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다브농 방앗간 조우전
트랑카벨 군의 진격은 전혀 성급하지 않다. 절반은 행군이지만 절반은 퍼레이드다. 전장으로 이동하는 한편, 그 위력과 기세를 주변에 과시하는 목적.
물론 과시하고자 하는 주변은 적과 아군, 그리고 적도 아군도 아닌 이들을 포함한다.
적이야 당연히, 생각보다 블랑독의 수비 태세가 강건함을 알고 소극적으로 움직이거나 아예 진격을 포기하고자 하는 목적이 크다. 아군의 경우는 피난민을 포함해서 병사들 자신이다. 아군, 즉 자신들이 얼마나 웅장하고 강대한 군대인지 알려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무기가 좋고 전술이 완벽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은 병사들이니까. 지금의 위험을 극복하면 반드시 승리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그리고 적도 아군도 아닌 이들은··· 현 상황을 좌시하는 자들을 포함해서, 블랑독 연맹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한 블랑독 주민들도 포함이다. 정순파를 추방하고 중립을 표방한 지역도 가끔 있으니까.
아무튼 이런 목적으로, 진격은 하나의 거대한 행군대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대 단위로 특정 지점들을 징검다리처럼 점거하면서 나아가는 것에 가까웠다. 다른 연대가 진격하는 동안, 이미 목표를 점거한 연대는 휴식을 취하는 한편 측면을 방비한다. 이렇게 넓은 지역을 천천히 점거하는 형태로 진격하고 있다.
“콘도티에레! 전령이 왔어요!”
“그래? 어디서?”
“네에, 가장 북쪽 에크테인 산맥 남쪽까지 정찰하러 간 용기병 중대의 중대장 그웬넬 드 리스바쥬로부터네요?”
나는 서둘러 쪽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 북방의 늪지대를 수색하던 중 대형 곡물창고가 딸린 방앗간을 발견
- 수십 명 정도의 적병과 조우, 교전하여 승리
- 창고 내부와 인근 숲에서 300명 이상의 피난민 발견, 적에 의해 학대당한 것으로 추정
- 직후 적의 본대 추정 군세와 접적, 1천 명 이상
- 본 중대는 곡물창고를 거점으로 지연전 개시, 구원을 요청합니다
“첼레스티나! 가장 북쪽에 있는 연대가 뭐지? 보병 중에서 말이야.”
“네에, 에에···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입니다!”
“그럼 제15 연대에 최우선 명령으로 전령이 온 곡물창고 쪽으로 직행하라고 전령을 보내 줘.”
“네에, 콘도티에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8 기병 연대에는 구원 요청을 알리지 않아도 될까요?”
“거기에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혹시 우회하는 적이 있으면 그것만 막으라고 해. 습지라서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야.”
“네에, 전달하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생각보다 접적이 매우 빨랐다. 백 명 안팎의 소규모 부대라면 몰라도 천명이라면··· 단순히 블랑독 깊숙하게 들어온 약탈부대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어쩌면 적 주력부대가 내세운 전위부대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당연히 첫 전투는 포르망제 주변에서 발생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괜한 걱정일 수도 있지만 적이 더 남쪽까지 내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제15 연대가 북쪽으로 움직였으니, 이동 계획을 변경하고 전투 중인 아군의 후방을 받쳐줄 작전이 추가로 필요하다. 내 눈이 지도 위를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시 지휘소를 차려 놓고 느긋하게 지휘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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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 절대 먼저 쏘지 마!”
용기병 소대장, 로용 드 말리크 남작은 통나무 창고의 지붕 위에서 고개만 내밀고 건너편을 살피며 외쳤다. 널찍하고 단단한 통나무 건물의 지붕은 의외로 괜찮은 매복처였다.
아마도 평화 시에는 수많은 곡물 운송 마차들이 오갔을 평지로 적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느슨한 사각형 대형을 갖춘 적군이 다가오고 있다. 이동하는 거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대열은 무너지고 있었고, 지휘관들에게 딱히 밀집 대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어 보였다. 분명 제대로 훈련을 받지도 않았고 함께 싸운 경험도 얼마 없는 부대들이다.
다만, 숫자만은 빌어먹도록 많았다. 눈앞에 보이는 두 덩어리의 적만 해도 한 덩어리당 최소 200은 되어 보인다. 로용은 문득 중대원들이 가진 탄약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 보았다. 예비 탄약까지 포함해도 20발 남짓이니··· 정말 한 발 한 발이 아까운 상황이다.
그웬넬 드 리스바쥬 중대장이 거점 방어전을 결심한 직후, 병사들은 부지런히 이 방앗간과 창고 건물 주변을 요새화했다. 일단 각 건물을 연결하는 선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후방으로의 연락선을 지키기 위한 선을 그어 역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주변에서 발견된 모든 것으로 최대한 방어선을 강화했다. 건물 안과 주변에서 찾은 망가진 마차와 상자들은 아주 좋은 재료였고, 창고에 버려져 있던 빈 포대에 흙을 채워 모서리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제 적이 최소 무릎까지 빠지는 늪지대를 우회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포위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후방과 측면을 안정시킨 용기병대의 방어선은 한층 단단해질 수 있었다.
[다브농 방앗간 전투 삽화]
“방아쇠에서 손 떼! 화승 관리 잘하고! 필즈, 빌어먹을 불 꺼졌다!”
“조심해라!”
창고 지붕 아래서도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최대한 적을 끌어들여 공격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다행히 창고 내부 구조는 높게 난 환기용 창문과, 아마도 곡물을 높게 쌓아 올렸을 때 관리하기 위한 용도로 보이는 다락 덕분에 여기저기 저격수를 배치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피난민 두고 도망치면 아실 자작님과 콘도티에레께 혼난다!’
숲 속에서 계속해서 피난민들이 넘어오고, 대규모 적에 대한 소식까지 들었으나 망설이지도 않고 지연전을 준비하던 그웬넬 중대장은 멋있었다. 중대원 중 10명을 뽑아서 피난민들을 후방으로 유도하는 한편 중대원들의 말을 데리고 퇴각하도록 했다. 본래 용기병대는 도보 전투가 중심이다 보니 전투 중에는 후방에 말을 한데 묶어서 대기시키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후방에 배치할 수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이 지역은 지형이 지저분해서 말 타고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 타고 도망칠 일도 없다. 처음부터 후퇴할 생각 따위는 없기도 하고.
적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
탕!
멀리서 총소리 한 발.
타타탕! 탕! 탕!
적 대열 여기저기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건 안 맞는다. 훈련이지만 그래도 몇 발 실탄 사격 해봤다고, 로용은 확신이 들었다. 걸어오면서 산발적으로 띄엄띄엄 쏘는 총알은 거의 절대로 맞지 않는다.
‘사격은 쏘는 것 보다 안 쏘는 게 어렵다.’
훈련 도중 교관에게 들은 말이었다. 트랑카벨 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콘도티에레가 해준 말이라고 한다. 전장에 나와보니 알 것 같다. 옆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병사들은 미리 격철 내려놓고 방아쇠에서 손 떼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로용 자신은 왜 이렇게 침착한 거지? 기이할 정도로 냉정하게 전장과 주변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과거에 이미 전투를 경험해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당시의 로용은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도 없는, 특히 시끄럽고 악취와 연기를 뿜어내는 생소한 무기 따위는 ‘어차피 그거 안 맞으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던 꼬마였다. 겨우 반년 지난 일이지만··· 아주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
그 과거에는 호언장담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노련한 기사로 보였던 아버지 메세 드 말리크와 나란히 말을 달리던 자신이 있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견고한 전신 갑주를 입고, 말리크 가문의 깃발이 휘날리는 기병창을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자신이 있었다. 가문의 영토인 뱅티유 농장을 침탈한 침입자들을 향해 돌진하던 자신이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적 총병의 대열 앞으로 뛰어들던 자신이 있었다.
단 한 차례의 일제사격. 그 연기와 납의 폭풍이 아직도 기억난다. 자신이 살아남았던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지.
“사격 준비!”
“사격 준비! 격철 당겨!”
“사격 준비잇!”
날카로운 호령 소리가 로용을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사격 준비! 격철 당기고, 아직 쏘지 마!”
언덕 위에 배치된 15명의 병사에게는 로용 자신이 명령해야 한다. 나름 중대에서 가장 재장전에 능숙하고, 사격 성적도 좋다고 선발된 명사수들이다. 그들이 긴장으로 떨리는 손으로 화승이 물린 격철을 뒤로 당긴다.
로용 또한 엄지손가락을 뻗어 격철을 당긴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코일형 스프링의 힘을 잔뜩 머금은 격철이 가장 끝까지 젖혀진다. 파스스스··· 하는 화승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앞에서 기합인지 욕설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악다구니를 하는 적들이 잔뜩 있는데, 괴상하게도 화승 타는 소리는 잘 들린다.
“발사!”
타타타타탕!
적에게서 가장 가까운 소대, 두 창고 사이에 걸쳐진 바리케이드에 배치된 부대가 첫 사격을 시작한다.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바리케이드 앞쪽이 하얀 연기로 채워진다.
“우리도 간다! 발사!”
이번에는 로용이 외쳤다. 이번에는 서로 배치된 위치가 다르므로, 중대 단위 일제사격이 아니라 소대장들에게 사격 명령이 일임되어 있었다. 비탈진 통나무 지붕에 배를 깔고 있던 병사들이 방아쇠를 당긴다.
타타탕! 타타타탕!
“재장전하고 각자 사격해!”
명령을 내린 로용은 그제야 자기 총의 목표를 노린다. 총탄이 쏟아지자 평지로 쏟아져 나오던 적들의 선두가 픽픽 쓰러진다. 썩은 나무둥치처럼 쓰러진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총에 몸통을 맞은 인간은 비명다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쓰러진다. 아우성치는 적들 바로 뒤편에 갑옷을 입고 손에 든 칼을 허공에 원을 그리며 흔드는 자가 보인다. 딱히 지휘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왠지 그래 보였다. 가늠자 사이의 공간과 총구의 가늠쇠가 일자가 되도록 조준한다. 가늠쇠 끝이 갑옷 입은 적병의 배꼽 부분을 가리킨다.
‘기왕이면 갑옷 입은 놈을 먼저 노려라. 안 입은 놈은 근접전에서 칼침을 놔 주고.’
훈련 중에 교관이 했던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도 생각이 났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손가락에 힘을 준다. 방아쇠에 연결된 기계장치가 격철을 속박하고 있던 톱니바퀴의 제약을 풀고, 코일형 스프링이 풀리며 뛰쳐나간 격철이 고운 화약이 담긴 화문에 불붙은 화승 끝을 쑤셔 넣는다. 쉬익, 하고 도화선 역할을 하는 고운 화약에 불이 붙는다.
그 불은 총 열 안의 장약에 옮겨붙었고, 흑색화약 알갱이들이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지하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차례대로 불이 붙는다. 순간적인 점화가 만들어 낸 압력이 종이로 감싸인 납탄을 밀어낸다.
타앙!
총구에서 엄청난 연기와 화염과 함께, 납탄이 튀어 나간다. 총열 속의 점화 과정에서 이미 감싸고 있던 탄약포 껍질은 불에 타 바스러졌다. 둔한 금속성으로 빛나는 납탄만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다. 제법 긴 총열을 활주하면서 그나마 안정되기는 하였으나, 상하로 요동치던 납탄은 순식간에 허공을 날아가 적병의 흉갑에 명중한다. 명중 순간, 무른 납으로 된 탄환이 변형하면서 에너지를 전달하고, 잡철로 만들어진 싸구려 흉갑이 깨져 나간다. 기다란 엿가락처럼 변형된 탄환과 부서진 갑옷 조각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고 피가 터져 나온다. 총에 맞은 적병이 휘청이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간다.
“콜록, 퉤!”
정작 총을 발사한 로용은 자기가 맞췄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도 시간도 없다. 하얗게 뿜어져 나온 연기가 눈 앞을 가렸기 때문이다. 탄약포 끝을 이빨로 끊어 뱉고 총구에 화약을 부어 넣는다. 원래라면 화약을 넣기 전에 총구 청소를 한 번 해야 하지만 명령 내리느라 연사 속도가 느려졌으니 이번만 생략한다. 이어서 꽂을대로 탄약을 다지고, 다음으로 탄약포째로 구겨서 탄환을 총구에 쑤셔 넣는다. 혀끝에서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짜고 씁쓸한 화약 맛이 느껴진다. 탄약포 끝만 잘 물어서 뱉어낸다고 했는데도 이렇다.
“오 시발... 맞았네?”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하얀 화약 연기가 바람에 밀려 날아가자, 그가 아까 노렸던, 갑옷 입고 설치던 적병이 뒤로 벌러덩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작은 성공의 경험이 그의 가슴을 빨리 뛰게 한다. 생각해보니 총으로 적을 쓰러뜨린 것은 아까 적과 조우한 순간, 양동이를 들고 있던 적을 쏴 죽인 것이 처음이지만 제대로 원거리에서 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놈이 장교였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적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며 슬금슬금 물러서고 있었다.
탕! 탕!
산발적으로 총소리가 나는 가운데, 로용 역시 장전을 마무리한다. 꽂을대로 탄환을 끝까지 밀어 넣었고, 화문에도 화약을 부었다. 화승의 길이는 충분하고 불도 꺼지지 않았다. 격철을 다시 뒤로 당기고 다음 표적을 찾는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적이 물러난다!”
“멈춰! 사격 중지!”
로용 역시 총몸에서 뺨을 떼고, 주변에 사격 중지를 알린다. 30미터 정도 거리까지 다가왔던 적들은 총알을 연달아 얻어맞더니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하고 도망쳐 버렸다.
“아직 전투 안 끝났다!”
“빨리 장전 마치고 대기해! 또 온다!”
그러나 적이 완전히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선두에서 전의를 상실하고 우르르 무너져 도망치는 적과 교대하듯, 곧바로 다음 대열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더 강해 보인다.
방패막이 역할도 제대로 못 하는 아군을 욕하는 것인지, 어지러이 도망치는 선두 부대를 윽박지르는 것이 보인다. 후속 부대는 확실히 무장이 잘 되어 있다. 갑옷을 입은 자들도 훨씬 많이 보이고, 손에 든 무기도 좀 더 그럴듯해 보인다. 생각해보니 조금 전 선두 부대는 제대로 된 전투 무기가 아니라, 농기구나 작대기에 가까워 보이는 조잡한 무기를 든 경우가 많았으니까.
이놈들은 총알 몇 발 먹여준다고 호락호락 도망칠 것 같지는 않다.
“갑옷이고 뭐고 화약으로 다 뚫어 버리면 되지!”
로용의 호기로운 외침은 절반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저놈들이 방어선에 도달하면 절대 만만하지 않을 것 같다. 오기 전에 최대한 죽여야 한다.
“최대한 끌어들여서 끝장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