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64화 (64/556)

13-1. 이스키비르의 지배자

“협상··· 이라니 항복 요구가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항복을 요구하게 되기는 하겠지만요.”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네그라타 용병단의 부장을 맡은 입장으로서, 항복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의 단호한 태도는 예상한 바다. 사실 많은 항복 협상이 이렇게 끝나버린다. 승자 쪽은 유리한 상황에서 협상을 권한 자비로운 자가 되고, 패자는 협상에 응할 만큼 예의 바르면서도 주군이나 계약에의 의무를 죽음으로써 지키는 명예로운 자가 된다. 의미가 없는 듯하면서도 있다. 나는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당사자들이 의미가 있다면 있는 거니까.

하지만 나는 몇 마디 더 해보고 싶다.

“조건이나 들어 보시지요.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무엇입니까?”

“시간과 치료, 안전입니다.”

상대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 나는 말을 이어간다.

“귀군이 본대의 퇴각을 엄호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2시간으로 하지요. 대신 이제는 희생을 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시간을 준다니요?”

“2시간 동안, 아군과 귀군은 교전 중인 겁니다. 그 때문에 아군은 귀군의 본대를 추적할 수 없지요.”

“허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네. 다행히 상대는 그저 싸움이 좋은 전쟁광도 아니고, 도망친 주군을 섬기는 충성병자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나름 이성적인 사람이겠지. 이성적으로 자신과 부하들의 죽음도 저울질의 끝에 선택지로 놓을 수 있는 인간.

2시간은 나도 나름 합리적으로 생각한 결과이다. 포격과 총격을 시작으로, 전면적으로 공격을 개시해서 적을 전멸시키고, 다시 추격을 준비하면 딱 그 정도의 시간이 들어갈 것이다. 아마 살짝 빠를 것이라고도 생각되는데, 상대도 똑똑한 지휘관이라면 아마 비슷하게 예상할 것이다.

“치료와 안전은 무엇입니까?”

먹음직하게 들리지? 걸려들었다.

“기다리는 2시간 동안, 붕대와 약품을 가능한 한 지원하겠습니다. 인력은 저희 쪽도 부족해서 무리지만··· 적어도 죽을 상처가 아닌데 죽는 병사가 이제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안전은, 귀군의 향후 책임을 저희 트랑카벨 가문에서 맡겠다는 것입니다.”

책임감이 강한 지휘관일수록, 치료도 못 받고 죽어가는 부하들을 그냥 보기 괴로워한다. 그리고 아마 포로 관리를 복수심으로 가득한 드 누아 가문에 맡기면··· 여러 가지 의도치 않은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트랑카벨 쪽에서 맡는 게 서로 좋겠지.

“...잠시 참모와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적 지휘관 미카토는 몇 걸음 물러나 함께 온 참모와 이야기를 나눈다. 30초쯤 지났으려나.

“트랑카벨의 에트 경, 제 휘하의 네그라타 용병 전원은 귀하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

약속된 2시간의 휴전 기간 동안, 건강한 병사들은 교대로 휴식을 취하고 전투 식량을 먹어 배를 채우기도 했다. 부상병들은 치료받았으며 일부러 넉넉하게 챙겨온 붕대와 지혈제 등 약품은 동맹군인 드 누아와 적인 네그라타에도 공여되었다.

길어야 200미터, 가까우면 100미터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휴전이 시작되자 병사들은 처음에는 당황했다. 조금 전 까지 사생결단을 내며 싸우던 상대와 갑자기 싸우지 말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갑자기 전투가 멈추며 조용해진 전장에서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한 부상자들의 신음소리였다. 아군과 적군을 막론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려고 일부러 무시되고 있던 소리.

차츰 병사들은 질서를 갖춘 상태로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았고, 부상자들을 한데 모아 치료했다. 당연히 아군이 우선이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적군 부상자도 치료하기 시작했다. 주신 앞에 모두가 동포라거나 하는 거창한 구실은 아니다. 전투의 살기가 사라지자, 사람만이 남았을 뿐이다.

30분 쯤 지나자 긴장이 풀렸는지 적군과 서로 농담을 하기도 했다. 가끔 과격한 언사가 오가면 장교들이 막았다. 내가 보기에는 문제가 될 정도로 선을 넘지는 않은 듯하다.

진짜로 2시간이 흘렀을 때, 네그라타의 부단장 미카토는 다시 백기를 들고 나타나 자신의 무기를 나에게 맡겼다. 병사들도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트랑카벨 군의 통제에 따랐다.

브롱보카쥬 전투는 결국, 이렇게 한 쪽이 항복하면서 종결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직후에 추격이 재개되었다.

추격전은 내가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으나, 이후의 보고 받은 사항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전장에 남은 마지막 미끼 부대가 목숨을 걸고 시간을 끄는 사이, 탈출에 성공한 적들은··· 완전히 지리멸렬한 상태로 도망쳤다.

뛰어난 장교들이 후위에 남아서 그런지··· 분명 브롱보카쥬 지역을 벗어날 때만 해도 나름 질서정연했었는데 그 후에 갑자기 전열이 무너져 멋대로 도망쳐 버린 것인지. 숲지기 경보병의 말에 의하면 나름대로 행군 대형을 갖춰 후방을 경계하며 나아갔으나, 앞질러 간 경보병들이 기습공격을 몇 차례 했더니 갑자기 패닉을 일으키며 무너졌다고 한다. 결국 먼저 도망쳐 가버린 기병들에 의해 보병 대열도 어지러워졌고, 남은 인원들은 무조건 이스키비르 강 쪽으로 뛰어갔다는 모양이다.

전쟁터에서 그렇게 완강하게 싸우던 이들이 갑자기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패닉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갑자기 공포에 질리고, 뒤처지면 안된다 생각하면 평소에 상상도 못 한 일들을 저지르게 되지···.

확실히 침착하고 유능한 부단장이 최후미에서 퇴각을 엄호하다가 붙잡힌 영향도 있을듯싶다.

결국, 추격전은 생각보다 싱겁게 종료되었다. 상당수가 죽느니 포로로 잡히는 쪽을 택했고, 투항을 거부한 자들은 드 누아 가문의 기병들이 추격하여 철저하게 섬멸했다. 게다가 이스키비르 강 동안의 주민들이 누구인가? 그간의 약탈로 잔뜩 화가 난 드 누아의 백성들이기에 절대로 숨을 수도 없었다.

마지막에 강을 건너려고 이스키비르 강변에 모여있던 부대가 잠시 저항했다고는 하나, 강을 건너지 못한 자들은 대부분 항복했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드 누아 백작 영지군]

참가 병력 약 2450명, 사상자 약 420명

[트랑카벨 영지군]

참가 병력 약 1900명, 사상자 176명

전력면에서 우위인 적의 주공을 받아친데다가, 전투 전반기 내내 치열한 백병전과 총격전이 이어졌던 드 누아 가문의 희생이 역시 더 컸다. 전투 시간이 그렇게 긴 편은 아니었는데도 결코 희생이 적지는 않았다. 결국 총포화에 노출되면 사상자 숫자가 끊임없이 늘어나게 되니까, 전투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상자도 많아진다.

한편 전투의 패배자인 적군의 결과는 내 생각보다도 파멸적이었다.

[네그라타 용병단(알코자르 영지군)]

참가 병력 약 4500명 전후 추정,

사상자 약 1400명 추정, 포로 약 1600명

브롱보카쥬의 전장에 남은 시체의 수는 1천 명이 되지 않았다. 전투에 패배했다고는 해도 그게 드라마틱하게 많은 사상자 차이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군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리고 미카토라는 이름의 적 부장이 목숨을 걸고 후방을 틀어막아 시간을 끌면서 주력부대를 탈출시키기까지 했는데···.

사망자도 포로도 이렇게까지나 늘어난 것은 전장을 벗어난 후에 관리가 되지 않아 군대가 붕괴하였기 때문이다. 이후의 추적자들에 의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 이스키비르 강변에는 도망병들이 버리고 간 장비가 쓰레기처럼 잔뜩 쌓여 있다고 한다. 배에 한 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지도.

게다가 갑옷을 입고 무거운 무기를 든 상태에서는 무리지만, 맨몸으로는 어떻게든 건널 수 있는 강이니, 다 버려놓고 건너간 자들도 있는 모양이다. 이 추위에 무사히 건너갈 수 있을지, 건너가더라도 따뜻한 불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단 알코자르 남작령은 이스키비르 강에서 한참 멀고, 바로 강 건너의 라솔 왕국 소속의 영주들은 알코자르 남작령과 사이가 좋지는 않다고 하니 말이다.

그나저나 포로가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우리 병사들이 포로 관리하려면 고생 좀 하겠다.

일단 드 누아 백자에게 이야기를 해서 포로를 많이 잡을 것이라고는 했는데, 역시 드 누아 병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있는 것 같다. 역시 이번 전투에서 적대한 것 외에는 크게 인연이 없는 트랑카벨 가문과 달리 드 누아에게는 십년이 넘은 원한이 있는 상대니까. 이전에 포로로 잡혔던 파들로 데 바르덱의 말에 의하면 항복하는 상대도 봐주지 않고 전멸시켰다고 했지.

아무튼 브롱보카쥬 전투는 끝났고 알코라즈 침략군도 이스키비르 강 건너로 쫓아내기는 했지만, 전후 처리는 많이 남았다. 이건 트랑카벨 가문과 드 누아 가문이 얽힌 문제이기도 하고, 크게 보면 블랑독 전체나 북쪽의 드 레뮤즈 가문도 엮여있으니 나 혼자 마무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귀환하면 또 보고서를 잔뜩 써야겠구나.

###

보고서 작성을 걱정하면서 누아 성으로 귀환했는데, 의외의 손님이 누아 성에 머물고 있었다. 다름 아닌 ‘보고서를 받아 보아야 할 사람’이었다.

“콘도티에레 에트, 무사하셨군요.”

“아, 아쥬흐 양! 여기는 어떻게···.”

깜짝이야. 정말 놀랐네. 성 입구에 환영 나온 드 누아 백작부인의 곁에 자연스럽게 서있는 모습이 마치 자기 집인 양 자연스럽다.

그나저나, 연갈색이나 어두운 갈색 계통인 머리카락이 대부분인 드 누아 가문의 귀족 여인들 사이에, 화사한 금발에다가 피부도 하얀 아쥬흐가 서 있으니 방이 확 밝아지는 느낌이다. 아쥬흐의 팔목이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는 꼬마도 둘이나 있네. 그 왜, 갓 태어난 아이도 미남 미녀를 더 좋아한다더니 어린아이들도 보는 눈은 변함없는 모양이다.

“콘도티레!”

“콘도티에에!”

그녀가 허리를 숙이고 아이들에게 뭔가를 설명하자, 꼬마들이 나에게 달려와서 내 손을 잡는다!

“어엇!”

“콘도티에에가 엘랑키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아쥬흐 언니가 말해주셨어요!”

“헉, 그래?”

“그럼 누아 언덕의 바위 들 수 있어요?”

“바, 바위? 누아 언덕이 어디지? 어렵지 않을까?”

“에에에~!”

내가 아이들의 습격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아쥬흐는 드 누아 백작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린다.

“안녕하세요, 가스텔 드 누아 백작님. 며칠 전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아쥬흐 트랑카벨 양. 다 트랑카벨 가문에서 지원해주신 덕분, 그리고 에트 경의 뛰어난 지휘 덕분입니다.”

“후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트랑카벨 가문의 일원으로서 무척 기쁘네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트랑카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승리하기 어려웠겠지요. 귀하의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드 누아는 귀하의 가문에 신의를 다 하겠습니다.”

“트랑카벨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훈훈한 대화가 오갔다. 그럼, 그렇게 크게 이겼는데 사이가 안 좋아지면 거짓말이지. 나는 아이들의 맥락 없는 대화를 열심히 받아주면서 흐뭇하게 생각했다. 어? 무슨 무기를 쓰냐고? 성검? 성검이 뭐니? 나는 근접 무기는 잘 못 다루는데···. 그건 드 누아의 기사분들이 훨씬 잘하시지 않을까? 어엇? 그럼 최강이 아니라고? 아니 그건 애초에 최강이라는 말이 조금 어폐가···.

“그래서··· 향후의 방침에 대해서 가스텔 백작님과, 콘도티에레 에트와 세 분이 이야기를 좀 나누어 보았으면 해요.”

“기꺼이 그러도록 하지요. 지금 말인가요?”

“이제 막 돌아오셨는데 무척 죄송하네요. 가능하면 오늘 중이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도 에트 경도 방금 돌아왔으니, 1시간 이후가 어떻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백작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요.”

여전히 훈훈하지만, 갑자기 무거운 분위기로 변했다. 정말 무슨 일이지? 아··· 솔직히 전쟁터에서만 지내다가 며칠 말만 타서 좀 피곤한데··· 자고 싶은데···.

“트랑카벨 가문에서 일부러 장녀를 파견하셨다면 그만큼 이유가 있는 이야기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어떤 주제에 대해서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음···.”

아쥬흐는 대답을 해도 될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스키비르 강 하류의 지배 구조 개편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네요.”

으음, 나에게는 ‘오늘 자기는 글렀다’로 들렸다고 하면 망상이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