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6화 (46/556)

10-2. 트랑카벨의 방문자들

내가 아롱드 트랑카벨 영감님을 한두 해 알아 온 게 아니고, 함께 마신 술만 해도 몇백 병은 될 정도로 나이를 초월해서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본 입장에서 하는 말인데, 이 양반은 절대로 자기 손해를 보는 거래를 할 사람이 아니다.

나한테 카르카냑을 준다고?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만약 실제 거래였다면 나를 짜내고 또 짜내서 카르카냑 값어치만큼의 뭔가를 땡길 자신이 있으니 하는 말인 것이다. 물론 그만큼 공정한 사람이니, 사람을 일방적으로 등쳐먹지는 않긴 하지만 그게 ‘자기 기준’이니까 말이지.

내가 보기에 이 에티엘이라는 공작은 선하고 솔직한 아주 괜찮은 청년인 것 같은데, 이런 사람일수록 아롱드 영감 같은 능구렁이와 대화하면 불리하다.

“왕실에 입조하시어 그동안의 오해를 설명해 주십시오. 이 에티엘 드 크레이, 목을 걸고 원만히 해결되도록 중재하겠습니다.”

“호오.”

“그리고 폐하께서 보내실 중앙의 관리들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러면 폐하께서 카르카냑 백작의 작위와 중앙 정부의 직위를 내려주실 겁니다. 국왕의 직속 영주가 되어 드 레뮤즈 가문이나, 외람되지만 제 크레이 공작가와도 동등한 입장이 되는 겁니다.”

트랑카벨 가문이 변방 촌구석에서 벗어나 중앙 귀족이 된다 이 말인가. 그것 자체는 솔깃할 수 있겠다. 만약에 트랑카벨 가문에 중앙으로 진출할 의사가 있다면 말이지만.

“그리고 영지 내의 이단들을 일소하시면, 법황청의 이단 토벌령 역시 그 정당성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전쟁의 위험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단을 어떻게 일소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엘랑키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단을 믿는 자들을 탄압하고 추방하여···.”

“그 추방된 이들이 현재 블랑독으로 와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된 게 아니겠습니까?”

“....”

에티엘은 말문이 막힌 것 같다. 엘랑키아 전역에서 차곡차곡 정순파 이단자들을 정리해서 쫓아내다 보니, 결국 이 남부 구석탱이에 죄다 모여버렸다 이 말이지. 그런데 여기서 또 어디로 보낸다는 말인가. 인접한 라솔 왕국으로? 바다 건너 주디칼리로? 라솔 왕국은 훨씬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넘치는 곳이고, 주디칼리는 그 젠장 맞을 법황청이 있는 곳이잖아.

“만약에 국왕 폐하께서 진정으로 블랑독의 평화를 원하시고 트랑카벨을 비롯한 이 지역의 백성들을 생각하신다면, 먼저 법황청을 방문해 항의하시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도 폐하께서는 법황청의 행보에 불만을 느끼고 계십니다. 그에 앞서서···.”

“불만을 느끼고 계신다면서, 거기에 숟가락을 얹으시지는 않았습니까?”

“....”

...그러니까, 안 된다니까. 나도 어디 가서 입 터는 걸로는 꿀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트랑카벨 인간들은 아주 그냥 이겨 본 적이 없어요! 으으으··· 할배나 손녀나 백전백패네 아주. 이 사람들이 나쁜 마음먹고 나 털어먹으려고 작정했으면 아주 골수까지 털렸겠다.

“저는 이단자라 불리는 정순파 신도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죽음까지 선고받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희 가문의 영토에 사는 정순파 신도들이 특별한 문제를 일으켰던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롱드는 잠시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간다.

“우리 가문의 땅에 살며, 블랑독의 문화와 법을 존중하고 의무를 진다면 트랑카벨의 신민입니다. 트랑카벨의 일원들은 마땅히 그들을 차별 없이 보호해야 합니다.”

나왔다아아! 트랑카벨 명대사. 나는 이 말을 아실, 아쥬흐, 그리고 아롱드 세 사람에게 다 들었다. 그것도 모두 다른 상황에서 말이다. 이 정도면 가훈이고, 진짜로 가문 전체가 믿는 기조라고 해도 되겠지. 하, 어디 가서 자랑해도 부끄럽지 않은 좋은 고용주 가문이다 정말. 용병 일 하다 보면, 가끔은 내가 어느 가문 소속이라고 말하기 쪽팔린 고용주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으니까. 용병 나부랭이라도 하는 일에 최소한의 자부심 정도는 가지고 살아야지.

“엘랑키아 왕국이 성립되고 적어도 500년 동안, 왕실은 블랑독을 쭉 방치해 오지 않았습니까. 저희 트랑카벨을 비롯한 블랑독 사람들은 다른 엘랑키아 지역과 상이한 문화를 유지하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협력하며 살아왔습니다. 거칠고 살기 어려운 땅을 저희 조상들이 조금씩 개척하여 비로소 현재의 풍요로운 지역이 된 것이지요.”

이제 분위기는 아롱드 영감님의 역사 강의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 에티엘 공작도 어느 정도는 아는 내용들이다. 오히려 그래서, 또 양심이란 게 남아있는 젊은이다 보니 쉽게 반박을 못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제와서 개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몇십년 전, 엘랑키아 왕실이 라솔 왕국을 침공했습니다. 당시에 저희 가문을 비롯한 블랑독의 여러 가문들이 병력과 물자를 제공해 종군했었지요. 알고 계십니까?”

“예, 알고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의 결과도 아시겠군요. 전쟁에 패했고 평화 조약에서 이스키비르 강 건너의 영토를 라솔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때 드 레뮤즈 가문이나 드 누아 가문을 비롯한 블랑독 서부의 가문들이 큰 타격을 입었지요. 사실 이 두 가문의 힘이 쇠락하면서, 블랑독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 지금과 같은 혼란 상황이 만들어진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요?”

“...말씀하신 내용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와, 영감님 말 잘 한다. 확실히 전쟁은 엘랑키아 왕실이 일으켜 놓고, 손해는 블랑독의 가문들이 봤다. 그런데 그 혼란 통을 이용해서 트랑카벨 가문이 군소 영주들 흡수하면서 블랑독의 패자가 된 것은 쏙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 봐.

아무튼 아롱드의 달변에 휘둘린 에티엘은 정말로 복잡한 표정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상식과 판단 근거와, 오늘 들은 이야기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양이다. 비겁한 고집쟁이였다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공정하고 정직하며 귀족적인 성격 때문에 이리 고생하는구나. 나는 그에 대한 호감이 조금 생기기 시작했다.

“에티엘 공작님, 이 촌로는 공작님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엘랑키아 영토 내에서 발생하는 유혈사태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자작님.”

“그러시다면, 제가 공작님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주제넘게 한 마디 드려도 되겠습니까?”

“듣겠습니다.”

“무릇 통치자가 될 인간이라면, 영토를 그저 지도 위의 점과 선, 그리고 면으로 이루어진 것으로만 보셔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사는 백성들을 보셔야 합니다. 이들은 그저 평생 힘들게 일해서 세금을 내는 존재만은 아닙니다. 이들 또한 수십 년에 걸친 기억을 가지고 있고, 수백 년에 걸친 역사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포용하지 못하신다면, 진정으로 그 땅을 통치하시지는 못할 겁니다.”

“네···.”

아롱드 영감님의 말투나 표정에서는 어느덧 애정까지 느껴진다. 이 앞날 창창한 젊은 귀족이 벌써 마음에 든 모양이다. 방금 한 말은 정론이지만, 본인이 실천하지 못하면서 한 말이었다면 좀 역겨웠겠지. 그런데 누가 봐도 트랑카벨 가문은 가문의 재산을 태워 왕에게 맞서면서까지 백성들을 지키며, 그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니 겉 다르고 속 다른 흔해 빠진 제왕학 이론가들과는 다르지.

그런데, 음··· 뭔가··· 파릇파릇한 꼬맹이 시절의 나도 이렇게 넘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으으으음···.

“감히 국왕 폐하께 무례한 말씀을 한마디 올리고자 합니다. 풍요로운 블랑독을 원하신다면, 공짜로는 가져가지 못하실 겁니다, 라고요.”

어라, 이건 역 선전포고라고 해야하나. 완전 그거잖아, 땅을 원한다면, 와서 가져가라.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에티엘 공작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말씀을 정말 잘하시는군요, 트랑카벨 자작님. 정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허허,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정말로, 제가 엘랑키아 왕실, 다고베르 2세 형님 폐하를 모시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설득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적대하게 될 것 같아 무척 아쉽게 생각합니다. 제가 토벌군을 이끌게 된 것이 솔직히 무척 괴롭습니다.”

오오, 그냥 순해 빠진 귀족은 아니었네. 나름대로 뚝심도 있고 판단 능력도 괜찮구나. 잠깐, 토벌군을 이끌어? 그럼 이 공작이 내년에 쳐들어올 왕실군의 사령관인 건가?

“그래도 말입니다, 트랑카벨의 가주,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께서 앞뒤가 꽉 막힌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아주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그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촌의 늙은이에 불과합니다만.”

“블랑독에서의 전쟁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한 가지를 더 제안하고자 합니다. 드 크레이 가문의 가주로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뭐가 또 남았나? 에티엘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혹시라도 자기 행동이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티가 난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그의 키가 크고 늘씬한, 승마와 검술로 단련된 몸을 옷 위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곧바로 말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인다. 방금 보여주었던 시원시원한 청년의 모습에서 갑자기 소심한 소년으로 돌아간 것 같은데.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하다가 멈추고, 망설인다.

“드 크레이 가문에서, 트랑카벨 가문에 결혼 동맹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응? 뭐라고?

뭘 해? 결··· 뭐?

결혼 동맹? 내가 아는 결혼이랑 뭐 다른 의미 있나? 판타지 세계라서? 아직 내가 이 세계 말을 잘 모르나?

뭔 소리야 이게 갑자기.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네. 옆을 돌아보니 아쥬흐의 원래 큰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진 것과, 시종일관 여유만만하던 영감님의 이마에 주름이 잡힌 것을 보면···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남들 놀란 것을 보면, 따라서 내가 놀란 것은 당연하였고.

“허헛, 그건 조금 의외의 제안이시군요.”

얼마 뒤, 다시 평온을 되찾은 영감님이 말을 이어가자, 에티엘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그러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쳐들어오듯 제안을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 동안 아쥬흐 양께 여러 차례 연락을 드렸었지만, 이야기 진행이 되지 않아 한 번 뵙고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와 이 인간, 소심한줄 알았더니 보기보다 꽤 저돌적이네? 연애편지를 보내다가

냉정하게 생각해보자면, 엘랑키아 국왕과 형님 폐하 어쩌고 하는 사이라면 왕족의 일원일 테고, 영지도 수도권 꿀땅에, 작위도 공작이다.

...객관적으로 일등 신랑감인데. 망할,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잖아.

“허어, 아쥬흐야, 이 할아버지는 처음 듣는 이야기구나.”

네 저도 처음 듣습니다. 그래도 여기서는 침묵의 미덕을 지키도록 하자. 말을 해서 맞아 죽는 인간이 말을 안 해서 맞아 죽는 인간보다 훨씬 많다.

아쥬흐의 얼굴이 애처로울 정도로 빨갛게 변했다.

“에티엘··· 공작님의 편지는 잘 받았었습니다. 선물도 잘 받았고요.”

거의 몇 초나 지난 후에, 간신히 평소의 여유를 일부분이라도 되찾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다만 아직 결정하지는 못해서... 일부러 멀리 블랑독까지 오시게 했네요. 뒤늦게나마 사과를 드립니다.”

"아닙니다. 무례하게 먼저 연락을 드렸는데도, 아쥬흐 양께서 답장과 답례의 선물을 보내주셨을 때는 정말 기뻤으니까요."

뭔가 연락이 오고 가기는 했던 모양이구나.

"그... 마지막으로 주셨던 총기는 굉장히... 값비싼 물건이었다고 들었네요. 당시에는 그것을 몰라서 적절한 답례를 하지 못했어요."

"그저 저희 영지에서 생산된 공예품의 하나일 뿐입니다. 가격이야 부차적인 문제이니 크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성분께 무기를 선물 드린 일이 적절했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뭐냐 이 눈곱만치도 설렘 없는 대화는. 방금 공개 청혼한 총각과 청혼받은 처녀의 이야기가 맞아? 내가 남녀 관계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보기에 이건 안될 것 같다. 아쥬흐가 이렇게 벽을 딱 치고 말하는 건 처음 듣네. 항상 아쥬흐와 대화할 때면 포용력 있는 사람이라 느꼈었는데 말이다. 아니 자기 영토도 아닌 데서 성녀 소리 듣던 사람이라니까? 요새도 듣고 있고.

“대답을 바로 듣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쥬흐 양. 천천히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언제라도, 어디서도 괜찮으니 혹시 마음이 결정되시면 답을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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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싱숭생숭한 접견이었다. 끄트머리의 충격이 너무 커서, 앞에서 무슨 이야기 했는지 다 까먹었어. 그 뭐더라... 전쟁인지 뭔지 한다는 그거 아니냐? 아롱드 영감님도 나름 충격을 받았는지, 아쥬흐와 가족 회의를 하려는 것 같더라.

"에트 경,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으음?"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아실 정도 또래일까, 굉장히 화려한 옷을 입은 소년이다. 어깨를 부풀린 비단 더블릿이라니, 이런 화려한 복장은 전 블랑독을 뒤져봐도 아무도 없을 거다. 과도하게 부풀리면 바보 같아 보이는데, 적당한 정도로 멋만 부리고 소년이 입으니 나름 어울려 보이네.

"저는 에티엘 드 크레이 공작님의 종자, 가티 드 리네콩테라고 합니다. 공작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어... 에티엘 공작이요? 오늘 왕실에서 오신 분 말씀입니까?"

"네, 맞습니다 에트 경."

"무슨 일이시죠. 들어오세요."

나는 대충 방으로 들어가 의자를 권했으나, 가티라는 이름의 소년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탁자에 들고 온 나무 상자를 내려놓는다.

"살로슈 22년 빈티지입니다. 마음에 드시면 좋겠네요."

응?

살로슈?

이거 그 명품 포도주잖아... 왕이나 귀족들만 마신다는 그거. 아니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분명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려는 것이겠지. 나를 포도주로 사려는 겐가? 나를 모욕할 셈인가? 어림없다.

"...이야기를 들어보죠."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나도 명품 포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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