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겨울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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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카냑의 모병소는 한적했다. 이미 지원할 사람들은 대부분 지원했는지, 최근 모병소 직원들의 가장 큰 일은 나이를 속여 지원하려는 소년들을 쫓아내는 것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건장한 청년 두 명이 모병관 앞에 서 있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로용 드 말리크.”
“귀족이신가요?”
“음··· 말리크의 남작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네? 없어져요?”
“아, 약탈당해서··· 지금은 말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군요.”
“아뇨··· 죄송합니다. 그런 줄은 몰랐네요.”
로용 드 말리크는 씁쓸하게 웃으며 모병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존심은 버리기로 작정했다. 가신도 없는 남작위 따위, 무슨 소용이 있겠나.
“혹시 무기와 군마는 가지고 계십니까?”
“평소 쓰던 검은 있지만··· 군마는 없군요. 수레를 끄는 짐말이라면 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로용 경. 귀족 지원병께 의례적으로 묻는 말입니다.”
“아, 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말리크 가문의 마구간에는 여섯 마리의 군마가 있었다. 이 중 다섯 마리는 전장에서 죽었고, 남은 한 마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선선대 말리크 남작 때부터 마구간 관리인을 했다는 대머리 영감도 기억난다. 아주 어렸을 때, 안장에도 오르지 못하면서 말이 타고 싶다고 떼를 쓰면 대신 커다란 손으로 목말을 태워줬었다. 살아는 있을까. 그렇다면 대체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지망하시는 병과가 있나요? 역시 남작님이시라면 기병을···.”
“가능하면 총 쏘는 법을 배워보고 싶습니다.”
“트랑카벨의 모든 기병은 권총을 휴대하기는 해요.”
“음, 가능하면 그··· 양손으로 드는 총을 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앗? 네···.”
모병관은 의외라는 듯, 로용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았다.
“어차피 병종은 기초 훈련을 받으신 후에 연대장님들이 결정하시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의향을 기록하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로용은 아버지와 다른 가신들, 그리고 이웃들을 단 한 번의 전투에서 모두 잃어버렸던 뱅티유 농장에서의 경험을 생각한다. 적에게서 불과 몇십 미터 거리를 남겨두고,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던 동료 기사들. 그 자신도 결국 옆구리에 총상을 입고 죽을 뻔했었다. 다행히 갑옷 덕에 치명상은 간신히 피했지만···.
그 이후로 계속 그 무기를 자신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처럼 강한 무기라면 자신도 쓸 줄 알아야 했다. ...같은 무기로 복수하고 싶었다. 당시에 뱅티유 농장을 습격했던 용병들은 아넥시 전투에서 모두 죽임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아직 남아있으니까.
“남작님, 죄송하지만 한 말쯤 드려도 될까요?”
모병관이 정색하며 말을 건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마 총병으로 입대하시면 평민 출신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고, 귀족으로서 격이 떨어지는 장교에게 지휘받으실지도 모릅니다. 혹시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서 특례를 원하신다면···.”
“아닙니다.”
무례함을 알면서도, 로용은 말을 끊었다. 불과 얼마 전의 자신이라면, 평민 출신 병사와 섞여서 싸운다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겠지. 마치 몇 년 전처럼 느껴진다. 뱅티유 농장에서의 전투 직전, 아버지와의 대화. 자신이 얼마나 어린아이처럼 굴었던가. 하지만 그 전투에서 작위 따위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귀중한 갑주만큼이나 쓸모가 없었다.
“작위는 이름뿐, 저는 가족도 영지도 없습니다. 몇 명 남은 가신과 백성들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평민들보다 제가 더 나은 것을 모르겠는데···.”
오히려 트랑카벨의 평민들은 군에 입대해서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있지 않은가.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말석이기는 하나 작위를 가진 귀족 나부랭이로서 자존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는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아마 그래도 위에서 작위를 가진 분을 평민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남작님의 의지는 잘 알았습니다.”
“네···.”
“그러면 여기 싸인 부탁드립니다.”
로용은 지원서의 거친 종이 밑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언젠가 중대장, 그리고 그 이상으로 진급하시는 모습을 보면 좋겠습니다. 로용 드 말리크 남작 각하.”
“고맙습니다.”
둘은 팔을 맞잡았다. 그제야, 로용은 모병관의 다리가 불편함을 알 수 있었다. 그 또한 이전의 전투 어디에선가 부상을 입은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의 참전용사였다.
“자, 다음 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고프릭 벨장 입니다.”
“어디 출신인가요?”
“블랑독 북쪽에, 어느 산골입니다. 이름은 없어요···.”
“흐음, 그럼 에크텐 어딘가겠네요.”
이런 경우가 많은지, 모병관은 능숙하게 칸을 채워 나갔다.
“지망하시는 병과가 있나요?”
“뭐든 하겠습니다.”
“음,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로용의 경우와 달리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기 싸인 부탁합니다.”
“그··· 제가 글씨를 몰라서···.”
“아! 그럼 동그라미를 치고, 가운데에 X 모양으로 채워 주세요.”
역시 능숙하게, 탁자 위에 이미 그려져 있는 마크를 보여주며 똑같이 따라 그리게 한다.
“환영합니다, 고프릭 벨장.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둘은 다시 손을 맞잡는다. 입대 서류를 받은 두 사람은 모병소를 나선다.
“그러면 여기서 헤어지겠군 고프릭, 혹시 모르지, 훈련소에서 또 만날지.”
“신세가 많았습니다, 나으리.”
“신세는 무슨, 그냥 같이 온 것뿐 아닌가. 자네 돈은 있나?”
“아니요···.”
“여기 은화 받게, 맛있는 거 먹고 오늘 저녁은 푹 쉬게.”
“어이구 나으리, 이런 것을 받을 수는···.”
“여기 올 때까지 자네 힘을 좀 빌리지 않았나. 짐도 날라주고. 그 품삯으로 셈하지.”
“...꼭 갚겠습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서로 병사로 만나겠군.”
귀족과 평민 사이의 벽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애매한 블랑독 특유의 문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트랑카벨 영지군 내부에서도, 하급일지라도 귀족 출신들을 하급 장교로 선발하거나 기병대에 편성하는 등 약간의 특혜는 주어지고 있었다. 그래야 귀족이나 평민이나 서로 편하다는 점도 있었다. 어쨌거나 애초에 결정한 일, 로용에게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럼 가보겠네. 꼭 맛있는 거 찾아 먹고 소집에 늦지 말게나.”
마치 은화가 굉장한 보물이라도 된다는 듯, 양손으로 꽉 쥔 고프릭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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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언덕에 바짝 붙어 선 가스텔 드 누아는 낮게 읊조리듯 말하며 언덕 위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언덕의 비탈 이쪽에는 드 누아 가문의 가신과 병사들이 바닥에 엎드리고 있었다. 벌써 초겨울, 날씨가 꽤 쌀쌀하고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올 텐데도, 누구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라고는, 화승이 타오르면서 가끔 내는 지직거리는 소리와, 그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서 입김을 부는 소리 정도이다. 어느 쪽도 겨울바람이 말라붙은 풀밭을 훑는 소리에 덮여 언덕 건너편에서는 들리지 않으리라.
“벌써 어디서 뭘 좀 약탈한 모양이네요.”
가스텔의 동갑 친구이자 가신단의 우두머리인 모콜리 드 디망투완 남작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닭의 발을 묶어 창대에 매달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모두 드 누아의 재산이지, 빌어먹을 녀석들.”
빌어먹을 녀석. 가스텔 백작이 증오심을 드러낸 자들은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온 라솔의 불한당들이다. 오래전, 드 누아 가문이 라솔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영토의 절반 이상을 빼앗겼을 때 라솔 국왕은 그 영토를 휘하의 용병대 중 하나에게 용병료 대신 넘겨주었다.
그 후로, 이 자식들은 겨울만 되면 강을 건너 이쪽 편의 마을을 약탈하거나, 강가에 있는 사냥꾼 오두막에서 건조 중인 가죽을 털어가곤 했다. 늘 있는 일이고 미리 대피만 시키면 피해가 그렇게 심대한 정도는 아니었기에 대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왠지 내륙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국경 지역에서 얻은 전리품이 충분치 않은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이번 겨울에 기어들어 온 것을 후회해라.”
살짝 손을 들어 신호하자, 활로 무장한 사냥꾼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적들은 이제 거의 다가와서 작은 저수지 부근 개활지에 이르고 있었다.
“궁수들, 시작해.”
삐이이이!
소리를 내는 화살, 말 그대로 효시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자 남의 땅에서 마치 제집 안마당인 양 당당하게 행군하던 적들이 잠시 당황해 수군대기 시작한다.
이윽고 화살들이 발사되기 시작한다. 소리도 없이 화살들이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자, 적들이 뭐라 고함을 지르며 모이기 시작한다. 창병들이 밀집해서 방진을 이루고 그 창벽의 그늘에 총병들이 바짝 달라붙는 전형적인 진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궁수들이 쏘는 화살은 멈추지 않는다. 물론 투구와 흉갑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화살로 상처 입히기는 쉽지 않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데 맞으면 다치는 것은 매한가지였고 갑옷이 부실한 총병들도 있었다.
탕! 타탕!
탕탕, 탕! 탕탕타탕!
산발적으로 반격하는 총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콩 볶는듯한 연이은 총소리와 함께 방진의 가장자리가 하얀 연기로 자욱해진다. 능선 위에서 보일랑 말랑하게 숨어 계속 화살을 날리던 궁수들이 재빨리 몸을 숨긴다.
“아윽!”
잠깐 시간이 늦었는지, 궁수 하나가 팔을 붙잡고 쓰러진다. 가죽으로 된 겉옷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궁수들은 이제 역할을 다했다.
“발사!”
가스텔이 상체를 일으키며 우렁차게 외쳤다.
타타타탕! 타타타타타탕!
일제히 몸을 일으킨 드 누아 가문의 총병들이 밀집대형을 취한 적들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게다가 상당수의 적 총병들은 궁수 상대로 대응 사격한다고 총알을 써 버린 상태이다.
타타타타타탕!
시차로 위치를 바꾼 두 번째 열이 다시 총탄을 쏟아낸다. 하얀 연기가 시야를 가리고 귀가 아프도록 총알 소리만 반복해서 들린다.
타타탕, 타탕!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매복한 총병들이 남은 총알을 털어 버리듯 쏟아 넣는다. 가스텔은 매캐한 연기에 기침이 나왔고 시야가 온통 가려져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진에서 계속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반복해서 들린다는 것은 파악할 수 있었다.
장전이 끝난 드 누아 가문의 총병들이 다시 산발적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적진에서도 총알이 휙휙 날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모콜리가 황급히 가스텔의 팔을 잡아당겨 자세를 낮춘다. 눈먼 총알이 무서운 법이다.
몇 차례 총격이 오가지만 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완전히 유리한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서로 연기가 시야를 가린다면, 밀집대형으로 한 군데 모여있을 수밖에 없는 적과, 능선에서 고개만 슬쩍 내밀어 사격하는 아군 사이에 우위는 명확하다.
자유롭게 사격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대략 세 번 정도 사격할 시간이 흘렀을 때, 가스텔은 신호를 올렸다. 붉은색 깃발이 세워지며, 날카롭고 시끄러운 신호나팔이 세 번 울렸다.
"사격 중지!"
"멈춰!"
잠깐의 정적, 뒤늦게 총성이 몇 번 들리기는 했으나, 하얀 연기만 자욱한 전장에 일시적으로 고요가 찾아왔다.
"돌격 준비!"
붉은색 깃발이 좌우로 요동치고, 더더욱 시끄럽고 방정맞은 나팔 소리가 자욱한 하얀 연기를 뚫고 퍼져갔다.
"돌격!"
"우와아아아아!"
언덕 뒤편에 엎드리거나 쪼그린 자세로 기다리던 드 누아 가문의 근접전 전문 중장병들이 능선을 넘어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근접 무기를 꺼내 든 궁수들도 그 뒤를 따른다. 가볍게 무장한 궁수들은 중무장한 적을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서 못 박힌 철퇴나 한쪽 끝이 날카로운 찍개로 된 망치 따위의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탕! 타탕!
언덕 아래의 적군이 산발적으로 사격을 하지만 그 발수는 많지 않다. 저들 역시 근접전에 대항해 진형을 새로 짜야 하는 것이다.
충실한 가신들이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면서, 가스텔은 전율을 느꼈다. 오랫동안, 강 건너편의 사이 나쁜 이웃들에게 당하고만 살았다. 때 되면 자릿세 수금이라도 해 가듯, 드 누아의 재산을,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해 갔으며 심한 경우 사람까지도 다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트랑카벨 가문에 팔아넘긴 자존심이 `화력 우세`라는 형태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길 수만 있다면 자존심이 아니라 영혼도 얼마든지 팔아 치워 주마.`
조상 대대로 가문에 전해지는 검을 오랜만에 꺼내든 가스텔이 가신들의 뒤를 따라 언덕을 내려간다.
“잠깐, 어딜 가십니까 백작님!”
그사이에 끼어 내려가려는 가스텔을 충실한 가신 모콜리가 황급히 막는다.
“이럴 때 재미를 안 보면 언제 보겠나! 자네도 가세!”
“으으··· 알겠습니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타타타탕!
장전을 마치고 능선 위에 늘어선 총병들이 부랴부랴 대열을 새로 짜고 있는 적들에게 또 한 번 사격을 퍼부었다. 죽어서 그런 건지 도망쳐서 그런 건지, 적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 처럼 보였다.
"전부 죽여라!"
"죽여라!"
드 누아 가문의 기사들이 호전적인 함성을 지르며 속도를 올렸다. 거의 15년 이상,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기사들이 복수의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