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65화 (65/556)

13-2. 이스키비르의 지배자

###

딱 한 시간 뒤 다시 모였다. 정말로 대충 씻고 간단히 배만 채운 다음이었다. 우리는 드 누아 백작가의 집무실 밖에 있는 비밀 방에 모였다. 탑에 의해 물리적으로 본성에서 떨어져 있는 구조의 방인데, 원래 높은 신분의 포로를 감금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뭔가 판타지답고 로망 있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좁다란 나무 흔들다리를 건널 때는 오금이 다 저렸다.

“자, 여기는 새가 아니라면 절대로 아무도 엿들을 수 없는 장소입니다.”

호스트인 가스텔 백작이 우리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확실히, 사방이 성벽의 파수병 시야에 있으며, 땅에서는 10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유일한 통로인 흔들다리는 건너편에서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으니.

아니 애초에 이렇게 보안을 필요로 하는 주제인가?

“후후후, 이렇게까지 해 주시지는 않아도 되는데요.”

아쥬흐 역시 얼굴이 묘하게 창백한 것을 보니 나처럼 흔들다리가 무서웠던 모양이다. 침착하게 옷자락을 붙잡고 걷기는 했지만, 손으로 잡았던 자락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꽉 잡은 자국이 남아 버렸고.

다만 이 자리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아쥬흐 양, 가스텔 백작, 거기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아쥬흐가 데리고 왔지만, 나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침착을 가장하고 있지만 다소 불안한 표정이 보이기도 한다. 설마 이 사람들도 흔들다리가 무서워서 이런 것은 아닐 테고. 과연 누구일까.

“백작님과 콘도티에레 에트, 두 분께서는 처음 뵙는 문들이죠. 쿠탈로 데 베스카란 자작님과, 데 차스틸리보 남작가의 장남이신 하브라고 데 차스틸리보 경을 소개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쿠탈로 데 베스카란입니다.”

“하브라고 데 차스틸리보입니다. 브롱보카쥬에서의 승전에 대해서 들었기에, 두 분을 빨리 뵙고 싶었습니다!”

쿠탈로 데 베스카란은 마흔 쯤 되었을까, 머리가 살짝 벗어지기 시작한 완전 평범한 아저씨처럼 생긴 남자이다. 자작이라··· 이름을 들어보면 엘랑키아가 아니라 라솔 계열로 보이는데···.

하브라고 데 차스틸리보는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다. 곱슬머리에 유난히 큰 눈이 매력적인 청년인데, 눈을 반짝반짝 빛나며 나와 가스텔 백작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들은, 기사 워너비 청년의 모범적인 모습이네.

“잠시 지도를 볼까요···.”

아쥬흐는 내 도움을 받아 지도를 펼쳤다. 블랑독과 그 주변을 그린 지도였다. 아쥬흐는 가스텔 백작이 보기 편하게 아래쪽을 그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여기 계신 두 분의 영지는 여기입니다.”

그녀의 길고 가녀린 손가락이 지도의 두 군데를 짚었다. 모두 서쪽에 치우쳐 있다. 블랑독의 서쪽 경계 부근.

바로 이스키비르 강 건너의 영토들이다.

“으음··· 라솔에서 오신 영주님들이시군요.”

내가 말했다. 확실히··· 트랑카벨 가문과 거래하는 라솔의 가문들이 있다고 듣기는 했었는데.

“맞습니다, 콘도티에레. 저희는 라솔 왕가를 섬기는 가문들입니다. 라솔 왕국에서는 이스키비르 지방이라고 부르는 곳이지요. 문화적으로는 블랑독의 서쪽 끝이기도 합니다. 저희 영토에도 정순파 신도들이 제법 살고 있지요.”

쿠탈로가 예의 바른 말투로 대답했다. 흐음, 그렇구나,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아마 라솔의 두 영주님께서 여기 오신 이유가 궁금하실 테지요. 이건 저희 트랑카벨 가문에서 제안하기는 했지만, 라솔의 두 가문에서도 만남을 원하셨기 때문에 성사되었습니다.”

아쥬흐는 잠시 뜸을 들인다.

“아시다시피, 우리 엘랑키아 입장에서 이스키비르 강 서쪽, 라솔 기준으로 이스키비르 지방은 라솔의 왕권이 미치는 지방은 아닙니다. 무법천지··· 까지는 아니지만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지요.”

“맞습니다. 그래서 알코자르와 같은 무도한 인간이 세력을 얻은 게 아니겠습니까!”

하브라고가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덧붙였다. 확실히 그런 깡패 용병단이 바로 이웃에 있었다면··· 화가 날 만도 하겠지. 주된 약탈은 드 누아 영지에서 했다지만, 험악한 이웃은 그 자체로 피곤하고 자잘한 손해를 보게 된다.

“라솔 왕가에서는 세금만 걷어가지··· 이 지방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세금이 무겁지는 않지만, 마치 누가 우두머리가 되건 상관없다는 태도지요.”

이번에는 쿠탈로도 목소리에 분노가 스며있다. 될 수 있으면 침착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그라데이션 식 분노가 차츰차츰 몰려온 느낌인데.

“그리고 드 누아의 백작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저희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과거의 전쟁 이전에는 엘랑키아의 영토였습니다. 드 누아 가문의··· 가신들이 통치하는 영역이었지요.”

“...알고는 있소만.”

가스텔 백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로서는··· 가문의 치욕에 대한 역사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내 명예를 걸고 말할 수 있지만, 이스키비르 강 건너 영토를 상실한 것은 가스텔 백작이나 선대 드 누아 백작의 잘못이 절대로 아니다! 머저리같이 감당도 못 할 전쟁을 일으킨 선대 엘랑키아 국왕 잘못이지. 현 국왕인 다고베르 2세도 좀 무모한 면이 있지만, 이 인간은 그래도 전쟁에서 계속 이기고는 있다.

아니 그런데 젠장, 생각해보면··· 내년에 자칫하면 국왕군이랑 전쟁해야 할 텐데, 왜 하필 이 차례에 유능한 왕이 걸린 거지? 그냥 무능해 주면 안 될까?

“라솔에서 오신 두 영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트랑카벨의 영애께서 저희를 한자리에 모은 의도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가스텔이 핵심을 찌른다. 음, 확실히··· 강 건너 상황도 엉망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아쥬흐나 아롱드 영감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혹시라도 무력 개입이라면··· 그건 안 된다. 언감생심 절대로 불가능하다. 영주들 간의 이권이 얽힌 다툼 정도야 뭐··· 크게 상관이 없겠지.

하지만 영토나 지배권, 작위에 얽히면 문제가 커진다. 라솔 국왕의 가신인 영주를 엘랑키아 국왕의 가신이 빼 온다? 이건 대놓고 전쟁하자는 것이지. 봉건 질서적으로도 어처구니가 없는 악행이기 때문에 편을 들어줄 사람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약육강식의 무질서한 세계를 정돈하고자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고착화한 것이고, 그래서 ‘제도’이다.

뭐··· 간단히 말해서 봉건 제도 아래에서 땅따먹기를 하려면 단순히 무력으로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다고 해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억지로 고집부리면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 하물며 최고 지배 군주인 국왕, 즉 나라가 달라서는··· 평범한 결혼 공작 따위로는 영토를 늘릴 수 없을 텐데.

“이제 제가 설명해 드릴 차례겠네요.”

아쥬흐가 나선다. 과연, 어떤 의도일까. 아롱드나 아쥬흐나 내가 파악하기에는 워낙 속이 깊은 인물들이니까, 이들의 다음 행보는 도대체 예상이 가지 않는다. 사실 군대를 이끈다면 엄청난 지휘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스키비르 유역의 영주들은 보호자가 없습니다. 엘랑키아는 이들을 저버렸고, 라솔 역시 그 자리를 채웠을 뿐이죠. 그러자, 두 분께서 브롱보카쥬에서 격퇴한 알코자르 남작과 같은 군벌이 나타나 혼란을 더했습니다.”

침착하고 낭랑하게 현실을 설명하는 아쥬흐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마치 서사시를 읊어주는 음유시인을 생각나게 한다. 어딘가 말투도 그런 느낌이네. 차이점은 주제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차갑디차가운 현실이라는 것이고···.

“저희가 제안하고 싶은 점은, 가스텔 백작님이, 드 누아 가문이 이스키비르 하류 지방의 비공식적인 보호자가 되어, 실질적인 통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허··· 충격적인 말이다. 내가 이런데 본인은 어떨지. 침착을 가장하고 있지만, 이건 많이 놀랐다. 저 커진 눈 하며, 관자놀이에 맺히기 시작한 식은땀 하며. 이해합니다, 백작님.

“비공식 보호자에 실질적 통제자라···.”

충격이 컸는지, 한참 눈알만 굴리던 가스텔은 중얼거리며 컵을 입으로 가져간다. 나라도 이런 제안을 들으면 입 안에 바짝바짝 말라붙을 것 같기는 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다고, 아쥬흐 양께서는 생각하십니까?”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번에 일전을 겨루어 승리하신 알코자르 남작령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여기 계신 두 가문을 포함해서 원하는 가문들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이시는 거고요.”

“흐음, 그렇구나···.”

“향후 주변 정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혼란기에는 항상 국경선이 새로 그어지고는 하지요.”

“그럴 때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라는 것이구려.”

“맞습니다, 백작님.”

우선 기댈 곳 없는 소영주들에게 기댈 곳을 내주고, 언젠가 그들이 ‘자신들의 주군’을 새로 정할 수 있는 시기가 온다면 새롭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정한다는 것이구나.

봉건 제도는 ‘규칙’이기는 하지만 무수히 많은 선례를 기반으로 한 판례 모음과도 같다. 명확하게 글로 적힌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때문에 주변 분위기나, 큰 세력 간의 경쟁이나 다툼 등에 의해서 그 ‘규칙’이 크게 변할 때가 온다.

아쥬흐는, 트랑카벨 가문은 그런 때가 곧 오리라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알코자르 남작령은··· 침입해온 군대를 격퇴했을 뿐 제압이라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후후, 백작님은 지금 알코자르 남작의 수하를 1500명이나 잡아놓고 있으시잖아요?”

“아아, 그렇군요!”

“게다가 포로 중에 있을 알코자르 남작의 가업인 용병단의 간부들, 가신들을 생각하면 그냥 두고 볼 수 없을 거예요. 그 한 명 한 명이 협상을 위한 중요한 코인으로 활용될 수 있고요.”

“...대체 트랑카벨은 몇 수 까지 내다 보신 거요?”

아니 진짜, 와··· 그러니까! 대체 어디까지 내다 보신 거세요? 혹시라도 우리가 전투 지면 어쩌려고 했어! 정말!

나도 그냥 포로 잡으라니까 잡았지! 와 진짜, 평균적인 남작령 기준이라면 1500, 아니 정확히는 1600명이면 영지를 통째로 들어 엎을 수 있을 엄청난 전력인데, 이걸 전부 우리가 포로로 잡고 있다 이 말이지. 타르벤도인가 하는 알코자르의 남작도 이 남작령 치고는 터무니없이 강력한 전력으로 동네 골목대장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고.

“물론··· 지금 말씀드린 것은 다 가정입니다. 향후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르죠. 저만 해도··· 트랑카벨 가문이 갑자기 엘랑키아 왕국과 척지고 전쟁을 할 줄은 몰랐어요.”

아쥬흐가 입을 가리고 소리 죽여 웃었지만, 나는 긴장해서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표정을 보니 나와 비슷하네.

“저도 듣고만 있었습니다만···.”

이쯤에서 내 생각을 말해야 하겠다. 나도 지금은 트랑카벨의 녹을 먹고 있는 상태니까.

“변혁기에 국경이나 영토 경계선이 바뀌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변혁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음 맞나?

“아니지··· 저희가 변혁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블랑독 전체가 똘똘 뭉쳐서 엘랑키아 왕국과 전쟁을 한다면 말이지요.”

“변혁기를 만든다··· 라고요.”

“저희가 패해서 사라지고, 블랑독이 엘랑키아의 의도대로 재편된다면 상관없겠지만요. 블랑독이 승리해 엘랑키아와 조약을 맺거나, 적어도 격퇴한다면 이는 반드시 라솔 왕국의 개입을 부를 것입니다.”

나는 잠깐 눈을 감고 뜸을 들였다. 분위기를 잡는 것은 아니다. 머리로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돌려보고 있다. 슈퍼컴퓨터처럼 끝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가정하는 것은 무리지만, 적어도 수십 갈래의 경우의 수를 생각해본다. 때로는 고무적이고, 때로는 절망적일 많은 사건.

“라솔 왕국이 트랑카벨 가문, 아니 저희 블랑독 연맹에 우호적일 수도, 적대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트 경, 콘도티에레께서는 어느 상황이 드 누아 가문이 이스키비르 하류 지역으로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하시오?”

“둘 다입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두 경우 모두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라솔이 아군이라면, 그 협력의 대가로 우호적으로 영역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라솔이 적군이라면, 그 승리의 전과로 영역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으, 나도 모르게 흥분했네. 아쥬흐가 깔아 놓은 판이 너무 재미있어서, 나도 모르게 선을 넘었다.

“음, 너무 흥분했네요··· 죄송합니다. 저 같은 이가 단순히 흥미 본위로 떠들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아니에요, 아니에요. 영주님들, 콘도티에레 에트의 의견을 좀 더 들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저, 저도 그렇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베스크란 가문도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음, 말씀해주시오, 에트 경.”

반응이 나쁘지 않다. 음, 갑자기 창피해진다. 내가 왜 흥분했을까···.

“...라고 하시네요, 콘도티에레 에트.”

“알겠습니다···.”

아쥬흐가 빙긋 웃으며 나에게 설명을 권했고,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설명을 시작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