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88화 (88/556)

17-8. 뤼나메르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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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공격을 해야 하는 이유가?”

라모리 스텐던 휘하의 보병부대 지휘관 자프론 푸코데모스는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그와 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왔으며, 전장에서 손발을 여러 번 맞추기도 했던 자프론 푸코데모스는 약간 불안함을 느꼈다. 가뜩이나 화상과 다른 흉터들로 무시무시하게 생긴 네부카디 델 카스트로소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서는 주름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딱 보아도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인간 외의 존재로 각성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모습이다.

“크으으··· 그대가 모시는 이는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 경이 아니십니까?”

터질 듯한 분노는 간신히 참아 넘겼는지, 요행히도 침착하게 반문한다. 역시 목소리는 좋은데, 끔찍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외모와 대비되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단자들을 격멸하는데, 이 타락해버린 블랑독의 땅에 주신의 영광을 되돌리는 데 온 힘을 다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흐음···.”

자프론은 방금 완벽하게 면도한 듯, 수염의 흔적도 없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것 같다. 라모리 스텐던 휘하의 지휘관 중, 자프론은 합리적인 고집쟁이로 통했다. 논리적인 사고 끝에 본인이 하겠다 결론 내리면 생각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수행하고, 그렇지 않다 결론 내리면 하늘이 무너져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상관 지시가 있어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 공격해도 언덕 위의 적들··· 이단자들은 격멸 못합니다. 그만큼 전력 차이가 나지도 않습니다.”

“주신의 뜻을 받들기 위한 노력을 해 보자는 것이지요.”

“지형은 불리하고, 초전에 승리한 적은 기세가 올랐고. 게다가 적은 대포도 8문이나 있다 들었습니다. 이대로 공격하면 사상자가 많이 생길 겁니다. 더 많은 이단을 죽이려면 더 길게 봐야 합니다. 다른 불리하지 않은 전장에서 싸우는 편이 낫다고 판단합니다.”

이 보병 지휘관의 말은 무심한 듯 깔끔했으며 나름 논리정연하다. 네부카디 수도원장의 얼굴이 다시 주름투성이로 일그러진다. 마치 마을 장터에서 약장수들이 일부러 보여주는 묘기 같다··· 라고 울터는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분노를 잘 진정시켰는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제는 화상으로 흉할지언정 적어도 인간처럼은 보인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자프론 경?”

“분명한 목적을 정해야 합니다.”

“목적 말입니까?”

“전투의 목적에 따라, 저희가 할 일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목적이라···.”

울터 콜린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단자를 태워 죽일 생각밖에 없는 정신 나간 광신도에, 논리를 중요시하며, 자기 판단에 어긋난다면 죽어도 남의 말은 듣지 않는 고집불통 지휘관. 감정과 이성, 두 돌대가리가 멀쩡한 결론에 도달할 리가···.

“그렇다면 이 목적은 어떤가요? 이단자들과 싸워, 앞으로의 더 큰 승리를 준비한다.”

“흐음···.”

그러니까 멀쩡한 합의가 나올 리가 없잖아. 혹시라도 둘 사이에 싸움이 나면 어떻게 말려야 할지 고민해본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목적을 위해서 싸우도록 하겠습니다.”

“주신께 맹세코, 오늘은 정말 멋진 날입니다. 이렇게나 든든한 지상 사역의 동지를 만나다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다음 공격의 주인공은 자프론 경의 부대입니다. 고견을 들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럼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감성의 돌대가리와 이성의 돌대가리는 의외로 적절한 합의점을 찾은 모양이다. ‘이단자들과 싸워, 앞으로의 더 큰 승리를 준비한다’라고? 세상에 이런 애매한 작전 목표가 어디 있나. 하지만 상당히 감성적으로 보일 수도, 이성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어정쩡한 표지션이 오히려 둘의 공감 지점이었을지도 모른다.

울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자프론의 작전 제안을 듣기 시작했다. 그로서도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환영이다. 아무리 소극적으로 싸우는 그라지만, 적의 함정에 빠져 얻어 맞기만 한 상태에서 전장을 빠져 나가는 것은 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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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까다로운 선택이 필요하겠는데···.”

나는 적의 새로운 기동을 보고 조금 긴장했다. 적은 이번에는 생각하지 못한 형태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아마도 적 지휘관은 상당히 열린 사고방식의 전술가가 분명한 것 같다. 설마 새로 합류한 적 보병 부대에 책사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콘도테에레, 이상한 적 지휘관이네요!”

“그러게···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어.”

첼레스티나도 그렇고, 잠시 소강상태인 틈을 타 주변에 불러 모은 우리 보병 지휘관들, 로이작 드 포르망제 남작, 지빌링엔 연대 지휘관 에르만 슈피리, 에크테인 광부 대표 쾨트 발도 셋 역시 당황하여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보병들이 배치된 오른편 언덕이 주전장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까 전투 1라운드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준 포르망제와 지빌링엔의 중무장 병력을 전위에 세우고 적의 공격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적 기병은 위축된 상태이고, 다시 치열한 보병전이 계속 될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왼편 언덕의 제8 벨모제 기병 연대는 여전히 그 난공불락의 당당한 언덕 꼭대기 포진을 유지하며, 아까와는 다르게 8문의 대포 모두를 기병대 앞쪽으로 빼서 포격 지원할 생각이었다. 오른편 언덕을 기어오르는 적들을 정확히 비스듬한 측면에서 저격하기 딱 좋은 위치라서··· 아마 이 배치만으로도 적의 기동로는 상당히 좁아지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적은 움직임은 대체···.

새로 도착한 적 보병 부대가 두 길이 만나는 교차로 부근에 선형에 가까운 전투 배치를 진행했다. 거침없이 익숙한 진형 형성이나 움직이는데도 대열이 무너지지 않는 질서를 보면 이들 역시 상당히 오랫동안 함께 싸워온 숙련 병력으로 보인다. 아무튼 전장의 정중앙이니까 상식적인 배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공격 개시 방향이다! 적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군 보병들이 기다리는 오른편 언덕 방향으로 오지 않았다. 이들이 취한 공격 방향은 아군 기병이 배치된 왼편 언덕이었다!

보병으로 기병을 공격한다고? 아니 생각해보니까··· 기병으로 포병 끼고 언덕 지키고 있는 아군 배치도 좀 변칙적이기는 한데··· 하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온다. 가위바위보로 이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상대는 묵찌빠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느낌일까?

아닌가? 내가 먼저 변태 배치를 해서 할 말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상호 확증 파괴처럼, 한쪽이 이상한 짓을 하면 다른 쪽도 이상한 짓을 하는 느낌인데.

“첼레스티나, 마브리엘 연대장에게 전령!”

“네에, 콘도티에레, 말씀해 주세요!”

“거리를 두고 대처할 것, 용기병은 사격 직후 퇴각, 언덕을 적이 점령해도 상관없다!”

“네에, 거리를 둔 대처, 용기병 사격 직후 퇴각, 언덕 포기해도 좋다!”

“좋아! 여기는 여기대로 대응해야겠네.”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전령 보내겠습니다!”

곧 첼레스티나에게 임무를 받은 전령이 반대편 언덕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자, 이제 나머지는 어떻게 한다?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 공!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흐음···.”

로이작 드 포르망제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한다. 지금 불안해하고 있지만, 다행히 상위 지휘관인 나에게 신뢰를 가지기 시작한 세 중견 지휘관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적의 의도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르겠다고 할 수도 없고··· 엉뚱한 소리나 하며 허세를 부렸다가는 뒤가 좋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 진짜 적 지휘관은 대체 뭔 생각이야?

“적이 굳이 원한다면, 왼편 언덕 줘 버리죠. 뭐.”

복잡한 머릿속은 일단 차단해두고,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여유로운 태도를 견지하며 말한다. 아, 이거 별일 아니거든요, 그냥 하던 거 하세요, 이런 말투로.

“그,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콘도티에레?”

이번에는 지빌링엔 연대의 에르만이 묻는다.

“적이 왼편 언덕을 차지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왼편 언덕을 얻었다.’ 밖에 없습니다. 대신 천 명이 넘는 쌩쌩한 병력이 언덕 꼭대기에서 놀게 되겠죠.”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혹시 언덕에서 내려와 아군의 측면을 공격하면 어떻게 됩니까?”

“제8 벨모제 기병 연대에는 500명이 넘는 총기병과 8문의 대포가 있습니다. 적은 절대로 측면 못 보여줍니다.”

“아! 그렇군요!”

다소 불안한듯했던 에르만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폭발하지 않고 땅을 튕기며 날아가는 원시적인 운동 에너지 포탄이다. 스치고 지나가면 갑옷이든 인간의 몸이든 가리지 않고 뚫어 버릴 정도로 강력하지만, 결국 직선으로 날아간다. 그래서 얇은 선형 대형의 정면에는 크게 효과가 없고 똘똘 뭉친 밀집 대형에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한다. 소규모라도 부대를 지휘하게 되면 기본 소양은 적절한 포각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걸 못 한다? 쇳덩이 몇 발 왔다 갔다 하면 지휘할 부대가 없어져 버린다.

그런데 이게 선형 대형의 측면에 명중하면···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유혈사태가 되는 거지.

“저는 배운 게 없는 놈이라 할 말이 없군요. 뭐든 시켜만 주시면 하겠습니다!”

장년의 광부 대표, 쾨트 발도가 자기 가슴을 손바닥으로 치자 요란한 쇳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방어구가 부족해 불안했던 광부들은 적 사망자나 포로로부터 벗겨내거나, 전투 불능 상태인 아군에게 물려받아 최소한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배치는 유지하겠습니다! 추가적인 명령을 기다려 주세요.”

“예!”

퍼펑! 퍼엉!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언덕 위의 대포들이 불을 뿜었다. 첫발이라 대부분 빗나가 평원에 의미 없는 모래 먼지를 일으키는 데 그쳤지만, 최소한 한 발은 적 창병진 바로 앞에서 튕기더니 적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몇 개나 되는 장창이 밑에서 잡아끌듯 훅 사라지거나 옆으로 쓰러지고, 질서정연하던 밀집 대형이 엉망진창이 된다.

실질적으로 적이 접근하기 전까지 입힐 수 있는 피해가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포탄은 적병들의 멘탈에 차곡차곡 데미지를 적립시킨다. 나도 많이 맞아 봐서 아주 잘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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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후방에 치우쳐서 적 기병이 점령한 언덕 쪽으로 행군하는 자프론의 보병 연대를 보면서, 울터는 불안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보병으로 기병을 공격한다고?’

‘라모리 경이 적과 교전해 적을 알아보라고 명령하셨다. 저 수도사의 제안이 그 명령과 들어맞으니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피해가 크지 않을까?’

‘아마 적 기병은 후퇴하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교전한다면 우리가 유리하지. 사상자를 250명 넘길 생각은 없어.’

평소처럼 무감정하게 설명한 자프론은 망설이지 않고 부대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언덕에서 날아온 포탄이 여기저기에 떨어진다.

“끄아아악!”

“어억, 컥!”

“내 다리! 내 다리!”

거리가 멀어 명중률이 높지는 않지만, 누구나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포탄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끔찍한 몰골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남는다. 울터는 자기 수하들이 당했던 끔찍한 산탄 사격이 생각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따위 상황은 다시는 경험하기 싫다. 공격의 선두에 자신의 기병대가 없다는 것이 슬슬 행운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전장의 다른 방향을 살핀다. 일단 네부카디 수도원장은 공격에 실패했던 보병들을 상대로 설교하고 있었다. 그 마약과도 같은 웅혼한 목소리로 주신의 말씀을 전했더니, 패잔병이나 다름없어서 당장이라도 도주하지 않을까 싶던 자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다. 목숨을 버리라고 하면 버릴 기세로 열렬하게 기도를 거듭한다. 종교가 그렇게 좋을까··· 명목상 ‘신의 군대’의 일원인 울터이지만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자신과 자프론이 신신당부를 해 두었기 때문에 무모하고 혼자서 정면 공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프론의 연대가 언덕 비탈에 도달한 이후에, 네부카디의 부대 역시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울터 콜린스 자신의 기병 연대는 예비대로서 전장 전체를 시야에 넣고 기다리기로 했다. 변칙적인 공격을 하는 이상, 적이 어떤 움직임을 할지 모른다. 그런다면 기동력과 충격력을 가진 기병만큼 대응하기 좋은 부대도 없으니까.

뭔가 전부 잘 맞아떨어지는 계획이다. 다소 불안하긴 하지만, 아군을 믿어 봐야지. 뭣보다 자프론은 전황 읽는 눈이 상당하니까 만약의 경우 자프론의 보병들을 지키며 함께 싸우면 지지는 않을 것이다.

“힘내라, 고집쟁이야!”

나지막하게 친구의 별명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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