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겨울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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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완전히 일과가 되어버린, 아침 차가 든 잔을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 앉았다. 무언가의 나무뿌리를 갈색이 되도록 볶아 내린 차인데, 커피 비슷한 맛이 난다. 각성효과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시고 나면 왠지 흐리멍텅하던 아침 정신머리가 조금은 또렷해지는 느낌이다. 요즘은 매일 마신다. 완전 소울 푸드가 다 됐다.
“오늘도 좋네, 고마워.”
“네에, 헤헤헤.”
슬그머니 의자를 가져와 나란히 앉아서는 내 옷자락을 잡는 첼레스티나는 차만 타다 준 것은 아니다. 어제부터 올라온 급하지 않은 보고서들을 먼저 읽어보고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급한 게 있었다면야 깨웠겠지만, 다행히 어제는 별로 급한 내용은 없었던 모양이다.
제일 먼저 체크한 것은 훈련소와 군수 생산 지구에서 온 보고들이다. 어느 중대가 훈련이 완료되어 연대에 배치되었고, 어느 무기가 얼마만큼 생산되어 실제 사용될 부대에 배치되거나 비축량에 추가되었다는 소식이다.
훈련을 마친 병력은 기존 연대의 결원을 채우기 위해 배치되거나, 새로이 편성되는 중대에 속해 신편 연대로 소속되었다. 지난 여울목의 전투 이후 트랑카벨 가문의 영지 출신 청년 지원 수가 늘어났고, 정순파 이주 계획 발표 이후 트랑카벨 가문 밖 블랑독 출신의 지원자도 늘어났기 때문에 새로이 입대하는 병력 자원은 풍족한 편이다.
한편으로는 군 내의 정순파 신도 비율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래도 종교라는 것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이기는 하니까. 그래도 정순파는 굉장히 온건하고 소극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는 종파이기도 하고, 무려 ‘성녀님’이 트랑카벨 가문에 있으니까 문제는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만다.
뭐 문제 생기면 성녀님이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 말이다.
그렇게 착실하게 병력을 늘려온 덕에 여울목의 전투에서 싸워 결원이 생긴 연대들도 인원을 보충받았고, 새로 편성된 연대들도 차근차근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처음 트랑카벨의 군사 고문이 되었을 때, 3개 연대를 합쳐도 2천명도 안 되는 소규모 군대였는데 벌써 보병 연대만 8개이다. 가끔은 이렇게 많아도 되나 하면서 겁이 날 때도 있을 정도이다.
무기 생산 보고는 대부분 대포였다. 질이 좋은 청동 야포들이 차근차근 각 연대에 배치되고 있었다. 비록 구경은 작은 편이지만, 트랑카벨의 야전 포병 전력은 어지간한 왕국 중앙군 수준 아니면 경쟁해볼 수 있는 내실 있는 수준이다.
다음으로 노획한 화승총을 비롯한, 고장난 화승총 재생 사업도 벌였는데··· 이게 의외로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최신식 화승총으로 병사들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고 남은 구형 총기류, 그리고 리니 능선 전투부터 아넥시 전투, 여울목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적으로부터 노획한 총기들을 수리하고 재생하여 신품 같은 중고를 만들어 냈다. 오히려 화약이 부족할 정도인데···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딱히 방법이 없었다. 응달의 흙을 모으는 식으로 초석을 조금씩 생산하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한계가 있었다.
“어라··· 기즈? 기즈 드 콜롬브? 드 누아 쪽에 훈련 교관으로 간 사람이 편지를 보냈네.”
“네에, 훈련은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흐음, 별일은 없는 건가?”
“성질 고약한 이웃과 다툼이 있었다는 것 같아요.”
“뭐? 정말?”
미리 편지를 읽어본 첼레스티나가 내용을 설명해주는데 어째 찜찜한 내용이 있었다.
- 드 누아 가문 군대의 훈련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두 멋진 병사들이며, 가스텔 백작에 대한 충성심도 상당히 높습니다.
- 누아의 청년들은 트랑카벨 영지군의 청년들과는 기질이 많이 다릅니다. 몽세나의 일부를 제외하면 주로 평지로 이루어진 초원 지역에서 자란 트랑카벨의 청년들은 밀집대형을 갖추어 싸우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누아는 강과 늪지대, 그리고 숲으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때문에 누아의 청년들은 느슨한 대형을 활용하는 데 능숙해 보였습니다.
- 현재는 사회적 계급이 높은 백작 집안의 가신들이나 기사들, 종사들 중심으로 대형을 갖추고 총과 창을 사용해서 싸우는 방식을 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 현재는 활로 무장한 경보병들의 활약이 인상 깊습니다. 누아에는 가볍게 무장하고 숲과 들을 달리는데 능한 사냥꾼 출신 병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병사들을 총으로 무장시키고 숲에서 싸우게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 드 누아 가문은 이스키비르 강 너머, 라솔 왕국의 어느 영주와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라솔 왕국 자체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며, 대체로 활발하게 상업적 교류를 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상당히 큰 충돌이 있었으며, 이웃 영지의 군대 200여명에 대해 드 누아 가문의 군대 400여명이 기습해서 거의 전멸시키며 크게 승리하긴 했습니다.
으음, 역시 아롱드 영감님의 마음에 든, 충실한 군인 다운 담백하고 좋은 보고서였다. 숲에 익숙한 경보병이라니··· 확실히 총기로 무장하면 상당한 능력이 발휘될 것 같기도 하다. 원래 활 쏘던 친구들이 총도 잘 쏘거든.
게다가 평소에 산개 대형을 취하고 싸우는데 익숙한 병사들은 굉장히 귀중한 존재이다. 주변과 맞춰 한가지 행동을 하면 되는 밀집대형에 비해서 한 명 한 명의 자율성과 판단력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부대를 산개대형으로 배치했다가는 패닉 관리가 안 돼서 우르르 도망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한다.
다만 총과 화약은 활과 화살보다 훨씬 무겁고, 연기가 심해서 위치가 바로 들킨다는 점 때문에 같은 전술을 그대로 활용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매복 공격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영지민들의 생업에 따라 궁수가 많은 사회 환경이라... 전장의 주역이 냉병기와 기사에서 화약 무기와 총병으로 옮겨가면서 몰락한 것도 이해는 간다. 가스텔 백작도 참 고민이 많았겠구나.
그나저나 이웃과의 분쟁이라니··· 아니 수백 명이 참여해서 200명이나 사망할 정도면 그냥 전쟁 아닌가? 당장 나만 해도, 우리 애들 200명이 어디서 죽었으면 바로 전군 비상에 연대 몇 개는 바로 파견할 건데 말이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좀 걱정이 되긴 한다.
그래도 이런 보고서를 받으니 흐뭇하다. 타국에 나가서도 잘해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이대로 별 탈 없이 겨울이 지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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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내 예상은 완전히 어긋났다.
그날 아침만 해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드 누아 영지의 동굴들에서 상당한 양의 초석을 채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박쥐 똥 등이 축적된 동굴 내부의 흙을 정제하면 상당히 많은 양의 초석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절대량으로 보면 그렇게 많지야 않겠지만, 아직 한 번도 채취하지 않았다면 동굴 하나에서도 제법 많은 양이 나올 것이다.
초석은 화약을 만드는 데 필수 불가결한 아주 귀중한 재료이다. 이 세계는 초석 광산도 제법 있는 편이고, 제조에 특화된 기프트들도 있어서 이전 세계의 중세에 비하면 구하기 쉬운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죄다 수입을 해야 하는 판이니. 트랑카벨 가문에서도 총은 넉넉하지만, 화약은 아껴 쓰는 상황이다. 뭐, 실탄 사격 훈련을 하는 것 자체가 화약이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방증이지만, 원래 사람은 실제로 바닥난 상황 보다 바닥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두려워한다 하기도 하고.
으으,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라, 긍정적인 사람이 `병이 물에 반이나 남았네`라 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병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할 때 `내일까지 물을 못 구하면 갈증으로 죽을지도 몰라!` 까지 발전해서 스스로 목을 조이는 타입이다. 쫄보에게는 쫄보의 생존 방식이 있다고.
망상 중이던 나에게, 아쥬흐가 해 준 이야기는 조금 걱정되는 내용이었다.
“이번에 드 누아 영지에서 전멸당한 도적 무리는 자칭 `용병왕`이라는 자의 수하라고 해요."
그녀의 단정한 얼굴에는 혐오하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아쥬흐는 타인을 가혹하게 평가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단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랬다.
"예전에 엘랑키아가 라솔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이스키비르 강 건너 영토를 빼앗겼을 때, 거기 참가했던 용병 대장 중 하나가 옛 누아 영지의 일부였던 요새를 받았다고 하네요."
아쥬흐가 라솔 영토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수집한 내용에 따르면, 지금도 용병 부대를 이끌고 있다는 타라트라바 출신의 용병 대장은 영주가 되어 해당 지역을 통치하고 있다고 한다. 봄이 되면 용병 일을 하러 갔다가 겨울이 되면 돌아온다는데, 수시로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서 `기동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드 누아 영지를 약탈하고는 했다는 것이다.
으음... 주디칼리에서 지내던 시절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나라들끼리 서로 국경지대 약탈해대는 것은 흔한 일이긴 하지. 하지만 아쥬흐에게 들은 다음 이야기는 정말 어처구니가 탈출하는 이야기였다.
"이 `용병왕` 이라는 작자는 엘랑키아 영토 뿐 아니라 같은 왕을 섬기는 라솔 왕국의 이웃 영지들도 지나다니면서 약탈한 모양이네요. 전쟁 준비라면서 멋대로 나무를 베어 가고, 징발 명목으로 가축을 훔치는 일이 자주 있었나봐요."
"아니 그걸 그냥 둔 겁니까? 라솔 왕실에서는요?"
"이스키비르 유역은 라솔에서는 변경에 속해요. 마치 블랑독 처럼요. 라솔 왕국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문제도 있어서... 중앙의 관리가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어 보이네요."
골치 아픈 상황이네. 과거에 엘랑키아와 라솔 두 왕국이 서로 전쟁한 적은 있다 쳐도, 변경 영주들 끼리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당장 얼마 전에도 전쟁 준비한다고 사온 물자 중에 라솔에서 온 것도 있으니까. 말과 화약을 가져온 상인들은 카르카냑에서 포도주를 사서 돌아갔었다.
용병왕인지 뭔지, 저런 양아치 무리는 어떤 상태일지 대충 상상은 간다. 법과 도덕의 선을 한 번 넘은 무리는 점점 폭력성이 강해진다. 상대가 참을 만해서 넘어가면, 다음에는 그 이상의 패악질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지. 그러다 상대가 도저히 못 참겠다고 하면? 마치 자기네 권리라도 되는 듯 적반하장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타라트라바 용병들은 나름 그룬발트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강한 전사들이고, 거친 산지인 타라트라바에서는 좋은 강철이 나기 때문에 무장도 잘 되어 있다. 아마 그런 놈들이 전공을 세워 왕에게 영토를 받아 자리 잡았으니 주변에서 더러워서 피한다는 식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그게 반복되니... 깡패 새끼들이 된 거겠구만.
"이번에 소식을 준 사람 중에는 라솔 왕실을 섬기는 귀족들도 있었어요. 필요하다면 협락하겠다 하시더라고요."
"...협력이라니 무엇에 협력하겠다는 것인가요?"
"흐음, 그건 우리가 정하면 되지 않을까요?"
할아버지인 아롱드 영감님을 닮아서, 절대 손해 보지 않는 미소로 아쥬흐의 알굴이 빛났다. 싸움 구경이 가장 재미있다... 와는 다르게, 이웃 나라 내부에서 벌어지는 알력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긴 할 테니.
참 라솔 왕국 내부도 문제가 많기는 한 모양이다. 그림자 토벌 성전을 벌여 아란 제국의 옛 판도를 회복하고 있으며 법황 공인 `주신의 진정한 왕` 칭호를 받은 영광스러운 왕국이나, 실제로는 여러 지역 국가들이 이룬 동군연합이라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다. 하나의 왕관 아래 통합되기는 했으나,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나라라고 생각하는 판이니, 골치 아픈 상황이겠지. 그래서 이처럼 변경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겠고.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음, 트랑카벨 가문으로서는 콘도티에레 에트의 의견을 묻고 싶네요."
"흐으음...."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가 원하는 답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잠시 다녀올까요?"
"트랑카벨 가문이 개입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으음... 동맹 가문이라지만 그쪽에서 요청도 안 했는데 멋대로 군대를 이끌고 가는 것은 좀 아닌 것 같고... 파견된 훈련 교관들 만나러 한 번 다녀오면 어떨까 싶습니다."
"호오, 좋은 생각이시네요. 가시는 김에 동맹 가문에 보내는 `선물`도 좀 전해 주시면 좋겠고요."
"허어, 뭐 또 더 가져다줄 게 있는 건가요?"
"저도 기즈 부연대장님... 현재 파견된 교관님의 보고서를 봤거든요. 우리가 안 쓰는 `중고품`들을 조금 빌려드리면 어떨까 싶어서...."
"아... `중고품`이라도 좋아하실까요?"
"후후, 싫다고 하시면 할 수 없지만요."
중고품이라면 최근에 재생한 좋은 물건들이 있긴 하지.
"그럼 교관 관리 차원에서 한 번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중고품들도 최대한 빨리 포장하도록 독려해볼게요."
아쥬흐의 확답을 듣고, 바로 옆에 서류를 들고 서 있던 첼레스티나에게 묻는다.
"감사합니다. 첼레스티나, 몽세나 쪽에 우리 보병 연대가 있나?"
"네에, 완편 연대들은 북쪽에 기동훈련 나가서 없지만, 신편 제22 몽세나 보병 연대가 훈련 중이네요?"
"그럼 제22 연대에 출격 준비를 시키고, 정찰 연대도 소집해 줘."
"네에~ 제22 보병 연대를 출격 준비 시키고, 제31 정찰 연대를 소집할게요. 어라, 둘 다 연고지가 몽세나 연대네요?"
"그렇네. 그럼 잘 부탁해."
결정됐으면 실행은 최대한 빨리하자.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을지도 모르고.
"음, 잠깐만...요?"
갑자기 아쥬흐가 불러 세운다. 뭔가 그녀의 목소리에서 망설임이 느껴진다.
"그... 두 분은 어떤 사이인가요?"
"첼레스티나는 현재 모리츠 대신 제 부관을 맡고 있습니다."
"네에, 맞아요."
"흠... 으흠, 그렇다면... 그런데, 왜 그렇게 가까이 붙어 계신 건가요?"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고개를 돌리자 어깨 너머로 찰싹 붙어있는 첼레스티나의 얼굴이 보인다. 아니 왜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지?
"그렇네. 너 왜 이렇게 가깝냐."
"네에, 부관은 콘도티에레 가까이 있어야죠!"
"으으으음...."
슬쩍 아쥬흐의 얼굴을 보니 어딘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모양이다. 지뢰를 밟으면 안 될 것 같은 얼굴인데....
"그래도 두 걸음쯤 떨어져야 해."
"네에...."
"아니 두 걸음... 휴... 그래 한 걸음으로 하자."
"네에, 에헤헤!"
아쥬흐의 표정이 무척 좋지 않다. 내 마음도 좋지 않다. 아니,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고용주 앞에서 이러면 안 되지....
"그럼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아쥬흐 양. 정확한 일정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네 기다릴게요."
큰일이다... 아쥬흐의 표정이 너무나도 좋지 않다. 좀 더 완벽한 일 처리가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