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다브농 방앗간 조우전
“이 새끼가!”
잠시 중대장을 부축하는 것과, 적을 쓰러뜨리는 것 중 뭐가 중요한지 저울질해보던 로용은 그대로 기세를 죽이지 않고 적에게 달려가 화승총으로 후려쳤다. 생각해보면 검을 휘두르는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만큼 냉정하지도, 머리가 잘 돌아가지도 않았다.
“이단자 새끼!”
물론 적도 호락호락 맞아주지는 않았다. 아직 화약연기가 풀풀 나는 총으로 내 공격을 막는다.
“이단은 시발놈이!”
이단 타령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분노가 울컥울컥 치솟는다. 최근에 훈련소에서 실전 압축적으로 배운 쌍욕이 자동으로 나온다. 적은 습지 가운데에 있는 마른 땅 끄트머리 쪽에 서 있었기 때문에 발디딤이 좋지 못하다. 로용의 공격을 막기는 했으나 그대로 발이 미끄러진다.
“내가 니보다 경전 많이!”
다시 한번 개머리판으로 투구 쓴 머리를 내려찍는다. 끝이 뾰족하거나 닭벼슬처럼 튀어나온 형태가 아니라 평평한 반구형 구식 투구라 정확히 정수리를 찍을 수 있었다.
“겍!”
괴상한 비명과 함께 피가 튀며 마치 개구리처럼 바닥에 철퍽 하고 퍼진다.
“...읽었을 거다.”
듣는 사람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움직이지 않는 적을 발로 밀치자 뒤로 벌러덩 넘어간다. 코와 잎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눈을 까뒤집은 적병이 습지의 축축한 진흙밭에 철퍼덕 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그리고 예상 못 하게도 바로 다음 상대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적은 아마도, 습지에 얼마 안 되는 마른 땅에 아군이 박아놓은 바리케이드를 우회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튀어나온 놈을 죽였으니, 다음 놈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탕!
“으헉!”
다시 총을 휘둘러야 하나, 아니면 칼을 뽑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함께 내려온 동료 병사가 쏴 버린다. 거리는 불과 3미터, 백발백중이 당연하다. 조심스레 바리케이드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니 겁에 질린 적들이 슬금슬금 온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조금만 늦게 내려왔으면 저놈들이 바리케이드 후방을 쳤을 거다.
“중대장님! 중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잠깐 저쪽에 앉혀주게.”
로용은 그웬넬 중대장의 팔을 끌어 창고 벽에 앉힌다. 흉갑에 손가락 두개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웬넬이 앓는 소리를 내며 통나무 벽에 등을 기댄다.
“로용 경, 잠시 자네가 지휘해야겠군.”
“중대장님, 지금 흉갑을 벗기겠습니다.”
“로용 경!”
“넵!”
“응급처치는 내가 할 테니 저기 떨어진 총이나 주워 주시게. 장전이라도 해 놓도록 하지.”
“아, 알겠습니다.”
“로용 경, 아니 로용 드 말리크 남작! 귀관은 블랑독 귀족의 피를 잇고 있지 않나. 타고난 지휘관이지! 부디 내가 쉬는 동안 잘 부탁하네!”
“맡겨주십시오!”
“쿠훅, 콜록!”
그웬넬이 기침하자 입가에 피가 묻어 나온다. 로용의 얼굴이 확 구겨진다. 지휘관 교육 중, 복부 상처로 인해서 입을 통해 피가 나오면 이미 위험한 상태라 들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웬넬 경!”
“아직도 있었나. 이제 전장을 살펴주게나.”
졸지에 중대를 지휘하게 된 로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본다. 방금 지붕 위에서 내려온 추가 병력으로 인해 뒤쪽 바리케이드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세 곳의 바리케이드, 어느 하나라도 무너지면 나머지를 지키는 의미가 없어진다.
“로용 경! 지원 요청입니다!”
“알았다, 지금 간다!”
어떻게 해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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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소리! 총소리가 들립니다!”
“어, 나도 들었다. 이제 멀지 않았군.”
멀리 방앗간 건물이 보인다. 주변에 개미 떼처럼 몰려있는 것은 아군과 적군이겠지. 여기저기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화약 연기가 어찌 보면 고상한 표현의 회화 미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까이에서 보면 아비규환의 지옥이겠지만.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장 쥐그 드 푸로니는 잠시 혼란에 빠져있었다. 북쪽에서 전투에 들어간 기병 정찰대와 자신의 부대가 가장 가깝기에 북쪽으로 직행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여울목의 전투에서 휘하 부대와 함께 나름 치열한 전투를 경험해 보았으나, 당시에는 콘도티에레의 지휘를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자신은 전술이나 작전을 이끌었다기보다는 주어진 위치를 필사적으로 지키고 특정 부대에 관한 부담이 가해지는 것을 막은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갑자기 전군의 선두에서 병력을 지휘하며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전장에 부하들을 투입해야 한다.
빌어먹을, 그가 실수하면 금쪽같이 키워온 부하 수백 명이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아주 잠깐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말을 듣고 델레망드의 재무관 자리를 물려받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럼 최소한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을 텐데.
“선두는 창병 10명과 총병 10명씩 임시 소대를 편성해서 진입한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조심해!”
머릿속 상태가 어떻든 간에 혀는 잘도 돌아간다. 주변에 둘러선 중대장들이 진지하게 자기 말을 듣고 있었다. 차츰 마음이 차분해져 간다. 새삼 콘도티에레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자신은 당장 눈앞에 뭐가 있는지도 몰라서 헤매고 있는데, 콘도티에레는 항상 전장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했지.
위험하다 싶으면 다른 전장이 움직여 위험에서 벗어난다.
기회가 보인다 싶으면 귀신같이 사격이든 돌격이든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아군이 그 기회를 잡아챈다.
대체 콘도티에레의 머리는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을까. 반의반이라도 흉내를 내기 위해서 노력해 본다.
“주변은 언뜻 보면 개활지로 보이지만, 개울과 습지가 가득하다! 한꺼번에 대규모 병력의 투입이 불가능하니 조심스럽게 나아가라!”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명령받은 최선임 중대장이 직접 돌입 부대를 편성하기 위해 부대의 선두로 향한다.
“그리고 자네, 방앗간을 지나 흐르는 개울의 깊이와 너비를 재어 주게. 어쩌면 그쪽으로 진출하게 될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쥐그 드 푸로니에게 현재 가장 두려운 점은, 늪지대의 혼란스러운 전장에 축차 투입되어 휘하 병력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이다. 차라리 싸운다면 개활지에서 대열을 짜서 벌이는 정면 대결을 하고 싶었다. 병사들도 힘든 훈련을 이겨냈고 쉽게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장님! 다른 연대에서 병력이 왔습니다!”
“무슨 소리야? 전령이 왔다고?”
“아닙니다, 보병들이 왔습니다.”
“어느 부대에서?”
“그게··· 이웃한 드 누아 연대로부터입니다.”
드 누아라니··· 거리가 꽤 떨어져 있을 텐데··· 설마 자신의 이동이 너무 느려서 후속 부대에 따라잡힌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불현듯 이 젊은 연대장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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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끈질기네! 개자식!”
임시 중대장 로용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침에 붉은 피가 섞여 있었다. 혀로 이빨을 훑자 어디가 터졌는지 쇠맛이 난다. 아까 적과 엉켜서 싸우다가 뺨을 부딪쳤는데 그때 찢어진 모양이다. 그래도 이빨은 전부 멀쩡한 것 같으니 다행이다.
간신히 바리케이드 넘어온 놈들을 전부 죽였다. 맨 먼저 넘어온 놈은 손을 짚고 넘어오는 순간 손도끼에 맞아 손가락을 두 개나 잃었음에도 짐승처럼 날뛰는 바람에 고생스러웠다. 진짜 성전인지 지랄인지, 종교에 미쳐서 반쯤 넋이 나간 놈들은 지독하게 움직인다.
절반은 바리케이드에서 적을 막고, 나머지 절반은 최대한 빨리 장전한다. 장전되어 발사하는 순간, 적이 우수수 쓰러지고 압박이 잠시 완화된다. 하지만 또 얼마 지나면 바리케이드 앞이 적으로 가득 차고를 무한 반복한다. 까딱 넘어가게 생기면 로용이 보낸 예비대가 문제를 틀어막는다. 그러다 급하면 로용이 직접 가문의 보검을 뽑아 들고 달려가는 것이다.
문득 깨달았다. 총병 상대로 드 말리크 가문의 보검은 아무 쓸모가 없었지만, 내가 총을 쓰니 보조 무기로 대활약하고 있었다.
“후방 바리케이드가 위험합니다!”
“이런 시발, 또?”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창고 뒤편으로 달려간다.
“막아!”
“옆이 뚫렸어!”
젠장··· 적은 옆으로 돌아오는 대신, 바리케이드의 측면 쪽을 무너뜨리기로 한 모양이다. 급조한 바리케이드이다 보니 흙을 충분히 파서 박아넣지 못했고, 원래 습지대라서 지반이 약했다. 아마도 밖에서 비탈 쪽을 파헤쳤거나 막대기나 밧줄 같은 것으로 걸어서 당겼겠지··· 결국 반쯤 삭아버린 널빤지와 부서진 마차 바퀴 따위로 대충 만든 바리케이드가 와르르 무너져 질척거리는 습지대 위로 넘어져 버렸다.
“으아아아!”
“이단자들을 죽여라!”
“주신이시여! 주신! 주신이시여!”
한 명씩 넘어오는 것도 벅찼는데, 이제는 비탈을 통해서 다섯 명이 한꺼번에 넘어왔다. 로용이 데리고 있는 ‘최후의 기동 예비대’는 딱 두 명이다. 그나마 지금은 곧바로 불려오느라 셋 다 장전도 되어있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돌격!”
생각할 겨를이 없다. 로용은 그대로 총을 팽개치고 칼만 들고 달려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총을 장전할 기회는 없어 보였다. 여기서 이놈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바리케이드의 아군들은 간신히 버티고 있다! 후방이 위험해지면 바로 무너질 것이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창날을 밑에서부터 걷어 올린다. 다행히 제대로 된 창이 아니라, 적당히 길고 곧은 어린나무에서 가지를 쳐낸 듯한 모양새이다. 오히려 탄력이 있고 가벼워서 튕겨내자 하늘을 향해 들린다. 그대로 칼을 휘두르자 두 놈이 움찔거리며 물러선다. 운이 좋다면 시간을 좀 더 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으윽, 크아아아!”
그를 따라온 병사는 로용만큼 실력이나 운이 좋지 못했다.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허벅지에 베인 상처를 입고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역시 최소한의 백병전 훈련밖에 받지 못한 용기병대의 일반 병사가 적 둘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도와주고 싶으나, 바로 눈앞의 적들도 무리이다. 아직 상처가 크지 않아 보이는데, 옆에서 도와주면 살 수 있는데! 빌어먹을!
타앙!
갑작스럽게 총소리와 함께 상처를 입은 병사를 마저 공격하려던 적 하나가 쓰러진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중대장 그웬넬이 벽에 기대앉은 상태로 총으로 적을 겨누고 있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고통을 억지로 참는 듯한 미소가 어려있다. 미소로 드러난 이빨에 자기 것이 명백한 피가 묻어있다. 그냥 봐도 위험해 보인다.
그래도 그웬넬의 도움으로 5:3 상황이 4:3이 되었다. 적은 놀라고 주춤거리고 있다. 나름 가문에 전해진 명검의 강도와 날카로움, 그리고 10년 넘게 수련해온 자신의 검술 실력을 믿어보자.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어리석었던 시절의 로용은 자신이 평생 기사로 살 줄 알았었다···.
“흐야압!”
오른손으로 코등이 바로 아래쪽을 단단히 틀어쥐고, 왼손으로 보석 장식이 튀어나온 자루 끝을 마찬가지로 잡는다. 그리고 두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크게 세로로 휘두른다.
빠각!”
“끄에에에엑!”
무의식적으로 창대를 휘둘러 막으려던 적병의 방어를 뚫고 어깨에 명중한다. 흉갑으로 보호받는 부위였지만 소용없었다. 날카로운 칼끝은 어깨뼈를 부수고 흉갑의 쇳조각을 쪼개며 어깨를 거의 반 뼘이나 파고 들어갔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은 피가 뿜어져 나온다.
“꺼져!”
“카아악!”
가가각, 흉갑에 긁혀 불꽃이 튀기며, 걷어차인 적병이 뒤로 나가떨어진다. 상처를 막아보려 하지만 하필 또 주변을 덮은 흉갑 때문에 막을 수가 없다.
“이단자 새끼가!”
잠깐 숨을 고르며 적의 욕설을 흘려넘긴다. 이런 전력을 다 한 일격은 여러 번 사용할 수 없고 심신의 소모가 크다. 그 때문에 적이 곧바로 달려들면 위험할 수 있었는데, 방금 동료의 어깨가 두 쪽이 나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시뻘게진 얼굴로 욕설만 퍼부을 뿐 섣부르게 덤비지 못한다. 애초에 둘 이상이 연계해서 덤비지 않았다. 이놈들이 얼마나 포악하고 용감한지는 몰라도 훈련받은 놈들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잠시 가빠졌던 호흡이 돌아오면서 자신감도 돌아온다.
“빨리빨리! 넘어와!”
그 잠시 돌아왔던 자신감이, 무너진 바리케이드 틈으로 적이 추가로 몰려오면서 다시 와르르 무너진다. 눈앞의 적 셋을 쓰러뜨려도 적은 끝이 없다. 갑자기 팔에 누적되었던 피로가 실감한다. 검을 몇 번이나 더 휘두를 수 있을까. 총 버리지 말고 얌전히 재장전이나 할 걸 그랬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아군이다! 쏘지 마!”
“트랑카벨 15연대에서 왔다!”
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방향에서, 생소한 내용의 외침이 들려왔다. 젠장, 뒤를 돌아보고 싶은데 앞의 적 때문에 볼 수가 없다. 마주 서 있던 적의 찡그려진 얼굴에서 분노가 싹 빠져나가더니, 경악의 표정이, 이어서 공포의 표정이 자리 잡는다. 적이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이건 확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원군이 도착했다!
“지형이 엉망이라 늦었다!”
방앗간의 뒤쪽 아무것도 없던 습지대 방향에서,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깨끗한 트랑카벨 전투복을 입은 보병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중대 깃발을 든 기수를 대동한 지휘관이 먼저 방앗간 건물을 지나쳐 달려오고, 총을 든 병사들이 그 뒤를 따른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모퉁이 너머로 흔들거리는 것은 분명 장창의 윗부분이다.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도착했어!”
로용이 외친다. 찔끔 눈물이 나온다. 이제 살았다. 그도 살았고, 절망적으로 싸우고 있던 용기병들 역시 살았다.
타타타탕! 타탕!
탕탕! 타타탕!
이번에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의 총소리이다. 혹시라도 자신이 표적인가 싶어서 뒤늦게 어깨를 움찔해보지만, 아니었다. 서쪽, 습지 방향이다. 무슨 수를 썼는지 습지 한가운데 섬으로 이동한 수십 명의 보병이 총탄을 퍼붓고 있었다. 바리케이드에 달라붙기 위해 빽빽하게 몰려들고 있던 적들이 예상하지 못한 측면에서의 일제사격을 받고 줄줄이 쓰러진다.
“으아악!”
“도망쳐! 망했어!”
“적이 끝도 없어!”
뚫릴 듯 뚫리지 않는 용기병들의 방어선을 계속 공격하던 적 역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통제되는 군대도 아니다. 그럴수록 변수에 약한 것은 당연하다. 순식간에 대열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제15 델레망드 연대의 전위부대일세. 그동안 수고했다.”
“네, 넵!”
“창병! 바리케이드를 넘으려는 적들을 몰아내라! 총병은 측면에서 달라붙은 적을 저격한다!”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