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이스키비르의 지배자
업무로 엮인 사이가 아닌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그것도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면 얼어버리는 것이 내 단점이기도 하다. 침착하자.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하자. 그 뭐냐, 군사 전략 조언도 하고 해야지. 트랑카벨의 군사 대리인이니까.
휴우, 말하기에 앞서서 심호흡 한 번.
"엘랑키아는 지방 분권이 강한 나라입니다. 시작부터 각 지역을 지배하는 8대영주들이 왕실의 권위를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어서, 왕실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미치는 곳은 수도 베르마유를 비롯해 중북부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아예 여러 개의 나라가 동군연합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어 끊임없이 내분에 시달리는 라솔이나 황제 자리가 20년 넘게 공석인 그룬발트보다는 상황이 좀 낫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때문에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자꾸 전쟁하는 이유는 왕가의 기반이 될 직할 영지를 늘리기 위해서로 보입니다. 얼마 전 북방 전쟁에서 얻은 도시들도 왕가의 직할령이거든요. 방위 비용의 일부는 대영주들에게 떠넘기기도 했고 말입니다."
"대영주들의 반발은 없었습니까?"
"있기야 했겠지만, 왕의 요구가 이치에 맞기도 하고, 국경지대를 국왕의 직할령이 지켜주면 그만큼 자기 영토의 방비는 힘을 덜 써도 되니까요."
"아하...."
"이번 블랑독 전쟁도 명목은 이단 토벌 성전이지만, 실상 다고베르 2세는 직할 영지를 늘리기 위해 편승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라솔의 입장이 나오는데...."
혹시라도 이스키비르 지방 영주들이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라솔 왕가 입장에서는 이스키비르 지역은 별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이스키비르 강을 자연 국경으로 삼은 것에 만족하고 있을 겁니다. 타라트라바나 포르트와의 분리 독립파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라솔 입장에서` 변경 구석을 신경을 쓰고 싶지 않겠지요."
"지금도 그러고 있지요.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대대로 이어지는 봉토를 반납하고 이스키비르 지방으로 옮긴 것을 무척 후회하고 계셨습니다."
하브라고 데 차스틸리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쿠탈로 데 베스카란이나 가스텔의 표정도 복잡해 보인다. 아마 엘랑키아, 정확히는 드 누아 가문의 영토에서 라솔 왕국으로 편입된 이후 분봉된 영주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상황이겠지. 가스텔 백작이야, 가문의 옛 영토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을 테고...
"만약에 다고베르 2세가 성전을 성공리에 마무리 짓고, 법황과 대영주들의 공인 아래 블랑독 전역을 차지하게 되면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라솔 왕국의 영토를 공격하겠군요."
"지금까지의 확장주의 행보를 보면 부왕이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나설 가능성이 크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드 누아의 영토를 찾아주기 위해서는 아닐 테고요."
가스텔 백작의 미간에 분노를 담은 주름이 잡힌다. 그는 멍청한 엘랑키아 왕가에게 농락당해 옛 영광을 잃어버린 가문의 말예이니까. 그런데 그 아들이 또 다시 드 누아를 이용하려 하니, 분노할 수밖에.
"이 시점에서 라솔 왕국은 블랑독을 도울 당위가 생깁니다. 지금처럼 반 독립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국경을 마주한 입장에서는 이득일 테니까요. 여기 도움이 된다면, `이스키비르 강 서쪽의 블랑독 문화권` 지방에 드 누아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라솔 입장에서는 관리하기도 귀찮아서 방치하던 곳이고, 엘랑키아와의 자연 방어선만이 의미가 있는 영토니까. 애초에 자기네 땅도 아니었고 문화까지 다른데. 오히려 완충지대 역할을 해주는 우호적인 지방 정권이 들어서면 좋아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라솔이 블랑독에 적대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어떻소?"
"블랑독 연맹이 엘랑키아 왕실군이 포함된 성전군을 격퇴하거나, 평화 조약을 끌어내서 전쟁이 마무리된다면...."
조금 고민된다. 불확정 요소도 더 많은 것 같고, 무엇보다 협력을 앞두고 있는 엘랑키아와 라솔 소속 영주들이 모인 장소에서 해도 되는 말인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반 독립적인 지방정권으로 인정받으면, 이번에는 라솔이 또 불안한 눈으로 바라볼지도 모릅니다. 아마 전쟁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불안해지겠죠. 갑자기 변경에 강력한 세력이 하나 나타났는데."
"만약 그렇다면 블랑독 연맹과 라솔 사이에 전쟁이?"
"아마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지만... 애초에 그럴 가능성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는 해도, 변경의 작은 지방이 총력을 다한 대국, 엘랑키아나 라솔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블랑독 연맹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엘랑키아나 라솔을 이길 만큼 강해질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그만큼 강해지면 두 왕국이 블랑독 부터 정리하자고 합심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블랑독 연맹은 엘랑키아와 전쟁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이단 토벌 성전군 입니다. 여기 열쇠가 있습니다. 엘랑키아가 전력을 다한 왕실군이 아니고요. 적을 격멸시킬 만큼 강할 필요가 없이, 우리 몸을 지킬 정도가 딱 좋습니다. 마치 덩치가 크거나 뿔을 가진 초식 동물처럼, 위험을 감수하면서 먹을 가치가 있나? 하고 포식자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줄 정도가 되겠네요."
문득 아쥬흐와 이야기를 하며 콘도티에레... 대리 군사령관 계약서를 작성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는데.
"상대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면서, 상대에게 위협당할 정도도 아니다?"
"그 표현이 딱 정확하네요!"
"오오, 그렇군요. 이해가 잘 됩니다!"
아쥬흐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칭찬하고, 이어서 쿠탈로가 감탄했다는 듯 찬탄의 소리를 내자, 미소를 지으면서도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갛게 된다.
"더 거칠게 말하자면, 한 입에 먹어치우기에는 까다로운 고슴도치 같은 존재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하핫, 저에게는 그 표현이 더 와서 닿네요. 확실히, 사냥개가 고슴도치를 잡아먹지 않는 이유는 고슴도치가 늑대보다 강해서는 아니지요. 저희 집 사냥개가 어릴 때 고슴도치를 잘못 물어서 온통 가시에 찔리더니 이제는 고슴도치 쪽은 쳐다보지도 않더라고요."
"크... 강아지가 안타깝네요."
무겁기만 했던 분위기가 조금 가볍고 유쾌하게 변했다. 너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자꾸 부연 설명을 하면 내용은 깊어지지만, 주제가 흐려진다. 명심하도록 하자.
"제가 가스텔 드 누아 백작님께 드리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입을 열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릿속에서 단어와 문장을 고른다. 음,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기도.
"적대하지 않는다. 적대 세력을 지나지도 못하게 막는다. 변경을 안정시키고 서로의 수익을 늘려간다."
자칫 말장난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걸 사전적 의미로 `드 누아 가문의 고토를 회복했다`라고 받아들이지는 못할지도 모르니까. 영토를 분봉하고, 그 지역의 영주와 기사들에게 충성을 서약받는 의미의 고토 회복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스키비르의 명실상부한 대영주에 가장 가까운 가문이 어디인가?`라는 의문을 가진다면, 그 답은 드 누아 가문이 될 것이다. 당연히 명분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명분을 만드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봉건 제도란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괴상한 사회 제도니까.
가스텔 백작이 이런 점을 잘 고려해주면 좋겠는데.... 가스텔 백작의 차갑게 가라앉아있는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혹은 계산하는지 흔들림이 없었다. 최소한 분노를 하는 기색은 아니다.
자, 이 치욕을 안은 백작가의 주인님은 어떤 결론을 내게 될까.
"통치권을 인정받고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를 하고 있음을 증명해서 통치권을 인정받아라, 이 말씀이시오?"
"맞습니다."
"흐음...."
다시 짧은 침묵.
"하긴 그렇지. 기사로 인정받는 것은 기사의 혈통으로 태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사답게 행동해야 비로소 기사가 되는 것이겠지요."
다행이다. 납득한 모양이다. 마주 앉은 아쥬흐의 얼굴도 밝아지는 것이 보인다. 아쥬흐의 의도도 이런 것이었나.
"트랑카벨 가문의 영애께서 허튼 소리를 하러 오셨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소. 다만 그 의도에 궁금한 부분들이 있어서 확인하고 싶었는데... 에트 경,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께서 아주 말을 잘하시는구먼."
"으으... 평소에는 이렇게 흥분하지 않는데, 부끄럽습니다."
"그렇지 않소, 무척 도움이 되는 분석이자, 조언이었으니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소만, 라솔에서 오신 두 영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도 평소에 물자 거래로만 알아 온 트랑카벨의 영애께서 부르시는 의도가 잘 짐작이 가지 않았었는데, 이리 설명해주셔서 좋았습니다."
"저도 감탄했습니다! 확실히 브롱보카쥬의 승장! 무도한 알코자르 남작의 대군을 단번에 섬멸해 버린 콘도티에레의 시야는 이런 것이구나, 하고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하하...."
하브라고라는 이름의 이 친구는 너무 과장되게 말하는 성향이 있구만. 분위기를 올려주는 좋은 친구지만, 이런 인물 중에는 자칫 보고도 비슷하게 올리는 바람에 대체 무슨 말인지 한참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태도는 좋지 않다고. 딱히 내가 창피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
"일단 외적으로는, 알코라즈 남작령이 몰락한 현재 라솔 왕국령 블랑독의 영주들이 질서 회복을 위해 협력한다는 것을 해두겠습니다."
쿠탈로의 말이다. 그는 상당히 침착하고 괜찮은 행정가 풍의 인물로 보인다. 이런 사람이 창의력은 부족해도 수행 능력이 좋아서 안정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밀어주면 참 괜찮은 결과를 내곤 하는데.
"또한 주변에 잘 지내는 소영주들도 한 번... 모임을 할 수 있도록 해봐야겠네요. 이후 힘을 합치는 일이 잘 진행되기를 빕니다."
"아! 저도 그렇습니다. 일단 영지에 계신 아버님부터 설득하고 말이죠. 사실 아버님께서도 마음은 있지만, 고민이 많으셔서, 저를 먼저 보내신 것이니 궁금하신 점이 많으실 겁니다. 이 하브라고 데 차스틸리보를 믿어 주십시오!"
분위기는 훈훈하게 마무리되어 간다. 이렇게 이스키비르 강 동쪽과 서쪽의 `블랑독 영주`들이 협력을 하게 되었다. 블랑독 연맹도 그렇지만, 지리멸렬한 소영주들이 한데 모이면 그만큼 큰 힘을 낼 수 있게 되겠지. 최소한 알코라즈 같은 깡패 군벌이 멋대로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처음 보는 이들과 속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쑥스럽기는 했지만 많은 것을 얻은 것 같다. 그럼 이 회의의 성과는 이 정도로....
"참,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콘도티에레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브라고 데 차스틸리보의 말이다. 음, 무슨 부탁일까? 이렇게 이야기가 좋게 마무리됐는데, 가능하면 들어줘야....
"쿠탈로 경과 이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저희 라솔 블랑독 영주들이 의견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라솔 블랑독이라, 하긴 엘랑키아가 아니라 라솔 왕국에 속한 블랑독이니까 이런 용어도 있겠구나. 쿠탈로 역시 실제로 합의한 사항인지 고개를 끄덕인다.
"저희도 자체적으로 힘을 길러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오늘 여기 계신 콘도티에레 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내... 말을 듣고요? 뭘 느꼈다는 거지?
"저희도 연합군을 만들고 싶습니다! 약간이지만 비용도 모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트랑카벨 가문에 지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희 베스카란 가문도 같은 마음입니다. 드 누아 가문과 알코라즈 가문의 전쟁을 지켜보면서 예전 방식으로 싸워서는 무력할 뿐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신식 무기도 구매하고 싶습니다."
음... 기특한 깨달음이기는 한데 말이지. 음, 뭔가... 뭔가... 이래도 되나? 나는 조심스럽게 아쥬흐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 그런 요청이시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감사합니다, 트랑카벨의 아쥬흐 양!"
"이럴 때일수록 도와야죠."
그녀의 화사한 미소가 눈부시다. 그야말로 성녀, 블랑독의 위기에 처한 정순파 신도들을 이끌고 구원하는 성녀 다운 아름답디아름답고 성스럽디성스러운 미소이다.
그녀가 보통 이런 미소를 짓는 경우는....
시장에 `적절한 가격의 괜찮은 물건`이 나왔을 때이다.
"특히 데 베스카란 자작가의 구리 광산이나, 데 차스틸리보 남작가의 말 농장에는 많은 신세를 졌으니까, 저희도 믿음을 보여드려야겠네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그저 좋은 가격에 물건을 팔았을 뿐인데요."
"후후, 최근에는 황금보다 귀한 것이 정직한 판매자니까요."
다 좋은 말이고, 훈훈한 말이지. 지금 상황도 말이지, 입이 찢어져도 아쥬흐가 누군가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래 상대인 쿠탈로나 하브라고가 모르는 내용이 계약서 어딘가에 쓰여 있을 것 같다는 말이지.
"훈련은, 드 누아 영지에 모여서 가스텔 백작님의 주관으로 진행하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아쥬흐 양. 저희 가문 역시 신병들을 훈련해야 하고요."
"그럼 결정됐네요. 트랑카벨 가문은 필요한 물자를 수배해 보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기즈 드 콜롬브 경이 고생하겠구나. 내년에 카르카냑으로 돌아오실 때까지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