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뤼나메르 교차로
###
“발사!”
타타타탕!
3열로 늘어선 트랑카벨 용기병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기자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고 납탄이 언덕 아래쪽으로 날아간다.
“우억!”
“큭! 맞았어···.”
“반격해! 반격!”
탕! 타탕!
언덕을 오르던 성전군 용병들이 우수수 쓰러진다. 대열을 교대하는 순차 사격으로 천천히 언덕을 오르던 성전군 총병들도 반격하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일제사격으로 가진 탄환을 모조리 쏴버린 용기병들이 재빨리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훨씬 빨리, 70미터 정도에서 발사하고 미련 없이 퇴각해 버린다.
퍼엉!
“흐익!”
“켁!”
포구의 각도를 최대한 낮춘 경야포가 불을 뿜으며 껑충 뛰었다. 포병들이 하마터면 뒤집힐 뻔한 포가를 허겁지겁 붙잡아 멈춘다. 한계까지 중량을 낮춰 만든 포신과 포가였기에 안정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발사하면 이런 꼴이 된다.
하지만 낮은 각도로 발사된 포탄은 확실한 역할을 했다. 모래 먼지를 뿌리며 언덕 중턱에 한 번 튕긴 포탄은 비스듬한 각도로 치솟으며 창병 두 명을 말 그대로 뚫고 지나가 버렸다. 재수 없게 목 쪽을 맞은 창병의 머리가 투구를 쓴 채로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비교적 운 좋은 동료들의 두려운 시선을 받으며 다시 떨어지는 창병의 머리에는 턱이 없었다.
일방적인 포격에 시달리는 성전군 용병들의 대부분은 이번이 첫 전투가 아니다. 상당수는 몇 번이나 적의 포격을 경험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억세게 운 좋은 자들이다.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교전 중에 포탄에 맞아 죽는 것은 천재지변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이다.
“형편 없구먼!”
“더 쏴 봐라! 씹새끼들아아!”
“으아아아아!”
분노와 공포를 함께 느끼는 병사들이 호전적인 함성을 지르며 창대를 꼬나쥐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함을 지르든 말든, 창병들은 이미 포가를 미리 준비하던 탄약 마차에 연결해 빠른 속도로 철수하고 있었다.
‘적이 원할 때는 절대로 싸워 주지 않는다.’
제8 벨모제 기병 연대장 마브리엘은 충실하게 콘도티에레의 지시를 지키고 있었다.
“포병은 모두 퇴각했나?”
“예, 연대장님!”
자기 역할을 다한 후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반대편 비탈을 내려가는 견인 마차들의 개수를 세어 본다. 딱 8문, 알아서 퇴각했다.
타타타탕!
탕탕! 타타탕!
다시 언덕 바로 아래에서 시끄러운 총소리가 울린다. 최후미를 맡은 용기병 마지막 중대가 마지막 총탄을 뿌린 다음, 서둘러 언덕 능선을 따라 넘어온다. 그쪽에는 그들의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후미 용기병들이 사격을 마쳤다는 것은 이제 정말로 적이 지척까지 다가왔음을 말한다.
“겁쟁이 새끼들아, 우리 왔다!”
“덤벼봐! 덤비지도 못하냐!”
시끄러운 욕설과 도발의 소리. 평지를 행군해 언덕을 오르는 내내 일방적으로 포격과 총격에 시달렸으니 쌍욕이 나올 만도 하지. 반대로 말하면 쌍욕이 나오게 했으니 마브리엘은 임무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제대로 된 전투라기보다는 수학적 규칙에 따른 ‘피해 강요’ 과정에 가깝다. 적은 꾸준히 진격해오고, 아군은 꾸준히 화력을 투사한다. 결국 투사한 화력의 명중은 확률에 기반하기 때문에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성전군 보병 지휘관 자프론은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는 피해’라고 판단했기에 묵묵히 언덕을 오르고, 마브리엘이 이끄는 트랑카벨 측은 ‘이 정도 피해 감수하면 포기해주마’라고 판단했기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마치 통행료처럼.
그 와중에 희생되는 병사들 처지에서는 날벼락이겠으나, 스케일만 다를 뿐이지 대부분의 전투 행동은 이런 계산에 약간의 직관이 더해져 실행된다.
아무튼, 자프론의 부대는 ‘통행료’를 거의 다 지불하고 언덕에 오르고 있다. 언덕의 주인이 바뀌기 직전이다.
“좋아, 우리도 퇴각한다!”
“옛, 퇴각 신호!”
용기병들이 서둘러 말에 올라 언덕을 내려가자, 연대장 마브리엘과 함께 후퇴를 엄호하고 있던 200기의 총기병들도 말머리를 돌려 언덕을 내려간다. 조금 전까지 언덕을 점령하고 있던 제8 벨모제 기병 연대는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챙긴 채로 언덕을 내려갔다. 뒤늦게 언덕을 점령한 성전군 보병들이 발견한 것은 무수히 많은 말발굽 자국과, 그 사이로 보이는 몇 가닥의 수레바퀴 자국뿐이었다.
###
왼편 언덕을 지켜보던 첼레스티나가 놀랐는지 폴짝폴짝 뛰며 나에게 달려온다.
“콘도티에레! 적이 왼편 언덕을 점령했어요!”
“어어··· 그렇네. 뭐 점령까진 아니고··· 그냥 등산했을 뿐이지 뭐.”
“네에··· 에엣! 그냥 둬도 될까요···.”
“경치 구경하다가 지치면 내려오지 않겠어? 당장 우리 문제에 집중해야지.”
“그렇죠! 적이 다가오고 있어요! 이 광신도들은 지치지도 않네요··· 광부님들의 곡괭이를 통한 충격 요법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아니 그래도 전쟁터인데 이상한 용어 쓰니까 좀 그렇다.”
“크하하하핫! 부관님 말씀이 맞습니다! 꼬마 때부터 평생 휘두른 게 곡괭이지요! 이 기회에 치료사 한번 해 봅지요!”
“네에! 멋져요. 광부님!”
“그렇네요··· 든든하긴 합니다.”
광부 부대의 대표인 쾨트 발도는 육체파에 은근히 폐쇄적인 광부 사회에서 우두머리를 맡은 만큼 책임감도 강할뿐더러 상당히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첼레스티나와 죽이 잘 맞는다. 나는 원래 좀 음습한 인간이니까···.
“발사!”
타타타탕! 타타탕!
탕탕!
“쏴라! 날려버려!”
타타탕! 탕탕!
적군이 접근하면서 전방 부대 지휘관들이 사격을 명령한다. 드 포르망제 총병대의 사격 구령은 평범하지만 모범적이고, 지빌링엔의 사격 구령은 좀 호전적이다. 적도 반격하면서 전방에 뻑뻑하게 하얀 연기가 뒤섞인다. 화력이 집중된 순간, 이럴 때면 정말 1미터 앞도 안 보인다. 손을 뻗으면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제 목소리를 들으소서!”
“부정한 이들을 치소서!”
“이곳에 복음을! 이곳에 복음을!”
...여기가 전쟁터여 부흥회장이여. 아무래도 이번의 적들은 뭔가 단단히 주입 받고 온 느낌이다. 아까와 좀 다르다.
“크윽, 크아악!”
슬그머니 창병의 측면으로 파고들려던 적이 후열에서 내민 창에 가슴을 찔렸다. 두툼한 가죽조끼 덕에 치명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증이나 충격도 없는 것은 아니다. 뾰족하지 않더라도 나를 향한 막대기와 부딪히기만 해도 얼마나 아픈데. 그런데 놀랍게도 창날을 붙잡고 뽑아내 밀쳐내더니 더더욱 밀고 들어오다가···.
뒷열이 내민 창에 또 찔렸다. 이번에는 꽤 깊이 찔렸는지 입에서 피가 쏟아진다.
“종교가 시발···.”
역겨운 놈들. 종교의 순기능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사실 전쟁의 원인이 된 블랑독의 정순파 신도들도 종교를 가진 것은 마찬가지지. 어찌 보면 이 전장에서도 정순파로서, 신앙을 지키고 이웃들을 지키기 위해서 열성적으로 싸우고 있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딱히 우리 편이어서가 아니다. 역겹다거나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딱 말을 정해서 선을 그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데 시발··· 저런 광신도는 역겹다 젠장 할 것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달려와서 제 목숨도 챙기지 않고 싸우는 걸까? 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신도들을 저 꼴로 만들어서 전쟁터로 내몬 빌어먹을 자식들, 내가 이 전쟁 끝나기 전에 꼭 끌어내서 조리돌림을 하고 만다!
일단 진정하자··· 나는 이 전투의 총사령관이다. 아군을 동정해서도 안 되고 적을 증오해서도 안 된다. 나에게 선은 승리이며 악은 패배이다. 아군을 최대한 많이 살리는 것도 선이며, 적군을 최대한 많이 죽이는 것도 선이다. 냉정해지자. 후우··· 하아··· 후우···.
예상대로, 전선은 굳어지고 있다. 아군 보병들이 질적으로 우세하다. 수적 불리에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게다가 실전을 거치면서 실시간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보인다.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개인들에게는 이렇게 표현하면 미안하지만 초광렙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리고 실전에서는 병사 개인뿐 아니라 ‘부대’ 역시 성장한다. 물론 부대라는 것은 개념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개인이 강해지고 동료와 유대가 생기는 한편, 지휘관 역시 유능해지고 조직으로서 전통이 생기는 것이다. 이게 쌓이고 쌓이면 소위 말하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명문 연대’가 되는 것이고.
정면은 지금은 이대로 괜찮다. 기동전력인 마브리엘의 기병 연대도 후방으로 잘 빼서 자유로운 상태이고. 노림수에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첼레스티나, 적 기병들은 뭐 하고 있어?”
“네에, 움직이지 않아요!”
“음, 예비대로 쓸 생각인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기왕이면 새로 도착한 적 보병 부대가 왼편 언덕을 오르는 동안, 오른편 언덕을 노렸으면 어땠을까? 물론 자칫하면 언덕 사이에 끼어서 애매한 위치에서 포탄이나 맞았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제8 기병 연대가 끝까지 사격하지 못하고 일찍 퇴각하게 만드는 효과 정도는 있었겠지.
아무튼 나도 적 지휘관들의 심중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적 역시 내 생각을 잘 알지는 못하겠지.
내 계획은 무조건 버티는 것이다. 내일까지. 병사들은 물론 힘들 것이다. 하지만 식량은 모자라지 않고, 화약도 제8 연대로부터 나눠 받았기 때문에 하루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왼편 언덕에서 마브리엘의 기병들이 한 것은 짤짤이 사격을 통해 적의 전력을 깎아 먹은 것도 의미가 있지만, 상당한 시간을 번 것이 크다.
조금만 버틴다. 조금만 버티면 24시간 내로,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와 드 누아 북부 연대가 도착한다. 제31 정찰 연대는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령과 무사히 접선하면 이들 역시 달려오겠지!
세상에 불리한 전황을 한 방에 뒤집는 기적적인 전략 따위는 없다. 기적이 있다면 병력과 시간이라는, 숫자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
“흐음···.”
성전군의 보병 지휘관, 자프론 푸코데모스는 방금 점령한 언덕 꼭대기에서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쾅!
언덕 아래로 물러난 적 기병대에서는 가끔 포탄을 한 발씩 쏘고 있었다. 방금도 언덕 비탈에 떨어져 흙먼지를 잔뜩 일으켰다. 몇 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라, 자프론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 거리에서 가끔 한 발씩 쏘는 포탄은 의미 없다. 부하 병사들은 능선 반대편에 자세를 낮춰 대기하도록 했기 때문에 직사 각도가 안 나오는 상황이기도 하고. 적군도 위협 차원에서 쏠 뿐, 맞출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맞출 생각이라면 최소한 한꺼번에 쐈겠지.
“흐으으음···.”
언덕 위를 이리저리 거닐며 고민을 해본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언덕 아래로 내려간 기병을 추격하자니, 보병으로 평지에서 기병을 추적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고··· 반대편 언덕의 적 보병을 공격하자니 측면이 너무도 간지럽다.
“상황이 애매하군.”
실로 애매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퍼억!
이번에는 날아온 포탄이 언덕에 그대로 박히면서 먼지를 일으켰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미세한 돌조각 몇 개가 자프론의 투구와 흉갑에 부딪혀 소리를 낸다.
“자프론 대장! 자프론 대장!”
“응?”
“위험합니다, 대장! 이쪽으로 오십쇼!”
“아아, 괜찮다. 이런 건 안 맞아.”
참모 장교들이 반대편 비탈에서 그를 불렀으나 고개를 젓는다. 딱히 참모들이 겁쟁이라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자프론 자신이 안전한 곳에 머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생각은 혼자 하는 것이 좋다. 의견은 그 후에 듣는다.
게다가 자기 혼자라면 포탄에 안 맞을 자신이 있지만 참모들까지 챙기는 것은 무리다. 자프론은 신병 때부터 귀도 눈도 좋고 판단력도 좋았다. 그러더니 언제부터인가는 어지간한 포탄은 쏘는 시점을 알 수 있다면 탄착지점도 대충은 예상할 수 있었다.
“병력을 반으로 나눌까?”
병력 일부는 언덕 아래의 기병에게, 나머지는 반대편 언덕의 보병에게. 음, 위험성이 크다. 그에 비해서 상당하는 이득은 적어 보인다. 뭣보다, 언덕 위의 적 보병은 확실하게 이쪽을 대비할 예비대가 있다. 전력도 아니고 힘을 나눠 가면서 뚫고 들어가기 만만치 않아 보인다.
"전령!"
마침내 자프론이 외치자 병사 한 명이 재빠르게 곁으로 뛰어온다.
"기병 연대의 울터 콜린스를 아나?"
"물론입니다!"
"다행이군, 가서 전달하게. 속히 언덕 위의 적 보병 좌측면을 공격할 것!"
"알겠습니다, 대장님. 언덕 위의 적 보병 좌측면 공격을 전달하겠습니다."
"좋아."
펑! 멀리서 적이 다시 포탄을 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프론은 명령을 전달한 전령을 보내고 무심히 멀리 적 기병 쪽을 바라본다. 다음 순간, 표정 없던 그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바로 몸을 돌리며 전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친다.
"이봐 전령, 피해!"
"옛?"
지휘관이 자신을 부르자, 깜짝 놀란 전령이 뒤를 돌아본다.
쾅! 퍽!
"끄아아악!"
완만한 비탈에 떨어져 엄청난 흙먼지를 일으킨 포탄이 기묘한 각도로 튀어 오르더니 전령의 흉갑을 때렸다. 평범한 체구의 전령은 그대로 허공을 3미터나 날아 바닥에 떨어진다.
"젠장! 자네 괜찮나!"
자프론이 뛰어가 전령의 곁에 무릎을 꿇고 살핀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과 입에서 걸쭉한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온다. 이미 절명했다.
"빌어먹을!"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자프론이 분노를 터뜨린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이다. 아무리 낮은 확률이지만, 포탄이 떨어지고 있던 장소에 부하를 불렀고, 결국 포탄에 맞았다. 탄착 지점은 대충 예상이 가능하다는 오만이 사고를 부른 것이다.
"오지 마! 멍청이들아!"
당황해서 다가오는 참모와 호위병들에게 괜한 고함을 지른다. 가슴이 뚫린 전령의 시체를 끌고 안전지대로 넘어온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끌려오는 시체 아래로 핏자국이 길게 남는다. 기억력이 좋고 달리기도 빠른 전령은 귀한 존재이다. 게다가 포탄이 떨어지는 공간에 곧바로 달려오는 배짱도 있었다. 그걸 자신이 죽여버렸다. 깊은 자괴감이 자프론의 가슴 속에 차올랐다.
"...전령!"
"예, 대장!"
새로운 전령이 뛰어온다. 동료의 죽음을 봤기 때문인지 경직된 얼굴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지만 전투 지휘는 해야 한다.
"기병 연대의 울터 콜린스에게 요청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