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알코자르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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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 위에서 정리되어가는 전장을 차분하게 내려다보았다.
드 누아 - 트랑카벨 연합군과 네그라타 용병단 사이에서 벌어진 브롱보카쥬의 전투는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 드 누아 - 트랑카벨 연합군의 승리로 말이다. 하지만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 끝났다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그것이 내가 전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세부적인 지시야 훌륭한 부하 장교들과 병사들이 멋지게 실행하고 있다만.
느릿느릿한 거대한 사각 방진끼리의 싸움에서는 사상자가 생각보다 많이 발생하지 않는다. 전투 시간이 매우 길어졌다면 포화에 노출된 부대에서 사상자가 차츰 누적되어 발생하게 되겠지만 대부분 사상자는 전열이 무너지고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상황에서 나오게 된다.
네그라타 용병단 역시 이것을 알기에 철저하게 대열을 지키면서, 끊임없는 적의 총격과 포격에 병력을 잃으면서도 대열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퇴각하고 있다. 내심, 후위에서의 전투처럼 공포가 합리성을 잃어버려 전열 붕괴가 발생했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적도 상당히 노련한 것은 분명하다.
나 역시 무리하지 않으면서 최대한의 성과를 얻기 위해 조심조심 병력을 움직이고 있다. 승리했다고 대열 무너뜨려 가며 추격하다가는 좋은 꼴 못 본다. 심지어 다 이겨놓고 막판에 밀집 대형 풀었다가 승패가 뒤바뀌는 전투도 있었다. 특히 기강이 잘 잡히지 않은 신입 용병들이, 전투가 다 끝난 줄 알고 전리품에 눈이 멀어 우르르 대열을 벗어났다가 마지막 힘을 짜낸 적의 반격에 무너지는 장면은 많이 봐 왔지.
무명이었던 슈토르히 연대가 갑자기 유명해졌던 것도 그런 이유였기 때문이 아닌가. 적은 지치고 낙담한 슈토르히 연대를 우습게 보고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들이받았다가 차례차례 격퇴당했었다. 그런 꼴이 될 수는 없지.
다행히 아군은 드 누아나 트랑카벨이나 주군에게 충성하는 영지군이 중심이라, 그럴 걱정이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장교들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병사들에게도 전염되는 것이다.
지금 내 목표는 이것이다. 내줘야 할 것은 내주고,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전과를 챙기자는 것.
적의 퇴각 작전은 누가 지휘하는지 몰라도 상당히 훌륭하다. 특히 퇴각로에서 가장 가까운, 우측에 있는 방진을 최후의 방패로 삼은 것은 예리했다. 만약에 그냥 배치된 순서대로 퇴각했다면 뒤로 처진 병력은 사실상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장 탈출로에 가까운 병력을 방패막이로 배치한 후, 마치 미닫이문이 열리듯 방패막이 방진을 축으로 나머지 병력을 탈출시켰다. 이러면 시간은 오래걸리지만 더 많은 병력이 대열을 유지한 상태로 전장을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실제로도 그랬고.
퍼퍼퍼펑!
하지만 포병 앞에서 밀집대형으로 뭐 어쩔 거냐. 적의 종심이 깊은 밀집대형은 우리 포병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었다. 그래도 악착같이 대열을 유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안 그러면 기병의 먹잇감이 되니까.
“제22 연대! 행군대형으로 전환, 기병과 함께 퇴로 차단을 위해 이동! 비스듬히, 45도 정도의 각도로!”
“옛, 콘도티에레!”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빼내려는 쪽과, 조금이라도 더 붙잡으려는 쪽 사이의 경쟁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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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드 나뵈프는 휘하 연대를 재정비해 적을 압박하는 보병 부대의 측면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명령을 내려오지 않는다. 퇴각하는 적 역시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기병대의 운용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휘관의 판단과 역량이 중요한지 배웠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여러 차례 기병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가 덮쳐서 격파했던 기병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몸은 멀쩡하지만, 뇌가 정지된 상태’였다. 기동성과 충격력이 생명이어야 할 기병이 거의 정지 상태인 것을 공격해서 승리한 것이 대부분이다. 아니, 콘도티에레가 항상 그런 상태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기병대를 출격시켰다고 해야 하겠지.
그런데 지금, 로베르는 조금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보이고’ 있었다.
아니 이걸 보인다고 해야 하나,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굳이 비슷한 감각을 묘사하자면, ‘냄새인데 보이는 상태’와도 비슷할지 모른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라, 뭐라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콘도티에레가 가까이 있었다면, 물어보면 대답해주지 않았을까 싶은데.
기이한 감각이 로베르를 충동으로 이끌고 있었다. 낯선 느낌에 몸이 살짝 떨렸다.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준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달리고 있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달리면 5개 중대의 부하들이 따라온다. 무조건 참아야 한다.
대체 저건 무엇일까? 마치 실체화된 것 같은 하얀 선이 보인다. 아니, 느껴진다. 이 선을 따라 달리라고 유도당하는 듯한 기이한 기분.
그 선은 곧게 이어지다가···. 슬금슬금 전장을 벗어나는 창병 대열의 옆에 딱 붙어있는 총병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총병대열과 직각으로 나아가다, 어느 순간 비스듬히 커브를 틀어서는, 최종적으로 적의 방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게 대체 뭐지? 뭐길래 이렇게 따라서 달리고 싶어지는 거지? 만약 자기가 충동대로 저 선을 따라 말을 달린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당연히 머리로는 예상할 수 있다. 창벽에 막히고, 고착된 상태에서 총병들에게 사격 당해 병력의 절반을 잃고, 어쩌면 로베르 자신도 저기서 바닥에 몸을 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에 그러지 않는다면? 창병이 이미 한계까지 대열이 연장된 상태이고, 총병이 각도 상 대응 사격이 불가능하며 장전 상태까지 좋지 않다면? 그렇다면, 얇아져서 대열 유지가 어려운 총병들을 총기병들의 일제사격으로 억지로 뚫어내고, 그 빈자리로 추격기병들을 돌입시킨다면?
로베르의 기병대는 적 방진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게 된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은 있다. 아넥시 전투에서의 마지막 돌격이 그랬다. 당시 아직 트랑카벨의 성녀님이나, 콘도티에레를 신뢰하지 못하던 머저리인 ‘나뵈프 가문의 로베르’는 트랑카벨의 기병대가 카라콜 공격으로 뚫어놓은 면으로 돌입해 적장을 쓰러뜨렸었다.
만약에··· 지금 그게 가능하다면? 퇴각 중인 적을 사실상 섬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질서정연한 대형을 부숴 버릴 수는 있지 않을까?
아, 사라졌다.
로베르에게 일어난 ‘선이 보이는’ 현상은 마치 처음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적이 진행하면서 방향이 비틀리고, 추격중인 트랑카벨 보병대가 중간을 가로막았기 때문인지.
그러자 갑자기 심장을 때리던 기이한 충동도 잦아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안도감이 느껴지면서 또한 아쉬움도 느껴졌다. 아까의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충동대로 행동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해도 의미가 없다. 지금은 전투의 마무리만 생각하자. 지금 해야 하는 내 일을 하지 않고 그다음을 고민해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도 이동하자! 보병대의 측면을 지킨다.”
“옛, 연대장님!”
로베르의 기병대가 다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아군의 측면을 보호하고 적의 움직임을 위축시키는 위치에 기다린다.
이제 선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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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다, 지금까지 잘 싸웠다!”
졌지만 말이다.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는 보고를 하러 온 장교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힘차게, 적어도 힘차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겨우 스무 살은 될까 말까, 낙오된 보병 부대를 이끌고 미카토의 방진으로 퇴각해온 어린 장교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포의 눈물인지, 안도의 눈물인지, 분함의 눈물인지.
사방이 적이다. 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전투는 소강상태라, 서로 총격 사거리 밖으로 벗어나서 대치만 하고 있다. 포성도 아까부터 더는 들리지 않는다. 포탄이 떨어진 것인가, 위치를 조정하는 것인가. 제발 전자이기를 빌어본다.
말 그대로 포위당했다. 한쪽은 드 누아, 한쪽은 트랑카벨. 단장인 타르벤도를 비롯해서 전 병력의 2/3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미카토의 부대는 어쩔 수 없이 후위가 되었다. 분하지만, 적장은 기동전에서 한 수 위였다. 서로 간의 힘 싸움이 끝나고 마치 반상 위의 장기와도 같은 상황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퇴로에는 트랑카벨의 보병들이 이미 대열을 짜서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돌파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달려들까 생각도 해 봤지만, 현재 미카토가 이끄는 부대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몹시 지쳐 있었으며, 방진의 비어있는 한 가운데는 부상자들로 가득했기에 포기했다.
피를 흘리며 헐떡대는 부상병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대부분은 치료받으면 살아날 수 있었고, 건강하게 전선에 복귀할 수 있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기회가 없겠지. 대부분의 보급품을 남겨두고 온 본진은 너무도 멀었다. 거기까지 갈 수도 없고. 갈 수 있다면 포위망을 벗어나 도망치는 게 나았겠지.
네그라타 용병단의 차기 단장 확정이었는데. 아쉬운 생각이 든다. 조금만 버텼으면.
이미 타르벤도 단장에게 후퇴를 건의하던 시점에 각오는 한 바였다. 자신이 대열의 최후미를 지키겠다고. 그래도 잘하면 전군을 포위망 밖으로 보낼 수 있을지도 생각했었는데, 역시 힘들었다. 적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용의주도했고, 아군은 너무 지친데다가 부상자도 많아 너무 느렸다.
그래도 시간은 제법 끌었으니 본대는 무사히 탈출할 시간을 벌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최후를 준비할 때···.
“부단장님! 적진에서 백기가 올라왔습니다?”
“뭐?”
“사람을 보내려는 모양입니다!”
이 시점에서 백기라, 항복을 권고하는 것인가. 솔직히 의외이다. 왜냐하면 네그라타 용병단이 저지른 약탈 때문에, 드 누아 가문은 네그라타 용병단과 알코자르 가문을 증오하고 있었으니까. 권고도 없이 전부 죽여버리려고 할 것 같은데.
하지만 항복은 불가능하다. 도망친 본대를 위해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안타깝지만,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여기의 병사들은 버림 말이다.
“이야기가 하고 싶다면 들어 줘야지. 중대장 있나?”
“어··· 부단장님, 제가 여기서는 유일한 중상을 입지 않은 중대장입니다.”
“흐음···.”
눈 앞의 중대장 역시 자잘한 상처를 많이 입고, 이마에 걸친 붕대도 피에 젖어 있었다. 치열한 전투를 지휘하면서, 가장 위험한 위치에서 싸웠던 중대장들이 이것밖에 남지 않았나.
“알겠다. 대화를 원한다면 해 줘야지. 자네, 하얀 천을 마련해서 기수와 함께 따라오게.”
“호위는 몇 명을 데리고 갑니까?”
“상대는 몇 명이 오지?”
“다섯 명으로 보입니다.”
“그럼 다섯에서 가지.”
잘하면 시간도 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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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위험해서 안 된다니까요!”
“별일 있겠어? 저쪽도 시간을 벌 생각일 테니까 대화를 하는 게 이득이야.”
“그래도··· 위험한데···.”
“그러면 첼레스티나가 저격수가 있나 감시해줘.”
“으으으으음··· 하지만 제가 곁에 있는 편이···.”
첼레스티나는 한참 고민하더니 최근 한 번도 발사된 적 없는 자신의 가늘고 기다란 총을 쥐었다. 역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저격을 미리 방지하려는 모양이다.
“으으음, 차라리 본인이 가는 것은 어떻겠소?”
논의 때문에 우리 진영 쪽으로 와 있던 모콜리 드 디망투완 경이 말했다.
“감사드립니다만, 역시 이번에는 트랑카벨 가문이 드 누아와 알코자르 두 가문의 사이를 중재하는 형태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후우, 그렇게 쉽게 중재될 사이는 아니라 보이네만, 가스텔 백작님께서 동의하셨으니 일단은 따르겠네. 조심하시게.”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의 대화는 금방 맺어졌다. 확실히 드 누아 기사들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원수들을 때려죽일 기세지만, 그만큼 충성스러워서 백작의 결정을 잘 따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떠나면 안 돼!”
“목숨을 걸고 콘도티에레를 지키겠습니다!”
그녀의 신신당부에 대답하는 호위병이 든든하다. 나는 부장으로 제22 연대장 지로드 드 뤼퐁텔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하얀 깃발을 든 기수와 호위병 2명. 어차피 사람이 많아봤자 분위기만 흉흉해진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적이 나를 죽여봤자 얻을 게 없다 생각하지만, 그래도 전투 직후이니 조심하기는 해야지.
치열한 전투 직후에 대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로 진영 간 거리는 200미터도 되지 않는다. 나는 대충 중간쯤 되는 위치에 가서 기다렸고, 상대방도 곧 다가온다.
부러진 창대에 지저분해진 붕대를 대충 감은 깃발. 적장을 비롯해서, 호위병들의 복장에도 전투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나마 큰 상처는 없어 보이는 것은 한가운데의 지휘관이 유일했고, 나머지는 여기저기 복장이 피로 젖은 것이 보인다. 시커먼 얼굴은 빽빽한 흑색화약 연기 속을 땀 흘린 상태로 돌아다닌 흔적이겠지. 병사들이 사격하는 최전선에 계속 있었다는 증거이다.
“트랑카벨 파견군의 지휘관을 맡고 있는 에트라고 합니다. 귀군의 용전분투에 경의를 표합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 용전분투에 대해서는 진심이었다. 전투의 초반부는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본대를 퇴각시키기 위한 지연전은 솔직히 감탄했다. 허를 찔렸다고나 할까.
“네그라타 용병단의 부단장, 미카토입니다. 이번에는 완전히 당했습니다.”
적장은 생각보다는 젊어 보인다.
“협상을 제안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