐서 자신들을 보호하는 광부들.

그리고 상체를 굽히고 달려드는 경기병들.

서로 만나기 어려워 보이는 이질적인 병종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

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크아아악!”

선두를 달리던 기병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를 태우고 있던 말이 마치 누군가가 아래에서 확 잡아당긴 것처럼 땅속으로 꺼졌기 때문이다.

“으아악!”

“함정! 함정이다!”

“멈춰! 비열한 새끼들!”

재수 없는 선두들은 함정에 빠졌다.

급히 멈추는데 실수한 기병들 역시 떠밀리듯 함정에 떨어졌다.

요행히 멈추는 데 성공한 기병은 뒤따라오던 멈추는 데 실패한 동료가 밀치는 바람에 함정으로 빠져든다.

걸려들었다 이놈들!

“다 죽여!”

“가자! 광부들아!”

“우아아아아!”

준비한 함정은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1미터 정도 깊이의 도랑을 몇 개 파 놓았을 뿐. 그리고 그 위에 보급품을 포장했던 천을 덮어 살짝 흙으로 덮는다. 언덕 주변의 흙 색깔이 검은색에 가까워서 위장하기는 좋았다. 땅 파기 전문가들이 잔뜩 있어서 작업은 순식간에 끝났지만 파낸 흙을 티 안 나게 여기저기 뿌려서 숨기는 것이 오히려 큰일이었다.

적도 평소라면 이따위 어설픈 함정에 안 당할 거다. 이런 걸로 기병 대응이 가능했다면 비싼 돈을 들여 장창은 뭐 하러 만들고, 창병 밀집대형은 뭐 하러 훈련하겠나. 전투의 혼란 와중에 가파른 언덕 오르다 보니 지치고, 빨리 본대에 도움이 되어야 하니 마음은 급하고, 정면에 딱 상대하기 좋은 보병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낚인 것이겠지.

...솔직히 평범하게 참호 파서 적 기병의 기동이나 안정적인 돌격이나 막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성대하게 빠져 주다니··· 몰랐으면 맞아야지 뭐.

“흐아압!”

“컥!”

어디가 부러졌는지 말에서 굴러 떨어져서 똑바로 일어서지 못하던 적병의 뒤통수에 크게 휘두른 곡괭이가 명중하자 투구가 벗겨지지도 않았는 데 촤악 하고 검붉은 뇌수가 바닥에 퍼진다.

1미터의 도랑이라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뛰어들었다면 말의 다리는 무사하지 못할 테고, 위에 탄 기수도 마찬가지이다.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든 무장 광부들이 꼼짝 못 하는 기병들을 말 그대로 떡을 만든다.

“후퇴! 후퇴!”

철제 흉갑이나 가죽조끼 이상의 갑주를 입지 못하고 무장도 빈약한 경기병들이 돌격은커녕 더 많은 숫자의 광부들에게 역으로 돌격 당했으니 전투의 향방은 뻔하다. 적장은 재빨리 말머리를 돌린다. 똑똑한 행동이다. 여기서 더 시간 끌었으면 반도 못 건졌을 것이다.

이렇게 위협 하나가 또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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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군 기병 지휘관 울터 콜린스는 답답함으로 인해 미칠 것 같았다. 그나마 희망을 걸고 있던 우회 부대가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해왔다. 적의 문자 그대로의 ‘함정’에 빠졌다며 사죄하는 부하 장교에게는 화도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함정이라니, 아주 이번 전투는 서로 괴상한 짓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겨루는 대회 같았다.

그들과 마주하고 있는 적들은 지빌링엔 용병들이다. 무슨 곰이라나 늑대라나. 생각해보니 얼마 전 타비뇽 부근 성전군 숙영지 부근에서 초라한 몰골로 돌아다니던 모습을 봤던 것 같다. 아마 거기서 적당한 고용처를 찾지 못해서 남쪽으로 내려가 이단자들의 군대에 합류한 것 같은데···.

트렌드에 맞지 않게 근접전에 집착해 한물간 녀석들이라는 소문 정도는 들어 알고 있었다. 바로 이게 첫 위화감이다.

‘근접전에 집착해서 한물간’ 녀석들과 자신은 왜 하필 근접전으로 싸워야 하는지 말이다.

이 자식들은 정말 독했다. 마치 공포라는 것이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심지어 성전군의 광신도들보다 심하다. 왜냐하면 광신도들은 전장에서 처맞다 보면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거든. 그런데 이 새끼들은 진짜···.

그는 조금 전, 적 창병이 허벅지에 총을 맞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미 어깨에 총상이 하나 있었다.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던 놈은 쓰러지는 대신, 옆으로 비켜섰다. 후열에 있던 동료가 자기 자리를 채우자, 그제야 힘이 빠진 듯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게 또 끝이 아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서도, 무릎을 세우고 창을 기대 끝을 이쪽으로 향하고 노려본다.

이런 시발, 총에 맞았으면 제발 그냥 뒈지거나 후방으로 가서 치료받든지 하라고! 죄다 이런 새끼들이다 보니, 정말 목숨이 끊기지 않으면 지랄같이 버텨대서 하다못해 이쪽 총알이라도 낭비하게 하고 마는 것이다.

이건 슬슬 두렵게 느껴진다. 이러면 이긴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울터 휘하 병력의 희생도 커진다.

비록 용병이라지만, 목숨 걸어놓고 대가로 돈 받아서 벌어 먹고사는 직업이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각오 정도야 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이 전투가 그만큼 가치가 있는 전투인가? 그냥 영지를 잃은 변방 남작의 패잔병과 주변 떨거지들을 섬멸하려던 임무가 아니었나? 이건 계산이 맞지 않는다.

울터의 기병대는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이 보유한 핵심 기동부대 중 하나이다. 여기서 적과 함께 녹아내리면 안 된다. 이번 전쟁은 못 해도 1년은 갈 것이다, 라모리가 그랬었고 울터도 동의한다. 전쟁을 계속하려면 울터의 기병 연대도, 자프론의 보병 연대도 여기서 무익하게 갈려 사라질 수는 없었다. 죽는다면 좀 더 가치 있는 전장에서 죽어야 한다. 아니 그러고 싶다.

“울터 경에게 전령을 보내라.”

“예, 대장님.”

“내용은··· 아니, 문서가 필요하겠군.”

연대 참모 장교가 울터의 뜻을 받아 적는다. 울터의 고집불통 친구가 이 전령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합리적인 친구이니 울터의 뜻에 동의 하리라 생각된다.

“우측의 중대는 우선 퇴각한다!”

어차피 접근로가 좋지 않았다. 적 역시 방어구역을 최대한 연장하기 위해 억지로 싸우던 영역에서는 병력을 후퇴시킨다. 이제 불리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이대로 교전을 유지하되, 더 이상 적진을 붕괴시키거나 돌파를 목적으로 하는 무리한 공격은 하지 않는다. 천천히 물러설 때를 찾아야 한다. 이미 마음은 결정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전장에는 다른 아군도 있었다. 알려는 줘야지, 그래도 동료인데 버리고 갈 수는 없다.

“네부카디 수도원장에게도 전령을 보낸다.”

“옛, 대장님.”

“더 이상의 전투는 무용, 퇴각을 엄호하겠다.”

그 광신도···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죽을 때까지 남아 싸운다고 할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그러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령관 라모리의 ‘교전하여 적을 알아본다’라는 명령은 충분히 수행한 것 같다. 적의 세력은 크지 않으나 악에 받친 듯 끈질기며, 단기간에 패퇴시킬 수 없다. 남부의 트랑카벨 가문에서 파견한 군대는 상당히 잘 무장되어 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달려가는 전령의 뒷모습을 보면서, 병력을 얼마나 살려서 퇴각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적의 생각을 예상하지 못해 기습적인 산탄 사격받고 잃었던 부하들이 너무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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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 이변이 생겼다.

“첼레스티나, 적이 혹시 퇴각할 낌새가 있어?”

“네에··· 아니요, 없어요!”

“조금 전부터 압박이 좀 줄어든 것 같은데···.”

확실히 병력이 열세이고 전투가 치열하기는 하지만, 여력이 있냐고 묻는다면 전혀 없지는 않다. 가령 아까 우회해온 경기병들이 멋지게 함정에 빠져주지 않았더라도 급조 창병 부대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운도 따라주었고, 무장 광부들이 기병들도 잘 때려잡아 주었기에 전선은 안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조금 전, 확실하게 압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앗! 콘도티에레, 기병의 일부가 돌아가고 있어요!”

“지빌링엔 용병대의 방어선을 뚫지 못한 건가?”

“네에, 그런 가 봐요!”

“아무리 기병이라지만, 창병 상대로 오르막 공세는 무리긴 하지.”

무슨 장기 두듯 했던 괴상한 병력 배치의 연발 끝에, 보병은 기병을 추격하고, 기병은 고지대의 보병을 공격하는 결과가 되었다. 반드시 나쁜 선택이라고 할 수야 없겠지만···. 그냥 우리 병사들이 생각보다 잘 싸웠다고 해야겠지.

“어? 어어? 콘도티에레! 저기! 저기요!”

“응?”

“저 뒤편에 기병대가 오고 있어요!”

“기병? 어? 적 증원군인가!”

아 이러면 정말 나가린데. 설마 지금 공세를 약화한 적 기병은 증원이 도착할 것을 예상하였던 건가? 힘을 아꼈다가 공격하려고? 아니 저 위치에서 어떻게 알았지?

“엇!”

“네에?”

아···

아니다.

이겼다.

“첼레스티나, 잘 봐봐.”

“네에?”

“맨 앞에 깃발이 있지?”

“앗! 올리브 잎!”

“하핫, 이제 살았네! 우리!”

서둘러 달려오는 기병들은 아군이었다.

고착된 전장을 뒤집어 놓을 힘을 가진, 제31 정찰 연대. 로베르 드 나뵈프가 이끄는 부대다.

“뭐 하다 이렇게 늦었지! 첼레스티나, 너한테 길치가 옮은 것 아냐?”

“네에엣! 길치는 옮지 않는다구요! 애초에··· 옮는다면 항상 붙어있는 콘도티에레에게 먼저 옮았겠죠···.”

“자, 병사들에게 지원군 도착을 알려 줘. 힘껏 외치게 하면 더 좋고!”

“네에, 알리겠습니다, 콘도티에레!”

늦장꾸러기들이 드디어 등장한다. 아군에게 전해 줄 승리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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