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69화 (69/556)

14-1. 전쟁하기 나쁜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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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토와의 면담을 무사히 마친 우리는 탑을 나와 누아 저택 본관으로 향한다. 아침 일찍 나왔지만, 면담과 아쥬흐와의 논의로 꽤 많은 시간을 썼기에 벌써 한낮이 되어있었다. 올 때의 한산함과 달리 길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으음, 이른 아침을 대충 먹었더니 출출한데. 벌써 아침 시간은 한참 지나서 저택 부엌에서 밥 차려달라고 하기는 미안하다. 어디 식당이라도 찾아볼까?

“아쥬흐 양, 첼레스티나, 우리 어디 식당이라도···.”

“성녀님···.”

갑자기 우리와 마주친 아낙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오른손 끝을 이마에 대고 허리를 깊이 숙인다.

“성녀? 성녀님?”

“뭐야? 정말 성녀님?”

“성녀님!”

아낙네의 말을 듣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작은 군중을 이루었다. 큰길 한복판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사람을 밀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지나갈 수 없어졌다.

“으아··· 여러분···.”

아쥬흐는 이번에도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거··· 아넥시에서 완성자 어쩌고 하면서 사람들 몰려들었을 때가 생각나네.

“성녀님! 저희 조카가 어제까지 열이 펄펄 났었는데, 성녀님의 손길을 받고 씻은 듯이 나았어요! 감사합니다!”

“성녀님! 누아를 지켜주시는 거죠?”

“성녀님, 성녀님···.”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이제 정말 사람의 벽에 갇혀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 심지어 사람들은 나나 첼레스티나에게도 몰려들어서 손이나 신발을 만지려고 한다. 아마 우리를 성녀의 종자 정도로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위해를 가하거나 몸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그래서 차마 밀쳐낼 수가 없었다. 뭣보다, 당사자인 아쥬흐가 참고 있는데 우리가 급발진해버릴 수야 없지. 으으, 이거 어쩐다.

그나저나 아넥시에서야 정순파 신도 비율이 상당히 높은 동네였다고 쳐도, 드 누아 백작령은 상당히 보수적인 지역으로 정순파가 별로 없다고 알고 있다. 딱히 탄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도 아쥬흐를 성녀라 부르니 참 신기한 일이네.

아넥시의 정순파 신도들이 불렀던 성녀, 즉 완성자는 교단 조직과 서품 성직자를 부정하는 정순파 교리에서 일반 신도들을 이끄는 종교 지도자를 지칭한다. 덕을 쌓아 신도들의 모범이 되는 ‘완성된 인간’으로 주신의 신성을 아주 일부라도 체현한 인간이다.

하지만 누아 성의 일반적인 주민들은 정순파가 아니라 전통적인 주신교 신자들이다. 이들에게 성녀란 신의 축복을 받은 독실한 신녀들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단의 심사를 통해’ 시성 받은 이들만 성자나 성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으음··· 물론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성자로 받들고 나중에 시성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하면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는 행동인데.

뭐, 교리 따위는 집어치우자. 거 내가 10년 넘게 살면서 신성모독적인 생각만 수백 번은 했을 텐데 아직 벼락 안 맞았잖은가.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고귀한 신분의 아름다운 처녀가,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 사이에 내려와, 아군도 적군도 상관없이, 손을 잡아주고 눈을 마주치며, 아픈 곳을 묻고 치료해준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앓던 이들이 편안히 잠들고 피를 흘리던 이들의 상처가 봉합된다.

이게 성녀지 시발 존나 객관적으로 10점 만점에 12점짜리 성녀다. 가스텔 백작에게 했던 제안의 내용을 조금 고쳐보자면, 성녀로 인정받아서 성녀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성녀의 행동을 하니까 성녀로 모셔지는 것이겠지.

와 근데 성녀고 뭐고 다 좋은데··· 사람이 벌써 한 백 명은 되는 것 같다. 이 자리 어떻게 벗어나지···.

“누아 주민 여러분, 길을 내세요!”

다행히 구원의 손길이 외부에서 왔다.

“성녀님이 지나가십니다. 자, 여러분, 잠시만!”

“잠시만 비켜주시죠!”

힘들었던 전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우리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의 병사들이다. 복장으로 봐서는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의 병사들인가? 10여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두 줄로 서서 길을 만들어 낸다. 정말 고맙네!

“성녀님을 위한 길을 내주시죠.”

말 그대로 부드러운 카리스마. 제31 정찰 연대는 블랑독 북부에서 피난민 유도와 호위 활동을 꽤 오래 해서인지, 민중들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해 보인다. 절대로 선을 넘지 않으면서 은근한 권위를 보여주어 통제한다. 사람들도 성녀를 보러 왔을 뿐, 딱히 폭동이 일어났던 것도 아니다 보니, 얌전하게 좌우로 물러나며 길을 만든다.

“고마워요, 로베르 연대장. 어깨에 상처는 괜찮으세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아, 연대장이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제31 정찰 연대 간부들이구나. 어쩐지 하나같이 덩치도 좋고 늠름하더라. 로베르는 지난 전투에서도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먼 거리에서 발사한 총알이고 갑옷이 막아줘서 큰 상처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어제 아쥬흐가 마지막으로 치료했던 환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간부들이 막아주는 사이 서둘러서 저택 쪽으로 이동했다. 경비병들의 인사를 받고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히이이,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것은 처음이에요! 아쥬흐 양은 성녀님 이셨구나!”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네에, 앗! 그런가요?”

“가끔 치료해 드리면 성녀로 불러주시는 분들이 있네요··· 저야 그렇다 쳐도, 일반 주민분들은 잘못하면 이단으로 오해받기 쉬울 텐데···.”

“그렇게 성녀처럼 예쁘게 생각하시고 행동하시니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요? 아니에요··· 저는···.”

아쥬흐는 조금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저는···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알코자르 남작의 파멸을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는걸요. 성녀라면 이런 생각은 안 할 거고요.”

“에엣, 그렇게 비겁한 용병대장에, 콘도티에레 사칭범이라면 그럴 만도 해요오!”

“후후, 그래도 성녀는 아닌걸요. 저는 종교가 싫어서 아홉 살 이후로는 딱히 행사에 참석하는 게 아니면 성전에도 나가지 않았어요.”

벌써 콘도티에레 사칭하면 범법자가 되는 걸로 사회적 합의가 끝난 모양이다. 그건 그렇다 쳐도 아마 주신 본인이 강림해도 알코자르 남작 하는 꼴 보면 벼락이라도 내리고 싶을 거야. 내가 보기에는 전혀 성녀 결격사유가 아닌 것 같은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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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들이 브롱보카쥬에서 우리 백작님이랑 함께 싸운 트랑카벨 사람들인가?”

“어쩜, 늠름하기도 하여라!”

어찌 된 일인지, 로베르 드 나뵈프 연대장을 비롯한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 간부들은 아쥬흐 일행을 구출한 후 대신 주민들에게 붙잡혀있었다. 사실 주민들은 그냥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궁금한 것도 있었고.

간부들은 당황해하고 있었으나, 로베르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성녀를 만났고, 성녀와 대화했으며, 성녀가 자신을 기억해 주었고, 소리를 내어 성녀라고 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르는 다른 이들이 아쥬흐를 성녀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대상이 남들에게도 그렇게 여겨진다는 은근한 기쁨 또한 느꼈다.

그의 성녀 숭배는 절대로 외부에 표출되지 않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었다. 남에게 밝히거나 공공연하게 행한다면 성녀에게 폐가 되는 일이니까. 다만 이번에는 ‘주민들을 계도한다’는 이유로 ‘부득이하게’ 입 밖으로 나온 것이니, 자신이 세운 서원에도 어긋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애초에, 어제는 비교적 경상인 자신은 병사와 포로들을 통제할 뿐 굳이 치료받을 생각이 없었는데, 붕대에 맺힌 피를 보더니 아쥬흐가 불러서 상처를 살피고 다시 붕대를 감아주었었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기뻐서 상처 따위 어찌 되든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오늘, 아쥬흐는 자신을 기억해 주었다! 대체 그녀에게 몇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는 것인지. 로베르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항상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그의 무뚝뚝한 얼굴을 보고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지만.

그러고 보니 콘도티에레에게 물을 일이 있었는데. 자주 마주치기는 하지만, 업무 영역이 다르다 보니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브롱보카쥬 전투 당시에 로베르가 했던 기묘한 경험 말이다. 그가 보았던, 아니 ‘느꼈던’ 그 정체불명의 선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전장에서 오래, 그것도 불패의 총지휘관으로 싸워온 콘도티에레라면 그게 무엇인지 알 것이다.

“총각들, 배는 고프지 않아? 우리 집에서 감자 그라탕좀 먹고 가!”

“그래! 이 집 감자 그라탕은 누아 최고거든!”

“어어··· 연대장님, 어떻게 할까요?”

뿌듯한 기분에 빠져있던 로베르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까닭으로, 간부 일행의 휴일 아침 식사는 감자 그라탕으로 정해졌다.

참고로 감자 그라탕은 매우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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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텔 드 누아 백작은 잠시 본성인 누아를 떠나서 북쪽 변경으로 향해 있었다.

원래 숲이 많고 미개발지가 많은 드 누아의 영토이지만, 특히 북쪽은 늪지대까지 펼쳐져 있어서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끔 사냥꾼이나 숲지기들이 지날 뿐, 인적 없는 지역이 많다.

그는 오늘 공식적으로는, ‘북쪽 자연 동굴들에서 채취된 흙에서 초석을 채취하는 공정’을 직접 확인하러 나와 있었다. 오랫동안 박쥐 등 동굴 생물들의 똥과 시체 등이 반복해서 쌓인 동굴 바닥과 벽의 흙은 대량의 인광석을 포함하고 있기에, 비료로 사용할 수도 있지만, 화약의 재료인 초석을 채취할 수도 있었다.

드 누아 가문의 총기 보유량은 최근 기록적으로 늘어났다. 트랑카벨 가문으로부터 공여받은 무기 외에도, 대량의 신규 총기를 수입했으며 네그라타 용병단과의 전투를 승리로 거두면서 엄청난 양의 총기를 노획한 덕분이다. 그래서 화약 소요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기 위해서 겨울 중에 자체적으로 초석을 생산하고 있었다. 물론 초석을 생산하는 요령은 트랑카벨 가문으로부터 소개받은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었다. 이는 가문의 중요한 사업이었으니 가스텔 백작이 직접 신경을 써서 관리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오늘은, 물론 초석 제작에도 관여하지만 다른 목적이 있었다.

가스텔 백작은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의도야 어떻든, 현재는 혈맹이나 다름없는 트랑카벨 가문의 아쥬흐나 에트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 누아의 명예를 걸고, 그들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거짓말은 결단코 아니었다. 혹여라도 그럴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새로이 하며, 쌀쌀한 바람을 막기 위해 망토를 여몄다.

오늘 그와 만나기로 한 상대는 사실 한참 전부터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호수인지 강인지 모호한 늪지대의 건너편에 튼튼해 보이는 마차와 이를 지키는 호위병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스텔은 재촉하거나 조바심 내지 않고 상대를 기다렸다.

“마차 문이 열렸습니다.”

이윽고 기다리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스텔은 호위들을 데리고 늪지대를 걷기 시작한다. 상대도 마찬가지이다. 겨울이 되어 원래 질척질척하던 늪이 단단하게 굳기는 했지만, 혹시 마르거나 얼지 않은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될 수 있는 대로 단단한 땅을 골라서 걷는다. 이윽고 양측은 늪지대 한가운데에 볼록 튀어나온 섬 위에서 만났다.

“오랜만이네요, 가스텔 백작님.”

필사적으로 위엄을 세우고 강한 척을 하려는 것이 느껴지지만, 어쩐지 힘이 없는 목소리이다. 가스텔은 약간의 측은함을 느꼈다.

“잘 지내셨나요, 레뮤즈의 라몽 공.”

블랑독 서부의 두 백작, 가스텔 드 누아와 라몽 드 레뮤즈의 비밀스러운 회동이었다.

“최근 라솔의 쥐새끼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셨다고 들었습니다.”

“허어, 참 소식이 빠르군요.”

“흥, 어찌나 빠른지 내가 보고를 듣기도 전에 레뮤즈의 술집에는 모르는 이들이 없었죠. 지금은 저 멀리 베르마유의 호사가들도 전부 알게 되었을 테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말투는 완전한 존대도, 완전한 평어도 아닌 애매한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이 특이하고도 모호한 태도가 유지되는 것이 이들이 전에도 이러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건강해 보이니 좋구려.”

“하루하루가 죽을 지경이지만, 어떻게 살아는 있군요.”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눈다. 가스텔은 라몽의 얼굴 피부가 땀에 젖어 있음을 깨닫는다. 아마 지금 악수를 하는 손도 장갑 뒤에는 식은땀으로 젖었을지도 모른다. 가엾게도, 여전히 병마에 시달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걱정과는 다르게, 트랑카벨 가문은 그 진의를 보여주었습니다.”

“....”

“무기를 제공해주고, 드 누아의 청년들을 훈련해 주었고. 마지막에는 군대도 보내서 라솔의 용병들을 섬멸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요.”

“흥, 그래도 트랑카벨은 꼴도 보기도 싫군요.”

“대체 트랑카벨 가문을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 거요? 이번에 우리 가문이 상대한, 라솔의 알코라즈 용병들은 레뮤즈에서도 골칫덩이가 아니었나요?”

“그야 이가 갈리는 놈들이었죠. 그놈들이 전쟁터에서 갈려 나갔다니 아주 속은 시원하지만, 그래도 트랑카벨은 싫은 것이고!”

“허허, 이거 참.”

가스텔은 딱히 화가 난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최근 트랑카벨의 영애가 아주 훌륭한 계획을 수행하고 있어요. 어쩌면, 드 누아 가문이 예전의 세력권을 회복할지도 모르겠고. 일단 그 이가 갈리는 알코라즈 남작은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구려.”

“호오···.”

라몽은 처음으로 조금 놀라는 태도이다. 하지만 곧 평소의 오만한 태도로 돌아온다.

“그래도 트랑카벨은 싫군요. 아직은.”

“허허허, 싫으면 싫은 거지, 어쩔 수 없군.”

“봄이 되고 날이 풀리면, 우리 영지군은 출병을 할 수밖에 없네요.”

“전쟁에 나선다는 이야기?”

“망할 국왕이 아니면 레뮤즈를 공격한다는데 내가 어쩌겠나요! 빌어먹을 정순파 놈들 같으니라고!”

라몽은 금방 얼굴이 벌겋게 변해서는 씩씩거린다.

“우리 레뮤즈 영지군은 바로 여기, 드 누아 북부의 늪지대를 통해 블랑독으로 진격할 것이고!”

“허어,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선전포고인 것인가? 이거 섭섭하구먼···.”

“아무튼 잘 기억해 놓으시죠!”

한쪽은 화가 나서 마구 쏘아붙이지만, 반대편인 가스텔은 전부 농담처럼 받아들인다. 물론, 가스텔은 라몽의 ‘선전포고’가 완전히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물론 내년 봄에 드 레뮤즈의 군대는 분명히 이 지역을 침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간에서 의미하는 형태의 전쟁이 벌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애초에 제정신을 가졌다면, 이따위 늪지대를 통해 진격하는 지휘관은 없을 테니까.

“잘 기억해 두시라고요, 가스텔 공! 우리는 이 늪지대를 공격할 것이니까!”

“잘 알겠소이다! 알려줘서 고맙군!”

“고맙긴, 흥! 날이 추우니 어서 돌아가 보시죠.”

“살펴 가시오.”

터무니없는 대화였다. 분명, 두 백작 가문의 주인이 서로의 접경지역에서 만나, 선전포고하고 진격까지 예고했다. 그러나 둘의 대화에서는 어떤 살기나 위협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득한 것은 깊은 신뢰에 가깝다.

가스텔은 라몽이 뚱뚱한 몸으로 뒤뚱거리며 마차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아주 오래전 무례하던 소년을 기억해냈다.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오만했던 소년. 가스텔은 그 소년의 아버지와 친구였다. ...은인이기도 했고.

그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태어난 아들을 걱정했다. 가스텔에게 아들을 도와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는 중이다.

“내년에 봅시다!”

온 숲에 메아리가 칠 정도로, 크게 부르며 인사를 한다. 벌써 멀리 떨어진 라몽은 움찔하더니, 몸을 돌리지는 않았으나 오른팔을 들어 반응한다.

두 백작의 애매하게 뒤틀린 우호 관계는 이 정도가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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