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87화 (87/556)

17-7. 뤼나메르 교차로

천천히 창날의 벽을 밀어붙이고 있던 지빌링엔 창병들이 뒤에서 쇄도해오는 아군 병사들, 무장 광부들을 향해 자리를 슬쩍 내준다. 전투 전에 미리 계획이 있었던 것도, 지휘관들 사이에 협의가 있었던 것도, 따로 협력 명령이 내려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한다.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단단한 사각형의 밀집대형을 지키며 차근차근 전진하고 있는 지빌링엔 창병들이 스쳐 지나가는 광부들을 바라보며 슬쩍 눈인사를 한다.

‘부탁한다.’

무서운 기세로 성큼성큼 적진으로 나아가는 무장 광부들 역시 무언의 눈인사로 답한다.

‘맡겨라.’

친밀함은커녕, 대부분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이다. 같은 부대에 속해 있었고 내가 도착하기 전에 함께 싸운 적도 있으니 서로 존재 정도는 같이 알았으나 전우라고 할 만큼 살가운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부하 병사들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는 내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형제나 다름없다.

나는 미지수의 예비 전력이었던 에크테인 산맥 광부들을 적 한가운데에 ‘풀어’ 놓았다. 다소 성급한 결정이었을까?

“이야아아아!”

“가자 동지들! 여기가 우리 막장이다!”

“쪼개 버리자!”

이미 오랫동안 전선에서 싸우느라, 그리고 지빌링엔 연대의 측면 공격에 밀리느라 몸도 마음도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적들에 새로운 충격이 가해지자 확연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압박이 가해지는 쪽에서 무의식적으로 멀어지려는 병사가 많아지면, 전투 대형 내부의 밀도가 달라지는 것이 밖에서 보인다. 이 불균형이 심해지면 전열 붕괴지 뭐.

좀 잔혹한 말이지만, 새로운 전력의 투입은 ‘적을 최대한 많이 죽이기 위해서’이다. 굳이 예비대를 투입하지 않았어도 적의 전방 대열은 곧 무너졌을 것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패주했을 것이다. 종교적 열정이고 나발이고, 연달아 두들겨 맞다 보니 제 목숨 귀하다는 사실을 뒤늦게라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투는 대열을 갖추어 힘 싸움을 하고, 전술적으로 적을 포위해 후퇴시키는 통상적인 전쟁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애초에 ‘신이 원한다’라는 정신 나간 구실로 남의 목숨과 재산을 노략질하러 온 미친놈들이다. 종교적 열정인지 뭔지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무장도 못한 주제에 사기만은 높다. 아마 이대로 패주시키더라도 상당수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오겠지.

답은 유리한 상황일 때 최대한 많이 죽여놓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뒤에 남겨놓은 엄청나게 많은 동료의 시체를 보면 마음을 고쳐먹는 자들도 나오겠지. 간신히 건진 목숨은 정신 나간 종교 놀음에 낭비하기에는 아깝게 느껴질 테니까.

통상적인 트랑카벨 영지군의 보병 연대였다면 지속해서 화력을 투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망자를 만들 수 있었겠으나, 드 포르망제의 군대나 지빌링겐 연대나 총병의 숫자는 적은 편이었기에 수고롭게도 광부들의 힘이 필요했다.

“죽어 이 새끼야!”

“게엑!”

돌을 부수거나 말뚝을 박는 용도로 보이는 묵직한 쇠망치에 정수리를 찍힌 적병의 코와 입에서 피가 튄다. 투구를 썼지만 보는 대로 아무 의미 없다. 광부들은 상상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었고, 그들의 무기도 성전군을 쓰러뜨리는 데 제법 유용한 모양이다. 지빌링엔의 흑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자신들의 일터, 자신들의 고향, 그리고 자신들의 가족을 잃어버린 광부들은 그 분노를 여지없이 적들에게 폭발시켰다. 거대한 곡괭이나 양손 망치는 장검에 비해서 덜 위험하지만, 더 무섭게 느껴진다. 적들도 마찬가지인지 자꾸 물러서려고 해 더 이상 대열이 유지되지 않는다.

“와아, 대단하네요!”

“생각보다 잘 싸워 주고 있어.”

“평소에 사람보다 훨씬 단단한 것을 부수던 분들이라 그런 걸까요?”

“...으, 그렇게 말하니까 좀 무섭다.”

“그러니까 훨씬 말랑말랑한 사람의 몸은 쉽게 부수는 거예요! 대단해요 광부!”

“네 표현은 가끔 소름이 끼쳐···.”

“네에? 너무해요오,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의 직관은 종종 날카로울 때가 있는데, 광부들의 무기 대부분은 싸구려 갑옷 쪼가리를 무효화 시킨다는 점에서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목까지 가리는 흉갑에 투구만 써도 창이나 평범한 근접 무기로는 상당히 죽이기 어려우니까. 아, 물론 적이 지친 상태가 아니었다면 둔중한 양손 무기가 이만큼 효과를 내긴 어렵긴 했겠지만, 기대도 하지 않은 시너지 효과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시간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 병력 복귀시키고 방어선 다시 짠다!”

“네에, 네에? 앗! 아아, 알겠습니다! 전령 보낼게요!”

“그래···.”

적 지원 부대의 도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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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시발!”

성전군 측의 기병 지휘관, 울터 콜린슨은 안도의 한숨과 욕설을 동시에 내뱉었다.

“아··· 진짜 존나 망했네! 이거!”

망했다.

이것보다 현재의 그를 잘 나타내어 주는 단어는 없었다.

“창도 아니고 대포를 숨기다니, 미친 새끼들 아냐?”

연달아 폭언을 내뱉는다. 기병을 엿먹이는 방법 중에, 짧은 무기밖에 없는 것처럼 위장하고, 갑자기 대열 안에 숨겨놓은 창으로 찌르는 전술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시발, 대포를 숨겨? 히든 폴이 아니라 히든 캐논이냐?

만약에 적이 보병이었다면 키 차이 때문에라도 보였을 텐데··· 기병 부대 사이에 소형포를 숨긴 데다가 적 쪽이 고지대여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시발 보통은 대포가 있으면 이딴 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멀리서 접근할 때쯤 쏴서 적 숫자를 줄이든, 견제하든 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원래 대포 하는 일이 그런 것 아닌가? 비싼 물건을 샀으면 시발 좀 원래 목적대로 쓰라고!

“젠장···.”

뭐라고 떠들어 봤자, 패배자의 넋두리임을 울터는 모르지는 않았다. `원래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은` 대포가 얼마나 유용했는지 바로 자신이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대량의 희생자를 내면서 말이다. 하지만 개소리라도 내뱉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백전백승의 기병대 지휘관은 아니었다. 이긴 만큼 진 전투도 많고, 누구처럼 이름이 유명해서 어딜 가도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알아보는 정도도 아니다.

다만 그가 평가받는 부분은 뛰어난 생존 감각이다. 그는 어디로 달리면 살아남는지, 부하들을 최대한 적게 죽이는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보다 유명하고 솜씨 좋은 기병 지휘관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는 동안 최후까지 살아남은 것은 바로 울터였다. 당연히 부대원들의 생환율도 높다 보니, 부하들도 그를 신뢰하고 따랐다. 아무리 용병들 사이에 오늘만 사는 인간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개죽음당하느니 기왕이면 살아남아 보상도 받고 봉급 쓰는 재미도 느끼는 것이 좋으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가끔은 너무 소극적이거나 태업을 한다는 이유로 아군에게도 까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적당히 선을 그어 놓고 할 수 있는 일은 했으니까. 오랜 친구이자 고용주였던 라모리 스텐던은 그의 성향을 인정해주었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 전의 실패한 언덕 돌격으로 인해 그 같은 평가가 완전히 날아가게 생겼다. 8문의 산탄포 일제사격과, 뒤이은 돌격. 불과 5분도 안되는 짧은 교전에서, 200명이 넘는 부하들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1/4 가까이 되는 병력을 잃은 것이다.

게다가 그 죽음은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트라우마를 줄 정도로 끔찍한 형태였다. 동료들의 피를 뒤집어쓴 병사 중에는 아직도 떨고 있는 자들도 보였다. 게다가 죽은 200명의 상당수는 돌격의 선두를 맡길 정도로 그가 신뢰하는 용감한 고참병들이다. 수치 이상으로 느껴지는 뼈아픈 피해. 이제 그의 기병대는 전처럼 수족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반대편 언덕을 공격했던 보병들까지 측면을 밀려서 무너지나 했는데··· 진짜 완전히 망하기 전에 지원군이 도착해서 아직 목은 간당간당하게 붙어있는 상태다. 다행히 전면적인 붕괴 상태가 오기 전에 무사히 퇴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만신창이로 보이기는 하지만.

“수도원장님? 적이 생각보다 완강한데요···.”

“.......”

적 포격이 무서워 병력을 멀찌감치 빼고 있던 울터는 네부카디 델 카스트로소를 찾아가 상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얼굴의 절반이 화상으로 뒤덮인 기분 나쁜 수도사는 반응하지 않는다.

아니, 반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 이쪽에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불경한 자가!”

네부카디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쩌렁쩌렁한 기세에 울터는 마치 자신이 꾸지람을 당하기라도 한 듯, 어깨를 움찔했다.

“어찌 주신의 정당한 군대를 이처럼 방해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오오, 신이시여, 저 이단자들에게 죽어서도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는 형벌을 내리소서!”

아니, 지금은 기도할 때가 아니라 지휘할 때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왠지 그렇게 말하면 왼팔에 끼고 있는 거대한 경전을 휘둘러 자기 머리를 찍을 것 같다는 괴상한 망상이 들었다.

“네부카디 수도원장님! 라모리 경이 보내신 지원이 도착했습니다.”

“오? 오오? 아! 미안합니다, 울터 경.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네···.”

참 목소리만은 좋다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한다. 어찌 저런 흉칙한 얼굴에서 저런 멋진 울림이 나오는지 참. 얼굴이 평균만큼만 되었어도 여자들이 줄을 섰을 것이라는 불경한 생각이 든다.

“라모리 경이 보낸 지원이? 어디입니까?”

“후방에 보병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법황이 특별히 임명한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은 애초에 네부카디의 선발대가 뤼나메르 교차로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보병과 기병 부대를 하나씩 파견했었다. 울터는 괜히 돕겠다고 속도를 내어 일찍 도착했던 자신의 판단을 저주했다. 네부카디의 선발대가 단체로 뒤지든 말든, 보병대와 함께 도착했어야 했다.

게다가 자신이 괜히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자신감을 얻은 네부카디가 무모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자신은··· 언덕에서···.

“시발!”

이 병신들이 자기 기병대 대신 산탄을 뒤집어썼어야 했는데. 울터는 분노와 짜증, 자괴감과 미안함 등 온갖 감정을 담아 나지막하게 욕을 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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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티에레! 제8 기병 연대 소속의 용기병들이 추가로 도착했어요."

"다행이네! 우리도 증원이 왔구나."

휴우, 이 증원이라는 것은 기세 때문에라도 중요하다. 아군이 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 완전히 이기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전방에서 직접 싸웠던 장교와 병사들은 얼마나 아쉬울까. 가능하면 전방 전투원들은 교대를 시켜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병력이 부족하다... 보병 연대 증원은 빨라도 내일에나 도착할 것 같고.

일단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지금 보병전은 솔직히 불리하다.

적의 어중이떠중이 보병들에 비해서 최소한 갑옷은 잘 입은 드 포르망제 가문의 중보병들, 노련한 지빌링엔의 전문 용병들, 워낙 체력이 좋고 분노로 가득한 무장 광부들이 확실하게 우세를 점하고 있지만 수적으로 불리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전장에 진입한 적군은 창병과 총병의 조합을 적절하게 훈련받은 용병으로 보인다. 숫자도 절대로 적지 않다.

기병 전력의 무게추는 뒤집혔다. 적의 돌격을 초장에 분쇄하며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힌 데다가, 외곽 정찰에 나갔던 용기병들이 합류해 수적으로 분명한 유리함을 점했다.

그런데 또 압도적으로 유리해서 적 기병 깨뜨리고 전장을 마구 활보할 수 있는 전력 차는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우세를 살리기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 가장 든든한 것은 8문의 경야포겠지.

언덕까지 선점했다. 보병이든 기병이든 어설프게 언덕에 접근하거나 우회하려 들면 몹시 아픈 경험을 겪게 될 것이다. 한 번은 더 쏠 수 있는 산탄도 쟁여놓고 있고. 아주 그냥 가까이 오기만 해 봐라.

교차로에서의 전투 1라운드는 끝난 것 같다. 승패는 아군의 판정승 정도라고 볼 수 있을까? 적 지원군만 늦게 왔어도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는데, 아쉽다.

이제 적이 하는 것에 따라 2라운드가 시작되겠지.... 적당히 끝내고 병력 빼서 후방의 다른 아군과 합류하고 싶지만, 바라는 대로 잘 될 것 같지는 않다.

새로 도착한 적 보병이 곧바로 전개에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식들, 좀 쉬었다 하자 쉬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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