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61화 (61/556)

12-7. 알코자르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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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텔 드 누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허울뿐인 백작령을 물려받고, 오늘까지 평생을 라솔에서 몰려오는 도적 무리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다. 싸웠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도 젊을 때의 기세를 이기지 못해 도전한 적도 있었고, 가신들이 도발 당해 우발적인 교전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결과는 항상 많은 희생이었다. 가스텔의 친구가, 친척이, 가신들이 죽어갔다. 무의미한 죽음은 아니었다. 항상 부끄럽지 않게 싸워주었고, 많은 적을 쓰러뜨렸으며 쳐들어온 적을 격퇴했다.

하지만 그 피해는 드 누아 가문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백작의 궁정의 중요한 인물들이 무의미하게 죽어갔고 그 빈자리는 쉽게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백작은 타협했다. 드 누아 가문이 타협한 것이다. 핵심지역을 공격해오고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면, 변경지역의 약탈을 용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질서 아닌 질서는 10년 넘게 유지됐다. 치욕감도, 분노도 멋대로 희석되어 ‘영지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억지로 타협을 강요당했다. 아니, 스스로 강요했다는 말이 맞겠다.

마치 새끼 때부터 말뚝에 묶여 자란 맹수가 성체가 되고도 말뚝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드 누아는 스스로가 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도 자신의 힘으로는 영영 벗어나지 못했겠지. 하지만 트랑카벨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일어나는 순간.

굴레는 깨졌다.

이가 갈리도록 단단하고 도저히 뚫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용병들의 장창 밀집대형과 드 누아의 장창 밀집대형이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적의 증오스러운 총병들의 사격에 총을 만져본 지 얼마 되지 않은 드 누아의 총병들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응전하고 있었다.

가스텔은 깨달았다. 그의 가신들은, 드 누아의 전사들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몰랐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동맹인 트랑카벨 가문으로부터 싸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창병과 총병 조합의 싸움은 무기를 다루는 숙련도나 진형의 철저함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병사들의 배짱과 과감함도 중요했다.

그간의 치욕과 분노로 잔뜩 독이 오른 가스텔의 가신들은 배짱과 과감함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쏟아지는 총탄에도 움찔거리지 않고 태연하게 새 탄환을 장전해 한 놈이라도 더 죽일 생각밖에 없는 드 누아의 기사와 병사들은 적에게 섬뜩함까지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금 가스텔의 전장은 이기고 있었다.

드 누아 백작 영지군과 적의 교전 상태는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전투 초반에 숫자와 숙련도로 밀어붙여 삼각대형으로 결사적으로 버티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단단하게 형성된 방어선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버텨내고 있다.

좌측, 기병들 간의 전투 역시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포격에 쫓겨온 적 기병들을 노리고 돌진해온 트랑카벨 기병대의 돌격은 예리했고, 자칫 적 지원군에 측면을 내줄 뻔한 위기는 바로 가스텔의 가신, 기병대장 브라소 드 마르지엘 남작이 처리했다. 정말로 자랑스러운 가신들이 아닐 수 없었다.

중앙에서 온 적 기병 지원군이 위기에 빠진 동료들을 수습해 후퇴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숫자가 많이 줄어 있었다. 무엇보다 외부에서 움직이며 적을 공격해야 할 기병들이 보병의 울타리 너머로 숨어 버렸다는 것은 큰 성과이다.

반대편, 트랑카벨 가문의 군대와 적 사이의 전선은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엄청난 총성과 포성은 여기서도 들렸다. 분명, 그 화력을 뒤집어쓴 상대는 끔찍한 꼴이 됐겠지.

가스텔은 자신도 뭔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다른 전선에서 아무리 많은 일이 일어나도, 결국 주전장은 백작님의 전장입니다. 적의 주력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다는 것만으로 절반은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병사들을 믿고 동맹인 저희를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트랑카벨 영지군의 지휘관, 에트의 마지막 당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의 부하들은 버거운 적을 상대로 대등하게 잘 싸워주고 있었다. 그 이상의 뭔가를 요구하면 안 될 것이다. 분하지만, 이런 전장에서 그는 초보자였다. 숙련자인 에트를 믿어보자.

“힘내라! 누아의 형제들아!”

그저 들리지 않을, 안타까움과 애정이 담긴 응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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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은 빠른 속도로 안정화되고 있었다. 로베르 드 나뵈프는 콘도티에레가 자신에게 ‘전장을 파악하고 움직여라’라고 한 말의 뜻을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적에게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 돌진하던 중대장 시절과는 다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500명의 기병은 명실상부하게 승패를 바꿔놓을 수도 있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트랑카벨 기병대의 지휘관은 누구십니까!”

드 누아 기병대에서 누군가가 부른다.

“접니다.”

“귀공의 활약 잘 봤습니다! 저는 드 누아 가문을 섬기는 브라소 드 마르지엘이라 합니다.”

“트랑카벨 영지군의 로베르 드 나뵈프입니다. 귀군 역시 적절한 타이밍에 지원으로 혹시 위험할 수 있었던 아군을 구해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허허허, 과찬이십니다!”

전투 와중에 기병 지휘관끼리 통성명하며 친목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별개의 지휘계통을 가진 부대가 유기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아야 한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시킬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으음···.”

브라소의 물음에 로베르는 조금 망설였다. 자칫하면 아전인수로 보일 수 있는 발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의 후위, 트랑카벨 군과 대치 중인 적을 우선하여 공격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브라소 경 께서는 남은 적 기병들을 견제하시며 우리 연대를 지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적 본대는 사방에 대응 가능한 태세이지만, 후위의 적은 선형으로 급히 편성한 부대라 후방이 비어 있다. 본대에는 아까 살아남아 도망친 기병대가 바로 붙어 있다. 화력 면에서 우세한 트랑카벨 보병이 이미 유리한 상황이다. 기병창 등 근접 무기로만 무장한 브라소의 기병대보다 총기로 무장한 로베르의 정찰연대가 밀집대형을 이룬 보병 급습에 유리하다. 무장과 무관하게 단단하게 뭉쳐있는 보병은 자칫하면 기병대를 끌어들이는 늪이 될 수 있으니까.

이유는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들을지 걱정이 되었다. ‘네가 트랑카벨 소속이니까, 동료들을 먼저 구하려고 하는 것이지?’라고 나온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런 생각도 하고는 있기 때문이다.

“흐음···.”

브라소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다. 로베르는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에 상대방, 브라소 드 마르지엘이 로베르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리해서라도 브라소의 의견을 따라야 할까? 물론 현재 기병전 1차전에서 승리하면서 우위를 점했으나, 여전히 협력 없이 따로따로 싸워서는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을 할 수 있는 전력 차는 아니다. 각개격파라도 당한다면 현재의 우세가 ‘과거의 일’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좋습니다! 귀경의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약한 적부터 처리하는 것이 순리이겠죠!”

의외로 브라소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그도 편견 없이, 전술의 기본 원칙에 따라 판단을 한 것 같다. 로베르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 앞장서시오!”

“감사합니다, 브라소 경. 서두르겠습니다.”

“곁다리들을 잘라 버리면 적 본대 역시 말라 죽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백작님을 중심으로 뭉친 드 누아의 사나이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하하하하하!”

“알겠습니다. 자, 이동 준비! 재장전은 마쳤나?”

다행히 조금 전의 접전에서 큰 피해는 없었다. 부상자들과 말을 잃은 병사들은 한데 모아서 일단 용기병들과 함께 행동하도록 했다. 하지만 전투가 격화되어서 용기병들이 전투에 나서게 되면 뛰어서 아군 후방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발!”

제31 정찰 연대가 다시 기동을 시작한다. 이번 목표는 적 보병 대열의 후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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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토는 미칠 것 같았다.

기병대의 구원은 성공했다. 100기의 친위 기병들을 이끌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동료들을 구했다. 확실히 기병창과 권총, 중장갑으로 무장한 친위기병대는 능동적인 상황에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드 누아의 기병들은 장비 면에서도 밀리고, 총기가 없는 데다가 트랑카벨의 기병들은 장전된 총을 이미 써버린 이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을 ‘격파했다’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확히는 윽박지르고 겁을 줘서 잠시 쫓아냈다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결국 전멸 위기의 기병대를 구해서 어떻게든 다시 타르벤도 단장의 주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록 반토막 나기는 했지만.

친위대를 타르벤도 단장에게 돌려주고, 자신이 지휘하던 후위 부대로 향한 미카토가 발견한 것은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활기를 잃어버린 부하들의 모습이었다. 일부 중대들은 사상자가 너무 많아서 예비대에 전열을 맡기고 후퇴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잠시 후위 보병 부대에서 눈을 떼고 기병 구원에 나섰던 이유는 그래도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숫자의 보병 대열이라면 특별한 외부 세력이 개입하지 않는 한 지루한 창병 밀치기 대결과 총격전이 이어지는 것이 상식이니까.

“전방의 적은 트랑카벨에서 온 군입니다!”

“진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상하게··· 이상하게 화력이 강합니다! 전면에 나섰던 부대들이 엄청난 피해를 보았습니다!”

침착함을 잊은 부하 장교들의 보고를 통해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원인은 두가지였다.

첫째, 트랑카벨 군의 화력이 너무 강하다. 총병의 비율도 무척 높고, 포병의 지원 사격이 끊이지를 않는다.

둘째, 트랑카벨 군이 근접 일제사격으로 선두 대열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장교들과 고참병들이 다수 사망하는 바람에 남은 창병 대열 일부가 지리멸렬해졌다. 제대로 된 창병 밀치기 대결이 시작되기도 전에 밀려 버렸다.

대체 트랑카벨의 지휘관은 무슨 생각인가?

이 정도면 창병보다 총병이 더 많은 상황 아닌가? 저걸로 전열 유지가 가능하다고? 무난하게 힘 싸움에 들어갔다면 창병 대열의 질량 차이 때문에 그대로 밀려 버리는 것 아닌가? 트랑카벨 가문이 블랑독 지방의 패자가 되었으며, 포도주 장사를 통해 큰돈을 벌었다고는 들었지만··· 이건 그저 아무 생각 없는 돈 자랑이 아닌가? 어리석은 행동이다!

물론 미카토가 그렇게 현실 부정하는 듯한 생각을 했지만, 현실은 그 트랑카벨의 보병 대열에 밀려서 위축된 자신의 병력만이 남았을 뿐이다. 무난하게 싸워서 밀린다? 무난하게 싸우지 않았다. 설마··· 설마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총병 비율을 늘렸는가? 설마··· 그럴 리가.

애초에 힘 싸움에서 밀린 이유 중 하나는, 대열의 외곽을 잡아줘야 하는 고참병 숫자가 부족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다가 적 경보병들의 견제 공격에 많은 숫자를 잃었고, 이후에도 숲에서 벌어진 조우전에서 주로 사망한 것은 용감한 고참병들이었다. 또한 어디까지나 주전선은 드 누아 가문 보병과의 싸움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많은 숫자가 거기에 배치되어 있기도 했다.

후위 부대의 전황이 불리한 것은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들이 겹겹이 쌓였기 때문이다. 악운 때문이다. 절대로, 절대로 상대방의 계산에 말렸기 때문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계산해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미카토는 억지로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 버리려 노력했다. 어쨌거나, 수세에 몰린 것이 현실이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철수한 부대를 재편성해서 중앙 돌파를 시도할까?

지금이라도 기병대를 불러와 적의 측면을 노릴까?

양 측면의 날개를 접어서, 적과 접한 면적을 줄여 압박을 줄이고, 작지만 견고한 새로운 방진을 구성할까?

선택지가 몇 가지는 있다. 하지만 무엇 하나 현재의 불리함을 명쾌하게 벗어나는 수는 보이지 않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주도권은 네그라타 용병단이 잡고 있었다. 언덕에서 싸울지, 아래로 유인해서 싸울지, 아예 무시하고 적의 본거지로 진격할지. 하지만 지금은 현상 유지에 급급하며, 새로운 수를 짜내지 않으면 서서히 불리해져 가는 미칠 것 같은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마지막 선택지, 양 날개를 접고 새로운 방진을 구성하는 쪽을 고르기로 했다. 다소 불리하고 불균형한 상황이기는 해도, 썩어도 네그라타 보병대이다. 일단 단단한 방진을 만들면 온종일이라도 버틸 수 있다. 이렇게 적군의 절반을 여기 붙들어 놓고, 기병대는 용병단 본대를 지원해 드 누아 군을 먼저 무너뜨린다!

드 누아의 지휘부를 타격해서 가스텔 백작 본인을 죽이거나 사로잡아야 한다. 하다 못해서 전장에서 패주 시키기만 해도 승리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었다. 일개인의 무용으로 승패가 갈리는 시대는 지났다지만, 그래도 총사령관의 부재는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결정했다. 그 수밖에 없다.

“양 측면을 재편성한다! 전령을···.”

“부단장! 부단장! 적입니다!”

“무슨 소리야! 전장에 적은 당연···.”

“후방에 적 기병입니다! 돌입 중!”

“뭐 시팔?”

잠깐이나마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반격을 지휘하려던 미카토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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