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다브농 방앗간 조우전
타타타탕! 타타탕!
방앗간 개울 맞은편에 서둘러 전개된 트랑카벨 영지군 총병들이 화력을 쏟아냈다. 개울 건너편에서 용기병들이 지키고 있는 바리케이드를 뚫어내거나 창고 벽을 기어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성전군 보병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양측의 거리는 불과 50미터에서 60미터, 게다가 빽빽하게 밀집해 있던 보병 무리는 완벽한 표적이나 다름없었다.
치열한 창고 건물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 블랑독 연맹군 측의 지원군이 추가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당연히 소수의 용기병들이 간신히 지키던 바리케이드에 추가 병력이 투입되면서 전선이 안정된 것은 당연하고. 다른 두 가지의 큰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전장이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투는 제7 용기병 중대가 펼친 3개의 바리케이드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창고 지붕에 올라간 소수의 총병들이 저격을 지원하고, 공격군 측의 사격 지원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리케이드를 두고 벌어지는 양측의 피 터지는 혈전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게 변했다. 전장 서쪽의 늪지대로 진입한 드 누아 엽병들과, 동쪽의 개울 건너편에 정렬한 제15 보병 연대 총병들이 지원 사격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거리 유지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건 전적으로 바리케이드에 트랑카벨 창병들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바리케이드는 방해가 없으면 사람이 타서 넘기에 어려울 정도의 높이가 아니다. 그저 잡동사니를 쌓아 놓은 울타리 정도니까. 하지만 그 뒤에서 죽을 각오로 방어하는 용기병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하지만 이제 바리케이드 위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장창의 창끝이라는 장애물이 또 생겼다. 물론 거기서 끝이라면 상관없었겠으나, 창병의 엄호를 받는 총병들이 뜨거운 납탄을 지속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다.
이 두 가지 변화는 블랑도 연맹군의 장점, 압도적 화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바리케이드의 창병들은 바리케이드 자체와 창병들의 엄호에 보호받으면서.
늪지대 한 가운데 알박기에 성공한 드 누아 엽병들은 질척거리는 습지로 보호받으면서.
개울 건너편에 위치한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 총병들은 개울로 보호받으면서.
일방적으로 압도적인 숫자의 총탄을 뿜어대고 있었다. 물론 바리케이드 쪽을 제외하면 공간 자체는 뚫려있으니 대등한 화력이 있다면 승부가 되겠으나, 중간중간 총기를 가진 병사들이 섞여 있을 뿐이고 독립 부대로 편성조차 되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들이 화력으로 반격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후퇴! 후퇴!”
“물러난다! 숲으로 돌아가!”
결국 지원군의 두 번째 사격이 시작되기 전에, 성전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성전이라는 목적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인지, 그 와중에도 공포로 전열이 붕괴하지 않은 것은 대단했다.
“이, 이겼다!”
마지막 적의 뒤통수가 수풀 사이로 사라지자, 로용 드 말리크는 갑자기 팔다리가 저려옴을 느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이미 한계까지 사지를 사용했기 때문이리라. 지금까지 그를 지켜줬던 바리케이드에 걸터앉았다. 피로 더러워진 가문의 명검은 아무렇게나 흙바닥에 꽂아 놓았다. 오랜 세월, 말리크 가문의 기사들 손이 닿아 반들반들해진 손잡이의 보석 장식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옆에서 나란히 싸운 병사도 다리에 힘이 없는지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그는 뭐 하다 얻어맞았는지 한쪽 광대뼈가 퉁퉁 부어있었다. 자기 피인지 남의 피인지, 팔뚝도 피로 흠뻑 젖어있다. 살아남은 것은 정말 천운이었다.
녹초가 된 용기병들에 비해서 방금 전장에 도착한 제15 연대의 보병들은 역시 절도가 있다. 그들은 이해한다는 듯, 용기병들을 놔두고 자신들끼리 대열을 유지했다. 딱히 명령이 없었더라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워온 용기병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다친 사람 있나?”
“여기 붕대 받게나.”
“아, 이건 제 피는 아닙니다.”
부상자들은 최소한의 응급조치를 한다. 부상자···.
“그웬넬 중대장님!”
그러고 보니 전투 중 정신이 없어 중대장을 살피지 못했다. 다른 중상자들 역시. 지금은 자신이 중대장 대리이다. 로용은 그저 전투 끝났다, 몸이 편해서 다행이다 정도로 안일하게 쉬고 있던 몇 초 전의 자신을 두드려 패고 싶었다.
“중대장님···.”
창고 벽에 기대어 두 다리를 굽히고 자연스럽게 앉아있는 제8 기병 연대 제7 용기병 중대장, 그웬넬 드 리스바쥬의 곁에는 병사들이 몇 명 모여있었다.
남자답게 선이 굵은 얼굴은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창백하다.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제외하면 얼굴이 너무 평온하고 깨끗해서, 오히려 편안히 눈을 감고 쉬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의 오른 편에는 화승총 두 정이 벽에 기대어 있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완벽하게 같은 각도로. 두 정 모두 완벽하게 장전되어있었고, 화승에 여전히 불이 붙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아무나 집어 들고, 격철을 뒤로 당긴 후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가리라.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장전했음에도 총기에는 한 방울의 피도 묻어있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웬넬 드 리스바쥬의 정갈했던 삶 그 자체를 증명하는 것 같다.
“그웬넬... 드 리스바쥬 경···.”
발음을 똑바로 하기 어렵다. 자꾸 목구멍 너머에서 감정이 쏟아져 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웬넬 경이 살아있었다면, ‘감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진정 위대한 자는 감정을 느끼되 표출하지 않는 인간이라네.’라고 했겠지.
빌어먹게도, 이 격언은 주신교 경전의 문구를 인용한 말이다.
저 바리케이드 너머에 널브러져 있는 주신 타령 씹새끼들보다 훨씬 주신교에 대해서, 경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빌어먹을 아이러니 때문에 분통을 참기 어렵다.
“이름 불명의 방앗간과 창고, 주변 늪지대에서 벌어졌던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피해가 적지는 않았으나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의 지원에 힘입어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저, 소대장 로용 드 말리크 남작은 위임 받··· 위임받았던 제7 용기병 중대의 지휘권을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말을 마쳤을 때, 로용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얼굴에 튄 피와 화약 연기로 인한 시커먼 그을음을 씻어내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거칠게 눈을 비비자 그을음이 엉겨 붙는 바람에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고 만다.
“그럼 사상자 파악 등 후속 업무가 많아서 가 보겠습니다, 중대장님!”
마지막으로, 주먹 위쪽을 가슴에 부딪히는 북방식 경례를 한다.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가 없다. 특히 그웬넬의 유해 옆에 나란히, 누구라도 손을 뻗어 사용할 수 있는 딱 좋은 각도로 놓여있는 두 자루의 장전된 총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 최후의 순간, 복부에 총알이 박혀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자신이 사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면서도 장전을 마치는 모습을 상상하니 오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으흐흐흑, 대장님···.”
“시발 새끼들··· 죄송합니다 중대장님!”
어느새 병사들이 모여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웬넬의 시체는 미동도 하지 않지만, 어쩐지 전투에서 이길 줄 알았다는 듯, 편안한 표정이다.
###
“콘도티에레, 다브농 습지에서 승전보가 왔어요!”
“전투가 끝난 건가?”
나는 보고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실 전투가 시작된 즉시 전장으로 가서 직접 상황을 보고 싶었으나, 아직 적 주력도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는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안절부절못하면서 지휘소에 남아있던 상황이다.
“네에, 쥐그 드 푸로니 연대장께서 보내신 서신이네요.”
첼레스티나가 종이를 내밀었고, 나는 얼른 받아 읽기 시작한다.
-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는 늦지 않게 다브농 습지에 도착, 방앗간과 그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를 지원하여 적을 격퇴할 수 있었음
- 적의 전투 의지는 왕성하였으나, 무장 상태는 좋지 않았고 조직력에도 의문이 갔음
- 전투의 수훈은 첫 교전 직후 내내 방앗간을 지켜낸 제8 벨모제 기병 연대 소속의 제7 용기병 중대임
- 현재 제7 용기병 중대는 중대장 그웬넬 경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막대해 현장 판단으로 철수 중
- 습지에서 움직이기 힘들었으나, 드 누아 가문의 북부 연대에서 파견한 엽병들이 길을 안내해 늦지 않을 수 있었음
보고서는 간결하게 현재 필요한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고 있었다. 교전에 참여한 적이 혹시라도 더 큰 주력부대의 전위가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그럼 그냥 생각보다 더 깊숙이 진출한 적의 약탈부대인가?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 병력인가, 그렇지 않은 병력인가··· 부족한 정보가 너무나 많았다.
포로가 있어서 신문한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이런 데서 붙잡혀서 쉽게 털어놓는 포로라면 별로 아는 게 없을 거다.
휴··· 답답하네. 우선은 더 정보가 들어오기를 기다려보자.
“그웬넬 중대장이 사망했구나···.”
“네에, 첫 지휘관급 전사자시네요오···. 콘도티에레께서 아시는 분이신가요?”
“음,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인상 깊은 사람이었어.”
겨울 동안 각급 부대 훈련에 참가하면서 지휘관들은 항상 만나고 다녔고, 면담도 자주 했으니까, 당연히 얼굴은 안다. 다만 그웬넬 경은 좀 특이한 이력과 유난히 반듯한 말투가 기억에 남았다. 처음 중대장으로 임명할 때 나눈 대화가 지금도 기억난다. 그의 아버지가 벨모제의 성주 톨마르 마슈레와 친구 사이라고 했던가.
‘저는 트랑카벨 가문의 미래는 교육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군인으로서의 포부나 승리에 대한 기여 등을 말하는 간부들이 많았다. 그야 대부분이 세습 전사 계급인 귀족 기사 출신이고, 영지군의 지휘관이 된 상황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 하지만 그웬넬은 좀 달랐다.
‘교육은 가르치는 교사나 시설인 학교도 중요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쪽이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 이런 이야기인가요?’
‘오, 그런 표현도 좋군요. 제 말은,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깨어있는 사고방식의 귀족이었다. 그러고 보면 귀족과 평민의 계급적 거리가 멀지 않고 자영농이 많은 구조이다 보니, 블랑독은 문맹률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낮은 편이라고는 하더라. 그래도 이런 수준까지 교육 철학에 대해서 고민해본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지군 창설을 트랑카벨 백성들의 교육에 대한 사고방식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훈련을 통해 성공적인 교육 과정을 경험한 병사들이 늘어나는 점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배움을 통해 더 나은 자신이 되는 경험을 가진 이들이 늘어난다면 공감하는 사람들도 늘겠지요. 저 자신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병사들을 이끌어 본 경험이 전쟁이 끝나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 전쟁에서 꼭 이겨야겠네요.’
농담처럼 나누기는 했으나, 나는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실제로 이전 생의 세계에서도, 교육 제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후진국에서는 첫 교육을 군대에서 경험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교도 병사도 마찬가지이다. 그게 배움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 자극이 없는 것과는 분명 다르긴 하겠지.
‘저는 기사 집안의 장남이긴 하지만, 부끄럽게도 검이나 창을 잘 다루지 못합니다. 그나마 활은 조금 다루어 보았으니 총이 나와서 다행이네요.’
멋적게 웃던 반듯하게 생긴 얼굴도 기억이 난다.
이제 와서 이런 사람은 전쟁터에 내보낼 것이 아니라 각자 잘하는 분야에서 일을 시켰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본인이 ‘주군과 고향이 위기에 처하면 기사의 의무’라면서 지원을 했고··· 지휘관급 장교가 부족했으니까.
사실 그웬넬 경뿐 아니라, 지금 무기를 들고 블랑독을 지키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분명, 전쟁 따위보다 훨씬 가치 있을 무언가를 싹 틔울 수 있는 미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전쟁에 끌려와서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이지.
옘병할 전쟁 같으니라고.
이세계까지 와서 옘병할 전쟁을 직업으로 가진 나도 참 젠장맞을 인생이다. 해야 되는 전쟁, 기왕이면 잘 하고··· 한 명이라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서 그 미래의 가능성이 무사히 싹틀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겠지.
휴, 모든 희생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었던 사람이 죽는 일은 더더욱 가슴이 아프다. 게다가 중대장이 사망할 정도로 격전이라면, 일반 병사들은 또 얼마나 많이 죽고 다쳤을까···.
그들이 360명이 넘는 피난민들을 살려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위안이 된다면 좋겠다.
“콘도티에레! 제11 연대에서 전령이 왔어요!”
“어? 제11 연대? 어어··· 그쪽에서? 설마 후방에 적이?”
제 11연대는 아군의 측후방을 지키고 있는 부대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내 심각한 표정을 보았는지 첼레스티나가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네엣? 아뇨, 아뇨! 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오··· 앗! 죄송해요, 여기 서신입니다!”
내가 너무 당황해서인지 첼레스티나도 당황한다. 다행은 다행이지 진짜로 그 방향에 적이 있었다면··· 전략을 근본부터 수정해야 하니까.
- 피난민들을 구조해 보호하던 중, 복수의 주민들이 동일한 ‘소문’을 이야기함. 확인되지 않은 정보이나, 보고가 필요하다 판단 됨
- 포르망제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증언이 다수
...전략을 근본부터 수정해야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