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전쟁하기 좋은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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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델레망드 보병 연대의 후위 부대가 나룻배를 타고 건너왔다. 재빠르게 배에서 내린 병사들이 다시 대열을 이루고, 중대장의 인솔에 따라 북쪽으로 향하는 행군 대열에 합류한다.
“저희 연대는 전부 건넌 모양입니다. 아실 경, 콘도티에레! 먼저 가보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곧 따라가겠습니다.”
제15 연대장 쥐그 드 푸로니가 부하들과 함께 멀어져간다.
공교롭게도, 블랑독 연맹군의 집결지는 여울목의 전투가 있었던 초원이다. 전투가 벌어졌던, 아군이 방어선을 폈던 언덕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장소에, 블랑독 전역에서 모인 대군이 집결하고 있었다.
블랑독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군대가 모이고 있었다. 수적으로 따지면 라솔과의 전쟁을 위해 집결했던 선대 엘랑키아 국왕이 이끌던 군대가 더 많기야 하겠지만, 블랑독이라는 지역에서 모인 특별한 경우니까.
“콘도티에레··· 지평선 끝까지 천막이 이어지네요.”
“하하, 저도 이렇게 많은 병력을 한꺼번에 지휘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모두 아실 경의 부하들입니다.”
“으으··· 긴장됩니다!”
“지금까지 잘하고 계시니, 분명 앞으로도 잘하실 겁니다.”
아실은 불안해하다가도, 이내 마음을 먹었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꼿꼿하게 선다. 지금 아실은 누가 봐도 대군의 총사령관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겨울 동안 키도 조금 자란데다가, 몸에 꼭 맞는 군복과 갑옷, 그리고 내가 선물해준 이각모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각모, 다시 말해 나폴레옹 모자는 내가 일부러 카르카냑의 재단사에게 주문을 넣어 만들었다.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신신당부해서 내가 원하는 모양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에오르크 레타일에게 수석총의 설계도를 그려줄 때보다도 신경을 썼던 것 같네.
이 세계에 유행하는 남성용 모자와는 좀 다른 모습이라 불편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매우 마음에 들어 해 항상 쓰고 있다. 주변 사람들도, 심지어 아쥬흐 조차도 멋지다며 어디서 난 모자인지 물을 정도였다. 크으, 역시 나폴레옹 간지의 클래스는 영원하다. 장담하는데, 이번 전쟁이 끝나면 이 모자 유행할 거다. 이 시대에도 특허가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 사이,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의 선발대가 배를 타고 건너왔다. 이들 역시 재빨리 물가를 벗어나 중대별로 새로운 대열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침에 첼레스티나가 작성해준 블랑독 연맹군의 리스트를 펼친다.
[트랑카벨 군]
정규군 기병 2700, 보병 9600
보조군 기병 3300, 보병 2940
제7 카르카냑 기병 연대 1000
제8 벨모제 기병 연대 1000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 700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 1200
제11 벨모제 보병 연대 1200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 1200
제16 몽세나 보병 연대 1200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 1200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 1200
제 21 카르카냑 보병 연대 1200
제 22 몽세나 보병 연대 1200
슈토르히 연대 보병 1140
네그라타 연대 보병 1800 기병 100
프리즈마라 연대 기병 3200
[드 누아군]
연합군 기병 480, 보병 2300
누아 기병 연대 480
북부 보병 연대 1100
남부 보병 연대 1200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대군이다. 드 누아에서 지원해주는 병력은 2천 명 안쪽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스키비르 강 건너, 라솔 블랑독 영주들의 지원으로 상당한 병력이 된 모양이다.
“혹시 북쪽의 드 레뮤즈 백작의 침공에도 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저희 가문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드 누아에 맡겨주십시오.”
이만한 병력을 파견하면 드 누아 영지의 방어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걱정이 되었지만,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의 묘하게 자신만만한 발언이 어쩐지 믿음직스럽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어쩌면 두 백작가 사이에 밀약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드 누아 백작이 최소한의 수비군을 빼놓고는 영토를 비우고 출전해 왔으니 말이다. 물론 브롱보카쥬 전투 당시를 생각하면, 핵심 정예군 일부는 수비군으로 돌리고 대신 신병과 라솔 블랑독 출신의 동맹군들로 채운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투자는 분명하다.
“소집에 늦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앞으로, 트랑카벨 가문과 블랑독을 위해서 견마지로를 다 하겠습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미카토 남작님!”
아실이 네그라타 연대를 이끌고 합류한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에게 악수를 청하자, 그는 다소 부끄러운지 몸을 움츠렸다. 분명, 남작이라는 새로운 작위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겠다.
석방 서약에 서명한 직후, 미카토는 소수의 측근과 호위병들만 데리고 알코라즈 남작령으로 돌아갔다. 몰래 잠입했나 싶었더니, 그것도 아니고 대놓고 정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미카토의 대담한 도박은 대성공했다. 오히려 몰래 숨어들어서 음모를 꾸미거나, 타르벤도 단장의 납치나 암살을 노리는 어설픈 짓을 했으면 반발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전 단장인 타르벤도 남작의 평판이 땅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유리하다 생각했던 전투를 완전히 말아먹은 데다가, 앞장서서 도망치는 바람에 일시적인 패배를 전면적인 패배로 바꿔 버렸다. 결국 출전했던 동료들은 다섯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에 비해서 미카토는 패배의 순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후위를 맡아 처절하게 싸웠던 부단장이다. 본대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적진 한가운데 남겨져 장렬히 전사한 줄 알았으나,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 평소 감정이 있었다고 해도 눈물 나게 반가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딱히 미카토가 입을 열어 뭐라고 할 필요도 없었다. 철저하게 박살이 나 전멸에 가까운 손해를 입었다는 패배감, 동료들을 죽게 내버려 두고 무질서하게 도망쳐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던 용병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든 용병 무리는 알코라즈 영지로 살아 돌아와 스스로도 면목이 없었는지, 영주관에 칩거하고 있던 타르벤도를 포위했다. 영주관을 지켜야 할 친위병들 역시 몰려든 용병들, 특히 살아 돌아온 미카토를 보자 놀라며 무기를 버리거나 자신도 대열에 합류했다. 삽시간에 타르벤도의 편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아니, 단 한명, 미카토의 친누나인 누에세바 남작부인이 타르벤도의 곁에 남았다고 한다. 첩들도 하인들도 대부분 도망치거나 숨은 상태에서 정문에서 나와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을 맞이한 그녀는 ‘용병들의 처지는 이해하지만 모든 책임을 타르벤도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동생과 용병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 모든 상황을 종료시킨 것은 저택 안에서 들려온 한 줄기의 총소리였다.
마지막 용기와 염치를 짜내 자기 머리를 쏜 타르벤도의 죽임이 확인 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알코라즈 영지 전역에서 울려 퍼지는 남작 미카토의 이름이 이 쿠데타 아닌 쿠데타가 무사히 마무리되었음을 증명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타르벤도의 장례식은 누에세바와 미카토 남매와 아주 소수의 살아남은 고참 용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끝났다.
남작이 된 미카토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드 누아 가문과 주변 영지, 특히 라솔 블랑독 계열의 귀족들에게 사과한 것이다. 선대 남작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다음으로 귀환한 포로들을 재편성하고 무장시켜 신생 네그라타 용병단을 재건했다. 새 고용주인 트랑카벨 가문은 꽤 괜찮은 품질의 중고 장비들을 지원해줬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이 장비들의 상당수는 브롱보카쥬에서 노획된 것이다.
여전히 드 누아 가문의 병사들과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절대로 적대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가스텔 백작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드 누아 백작령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행군 중에도 별 일은 없었다는 모양이다. 뭐··· 포로 석방 비용과 전장 노획품으로 드 누아 가문이 꽤 큰 돈을 만진 덕분이기도 할 테고. 큰 돈은 때로는 증오심을 희석시키기도 한다.
“콘도티에레, 프리즈마라 연대는 어떤 분들인가요?”
“그룬발트 동부 변경 출신의 기병들입니다. 조상들이 대초원의 유목민 출신이라고 하더라고요.”
“정말인가요? 털가죽 옷을 입고 활을 쏘나요”
“하하, 그런 녀석들도 있지만, 보통은 그냥 그룬발트 문화에 익숙해진 경기병들입니다. 평범하게 그룬발트나 주디칼리 출신인 구성원들도 많아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유목민인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쉽네요!”
“진짜 활 들고 다니는 친구들도 있긴 합니다. 그쪽 단장과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1년 단위로 장기 계약을 제안했더니 좋다고 달려오고 있지요.”
다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제 곧 봄이라고는 하지만, 늦겨울의 거친 바다 때문에 배가 늦어져서 그런 모양이다. 뭐 딱히 걱정되지는 않는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격화되기 전에 오겠지. 뭐. 아무튼 3000명이 넘는 경기병이다. 오합지졸이라 잘 훈련된 트랑카벨 기병 연대와 같은 활약을 기대할 수야 없겠지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름 기병 강국인 엘랑키아 왕실이 혹시라도 정신 나간 기병 물량을 쏟아 부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기동성을 제한 받는면서 싸우는 것은 괴로우니까.
아무튼 전부 집결하면 2만 가까이 되는 대군이다. 아무리 나라도 이 정도 병력의 지휘권을 가지게 되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떤 적이라도 싸워서 이길 수 있을것 같다. 블랑독을 두고 벌이는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지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소심하게 몸을 사린다.
블랑독 연맹군이 집결한 이후로 진행하는 첫 전략 회의이다. 모두의 힘을 모았기에 허투르게 써 버릴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만약에라도 이 군이 허무하게 패한다면 블랑독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된다.
모두가 불굴의 정신, 불패의 신념을 이야기 할때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분들이 힘을 써 주신 덕에 대군이 집결했습니다. 그만큼 지휘관 여러분들의 역할도 중요해졌습니다. 블랑독 연맹군의 맹주로서, 또 트랑카벨 영지군의 사령관으로서 앞으로 아군의 전략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회의의 발제는 아실이 시작한다. 다행스럽게도 이 호감 가는 외모와 성격의 미소년 사령관은 연맹군 소속의 모두와 잘 지내는 모양이다. 아실이 조금씩 성장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 소년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다. 트랑카벨의 다른 사람들처럼.
“작전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나설 차례. 나는 막대기를 들고 벽에 걸린 블랑독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한다.
“먼저 두 가지 전제를 두고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적은 동쪽과 서쪽 두 군데에서 온다. 둘째, 로데브 강은 절대 방어선으로서 사수한다.”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모여있는 회의 내부 분위기는 무척 진지했다. 나는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을 이어간다.
블랑독의 동북면은 이단 토벌 성전군 사령부가 있는 타비뇽에서 가깝다. 때문에 드라멜른 기사단을 비롯한 종교기사단이 진격해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직은 드라멜른 이외의 기사단 소식은 없지만, 법황청에서 어떤 놈들을 더 보낼지는 알 수 없으니까.
우선은 이 방향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대규모의 오합지졸들, 전장 순례자들이다. 이렇다 할 소속 없이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으로 참여한, 천국행 티켓을 탐내는 머저리들. 조직된 군대에 비해서 전투력은 형편없겠지만 숫자만은 많고 끈질기며, 형편없는 식사와 잠자리에도 끈질기게 버티며 블랑독을 더럽힐 것이다. 아쥬흐가 모아준 상인 네트워크의 목격 정보에 의하면, 타비뇽 부근에 집결한 이 역겨운 전장 순례자들은 2만 명이 훌쩍 넘는다고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 멍청이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기만 해도 전부 쏴 죽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2만이나 되니까요.”
잠깐 좌중에서 웃음 소리가 들렸지만, 이는 현실적인 공포이자 경고이다. 화약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다. 이런 놈들도 죽이자면 화약 써서 총을 쏴야 하니까. 어찌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멍청이들이 위협적인 이유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쉽게 죽어주는 것도 아니고.
다음으로 서북면은, 말할 것도 없이 엘랑키아 본토와 가까운 방향이다. 이전의 기사도 연합인지 뭔지가 그랬듯 엘랑키아 내부에서 편성되는 군대는 이 방향에서 올 것이다. 솔직히 질적으로 걱정되는 것은 이 방향에서 오는 병력이다. 특히 이번에는 엘랑키아 왕실이 나서 성전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니··· 걱정이 많이 된다.
“다만, 이 서쪽에서의 변수 또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병력 소집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입니다.”
귀족 군대 모으는 것이 그렇다. 어지간히 세력을 가진 왕이나 귀족들은 돈을 좀 쓰더라도 자기 직속 기간 병력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집결지까지 거리도 제각각,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와 적극성도 제각각인 귀족들이 한 군데 모여서 군대를 결성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아마 작년에 허세 부린다고 성전 참여를 맹세해놓고 정작 해 바뀌니까 귀찮거나 무서운 귀족들도 있을 테고 말이지.
“이미 작년부터 모여서, 열악한 식사와 뼈에 사무치는 추위도 견디면서 출전만을 기다리던 타비뇽의 무리와, 겨울 동안 따뜻한 곳에서 지내면서 슬슬 전쟁하러 가볼까 하던 귀족들 사이에는 적극성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시간 차이를 잘 활용해야 한다. 뭐 내선의 이점이니 이딴 소리 하면서 순서대로 섬멸전 노리는 무모한 짓이 아니라, 전선에 가해질 불균형한 압박을 잘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디 정신 못 차리고 단기 섬멸전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두번째 변수는··· 바로 드 레뮤즈 가문입니다.”
슬쩍 가스텔 백작 쪽을 바라본다. 딱히 티가 나지는 않는다. 과연 가스텔 백작은 레뮤즈의 라몽 백작과 무슨 관계일까.
“레뮤즈의 라몽 백작은 이번 성전에 강제로 참여하게 된 케이스입니다. 믿을만한 정보통에 의하면, 왕실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심하게 역정을 내서 저택의 고용인들이 모두 긴장했다고 합니다."
아쥬흐가 말하는 `믿을만한 정보통`이란 누구일까. 어쨌든 아쥬흐가 지속해서 드 레뮤즈의 정보를 얻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녀가 보증한 정보라면, 출처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겠지.
내 말을 들은 가스텔 백작이 천천히 입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