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뤼나메르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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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완전히 반칙하는 느낌인데···.”
트랑카벨 영지군 제8 벨모제 기병 연대의 지휘관 마브리엘 마슈레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만큼 전장의 상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들으라고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 들었으면 민망했겠다.
‘제가 제8 연대에 기대하는 것은 통상적인 충격 병력의 역할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못 하는 역할, 중요한 거점을 누구보다 빨리 달려가서 지켜내는 역할도 중요합니다.’
콘도티에레는 트랑카벨 영지군이 보유한 3개의 기병 연대를 각자 다른 목적으로 편성했다고 알려주었다.
제7 카르카냑 기병 연대
- 기동력과 전투력을 모두 가진 충격 전력
- 총기병 8개 중대, 용기병 2개 중대
제8 벨모제 기병 연대
- 중요 전략 거점을 선점하고 적의 선택지를 제약하는 기동 전력
- 총기병 6개 중대, 용기병 4개 중대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
- 정규 기병연대가 하지 못하는 광역 정찰과 원거리 추격 등 특화 임무를 수행하는 만능 전력
- 총기병 2개 중대, 용기병 2개 중대, 추격기병 3개 중대
마브리엘의 연대는 이러한 설립 목적 때문인지 새로 주조된 기마 견인포를 배정받았다. 사전 개발된 가죽포에 비해서 훨씬 안정성 있고 위력도 조금 더 높다고 한다. 무게도 조금 더 나가지만 말 두 마리가 끌면 충분히 기병의 행군 속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
이런 경야포가 무려 8문이나 있었다. 하나같이 카르카냑의 병기창에서 새롭게 주조된 최신예 청동제 야포이다.
최대한 다른 기병들이 주변에서 행군하도록 하고, 다른 보급 물자 수레에 섞어 튀어나와 보이지 않도록 하고, 밤에는 연대장 막사 바로 옆에 보관하도록 했다.
방금도 기병 대열 한가운데서 장전을 마쳤다. 포구 앞에서 대기했던 부하들은 등이 자꾸 간지러웠을 텐데···. 미안한 일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덕분에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다!
적의 기동은 실로 유려했다. 같은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마브리엘이 감탄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전력을 다해 제8 연대의 장점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 기동성을 이용해,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해왔으며, 주 공격점을 놓치게 만들었다. 다행인 점은, 애초부터 마브리엘은 방어 계획을 수립해놓고 적의 어설픈 페이크 무빙에 일일이 대응할 생각이 없었다.
하필이면 적은 돌격의 마지막 순간, 중앙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마브리엘의 제8 벨모제 기병 연대가 숨기고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음 순간, 8문의 화포가 기병 대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잘 닦여 황금색으로 빛나는 포구가 말이다.
“발사!”
언덕 비탈이 시작되기 직전, 끄트머리에 멈춰 세운 경야포들은 마브리엘의 명령에 일제히 점화되었다. 고운 점화용 화약이 타들어 가고, 포신 내부의 좀 더 입자가 굵은 장약에 불이 붙었다. 포신 내부에 가로 놓인 격목이 폭발하는 화약의 힘에 밀려 포구쪽으로 밀려 나간다. 장인의 손에 의해 포구에 딱 맞게 깎인 격목은 발사체에 거의 손실 없이 운동에너지를 전달했다.
그렇게 포구에서 쏟아져 나간 것은 장거리 포격용의 단일 포탄이 아닌, 잔뜩 욱여넣은 화승총용 납탄이었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수백 발의 작은 탄환은 마브리엘이 ‘반칙’이라고 생각할 만한 광경을 만들었다.
“으아아아!”
“끄윽, 커허헉!”
“크에에에엑!”
다소 희생이 있더라도 숫자로 밀어붙이기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몰려오던 기병 대열을 여덟 개의 비극이 훑고 지나갔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쏟아지는 탄자를 정면으로 뒤집어쓴 가장 앞줄의 기병은 인간과 말이 함께 생물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어떤 것이 피부 안쪽에 있었고, 어떤 것이 피부 바깥쪽에 있었는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버린 육체는 입고 있던 섬유와 가죽, 일그러지고 쪼개진 갑주와 함께 안개가 되어 흩날렸다.
뒤이은 기병들은 상황이 좀 더 나았다. 혹은 더 나빴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인간은 엄지손톱만 한 금속 구슬이 신체 어디 건 뚫고 지나가면 치명상에 이르니까. 때로는 절명하고 때로는 살아남아 고통에 절규하며 나뒹군다.
더 뒤쪽의 기병들은 운 좋게도 앞의 동료들이 대신 맞아준 덕분에, 혹은 발사체의 추진력이 빨리 떨어지는 산탄 특성 덕분에 치명상은 피했다. 때로 여기까지 날아온 탄환이 있더라도 낙마만 하지 않는다면 갑옷이 막아주었을 것이다. 대신 그들을 뒤덮은 것은 더 운이 없었던 선두 동료들이 뿌린 피의 안개였다. 간간이 손가락, 눈알,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두개골 조각 등이 섞여서 날아오는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럽고 역겨운 지옥의 세례 말이다.
“으아아아! 크아아아!”
“이게 뭐야 시발! 내 다리! 아아!”
운 좋게 산탄 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기병들은 물론 계속해서 언덕을 달려 올라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발사 직후 자리를 비운 기마 포병들을 대신한 총기병들이었다.
타탕! 타타탕!
탕탕탕!
양측 기병의 선두끼리 총격전이 벌어졌다. 산탄 공격에 적진까지 도달하지 못한 대열이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 언덕을 달려 올라온 기병들의 최선두는 수적 열세 상황에서 총격을 받고 삽시간에 녹아 사라져 버린다. 최소한 적과 접촉하는 순간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는 백병전과 다르게 사격전은 수적 열세가 즉각적인 부대의 파멸로 이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그걸 깨닫는 순간이 너무 늦었다.
“선두 중대 돌격! 적을 언덕에서 몰아낸다!”
“돌격 나팔을!”
마브리엘의 명령에 선두 2개 중대가 함성을 지르며 비탈을 달려 내려간다. 돌격을 이끌고 있었던 선두의 장교들과 고참병들을 거의 다 잃고, 첫 접촉에서 밀리며 기세까지 잃어버린 성전군 기병들이 삽시간에 밀리기 시작한다. 반대로 고지대에서 달려 내려오는 트랑카벨 기병대의 돌격이 그들을 덮쳤다.
혹자는 권총을 쥐고, 혹자는 검을 쥐었다. 돌격 상황에서, 트랑카벨 총기병들은 상당한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다. 꽤 많은 숫자가 말고삐를 쥔 왼손으로 권총을 쥐고 있기도 했다. 거리가 좁혀지면서 서로 많은 총탄이 기병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고, 적지 않은 숫자가 총에 맞아 낙마한다. 기병의 몸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입었건, 다행히 갑주가 튕겨냈으나 충격을 버티지 못해 떨어졌건, 말이 총에 맞아 쓰러졌건 난전 중에서는 대단히 위험하다.
최초의 총격전이 지난 직후, 서로의 말머리가 겹칠 정도가 되자 기세를 타고 내려온 트랑카벨 기병대의 우세가 빛을 발한다. 특히 기사 시절 쓰던 묵직한 장검을 쓰는 경우가 많은 귀족 기사 출신의 트랑카벨 기병들은 말이 달리는 속도가 그대로 검의 충격력이 되었기에 적에 의해 막히더라도 힘으로 밀어 그대로 낙마시키고 뚫고 지나가기도 했다.
“물러나! 물러나!”
“퇴각!”
“대열을 정비한다!”
제대로 된 교전이 시작된 지 30초도 지나지 않아, 후퇴를 알리는 외침이 적 기병들 사이로 퍼져갔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통제가 잘 되는 적 기병들은 망설이지 않고 매끄럽게 빠져나간다. 뒤로 무수한 시체를 남기기는 했지만 말이다.
“추격 중지! 다시 언덕으로 돌아간다!”
마브리엘은 더 이상의 추격은 포기하기로 했다. 적은 와해된 것이 아니라 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것이다. 조직력이 이렇게 좋은 상대에게 무리하게 덤비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뭣보다, 그가 이긴 기병전은 전투의 절반에 불과하다. 나머지 전투인 보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병의 숫자가 충분했다면··· 이대로 일부는 추격하고 나머지는 적 보병의 측면을 노렸다면 좋았겠지만.
‘기병 지휘관에게는 적 기병의 격멸도 중요하겠지만, 부대를 온존하는 쪽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만으로 아군 보병들의 측면이 안전해지니까요.’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고, 콘도티에레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하자. 이번에도 적 기병 견제를 최우선이라고 하였으니. 말머리를 돌리며 보병들이 지키고 있는 오른편 언덕 방향을 바라보니, 보병 싸움에서도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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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몰아붙이고 있는데? 몰락한 것 맞아?”
“네에, 피 흘리는 흑곰이라고 했나요? 복고풍 전술이네요, 멋져요!”
“저거 그거 아니냐, 강습 돌격조.”
“네에, 맞습니다아! 트랑카벨 보병대도 훈련받아서, 저거 할 수 있어요!”
“아 그랬었지.”
언젠가 첼레스티나가 훈련 목록을 만들어서 가져다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당시에 그녀가 실사격까지 하면서 화끈하게 해보자! 고 했지만 내가 위험하고 화약 비용도 아까우니 각하했었지.
창병과 총병들이 접전을 벌이는 와중에 일시적으로 적진을 돌파하게 된다면, 돌격의 선두에 서는 것은 창병이 아니다. 당연히 창이 무겁고 불편해서 뛰어다니면서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서 그렇다. 그럼 창을 버리고 백병전에 뛰어드느냐 하면 이것도 아니다. 아무리 유리한 상황이라도 창병 밀집 대형 풀었다가 역공당할 때 막을 방법 없어서 무너진 전례가 꽤 있기도 하고.
방패나 미늘창, 양손검 따위로 무장한 전문 백병전 부대를 가지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대체로 급한 창병과 총병에 밀려서 숫자는 적게 마련이고, 결국 즉각적인 강습 돌격을 위해서는 창병을 제외하고 있는 병력 최대한 짜내서 만드는 수밖에 없다.
지금 지빌링엔 보병들이 하는 방식이다. 탄환을 쓴 총병, 포병, 말에서 내린 기병 등등. 물론 창병의 일부가 창을 버리고 포함되기도 한다. 이런 즉석 부대를 강습 돌격조라고 부르는데, 총병이나 기병처럼 화기를 가진 부대는 즉각 전부 장전한다. 그리고 공세가 시작되는 지점에 몽땅 때려 부어서 방어선에 틈을 만들고....
돌격한다!
대열을 갖추고 최전열을 밀어 올리기 위한 전면적인 돌격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한 지점에 집중한 일점돌격. 한 지점에 감당할 수 없는 화력과 병력을 집중해 뚫고 들어가는 것이다. 적을 죽이는 것 보다 마구 밀쳐내고 위협하면서 그대로 돌진한다.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당황하도록`하는 것이다. 그 지점 외의 아군은 여전히 대열을 유지하고 견실하게 싸우는 것도 포인트이다.
당연히 실패하면 리스크는 크다. 적진으로 뚫고 들어간 병력들은 기세를 잃고 적군이 정신을 차려 조직적으로 반격하는 순간 고립무원에 빠진다. 나머지 병력이 도와줄 방법도 없다.
그러면 성공하면 되지! 지금 지빌링엔 병사들이 그렇듯 말이다. 대열을 뚫고 깊이까지 들어간 병사들이 적 보병 대열의 측익을 단절시켰고, 이어진 지빌링엔 본대의 돌격이 단절되어 지리멸렬한 적 우익을 무너뜨렸다. 갑자기 돌아가는 회전문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격이 된 적 본대가 흔들리며 대열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나는 딱 3초 동안 고민했다.
피 흘리는 흑곰의 돌격을 여기서 멈춰 세우고 밀어 올린 전선과 유리한 전황에 만족할 것인가.
예비대를 추가해 적 측면을 완전히 갈아 버릴 것인가.
4가지 정도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보았다.
결론, 이건 발을 뻗어도 될 자리다. 흑곰 웨이브에 탑승한다.
"첼레스티나! 광부 예비대에 전령!"
"네에, 전령 준비하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좌측의 지빌링엔 연대가 뚫어 놓은 돌파구로 후속 돌격할 것! 암만 부수던 기세로 적 대열을 쪼개버려라! 이상!"
"네에, 콘도티에레! 지빌링엔 연대의 돌파구로 후속 돌격! 암반 쪼개듯이 적진도 쪼개라!"
"그래, 전달 부탁해!"
험상궂은 얼굴로 투입을 기다리고 있던 광부들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봄의 제법 서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근육이 튀어나온 팔뚝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곡괭이, 삽, 망치 등등 바위를 부수고 땅을 파내던 도구를 든 광부들은 모두 왼 팔뚝에 나무토막을 끈으로 묶고 있었다. 방어구가 없는 상황에서 급히 전투에 들어가기 위해 내가 제안한 방법이다. 여전히 위험하지만, 최소한 없는 것보다는 낫다. 특히 양손을 같이 쓰는 무기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가자 동지들!"
"우와아아아아!"
"개자식들의 골통을 파내 버려라!"
몹시 호전적인 함성을 지른 광부들이 달려 나간다. 바위를 부수고 흙을 파내는 전문가들이 이번에는 적의 뼈를 부수고 살을 파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