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트랑카벨의 방문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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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목의 전투 이후, 블랑독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워졌다.
뭐,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말 그대로 폭풍전야다. 뭐 먹을 거 있나 머리부터 들이밀던 놈들을 두들겨 패서 쫓아낸 결과, 한동안 조용해졌을 뿐이지, 쳐들어오고 싶어 하는 놈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
여울목의 전투에서 적군을 꽤 아프게 두들겨 팼고 패주 시킨 것이 효과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젊고 활동력 있는 귀족들의 전력을 상당히 깎아낸데다 죽은 놈들도 많았고, 포로도 잔뜩 잡았으니까. 아쥬흐가 상당히 가혹한 몸값을 책정해 또 덤비려 든다면 파산할 정도로 몰아붙이고, 혹은 깎아주면서 향후 몇 년간 트랑카벨에 적대하지 못하도록 서약을 하게 만든 모양이다.
이 과정이 엘랑키아 귀족 사회 전체에 소문으로 퍼져나가면서 어설픈 한입충들은 제법 근절된 것으로 보인다. 뭐 원한을 가지고 눈이 뒤집혀 덤벼드는 놈들도 소수 있기야 하겠지만··· 트랑카벨 가문이 만만하지 않다는 점은 확실하게 전달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장기적으로 적을 더 확실하게 준비하게 만들어 힘든 싸움이 되게 할지, 성전에 참여하는 귀족의 숫자를 줄여 유리한 싸움이 되게 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현재의 트랑카벨 영지군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통제되는 소수와 싸우는 편이 유리하다는 생각은 든다.
블랑독 밖에서 무슨 음모가 진행되고, 어떤 군대가 모이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 와중에 블랑독에는 풍년이 들었고, 농부들은 힘들었던 일 년의 결실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양곡들은 힘들 것으로 예상되는 내년의 전쟁을 버틸 중요한 비축 물자가 될 것이고, 늦게 거둬들이는 포도는 잘 숙성되어 포도주로 팔려나가 미래의 군비가 될 것이다.
아, 물론 우리가 먹을 것도 적당히 남겨 놓아야지. 이제 블랑독 포도주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 시기에 횡행하는 약탈자 무리가 있었다면 골치 아팠겠지만, 수백 명 단위의 기병들이 순찰을 하고 보병들이 수천 명씩 몰려다니며 기동훈련을 하는 지역에 감히 접근하는 정신 나간 약탈자들은 다행히도 없었다. 이 역시 여울목의 전투 이후 퍼져나간 소문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블랑독의 대부분의 가문은 트랑카벨에 우호적이다. 많은 가문이 병력과 자원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렇지는 않더라도 트랑카벨에 협력하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유리하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것은 광범위한 정보이다. 만약에 블랑독의 변경을 침범하는 적이 있다면, 그 행군 속도보다 훨씬 빨리 적의 위치와 규모에 대해서 알게 되리라.
물론 레뮤즈라는 불확정 요소가 있기는 하다. 뭐, 지금까지 적대 행위를 해 오지는 않고 있으니까. 계속 이렇게 모호한 입장만 취해주면 좋을 텐데.
“병사들 휴가는 제때 보내 줘야지! 시기도 딱 좋으니, 가서 농사일도 좀 돕고 하라 그래. 추수철이잖아?”
“걱정 마십시오, 콘도티에레! 각 연대가 로테이션으로 다들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 더 추워지기 전에 집에 선물도 좀 가져다드리고 해야지.”
요새 할 일이 없다 보니 정말 꼰대 같은 소리만 하게 되는구나. 회사에서 딱히 할 일없는 어중간한 중간 관리직들이 왜 여기저기 기웃대면서 아이디어랍시고 허튼소리 했었는지 알 것 같다.
으으, 설마 중견 장교들이 나를 진급 떨어져 좌천된 대머리 부장 취급하는 건 아니겠지? 그냥 입 다물고 입자.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라지 않는가.
트랑카벨 영지군은 지금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 벼락치기로 갑자기 만들어진 조직이라 아직 고이지를 않아서 그런 것도 있겠고, 중견 장교들이 정말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고 똑똑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훈련은 아실의 총괄 아래 슈토르히 연대 간부들이 고문관으로 파견되어 연대별로 잘하고 있다.
신무기 개발은 장인 에오르크 레타일이 총괄해서 잘도 진행하고 있다. 내 역할이야 가끔 가서 욕 얻어먹고 멱살 잡히는 정도지.
나름 사전에 준비해 둔 커리큘럼대로 잘도 진행되고 있어서 오히려 무서울 정도다.
평화로운데 할 일도 없다?
그럼 또 대낮부터 술이나 마시러 갈까?
“콘도티에레! 주인 자작님께서 부르셔요!”
시커먼 남자들만 바글거리는 병영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1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깡마른 소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어, 에밀리아냐? 왜 여기서 일하고 있어?”
“아쥬흐 영주영애께서 영지군 사령부에 사람이 부족한 것 같으니 가 보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모리츠 스승님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그러냐··· 고생한다.”
에밀리아는 아넥시 마을에 약탈자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했던, 북부에서 발생했던 어떤 학살의 생존자였다. 가족을 잃고 힘들어하던 것을 아넥시 전투 이후 아쥬흐가 거두었었는데··· 지금은 모리츠에게 사격술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지금은 소녀다운 밝은 모습을 되찾아 참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본인이 총 다루는 법을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어린애는 안 된다고 말렸었는데, 알고 보니 열 여섯 살이었다나··· 키가 작고 말라서 열 두 살 쯤 되는 줄 알았지, 나는.
“그거 안 무겁니?”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콘도티에레!”
에밀리아는 요새 모리츠와 함께 지내서 그런지, 쓰는 말투나 용어가 묘하게 모리츠를 닮아가고 있었다. 영주영애라니, 트랑카벨 전체에서 그런 단어 쓰는 것은 모리츠와 에밀리아 단둘 뿐일걸. 덩치가 서너 배는 차이 나는 꼬마 여자아이가 그러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녀의 등에는 화승총이 메달려있다. 기병용의 단축 총신을 가진 소형 화승총이지만, 그녀의 작은 체구에는 그마저도 커 보인다. 아넥시 전투에서 크게 다치고 죽어가던 적 용병이 그녀에게 남겨준 금화로 샀다고 한다. 모리츠가 골라줬으니 좋은 총이겠지.
“쏠 때 어깨 아플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콘도티에레! 요즘에는 다람쥐도 잡고 있어요.”
“와, 그걸로 다람쥐를 잡아? 보통이 아닌데?”
재능충이구만, 재능충이야. 명중률이 조금만 떨어져도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는 화승총으로 작은 짐승을 사냥하는 것은 눈치채지 않게 가까이 다가가야 해서 상당히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다.
“아, 아롱드 영감님이 부르신댔지? 무슨 일인지는 알아?”
“저는 몰라요. 어디서 높으신 분이 찾아오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 고마워. 회의실에 계시는가?”
“접견실에 계십니다!”
또 접견실인가? 접견실은 보통 손님이 올 때는 쓰는 장소가 아닌데··· 지난번 접견실에서 손님을 맞았을 때는 라몽 드 레뮤즈 백작과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이 왔을 때였지. 신분 숨기겠다고 후드 쓰고 찌질대던 라몽의 모습이 기억난다.
“저 왔습니다, 아롱드 자작님.”
“오, 왔구만 에트 군.”
방 안에는 평소처럼 하인 오드가 끄는 휠체어에 앉은 아롱드가 외부에서 온 손님과 마주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아쥬흐가 앉아있는데··· 표정이 좀 불편해 보인다.
어라, 아쥬흐가 나를 보더니, 눈을 피한다. 아니, 눈을 피했다기보다는 어디를 봐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아쥬흐가 불편해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다? 대체 누구의? 생전 상상도 못 한 상황인데. 언제나 여유만만한 그녀가 말이다.
“우리 트랑카벨 가문의 군사 조언을 맡아주고 있는 용병, 에트 군입니다.”
아롱드가 내 소개를 하자, 마주 앉아있던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갈색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길쭉 비율이 좋은 남자다. 얼굴은 남자답게 잘생겼고 신분도 높아 보인다.
입고 있는 옷도 고급져 보이고, 인제 보니 흉갑에는 돋을새김으로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모서리마다 은이 씌워져 있었다. 예술 작품인데. 그 위에 걸친 붉은 비단으로 된 단망토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반복 타입이 수 놓여 있다. 진짜 엄청나게 비싸 보인다. 애초에 비단 망토는 한 겹만 해서는 모양이 안 나서 최소 몇 겹을 겹치기 때문에 재료비만 해도 엄청나게 비싸다고.
뭔가 내가 재수 없게 생각하는 귀족 타입인데.
“에트 군, 이분은 크레이의 공작 각하시네. 성함이···.”
“에티엘 드 크레이입니다, 자작님.”
자기소개를 한 남자가 나에게 손을 내민다.
“에트 경께서 블랑독에서 이룩하신 여러 승리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에티엘 드 크레이라고 합니다.”
잠깐, 잠깐잠깐··· 공작? 이 스물 몇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공작이라고?
이 근방에서 작위가 높은 사람이 엘랑키아 8대 귀족의 일원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인데··· 공작이라니, 엘랑키아에 와서는 처음 본다. 물론 작위가 권력이나 영토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작이라니 일단 먹어주는 가문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하겠다.
크레이가 어디더라···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라 모르겠다. 아무튼 공작치고 예의 바르기는 하네···.
“그룬발트 출신의 에트라고 합니다. 제가 외국 출신 용병 나부랭이라 엘랑키아의 지명에 대해 무지합니다. 크레이는 어디에 있는 지역인지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이 정도 물음이 무례한 일은 아니겠지? 내 말투가 약간 퉁명스럽기는 한데. 나는 기본적으로 잘 생기고 지체 높은 놈들이 싫다. 원래 잘생긴 놈이 못생긴 놈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만 반대는 괜찮다고. 자기방어야.
“크레이는 사와르 강 상류 쪽에 있는 영토입니다. 아름다운 곳이지만, 공작령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작은 지방이지요.”
“아하, 그렇습니까.”
사와르 강이라. 거기 그 왕이 마신다는 살로슈 포도주 만드는 곳인데. 아니, 애초에 사와르 강이면 엘랑키아 왕도 베르마유가 있는 곳이잖아! 수도권이네 수도권. 서울놈이잖아 이 녀석! 분명 나를 무식한 촌놈이라고 비웃고 있겠지!
“에트 군도 이쪽에 와서 앉으시게. 자, 에티엘 공작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잠자코 아롱드의 옆, 아쥬흐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렇게 딱딱한 분위기는 아니긴 한데, 아롱드가 나를 ‘군사 조언을 맡은 용병’이라고 소개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전에 라몽과 가스텔 두 백작이 왔을 때 아쥬흐는 나를 ‘군사 전권 대리인’이라고 소개했었으니까. 낮춰 불러서 섭섭하다 이런 것이 절대로 아니고, 나를 이 자리에 참석시키고 싶지만, 역할을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알리고 싶지는 않은 상황인 것이 분명하겠지.
“저는 엘랑키아의 적법한 국왕이신 다고베르 드 팔라스 폐하의 명을 받들어 찾아왔습니다.”
와... 진짜 왕이 보낸 사절이야? 역시 공작을 보내려면 왕은 되어야 한다 이거지.
“존귀하신 국왕 폐하께서 이런 변경의 촌락에는 어떤 일로 관심을 가지신 것인지요?”
역시 산전수전 다 겪으신 아롱드 영감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평이하게, 자신을 낮추지만, 전혀 낮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당당한 태도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블랑독에서의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하시는 폐하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으음,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하신다···.”
잠시 뜸을 들인다. 솔직히 아롱드 영감님 성격상, 속으로는 뭔 개소리야 하고 호통이라도 지르고 싶으시겠지.
“전장을 원하는 이가 블랑독 천지에 누가 있겠습니까. 이 촌로가 잘은 알지 못하나, 잘못 찾아오신 것 같소만. 전쟁을 피하시고자 하는 의도라면 주디칼리의 법황청에 방문하시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근본적인 전쟁의 원인은 정순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단 토벌 성전을 때린 법황 책임이니까. 거기 냉큼 호응한 국왕 잘못도 상당히 크지만, 역시 거기까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에티엘이 똑똑한 인물이라면 행간에서 읽을 수 있겠지.
“자작님,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국왕 폐하의 사절로서가 아니라, 동료 귀족 개인의 입장에서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베르마유의 왕궁에 입조하시어 그간의 오해를 풀고 블랑독에 평화를 유지하시기를 빕니다.”
“허어, 그것 참.”
“그렇게 하시면 다고베르 2세 폐하께서는 트랑카벨 가문을 카르카냑의 백작으로 인정하실 겁니다. 더 나아가 블랑독의 관리자로 임명하시겠지요.”
“허허허, 블랑독은 드 레뮤즈 백작가의 영토가 아니었습니까?”
“드 레뮤즈 가문은 오랫동안 블랑독 관리를 내버려 뒀습니다. 현재도 전혀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고 이에 대해 폐하께서 책임을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네. 드 레뮤즈 백작, 국왕한테 쿠사리 좀 듣겠구만.
“허허, 저희 트랑카벨 가문은 자작가로서, 블랑독의 지배자이신 드 레뮤즈 백작가에 충성을 다 하고 있습니다. 매년 조세와 공납을 바치고 있지요.”
“하하, 명목상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와 생각보다 정확한데. 은근히 조사 많이 하고 온 모양이네, 공작 양반.
“최근 로데브 강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트랑카벨 가문의 군대와 드 레뮤즈의 군대와 교전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허허허, 이웃 사이에 종종 오해가 벌어지고는 하지요.”
“단순히 오해···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규모의 교전은 아니지 않았습니까? 전투에 참여했던 가문들이 포로의 몸값을 내기 위해 이리저리 돈 빌리러 다녀 소문이 다 났습니다. 이제 엘랑키아 전역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네요.”
“허허.”
...그게 그렇게 되었겠구나. 그렇게 귀족들이 이리저리 발품 팔아서 구해온 금화들이 아쥬흐의 금고를 풍족하게 채워 주었고, 아쥬흐는 그 돈을 영지군에 재투자했다. 당장 휴가 갈 때도 약간이지만 포상금도 지급해줬다고.
고마워, 귀족들.
“다시 한번 요청드립니다, 자작님. 국왕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엘랑키아 왕실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주십시오.”
“흐으으음.”
에티엘 드 크레이라는 공작은 굉장히 예의가 바르고 교육도 잘 받은 사람이다. 분명 성실하고 선량한 사람이겠지. 정말로 진지하게 자신의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롱드 영감님의 저 ‘흐으으음’은 100퍼센트 거절을 준비하는 흐으으음이다.
“그럼 역으로 묻겠습니다.”
“말씀하세요.”
“트랑카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 받아들일 생각도 없으면서 조건을 물어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