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겨울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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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클랑 나브룰은 심호흡을 하며 반대편을 살폈다. 숲 그늘에 의지한 그의 30명짜리 작은 경보병 부대가 다가오는 적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르클랑은 드 누아 백작가의 숲지기장 중 한 명이다. 본래 귀족 가문의 숲지기는 평범한 향사 가문의 일인 경우가 많지만, 숲이 영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드 누아는 조금 다르다. 북부와 중부, 남부 셋으로 나뉘며, 각각의 관리하는 숲지기장이 따로 있다.
각 숲지기장은 휘하의 숲지기들을 통해 숲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 사냥을 생업, 혹은 부업으로 삼는 영민들의 사냥 기간이나 영역을 통제하고 다툼을 중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외곽 지역을 침입하는 적이 있다면 감시하거나 격퇴하는 일을 하고, 백작의 명령에 따라 군이 소집되면, 휘하 숲지기들과 영민들을 무장시킨 부대를 이끄는 지휘자의 역할도 한다.
그는 북부 숲의 정예 궁수들을 이끌고 지난번 대승리에 참여했었다. 그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언젠가 라솔의 개자식들과 일전을 벌이게 될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치열한 유격전으로 괴롭히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 낯선 무기를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정비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쇠기름 냄새가 나는 화승총. 사람 손을 타 반질반질한 나무 손잡이 부분의 감촉이 아직도 낯설었다.
‘총은 불을 쓰는 무기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불씨가 작아서 연기는 보이지 않겠지만, 작더라도 그늘에서 타오르는 불은 아주 멀리에서도 보입니다. 아, 그리고 산불 조심하세요’
지난주에 도착한, 교관의 고문이라는 남자가 설명해준 말이 생각나, 혹시라도 적 입장에서 보이지는 않나 싶어서 총의 옆면을 적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주변의 부하들 30여 명 역시 이 낯선 무기를 조심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쪽이다!”
“방패병 앞장서!”
“산적 새끼들 오늘 싹 털어 버린다!”
저 앞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그의 다른 부하들이 적과 교전 후 후퇴하고 있었다. 물론 계획된 행동이다. 선두 부대 소속의 궁수들이 숲을 뚫고 나타나 메르클랑의 부대를 지나간다. 서로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으며 눈빛만을 교환한다. 이제 우리에게 맡기라는 뜻을 눈빛으로 전한다.
‘활로 무장한 부대가 평소처럼 적을 기습해 유인합니다. 그럼 활에 대응하기 위해 밀집대형을 취한 적들이 숲으로 들어오겠죠? 이걸 총으로 무장한 부대로 한 방 날리는 겁니다.’
그 남자는 숲에서의 전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쏘고 나서 반대편이 보이는 숲이라면 100미터, 보이지 않는 숲이라면 50미터 즉시 후퇴합니다. 거기서 재장전하며 적의 동향을 살피고, 적이 추격해온다면 추가로 후퇴하고 추격해오지 않는다면 원래 위치로 돌아갑니다.’
기본적으로 드 누아의 궁수들이 쓰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숲에서의 전투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숲에서 싸워본 적이 있냐 물어보니 그룬발트 남부는 온통 숲으로 뒤덮여있다고 하더라.
“산짐승 새끼들 가죽을 벗겨 버린다!”
“남자답게 덤벼!”
“니들 마누라 앞에서도 도망만 다니냐!”
적들이 외치는 고함이 가까워졌다. 숲에서는 나무 때문에 소리가 이리저리 반사되거나 흩어져서 도착하기 때문에 거리나 방향을 추측하기가 조금 어렵다. 하지만 평생을 숲에서 살아온 메르클랑에게 적과의 거리를 추측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함께 매복하고 있는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겠지. 이제 적과의 거리는 멀어야 20미터 정도이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반질반질한 금속 갑주가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한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다 철제 갑주의 표면에 반사된 빛은 의외로 멀리까지 전해진다.
“준비.”
속삭이듯 말하며 오른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려 주먹을 쥔다. 미리 약속한 신호, 사격 준비의 의미이다. 지금까지 요령껏 총을 나무 그늘에 숨기고 있던 병사들이 총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다. 여기저기서 격철을 당기는 찰칵찰칵 소리가 들린다. 워낙 조용해서 혹시라도 적이 들을까 걱정이 되지만, 숲을 뚫고 지나오면서 온갖 소음을 내는 자들에게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겁쟁이들 또 도망쳤냐!”
“네그라타 용병단 이름만 들어도 지리겠지?”
시끄럽게 떠들어준 덕분에 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대략 15미터.
‘숲속에서 산개대형으로 기다리는 것, 적이 코앞에 다가오기까지 사격하지 않고 참는 것, 모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라면 할 수 있다 믿습니다.”
그럼, 할 수 있고말고. 저 빌어먹을 자식들 상대로 참기만 해온 시간이 몇 년인데, 그걸 못 참겠나. 예상대로, 메르클랑의 형제들이나 다름없는 북부 숲지기들은 침착하게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사!”
날카롭게 외치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그 소리가 실제 신호였다.
타타타탕! 타타탕!
30여 명의 숲지기가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고, 총탄이 나무를 뚫고 나아갔다. 몇 발은 중간에 있는 나무에 막혔는지, 나무 둥치에 총알이 박히는 퍽퍽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으악!”
“뭐야? 시발! 저 새끼들 총 있어!”
“총병! 총병!”
예정대로, 직후방으로 후퇴한다. 숲에서의 전투에서는 전진도, 후퇴도 기준이 되는 지휘관이나 깃발이 보이지 않고 명령도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각자의 감각과 계획이 중요하다. 그리고 드 누아의 숲지기들은 여기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전문가였다.
부하들이 계획대로 잘 후퇴하고 있나 확인하는 몇 초 동안, 흩어지기 시작한 하얀 연기 너머로 분명하게 보았다! 들고 있는 방패의 위쪽 절반 정도가 부서진 적병이 목 부근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사격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흥분한 베르클랑의 총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화약은 다섯 발 더 있다. 주신에게 맹세코, 이걸 몽땅 적의 머리통에 꽂아 줄 것이다.
숲을 누비며 후방으로 달리기 시작한 지 몇 초 지났을까, 적 방향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앞으로 나온 적 총병들이 쏜 모양이다. 하지만 적의 총알은 빽빽한 나무에 막혀 이미 자리를 뜬 숲지기들에게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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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산적 궁수 나부랭이들이 총을 쏜다고?”
이스키비르의 용병왕, 알코자르의 남작, ‘콘도티에레’ 타르벤도 카마조 데 보르토는 의외의 소식에 당황했다. 만만하게만 생각했던 누아 약탈부대가 갑자기 돌아오지 않는다 생각해서 무력 시위도 할 겸 병력을 더 이끌고 찾아왔는데 의외의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선발대가 적의 매복에 걸려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숲속에서 적을 쫓아갔으나, 적과 제대로 교전도 못 해보고 병력만 30명 이상 잃었다. 따라잡았나 싶으면 총탄의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건 사실 일선 지휘관의 실수이다. 아무리 산에 사는 거지새끼들이라고 해도, 자기 앞마당에서는 절반을 먹고 들어가는데 괜히 깊이까지 추격한 것이다.
타라트라바 출신인 타르벤도는 네그라타 용병대의 일개 신입 용병으로 시작해서, 5년 만에 대장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절정기는 라솔 국왕의 휘하에서 엘랑키아 왕국과 싸웠던 전쟁이다. 당시 네그라타 연대는 엘랑키아 왕실 근위대의 결정적인 공격을 막아내며 승리를 견인하는 데 성공했었다. 이 덕분에 네르가타 용병대의 대장이었던 타르벤도는 전쟁에서 얻은 남작령 중 하나를 받을 수 있었으며, 팔자에도 없던 남작이 될 수 있었다.
그 이후, 네그라타 용병대는 ‘겨울에도 고용을 보장한다’라는 캐치프라이즈로 승승장구했다. 물론 겨울 중 용병료는 타르벤도가 지급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는 ‘동계 군사 활동’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것이다.
이 군사 활동의 대상은 강 건너 엘랑키아의 영토일 수도 있었고, 이웃의 라솔 영토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이런 변경 지역에, 어지간한 백작령 이상의 군사력을 갖춘 알코자르 남작령을 적대하려는 귀족은 없었다. 게다가 꾸준히 뇌물과 용병을 제공하면서 이어온 중앙의 몇몇 왕실 귀족들과의 커넥션은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
즉, 용병 대장 타르벤도에게 이 겨울의 군사 활동은 병사들의 숙련도를 높이고 물자를 조달하는 일거양득의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드 누아의 백작이 진짜로 한 번 해볼 생각인 것 같은데요?”
타르벤도의 처남이자, 신뢰하는 부단장인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가 말했다. 타르벤도 역시 동의했다. 최근 몇 년간 유독 누아 지방을 심하게 털기는 했다. 가난해서 별로 먹을 건 없었지만, 질 좋은 가죽들이 중앙에 대한 뇌물로 쏠쏠하게 먹혔기 때문이다. 더 북쪽의 드 레뮤즈 백작령보다 더 가깝기도 했고, 주변 영주들은 아무래도 같은 라솔 왕국의 일부이다 보니 대놓고 털어먹기에는 좀 눈치가 보였다.
“산적 새끼들이 총 몇 자루 더 생겼다고 갑자기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어차피 남쪽 평지를 통하면 뭘로 막으려고?”
“그렇죠··· 평지에서 유격전을 할 것도 아니고요.”
네그라타 용병대는 상당한 병력을 가진 대규모 부대이다. 게다가 라솔이나 타라트라바, 혹은 저 멀리 알디온까지 여러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타랑들이 중핵을 이루고 있기에 전력은 상당히 충실했다. 타르벤도 자신도 전장에서 30년 이상 싸워온 백전노장으로, 콘도티에레라는 칭호는 단순히 자칭만은 아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작님?”
“어허, 전장에서는 뭐라 부르라고 했지?”
“아, 죄송합니다, 콘도티에레 타르벤도.”
“흠흠.”
부단장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는 이 30살 가까이 차이 나는 매부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용병대에 복무 중인 자신을 만나러 왔던 두 살 위 누나에게 이 늙은이가 반해서 결혼하게 되었을 때는 어린 마음에 죽여버리고 누나를 데리고 도망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뭐, 누나도 그럭저럭 행복해 보이고 자신도 높은 지위를 약속받았기에 지금은 그만큼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허영심과 열등감 덩어리라 행동 하나, 복장 하나도 온갖 과시하듯 사치를 부리고 귀족 행세하는 데에는 정말 지칠 지경이었다. 저 어울리지도 않는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 가발은 제발 좀 벗어주면 좋겠는데. 게다가 늙어서 체력이 떨어져서 부대 행군 속도가 느려지는 것도 짜증이 나고 말이다. 그래도 꾹 참으면, 차기 네그라타 단장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버티고 있었다.
“가끔은 겨울에 거하게 한 번 싸워도 나쁘지 않겠지. 전군을 소집해라. 방한 장비를 지급하고.”
“고향으로 간 애들이 꽤 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백작 간판만 달린 거지 소굴이니까. 재빨리 누아 성으로 행군해서 전부 빼앗아 오는 일이니까.”
“네, 남작··· 아, 콘도티에레 타르벤도.”
중간에 ‘싸운다’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간에 습격해와서 격퇴하든, 누아 성에 모여서 저항하는 놈들을 물리치든 똑같았으니까.
지금까지 변경 지역 약탈만 한 이유는 굳이 중앙까지 공격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어차피 남의 나라 땅이고, 계승권 문제로 힘으로 먹어봤자 도로 뱉어내야 한다. 얼른 약탈하고 문제 생기기 전에 빠지는 것이 최고다. 아마 엘랑키아 왕국이나 주변 유력자들이 문제 삼을 즈음에는 폐허밖에 남지 않겠지.
잠깐, 현 드 누아 백작을 죽이고 그 자식을 허수아비로 삼아서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드 누아 백작이 어린 자식이 있던가?
어쨌거나 가난한 지방이라지만 썩어도 백작령, 제법 챙겨올 거리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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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맛을 봤으니 올해는 좀 그만 왔으면 좋겠는데.”
나는 겨울이 되어서 딱딱하게 굳기 시작한 이스키비르 강변의 늪지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강을 건너면 라솔 왕국이다.
“알코자르 남작? 이라는 자는 어떤 인물입니까?”
“욕심 많은 자입니다. 라솔에서는 나름대로 용병으로 유명한 자라고 합니다.”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노신사처럼 생긴 그의 단정한 미간에 혐오스러움의 주름이 잡힌다.
최근 이야기를 들어본 바로는 라솔과 드 누아 사이에 쌓인 분노와 증오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하긴 과거에 전쟁했던데다가, 십 년 넘게 일방적으로 약탈까지 당하고 있으니 그 심정은 이해할 것 같다.
과거에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큰 피해만 입었을뿐더러, 그럴 때는 오히려 심하게 패악질을 부려 마을을 약탈하고 생산 기반을 파괴하는가 하면, 심지어 숲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트랑카벨 영지군을 드 누아로 불러들여도 되겠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가스텔 백작에게 물었다. 아무리 동맹관계인 블랑독 연맹의 일원이라고 해도, 멋대로 남의 영토에 부대를 이끌고 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야 교관단이 잘 활동하고 있나 확인하러 왔을 뿐이고. 이럴 때일수록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한다. 이 때문에 제 22 몽세나 보병 연대와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는 백작령 밖에서 ‘훈련’ 중이었다.
“...부탁드리겠소. 드 누아의 힘만으로 싸우기에는 벅찬 부분이 있구려.”
“트랑카벨 영지군 총사령관 아실 트랑카벨 자작께서, 동맹인 드 누아 가문을 돕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힘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소.”
씁쓸한 표정으로도, 가스텔 백작은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원래 부자 가문으로 생각하긴 했었으나, 이제 트랑카벨 가문의 힘은 명목상 백작인 드 누아로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실례가 되지 않도록 되도록 표현을 자제했다.
하지만 해묵은 가문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트랑카벨이 아니라 더한 존재도 끌어들일 수 있겠지. 가스텔 백작은 현실적인 사람이니까.
“첼레스티나, 드 누아 백작령으로 진입하라고 전령을 보내 줘.”
“네에,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가 전령을 찾아 떠났다. 그녀는 최근에는 완벽하게 내 곁에서 한 걸음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무슨 닌자도 아니고,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그럼 방어 계획을 준비해볼까요? 지도가 있습니까?”
“준비하라 전달하겠소.”
우리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말을 돌려 주둔지로 돌아간다. 예상되는 전장 주변을 좀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