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74화 (74/556)

15-3. 전쟁하기 좋은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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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베트르 드 랑두제, 이제는 은퇴한 전 남작은 자신의 오두막 문간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어설프지만 그가 처음으로 만든 가구였다. 영지 운영에서 은퇴한 이후, 외딴 농장에서 혼자 살면서 소일거리로 잡다한 가구를 만들고는 했었다.

지난겨울은 제법 추웠다. 때문에 가끔씩 현 드 랑두제 남작인 아들이 찾아와서 겨울 동안이라도 랑두제 성에서 지내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원래 주인이 꼼꼼하게 지어 놓은 오두막은 충분히 따듯했고 땔감도 충분히 모아 놨었으니까. 원래 썩 여유가 없는 가문이기도 해서, 거친 생활에는 나름 익숙하기도 했다.

새해가 되면 작게나마 농사를 지어 볼까. 아니면 말들을 교배시켜 망아지를 키워 볼까. 나름 즐거운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본다. 모든 부담을 내려놓으니 시간이 충분히 남아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베트르 경.”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무도 없는 외딴 농장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목소리가 아는 목소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다시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했던 상대.

“라몽··· 백작님?”

“주군 이름은 잊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 정신은 멀쩡한 것 같군.”

오두막 옆에 서있는, 찡그린 얼굴에 살집이 좋은 사내. 그는 드 랑두제 가문의 상위 영주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낯익은 또 다른 사내가 서 있었다.

“소베트르 드 랑두제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신은··· 그··· 기사도 연합의 책사였던 자가 아니오?”

“맞습니다, 소베트르 경.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제 소개를 드린 적이 없던 것 같네요. 아인멜츠 피노르 폰 자이트리츠라고 합니다.”

현실감이 없었다. 소베트르로서는 이 특이하게 긴 그룬발트 청년의 이름보다도, 대체 이 두 사람이 자신의 오두막을 찾아왔는지가 궁금했다.

소베트르는 실패한 인간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실패했고, 전투에서 실패했고, 자신의 영지 운영에 실패했으며, 더 나아가 주군인 드 레뮤즈 가문을 섬기는 것도 실패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소란을 일으켰고, 이것이 불필요한 분쟁으로 비화했다. 그 결과는 여울목의 전투라는 참패였다.

결국 라몽 백작의 지시에 따라 기사도 연합인지 뭔지가 해산한 이후, 비참한 꼴로 자기 영지로 돌아왔다. 직접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지만 황폐화되어있었다. 부끄러움을 느낀 그는 모두 자기 잘못이며,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공식적으로 주변에 전달하고 남작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자기보다 선량하고 똑똑한 아들은 더 나은 통치를 할 것이라 믿고.

가문의 성을 떠나 이렇게 은둔한 것은 아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주군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는 이유가 가장 컸는데··· 이렇게 찾아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라몽 백작님···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이 없을 만 하군! 이런 촌구석까지 직접 찾아오게 하다니!”

분명 라몽 백작은 매우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소베트르가 예상한 이유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마침 작위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지? 잘 됐군.”

“네에··· 저보다 똑똑한 자식 놈입니다. 백작님을 잘 섬기리라 믿습니다.”

“뭐 그거야 보면 알겠지! 손바닥만 한 영지 운영인데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 그보다, 오늘은 귀경에게 용무가 있소. 최대한 빨리 신변을 정리하고 레뮤즈로 거처를 옮기시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레뮤즈의 내 궁정으로 출근하라는 말이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소베트르는 눈만 끔뻑이다가, 라몽과 아인멜츠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라몽은 짜증이 나서 찡그린 얼굴, 아인멜츠는 특유의 확신을 가진 미소이다. 대체 이 두 사람의 조합은 어쩌다 이루어진 것이며, 심지어 자신을 찾아온 연유는 무엇이며, 갑자기 레뮤즈로 출근이라니···.

“소베트르 경, 외람되오나 제가 소베트르 경을 새로 편성되는 드 레뮤즈 영지군의 기병 지휘관으로 추천했습니다!”

아인멜츠가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여울목의 전투에서 어리석게 굴다가, 기사도 연합의 기사들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전투를 말아먹은 것은 아인멜츠가 가장 가까이에서 보지 않았던가?

“올 거요 안 올 거요? 그대는 은퇴했어도 여전히 내 신하가 아닌가?”

“배, 백작님! 저는 이미 한 번 백작님을 실망하게 한 어리석은 신하입니다.”

“내가 실망했는지 안 했는지는 내가 결정하오! 그냥 트랑카벨이 얼마나 무서운지 털리면서 몸으로 배운 인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오!”

“아··· 네, 넵!”

“그래서 올 거요? 그대가 안 오면 드 랑두제 남작령에서도 병력과 물자를 공출할 수밖에 없는데.”

“제, 제가 가겠습니다. 드 랑두제 영지는 지금 복구 중이라서 여력이 없습니다.”

“뭐 그렇겠지. 기사도 연합인지 메뚜기 연합인지 와서는 다 뜯어먹고 갔을 테니, 쯧. 알아서 레뮤즈 성으로 와서 보고하시오!”

할 말을 다 끝냈는지 라몽은 몸을 돌려 가버린다.

“소베트르 경, 다시 함께 일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반대로 아인멜츠는 소베트르에게 다가와 양손을 꽉 잡는다. 그의 군인답지 않은 곱상한 얼굴에는 정말 기쁘다는 표정이 가득하다. 도저히 자신을 농락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나는 이해가 잘 안 가는구려.”

“지난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저는 고용주에게 버려져서 잠시 떠돌이가 됐었습니다.”

“그랬지, 그래서 랑두제 성에서 잠시 머물지 않았소?”

“예, 그 직후에 라몽 백작님을 만났고, 저를 거두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드 레뮤즈 영지군을 위해 지혜를 짜내고 있습니다.”

“허어··· 그거 다행이구려.”

“예! 그래서 영지군의 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소베트르 경이 필요합니다!”

“내가··· 내가 어떻게 실패하는지는 책사 경이 바로 옆에서 잘 보지 않았소?”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보이는 법입니다! 전투가 유리할 때는 유리해서, 불리할 때는 불리해서 정신을 못 차리던 수많은 귀족 기사들 가운데 소베트르 경 만이 지휘관의 역할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허허···.”

갑작스러운 칭찬이다. 가만히 당시의 자신을 되돌려 생각해본다. 역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아등바등한 것 외에는 없지 않은가.

“승패는 병가지상사, 한 번의 패배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저희 자이트리츠 가문에서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높이 평가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주군께서 부르시니 가기는 하겠지만···.”

“그럼 레뮤즈 성에서 뵈면 다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저는 백작님을 따라가야 해서 이만!”

그렇게 휙 하고 말에 올라 벌써 저만치 멀어진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을 따라가 버린다.

“...알겠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대답을 하면서, 소베트르 드 랑두제는 한숨을 내쉰다. 느긋하게, 모두에게 잊힌 상태로 은퇴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가 지은 죄는 그를 편안히 쉬도록 놔두지 않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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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뭐야 저 자식?”

상업도시 타비뇽의 중앙 거리를 곰처럼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걷고 있었다. 그를 본 주민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를 내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덩치만 클 뿐 아니라,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그럭, 절그럭.

그가 걸을 때마다 소름 끼치는 쇠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중무장병이 내는, 갑옷 부속 스치는 소리나 무기 부딪히는 소음과는 달랐다. 기괴하고도 신경을 긁는 소리는 남자의 허리띠에 매달린 도구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이다.

도대체 무슨 용도일까. 집게처럼 생긴 도구, 꼬챙이처럼 생긴 도구, 죔쇠처럼 생긴 도구, 공처럼 생긴 도구. 도대체 용도를 알 수 없는 쇠로 된 도구들이 과시라도 하듯 가느다란 쇠줄에 매달려, 두꺼운 가죽 앞치마 위에서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소리 때문에 사람들이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기괴한 소리는 전주곡에 불과했다.

그의 얼굴의 절반은 화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절반은 화상 흔적 때문에, 절반은 짧게 깎았기 때문에 그는 머리에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었다. 이마에서 뺨까지 덮은 화상은 팽팽하게 당겨지며 상처가 없는 쪽의 피부까지 일그러지게 했는지, 한쪽 눈이 기괴하게 당겨져 양쪽 눈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간신히 제 역할을 하는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는 이상한 빛을 발하며 지나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노려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피할 정도이다.

유난히 두껍고 희미한 얼룩으로 뒤덮인 가죽 앞치마와 매달린 괴상한 도구들을 빼면, 평범하게 온몸을 덮은 철갑옷을 입은 중장병의 모습이다. 그저, 유일하게 피부가 드러난 부위인 얼굴이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을 뿐.

남자는 남들이 자신을 피하건 말건, 뒤에서 수군거리건 말건 거리를 부지런히 걸었고, 도착한 곳은 타비뇽 중앙 광장에 인접한 성전이었다. 성전 안에 높으신 분이 있는지, 입구를 화려한 복장을 한 법황청의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누구냐!”

다소 삐딱한 자세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근위병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흉측한 몰골의 남자를 보고 기겁하며 들고 있던 창과 검을 겨눈다. 남자는 자신에게 겨누어진 날붙이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품속에서 종이를 꺼낸다.

“모스탈 수도회의 수도원장을 맡은 네부카디 델 카스트로소요.”

흉측한 외모와 달리, 남자의 목소리는 중후한 울림이 있는 미성이었다. 꺼리는 태도로 신분 확인서를 받아든 근위병이 내용을 읽더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수, 수도원장? 그런 꼴로?”

“어이, 입 조심해!”

“죄송합니다,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원장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추기경 예하께서는 기도 중이시라 잠시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럼 기다리지요.”

근위병들이 자리를 비키자, 네부카디 수도원장은 거침없이 성전 안으로 들어선다. 벽과 천장에 그려진 백년 이상 묵은 섬세한 성화와 벽감마다 놓인 성인들의 석상 사이에 머물러 있던 고요함을 기괴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밀어낸다.

넓은 성전은 완벽하게 비어 있었다. 그 한 가운데, 제단 앞에는 단 한명,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이 무릎을 꿇고, 지팡으로 땅을 짚은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자세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 한참 뒤에 멈춘 네부카디는 묵묵히 기도가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 없이 기도하던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반대로 네부카디가 부복한다.

“왔는가, 네부카디.”

“예, 추기경 예하의 부름에 응해 타비뇽에 도착했습니다.”

“고생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추기경께서 미천한 저희를 필요로 해 주시니 한달음에 달려왔을 뿐입니다.”

추기경은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해 부복한 네부카디를 일어서게 한다. 놀랍게도, 그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떠올라 있다.

“블랑독의 이야기는 들었느냐?”

“예. 어느새 정순파라 자칭하는 이단들의 땅이 되었다 들었습니다.”

“그 뿐 아니다. 얼마 전부터는 멋대로 트랑카벨 가문의 여식을 성녀라 부르며 추앙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런! 교단의 가르침을 어긴 인신숭배라니! 실로 마귀의 행위가 아닐 수 없도다!”

분노한 네부카디의 외침이 성전의 내부를 쩌렁쩌렁 울린다. 마치 성악가와도 같은 발성.

“작년, 앞서서 저들을 계도하려던 보세낙 수사가 트랑카벨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아아, 보세낙 드 리몽 선배님께서!”

“항시 길 잃은 교인들을 생각하며, 목자 된 도리를 다하려던 훌륭한 아이였다. 하지만 이리 가버릴 줄이야··· 충분히 도와주지 못했던 것이 원통하구나.”

“선배님의 복수는 이 네부카디가 반드시···.”

“어리석은 녀석! 어디 성스러운 주신의 일을 하다 스러져간 아이의 넋을 기리는 이가 감히 ‘복수’를 입에 담는 것이냐!”

추기경의 꾸지람에 소스라치게 놀란 네부카디가 무릎을 꿇는다. 성전의 대리석 바닥에 철갑옷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난다.

“실언을 했습니다. 추기경님···. 동부에서 이교도들과 지내다보니, 어리석음이 옮아 온 모양입니다···.”

“네 마음은 이해하나, 그런데도 성스러운 주신의 일을 하는 자는 복수 따위를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 추기경 예하.”

“내 너에게 임무를 맡기고자 한다. 괜찮겠느냐?”

“옛, 기꺼이!”

“모스탈 요새수도원의 원장, 이단심문관 네부카디여!”

“예, 추기경 예하!”

“성전군의 선발대를 이끌고 블랑독의 경계를 넘으라! 그곳에서 주신의 복음을 전하고, 마귀들을 솎아내어 주신의 심판을 받도록 하라!”

아르누아 추기경이 두 팔을 벌려 선언하듯 말했고, 무릎을 꿇고 명령을 들은 네부카디는 두 손을 모아쥐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양 쪽이 다른 모양의 두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 네부카디 델 카스트로소, 신의 종이 된 이후로 이처럼 강복했던 적이 없나이다. 물론 따르겠나이다!”

“좋다. 네부카디여, 성전군 사령부의 라모리 스텐던을 찾아가거라. 법황 성하께서 사령권을 그에게 위임하셨으니, 그에게 선발대의 병력을 요청하도록 하여라.”

“따르겠나이다!”

뺨을 따라 흐르는 감동의 눈물을 닦아내는 것도 잊은 채, 작별 인사를 올린 네부카디는 성큼성큼 성전을 나선다. 환희에 빠져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그의 얼굴은 한층 흉측했기에, 입구를 지키던 근위병들이 기겁한 것은 물론이다. 그들의 지휘관은 혹시라도 그의 흉흉한 모습을 보고 추기경에게 위해를 가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어 성전 안으로 들어갔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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