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트랑카벨의 방문자들
###
피난민 호위와 기동훈련을 마친 나는 카르카냑으로 돌아왔다. 제31 몽세나 연대는 추가적인 훈련과 블랑독 순찰을 위해 아넥시 부근에 남았고, 부관인 첼레스티나와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우선 돌아왔다. 새로이 부관이 된 첼레스티나는 모리츠 이상으로 훌륭하게 내 업무를 보조해주고 있었다. 역시 적응도 빠르고 사고방식도 딱 맞아서 일이 쉽게 쉽게 풀리는 느낌이다.
그런데 첼레스티나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다. 본인 잘못도 있다고는 하지만, 고생하면서 길고 긴 길을 돌아서 간신히 도착한 그녀가 처음 도착했을 때 반갑게 맞이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으으···.
그녀의 몸에서 심각한 생선 썩은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성문 경비병이 못 들어오게 막아 놓고 사람을 보내 나를 호출할 정도로. 나중에 사정을 듣고 나니 이해가 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 카르카냑은 아직 피난민도 많고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돌입하지 않아서 좀 수상해 보이는 사람도 몸수색하고 명단만 적어놓고 통과시키는 그런 상황인데··· 그걸 못 들어가게 잡아 놓았을 정도니 말이다.
“정말, 무척 상처받았어요.”
“미안해··· 그런데, 정말··· 장난 아니었어.”
“흑흑, 세상 사람이 저를 다 피해도 콘도티에레만은 아닐 줄 알았는데.”
“그게 좀 특수 상황이었잖아.”
“힘들게 도착해서 반가운 얼굴을 봤는데, 첫 말이 ‘어? 잠깐만 떨어져 볼래?’ 였어요··· 흑흑.”
“윽···.”
내 소매를 붙잡은 채, 첼레스티나는 심통을 부리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딱 업무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잡고 있으며, 그 와중에도 완벽하게 업무 보좌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으음, 각 연대 산하 야포의 충원이 늦어지고 있는 모양이네.”
“아! 그건 제가 알아봤어요. 생산 설비 증설 중이라 그쪽에 인력이 들어가 있다고 하시면서, 완성되면 지금보다 1.5배 페이스로 생산할 수 있다 하셨어요.”
“정말? 그건 어떻게 알았어?”
“에오르크 레타일 님께 물어봤어요.”
“망할 영감탱이 나한테는 말도 없이!”
아무튼 에오르크 영감은 맡겨두면 일정대로 일은 잘하니까 상관없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수적 열세가 필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전쟁에서 화력까지 밀리면 답이 없다.
이전 세계나 이 세계나, 장거리 무기는 겁쟁이들이나 쓰는 것이며, 진정한 영웅이며 용사들은 빗발치는 적의 사격을 뚫고 돌진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이미지는 항상 있다. 강력한 충격 부대의 돌격으로 적진을 무너뜨리는 것, 멋지기도 하고 실전에서 나름 유용하기도 하다.
하지만 적절한 화력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다. 물론 몇 번 정도 불리한 상황에서 기책으로 사용될 수는 있다. 그러나 화력이 불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돌격 전술은 필연적으로 많은 희생자를 수반한다. 게다가 돌파에 실패라도 한다면? 후퇴도 못 하고 십자포화 속에서 싹 녹아버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전장에서 보았던 결사의 돌격들은··· 화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 없이, 발작적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체로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병사들의 개죽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내 병사들을 화력으로 압도당하는 상황에서 돌격으로 내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기 위해서 보병 연대의 총병 비율도 많이 늘린 것이고, 모든 기병들을 화기로 무장시킨 것이다. 화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가장 안 좋은 것은 돌격 타이밍을 이쪽에서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니까.
“포병들의 훈련은 잘 진행되고 있지?”
“네에, 나무로 만든 모형 포를 사용한 훈련은 다들 부지런히 하고 있고, 신품 포가 배치되는 대로 서로 교대하며 적응 훈련도 하고 있어요.”
“다행이네. 포병 중에 실전 경험이 있는 애들은 가죽포를 다뤄 본 일부밖에 없으니까.”
나는 다음 서류, 예정된 사격 훈련 내역과 거기 필요한 화약량을 꺼내 들었다. 초안은 모리츠가 작성했고, 마무리는 첼레스티나가 했는지 중간부터 글씨체가 다르다. 그래도··· 문서는 완벽해 보인다.
그나저나 저 밑에 쓰인 엄청난 액수의 결산 금액이 신경 쓰인다. 돈 문제 때문에 단 한 번도 실사격 훈련을 못 해보고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총병의 일부는 1/10의 화약만 사용하는 훈련 사격조차 한 번도 못 해보고 실전에서 첫 사격을 하기도 한다니. 가뜩이나 불발률이 높은 화승총 사격에서 실사격 경험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가끔은 돈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기도 하니까.
“그러고보니 첼레스티나가 총병 선임 중대장이잖아. 최근 슈토르히 연대 신병은 실전 직전에 사격 훈련은 얼마나 해?”
“네에? 요즘 슈토르히 연대는 신병은 안 뽑아서··· 신병 훈련은 안 한 지가 꽤 됐네요···.”
아, 경력자만 뽑는 거였나. 그럼 신입들은 어디서 경력을 쌓으라고! 뭔가 엄청 빡빡하네.
“경력자면 슈토르히 연대 내부 훈련에 안 맞추려 하고 그러지는 않아? 나름 자기가 해 온 방식에 자부심도 있을 테고.”
“헤헤헤,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주면 바로 조용해져요.”
“허어···.”
나와 나란히 앉아서 내 소매를 붙잡고, 뭐가 그리 좋은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이 여자 용병은 보기와는 다른 사람이었지. 문득 그녀가 옆에 세워놓은 유난히 긴 총열을 가진 소총과, 허리에 매달린 권총, 그리고 반대편의 장검에 눈이 갔다. 허리띠 뒤편으로는 폭이 넓은 단검도 있을 거다.
백병전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은 슈토르히의 베테랑 총병들은 이 중 한두 개 정도는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녀의 경우는 좀 더 특별했다.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이라는 것들이 다 좀 특이한 놈들이긴 하니까.
“네에? 제 몸을 보시는 건가요, 콘도티에레? 그동안 많이 자라지 않았나요?”
“아냐, 무기를 본 거야!”
“무기에 가려서 안 보이시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서 더 대답하면 말린다. 나는 자기 사이즈라도 재 보는 듯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보는 첼레스티나를 무시하고 사격 훈련 내역표에 집중하기로 했다.
실사격 훈련을 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화약이 물리적으로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마침 다른 데 큰 전쟁이 없어서 트랑카벨 가문에서 운영하는 블랑독 상회를 통해서 충분히 공급받고 있지만, 간혹 돈은 있어도 화약을 못 구하는 경우도 있다. 구할 수 있을 때 충분히 구해놓자···.
“포병 실사격 훈련, 총병 조준사격 훈련을 그렇다 치고... 강습 돌격조 훈련은 뭐야?"
"네에, 트랑카벨 영지군은 따로 근접전 전용 보병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여기 실사격이 필요할까?"
"훈련도 실전처럼 화끈하게! 하얀 연기를 뚫고 돌격해야죠...?"
"...안 돼. 이건 훈련탄으로 하자."
"네에...."
첼레스티나는 풀이 죽은 것처럼 보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헤헤헤 웃는다. 뭐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네.
실사격이야 하지 않겠지만, 첼레스티나의 훈련 안은 좋은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대열을 굳건히 지키면서 싸우는 연습만 했다면, 실전에서는 일부가 대열을 무너뜨리고 적진을 돌파하기 위해 나서는 경우도 분명 발생하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실사격은 좀 아니다. 위험하기도 하고.
###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장 로베르 드 나뵈프는 진창에 빠진 수레를 뒤에서 밀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휘하 연대의 병사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마찬가지로 수레를 밀고 있었다.
"으쌰! 으쌰!"
진흙에 파묻혀 꼼짝을 하지 않던 수레바퀴가 덜컹 소리를 내며 구르기 시작했다. 무거운 마차지만, 장정 대여섯이 달라붙어 밀고 당기자 도리 없이 움직인다.
"감사합니다, 기사님들...."
"조심해서 가세요!"
엄밀히 말하면 제31 연대에는 기사보다는 기사가 아닌 이들이 더 많다. 연대장인 로베르 부터가 작위가 없는 하급 귀족이고, 특히 가볍게 무장한 추격 기병들은 최하급 가신인 종사나 향사, 자영농 계급이 더 많았다. 민간인들 보기에는 말 타고 다니면 다 기사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다음에 또 이럴지 모르니 길을 메우도록 하자."
"예, 연대장님."
병사들은 시키기 전부터 삽을 꺼내더니 흙을 퍼다가 진창을 메우기 시작했다. 최근 로베르와 그 병사들의 업무는 이런 게 많았다.
"자네... 혹시 로베르 아닌가?"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여느 피난민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로베르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죽은 줄 알았던 친구.
"로용... 로용 드 말리크?"
"그렇네...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자네가 죽은 줄 알았네."
로용은 보세낙 드 리몽이라는 고블린처럼 생긴 수도사가 이끄는 약탈 군대가 블랑독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와 이웃 귀족들과 함께 출정했다가 큰 상처를 입었다. 그 직후 말리크 영지는 완전히 약탈당했다. 주민들 중 상당수가 죽임을 당하거나 흩어졌고 영지는 완전히 황폐해졌다.
아버지는 야전에서 전사했고, 형 역시 영지를 지키려던 싸움에서 전사했다. 혼자 살아남은 로용은 다 죽어가는 몸으로 필사적으로 카르카냑으로 말을 달렸고, 용병들의 습격을 알려 트랑카벨에서 지원군을 파견할 수 있었다. 그 후 카르카냑의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다가 최근에야 고향으로 돌아가 살아남은 영민들을 수습해 피난하고 있었다.
"뭐 이제 이름만 말리크 남작이지, 완전히 망했다네. 지금 주변에 있는 이들이 전부라네. 한 스무 명 되려나. 안전하게 카르카냑까지 도착할 수 있다면 좋겠군."
"...정말 고생했군."
"자네는 어떻게 된 건가? 복장도 멋지고 인물이 훤해졌구먼."
"나도 죽을 뻔했지만, 아넥시에서 트랑카벨 군대와 함께 설욕했다네."
"아넥시? `그 아넥시` 말인가? 그래... 그렇게 된 거로군."
블랑독 북부 주민이라면 아넥시 전투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로베르는 조금 뿌듯함을 느꼈다. 허리를 쭉 폈다. 그의 옷깃에 고정된 트랑카벨 쌍엽장이 유난히 빛나는 것 같다. 자신이 아넥시에서 승리했던 트랑카벨 기병대의 일원이다, 성녀께서 직접 수여해주신 훈장이다. 현재 그에게 가장 큰 자랑이다.
"트랑카벨 가문에... 우리 미래를 맡길 수 있겠나?"
"그럼 달리 누구를 믿을 수 있겠나?"
"카르카냑에는... 아넥시의 성녀가 있다 들었네. 정말 성녀가 맞는가?"
로베르는 순간 움찔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내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만약에라도 그의 성녀가 모욕당한다면 친구라도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우리가 뭘 어쩔 수 있겠나. 겨울이 되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둘 중 하나겠지. 하지만 성녀께서 우리 가족들과 백성들을 모두 맡아주시고, 겨울 동안 돌봐 주시기로 하지 않았나."
"으음...."
"심지어 우리는 바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트랑카벨 가문을 싫어했었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냥 대대로 싫어했다는 이유 만으로, 트랑카벨에서 보내온 동맹 요청을 무시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지금, 두 번째 기회까지 받지 않았나. 굳이 말하자면, 이게 성녀의 기적이겠지."
"호오, 자네는 그 성녀란 분을 매우 추앙하고 있는 듯하군."
로베르는 잠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기답지 않게 흥분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섬기는 기사이니까. 자신이 열을 올리면 오히려 성녀의 이름에 누가 될지도 몰랐다.
"사실은 나도 총에 맞아 죽어갈 때, 열이 너무 높아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 성녀라는 분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네."
"정말인가?"
"하얀 옷을 입고 금발을 한 아름다운 분이었네. 분명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살아 있더군."
"허어, 자네도 그분의 은혜를 받았었군."
"우리 둘 다, 성녀님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멀쩡히 이야기도 못 했겠구만...."
로용 드 말리크가 쓰게 웃었다. 생명과 명목뿐인 남작위 말고는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웃음은 겨울 하늘보다도 공허해 보였다.
"기사님,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옆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튀어 나왔다. 키가 190센티는 되어 보이는 거한이고, 그동안 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핼쑥해 보인다.
"아, 이 친구는 중간에 우연히 만나 함께 하는 농부라네. 약탈자들에게 가족을 잃었다 하더군.... 자네 이름이 고프릭이었나?"
"그렇습니다, 나으리."
로용이 설명하자, 로베르는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질문인가?"
"저는 블랑독 북쪽 산골짝에서 농사를 짓던 놈입니다. 저 같은 놈도 군에 지원할 수 있습니까?"
남자의 눈이 불안함과, 무엇인지 모를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로베르는 아마도 분노와 복수심이 아닌가 싶었다. 가족을 잃었다니.
"모병은 내 담당이 아니지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복수만을 원한다면 맞지 않을 수도 있지."
잠시 주제넘은 게 아닌가 고민이 됐지만, 말을 이어간다. 자신이 오늘따라 말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군율을 지키며 함께 싸워간다면, 언젠가 복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길 것이니까."
마지막 말은 정말 괜히 했다 싶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나도 무사히 도착하면 함께 알아봐야겠군."
로베르는 진흙탕을 다 메운 부하들을 이끌고 출발했다. 오랜만에 생존을 확인한 옛 친구와, 가족을 잃은 거구의 농부 고프릭이 무사히 안전지대로 도착하기를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