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8화 (58/556)

12-4. 알코자르 토벌

###

“뭐? 놈들이 결전을 받아들여?”

“그렇습니다, 타르벤도 남작님!”

“어허, 전장에서는 다르게 부르라 하지 않았나.”

“앗, 죄송합니다, 콘도티에레 타르벤도.”

“으흠.”

전령으로 다녀온 아버클리 그릭키의 보고를 들은 네그라타 용병단의 콘도티에레, 타르벤도 카메조 데 보르토 남작은 다소 놀라기는 했으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클리의 멋들어진 발음으로 하는 콘도티에레라는 호칭도 좋았고, 보고의 내용도 좋았다.

만약에 적들이 누아 성을 비롯한 요새에 꽁꽁 틀어박혀 있으면 혹시라도 전쟁이 길어질까 걱정했는데··· 알아서 밖으로 기어 나와서 야전을 벌여 준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다. 유일하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전투가 너무 질질 끌려서 결국 누아 함락에 실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면 더 추워지기 전에 전쟁이 끝날 것 같다.

“전장은 어디로 정했나?”

“저··· 이쪽, 브롱보카쥬입니다. 오면서 확인했는데, 키 작은 관목 숲이 있는 언덕이 있는 지형이었습니다. 사흘 후에 만나자고 하더군요.”

“오호, 언덕을 먼저 차지하고 진을 치겠다 이 말인가, 제법 머리를 썼군.”

함께 대화를 들으며 지도를 내려다 보고 있던 부단장,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타르벤도 단장의 말처럼, 성벽 뒤에 틀어박힌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낫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사흘 후인가요? 오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출발해도 조금 빠듯하겠네요.”

게다가 시간이 부족하다. 아버클리 이 인간은 용병 생활도 한 적이 있으면서 이렇게 빠듯하게 잡아 오면 어쩌자는 거야, 문득 미카토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자, 우리 고참병들은 전투 직전의 강행군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건 맞습니다만···.”

한참 지도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던 미카토는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연다.

“콘도티에레 타르벤도, 건의를 올리고 싶습니다.”

“무엇인가?”

“물론 콘도티에레 타르벤도의 명예로움에 누를 끼칠지 모르는 건의를 드려 죄송스럽습니다만, 브롱보카쥬의 적을 무시하고 남쪽 길로 우회하는 작전을 건의드립니다.”

“뭐라! 결전의 약속을 깨자는 것인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군은 전략적 우위를 가지게 됩니다. 적이 알게 되면 허겁지겁 우리 군을 따라 기동하게 될 테고, 말씀하신 대로 네그라타 연대가 최고 속력으로 기동한다면, 오히려 누아 성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결전을 강요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흐음···.”

드 누아의 방어군이 의기양양하게 유리한 지형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남쪽으로 우회하는 다른 길을 통해 빠르게 진격하는 것이다. 적은 브롱보카쥬에 어떤 준비를 해놓았든지 간에, 전장을 이동하는 시점에서 모두 포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제안한 결전의 약속을 이쪽에서 깼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만큼의 이득을 볼 수 있느냐의 문제이고.

“미카토, 무척 지혜로운 의견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지금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모르겠군.”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전력 면에서 아군이 우위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책을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정면으로 싸워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뭐, 나이가 들고 총기가 사라졌다고는 해도, 타르벤도 역시 어리석은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명분과 실리가 마구 뒤섞인 음모의 구렁텅이에서 살아남아 남작까지 된 인간이 아니던가. 미카토는 깔끔하게 자신의 의견을 포기하기로 했다.

“허나, 드 누아의 산적 패거리들에게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형태로 싸워 줄 필요가 없는 것도 맞긴 하지!”

“...콘도티에레? 무슨 말씀이신지?”

“결전의 장소는 브롱보카쥬로 정했지만, 언덕 위에서 기다리는 적을 공격해줄 의리 따위는 없다 이 말이지!”

타르벤도는 눈을 반짝이며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미카토는 인정했다. 이 늙은 남작은 우연히 용병대의 우두머리가 된 인물은 아니었다.

###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은 브롱보카쥬에 있는 두 개의 언덕 중 하나에서, 부릅뜬 눈으로 평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침략자인 알코자르 남작의 행렬이 동쪽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아··· 역시 이렇게 되는 겁니까.”

옆에서 모콜리 드 디망투완 남작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아침 일찍부터 다들 고생하여 배치한 전투 대형이 의미 없어지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다.

브롱보카쥬에서 결전을 약속한 직후, 서둘러 행군한 드 누아 영지군은 브롱보카쥬에 적보다 하루 일찍 도착했다. 남은 시간을 이용해 언덕 비탈을 살짝 요새화하고 밤 늦게까지 병력 배치를 고민했다.

하지만 적은 언덕을 공격하지 않는다. 동쪽으로 행군할 뿐이다.

이는 브롱보카쥬 지역의 특이한 지형에 기인하는데, 브롱보카쥬는 숲이 많은 드 누아 영지에 드물게 존재하는 널찍한 띠 형태의 평야 지대이다. 현재 드 누아 군이 포진한 두 개의 언덕은 평야의 남쪽에 있다. 그 때문에 여기 배치된 병력으로는, 적이 평야의 북쪽을 가로질러 행군해 버리면 막을 방법이 없다. 오히려 백작의 거성인 누아 성으로 향하는 적을 구경만 해야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우리도 어서 움직이도록 하지. 적이 누아 성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백작님.”

적의 움직임은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다. 드 누아 백작은 담담하게 말하며 진형을 풀고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적이 앞질러 가서 브롱보카쥬를 통과해 누아로 향하는 길로 들어가 버리면 안 된다. 병사들도 느끼고 있었는지 신속하게 언덕을 내려간다.

먼저 경기병들이 길을 선도하고, 그 뒤로 활과 총으로 혼성 무장한 숲지기 경보병들이 뒤를 따른다. 다음은 세로로 긴 행군대형으로 바뀐 창과 총으로 무장한 주력 보병대이다. 편성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모콜리의 엄격한 지휘에 잘 따라주고 있었다. 가장 후위에서 200여 기의 중기병들이 마지막으로 언덕을 내려간다.

유리한 고지대를 포기하고 평지에서 적을 만나러 향한다. 아쉬운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증오스러운 숙적과의 싸움인지, 병사들의 움직임은 기운차다.

“드 누아 만세!”

“만세!”

“누아!”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환호가 병사들의 대열에 퍼져나간다.

###

“오호, 매우 기운찬 병사들이네!”

타르벤도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드 누아의 산적 패거리들에게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형태로 싸워 줄 필요가 없는 것도 맞긴 하지!’

그 말대로, 그의 군대, 네그라타 용병단은 억지로 언덕을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의 본거지로 진격하겠다는 제스처를 보이자마자, 적은 기겁해서 언덕에서 후다닥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물론 드 누아의 주력군을 남겨두고 누아 성으로 진격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본심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한데 모인 적을 때려 부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만일이지만, 정말로 만약에 언덕 위에서 드 누아 군이 농성하면서 ‘적이 지나가건 말건 우리는 언덕을 지키겠다’라는 태세로 나왔다면 못 이긴 척 언덕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은 그만한 배짱이 있지는 못했다. 그 결과, 평원에서 적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행군 중지! 숲을 등지고 전투 대형을 짠다.”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전령을 불러라!”

“행군 중지! 전령!”

드 누아 백작과 그의 군대. 알코라즈의 남작이자 네그라타 용병단장의 명예를 걸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상대해 섬멸해 주겠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역시 콘도티에레 타르벤도! 그 놀라운 전술적 식견에 이 아버클리는 감동을 금할 수 없습니다!”

측근인 아버클리의 아첨 역시 즐거운 부분이었다. 꿀을 바른 듯한 목소리로, 연극 배우의 과장된 억양을 가진 이 알디온 출신의 남자는 원래는 별 볼 일 없는 용병 출신이었다. 하지만 나름 똑똑한데다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썼기 때문에, 단순한 용병대장이 아니라 남작으로서 행정가가 필요해진 시점에 등용되어 출세한 케이스이다. 그 과정에서 그의 목소리와 아첨 실력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했다.

“적 보병의 움직임이 제법 그럴듯합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세개의 전열로 나뉘어 빠른 속도로 진형을 구축하는 드 누아의 보병들을 보면서 미카토가 말했다.

“그사이에 새로운 개념 훈련이라도 받은 것인가? 총으로 무장한 병력도 제법 늘어난 모양이고.”

“트랑카벨에서 교관을 파견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흐으음, 꽤 유능한 교관인 모양이군. 포로로 잡힌다면 네그라타 용병단에서 고용해도 나쁘지 않겠어.”

최근 귀족 출신 신병들이 부대에 잘 녹아나지 않는 일이 자꾸 발생해서, 용병단의 중견 간부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드 누아의 산적 무리를 저렇게 훈련할 수 있었다면 분명 쓸만한 인물이겠지.

“적은 주력 전열을 셋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맞춰 주도록 할까요?”

“아니! 대군이 굳이 적에게 맞출 필요는 없다. 계획대로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네그라타 용병단은 주력 보병을 크게 둘로 나누었다. 두개의 거대한 방진이 위풍당당하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역시 숙련도가 높아서 그런지, 더 늦게 시작한 결진을 더 빨리 끝낸다. 드 누아의 보병대도 그렇게까지 늦지는 않지만, 묘한 만족이 타르벤도의 마음을 채운다.

“전진!”

“전진하라!”

3300명에 가까운 대규모 보병대열 두 개가 천천히 적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한다.

“빨리 끝내고 누아로 가자!”

###

“밀집 대형으로 저 속도라니, 확실히 숙련도는··· 대단하군요.”

모콜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적은 무섭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가스텔 백작 역시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적의 진격은 거침이 없으며, 드 누아의 병사들에게 큰 위협이 되리라.

“백작님, 저는 전열을 지휘하러 가 보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불러 주십시오!”

“알겠네, 모콜리. 잘 부탁하겠네.”

“넵! 드 누아를 위해 승리를 가져오겠습니다!”

모콜리가 전령 두 명과 함께 선두 방진으로 멀어져갔다. 총 세개의 방진은 중앙이 조금 전진해 있는 삼각 대형으로, 적의 훨씬 거대한 방진에 맞서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중앙이 돌출된 만큼, 적의 충격력을 흡수하는 데에는 좋겠지만 그만큼 중앙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것이다.

타타타탕!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온다.

탕탕! 타타타탕! 타타탕!

타타탓, 타탕탕!

점점 많이, 자주 들려오기 시작한다. 선두 전열들이 교전을 시작한 것이다. 양측의 최전열에 하얗게 화약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직 창병들은 직접 교전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시간문제이다.

적의 숫자는 거의 두 배,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전투 방식이다. 이대로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전투에 나서기로 한 것은 바로 자신,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의 결심이다.

“힘내라 모두!”

전해지지 않을 응원을 전해본다.

###

“크흑, 크으악!”

“대열을 유지해! 무너지면 다 죽는다!”

타앙! 탕!

“죽어 시팔!”

“끄으윽!”

“이야아아!”

선두 전열 사이로 들어간 모콜리의 눈앞에서는 끔찍한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었다. 장창 방진과 장창 방진이 부딪혔을 때, 서로 찌르고 죽이려는 싸움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오히려 방진끼리의 충돌에서는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지 않는다. 총병이 딜러라면 창병은 탱커에 가깝기 때문이다. 서로 무거운데다 길어서 무게중심도 안 좋은 창대를 들고 있어서 컨트롤도 잘 안 되고, 서로 겹겹이 쌓인 창대 사이를 뚫기는 힘들다. 게다가 서로 갑옷과 투구까지 걸쳤으니 어쩌다 적 몸에 닿아도 치명에 이르는 경우는 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우선 방패와 미늘창으로 무장한 네그라타의 근접 보병들이 들이닥쳤고, 창이나 총에는 익숙하지 않아도 백병전에는 전문가인 드 누아의 중장병들이 이를 받아쳤다.

게다가 양측 사이에는 도저히 메우기 힘들어 보이는 심한 감정의 골이 있었으며, 특히 심하면 자신의 체면은커녕 목숨도 돌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이 때문에 방진들의 모서리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양측의 창대가 어지러이 겹치는 대열의 정면에서도 추하게 땅을 구르는 드잡이질이 벌어졌다. 허리도 펼 수도, 무기를 휘두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갑옷으로 중무장한 전사들이 서로의 약점을 찾아 단검을 내지르고 주먹질을 하는 난리 통이 된 것이다.

“대열을 유지해! 적이 파고들지 못하게 막아라!”

모콜리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전방에서 싸우는 아군을 독려했다.

“모콜리 남작님! 윌라지 경이 전사하셨습니다!”

“으음, 내가 곧 가겠다! 조금만 버텨라.”

“알겠습니다!”

윌라지는 방진의 측면을 담당하고 있던 기사였다. 서서히 중앙 전열이 밀리고 있었다. 밀릴 수는 있다. 그것을 감안하고 선두에 배치한 것이니까. 하지만 대열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괜찮은가, 자네들!”

“오오, 모콜리 경 오셨습니까! 물론 잘 싸우고 있습니다!”

“윌라지 경이 전사하셨다 들었네!”

“그쪽에는 레이동 경이 가셨습니다! 파고들었던 놈들은 전부 피떡을 만들었죠!”

“다행이군!”

명문 백작가인 드 누아를 몇 대째 섬기고 있는 긍지 높은 가신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밀집 대형에서 평민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창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하나가 드 누아 백작을 욕되게 하느니 기꺼이 목숨을 바칠 용장들이다. 적군이 밀려들어도, 옆에서 동료들이 쓰러져도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으앗, 조심하십시오! 적이 파고듭니다!”

“으음!”

이번에도 방진의 좌측 모서리 쪽이 밀쳐지며 방패를 앞세운 적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옆에서 아군이 검으로 종아리를 찌르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바로 뒤를 따라오던 적이 미늘창을 크게 휘둘러 공간을 확보한다. 이대로라면 적이 더 몰려든다. 모콜리는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다.

카가각!

모콜리의 검과 적이 겨눈 미늘창이 얽힌다. 본래라면 더 무거운 미늘창이 검을 튕겨냈겠으나, 이를 예상한 모콜리가 검을 비스듬히 내리며 기세를 죽였다. 덕분에, 미늘창의 축이 노기사의 정면에서 벗어났다.

“이야아아아!”

그르르르륵! 소름 끼치는 나무 창대 긁어내는 소리와 함께 모콜리가 돌진한다. 상대는 재빨리 미늘창을 짧게 고쳐 잡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미늘창은 장창처럼 길지 않으니까.

“으억!”

모콜리는 창대를 밀쳐내던 검은 그대로 놔두고 왼 주먹으로 상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노장의 주먹, 그것도 팔뚝까지 보호하는 쇠장갑이 씌워진 주먹이 적병의 얼굴을 후려치자 우드득 소리와 함께 하얀 이빨이 몇 개 튀어 오른다. 주인 잃은 미늘창이 바닥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진 적의 턱을 걷어찬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적의 눈이 뒤집힌다.

“모, 모콜리 경···.”

“자기 위치를 사수하면 절대로 지지 않는다! 지금은 이길 필요가 없다, 지지 않는 것만 생각해!”

“알겠습니다!”

“맡기겠다, 레이동!”

흔들리던 방진이 다시 단단해진다. 한동안은 유지될 것이다.

갑자기 모콜리는 야속함이 느껴졌다. 동맹군인 트랑카벨 영지군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도와주러 오지 않는 것인가!

‘완벽한 기습을 위해서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동안만 버텨 주세요.’

트랑카벨의 지휘관이 한 말이 허튼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믿었으니까, 가스텔 백작도 자신도 작전을 받아들였던 것이고.

하지만 최전선에서 시간 벌이를 맡은 병사들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시간이다. 게다가 지금 적을 막다가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병사들은 바로 모콜리가 소년 시절부터 함께 지내며 훈련했던 소중한 드 누아의 가신들이다!

“제발, 빨리! 빨리!”

들리지 않을 재촉을 해 본다.

퍼퍼엉!

멀리서 생소한 울림이 들린다. 귀가 아프도록 들리는 총소리와는 다른 뻐근한 울림.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참혹한 기다림의 끝을 알리는 소리라는 것을 모콜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