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슈토르히 용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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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발트의 기사들, 용병들, 군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황새 깃발 용병단의 전설이 있다.
처음에는 그저 흔한 중소규모 용병 연대로 출발한 그 부대는 특출난 장비나 구성원 없이 구성된 평범한 보병 연대로, 다른 수많은 용병이나 영지군 부대들과 함께 전장에 나가곤 했다.
종종 특출난 전선 유지나 뛰어난 사격 통제로 입소문에 오른 적이 있으나, 전쟁에서 잔뼈가 굵고 타 부대의 활약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소수의 군인들 사이의 이야기였다. 결국 전선을 지키는 수많은 연대들 중 하나에, 규모까지 작아서 보조 전력 역할을 하는 그저 그런 부대일 뿐이었다.
황새 깃발이 처음으로 전설이 된 것은, 칠선제후 전쟁의 막바지에 벌어진 다텐슈타트 전투에서였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황위는 특이하게도 세습이 아니다. 총 13개의 선거권을 가진 선제후 가문들이 황제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으며, 가문들의 투표를 통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이가 황제가 된다.
더 특이하게도, 13 선제후 가문들은 모두 엘프 혈통이다. 이 가문들 중 일부는 고대 아란 제국보다도 오래된 역사가 있으며, 나머지 가문들은 그 오래된 가문들의 방계이다. 그 시작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이는 이제 대륙에 아무도 없으리라.
그룬발트의 모든 엘프들은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 고대의 맹약에 따라, 스스로 제국의 지배자, 즉 황제가 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 황제는 오로지 엘프 이외의 종족만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역대 모든 황위는 인간에게 주어졌다.
더더욱 특이하게도, 황위 선거에 참여하는 가문들은 1가문 1표가 아니다. 표결 직전에 진행되는 사전 회의에 따라서 가문이 가진 표의 개수가 정해진다. 여기서 투표권 입찰이 벌어진다. 모든 가문은 무기명으로 금액을 적어내며, 이 결과가 가문이 가진 투표권의 개수를 결정한다.
가장 많은 금액을 낸 가문은 13표, 가장 적은 금액을 낸 가문은 1표가 된다. 만약 동등한 금액일 경우, 해당 가문들은 모두 더 낮은 순위만큼의 표를 가지게 된다. 이런 복잡한 선거제도 때문에 황제 선거는 무사히 끝나는 경우가 없었다. 선제후 가문들은 투표에 앞서 온갖 모략과 술수, 때로는 전쟁까지 벌이게 된다. 그런 와중에 상당히 오랜 기간 황위가 비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곤 했다. 엘프 입장에서는 그렇게 긴 기간이 아닐지도 몰라도, 인간 기준으로는 상당히 긴 기간 말이다.
지금도 20년 넘게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황위는 비어있으며, 10년 전 까지만 해도 선제후간의 내전이 반복해서 벌어지곤 했었다.
칠선제후 전쟁은 말 그대로 일곱 명의 선제후가 참여한 전쟁으로, 가장 최근 벌어진 선제후간 내전이었다.
다텐슈타트 전투는 양측이 모두 3만 이상의 병력을 투입한 전투였으나, 불과 1시간만에 한쪽 전열이 붕괴하면서 승패가 갈리고 만다.
패주하는 대열의 최후방에서, 몇 배나 되는 추격군을 틀어막았던 것이, 황새 깃발 전설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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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르히 연대! 콘도티에레께서 조직하셨던 용병단이죠?”
“뭐 그렇습니다. 그래도 여럿이서 다 같이 만든 거지, 꼭 제가 조직한 것은 아니지만요.”
“불패 연승 무적의 용병대라고 들었습니다!”
“으으음, 아실 경, 지지 않는 것과 이기는 것 사이에는 제법 큰 차이가 있답니다, 꽤 다르거든요.”
“연대의 상징이 황새라면서요? 깃발에 황새가 그려져 있나요? 슈토르히가 그룬발트 말로 황새라는 뜻이라 배웠습니다.”
“아아, 그렇죠. 대체 누가 그런 촌스러운 이름을 지었는지 참··· 어느새 다들 부르기 시작해서 바꿀 수가 없었어요.”
“어떤 분들일지 정말 기대되네요! 콘도티에레 처럼 훌륭한 군인들이신가요?”
“으음 글쎄요··· 훌륭한 군인이라는 개념이 다소 모호하긴 합니다. 용병단에 개성 강한 친구들이 좀 있긴 합니다만···.”
“어서 카르카냑으로 돌아가서 빨리 뵙고 싶네요! 어떤 사람들이 과거에 콘도티에레와 함께 싸우셨었나 궁금하네요.”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옛 친구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는 오랜만에 만난 아실과 말을 나란히 하여 카르카냑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아실은 오랜만에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운 것 같고 나 역시 무척 반갑고 기쁘다.
언제나 밝고 순수하며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뿌리는 트랑카벨 가문의 다음 주인, 아실 트랑카벨은 트랑카벨 가문이 받은 선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나 누나가 가진 철두철미함은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눈부시게 빛나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트랑카벨의 영지군들 중, 이 어린 후계자를 싫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트랑카벨 가문에 해묵은 원한과 거부감을 가진 블랑독의 나이 든 귀족들조차도, 해맑은 아실과의 협력이라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트랑카벨은 착취하지 않는다.
트랑카벨은 억압하지 않는다.
트랑카벨은 섬기는 이를 버리지 않는다.
다소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아실 트랑카벨에게 있어서는 진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쥬흐와 내가 진실로 만들어 버릴 것이니까.
이번 여울목 전투에서도 그렇지, 내 지원 요청을 받자마자 만사 제쳐놓고 훈련 중이던 연대들을 이끌고 바람처럼 달려왔다. 내가 예상했던 최단 시간을 뛰어넘었을 정도이다. 이러니 영지군 중에 그를 싫어하는 놈이 있을 리가 있나.
“으음, 황새 깃발!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 유명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모리츠 경! 모리츠 경도 그 자리에 계셨나요?”
“물론입니다, 소영주님! 제가 처음 황새처럼 생겼다고 말했었거든요!”
“와아! 정말인가요?”
...역시 모리츠가 문제였구나. 그 촌스러운 작명 센스라니.
“다텐슈타트 전투 직후였습니다! 아군이 패했고, 슈테른가르텐 선제후는 퇴각을 명령했었습니다!”
“그룬발트의 선제후 말이죠! 직접 보셨나요?”
“물론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품위있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속은 시커먼 사람이었죠! 뭐, 엘프들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엘프 선제후라니, 저도 언젠가 보고 싶네요.”
“그러고 보니 엘랑키아에서는 엘프를 보기 어렵군요!”
“혹시 슈토르히 용병단에는 엘프 분이 계시는가요?”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아, 그거 아쉽네요.”
엘프라. 사실 그룬발트에서도 쉽게 보기는 어렵긴 하지. 선제후 가문이나 그 방계 엘프들도 대체로 선제후 작위에 봉해진 신성수림에 틀어박혀서 잘 나오지 않으니까. 오히려 그것들이 단체로 신성수림에서 기어 나오면 전쟁이든 뭐든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나도 친한 엘프가 있기는 했구나. 못 본 지 정말 오래되었지만.
“저희는 퇴각하는 선제후군의 후미 쪽에 있었습니다. 사실, 후방에서 지연전을 맡았던 타라트라바 용병들이 전멸하는 바람에 저희가 최후미가 된 상태였죠!”
으으, 끔찍한 기억이다. 모리츠가 설명이 재미있고 조리 있게 잘하는 데다가, 목소리까지 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다 집중하는 모양새다. 갑자기 모리츠를 제외한 주변이 조용해졌네! 잡담도 없이.
“저희는 이틀간, 잠도 자지 못하고 싸우면서 퇴각했습니다!”
“적군이 쫓아왔나요?”
“아, 물론입니다! 상대방 측의 내로라 하는 정예들이 선봉을 자처해 도전해 왔습니다. 로자브뤽의 기사들! 그로이엔펠트 슈미트 용병 연대, 볼켄라스의 용기병 연대, 리히트슈페어 반창기병 연대도 생각나네요!”
하··· 뭔가 멋지고 그럴싸한 이름을 주워섬기는 것 같지만, 정말 꿈에 나올까 두려운 이름들이다. 말 그대로 트라우마 그 자체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앞을 가로막았던 것일까. 오히려 당시에는 잘 모르니까 무모하게 나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로이엔펠트 슈미트가 정면에서 밀어붙이고 리히트슈페어가 측면으로 우회하면 바로 도망쳐야지 미쳤다고 그걸.... 당시에는 다행히도, 아주 아주 다행하게도 네임드 연대들이 자기네끼리 경쟁하는 바람에 아주 비효율적으로 추격해왔었다. 어차피 전투도 이겼겠다, 대충 꿀 빨 생각이었겠지, 멍청이들!
이게 진실이다. 우리는 그 덕분에 살아 남은 거지, 내가 저 괴물 연대들 상대로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싸워서 이긴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모리츠가 이걸 명확하게 이해시켜줘야 하는데.... 교묘하게 진실의 일부만 전달되곤 하는 게 문제잖아.
그 후로 추격에 실패한 네임드 연대들이 자기들 쪽팔리니까, 괜히 과장해서 소문 퍼뜨린 것도 문제를 유발했다. 무슨 철벽이니 시간차 사격이니 내가 한 적도 없는 게 막 소문이 났더라니까? 우회하느라 무리해서 강행군 해놓고, `오버해서 쫓아갔다가 정작 적을 앞에 두고 탈진해서 뚫지 못했다`라고 해야 할 것을 `자기들은 만전의 준비태세로 임했으나 철벽과도 같은 창병 방진과 절묘한 시간차 측면 사격으로 격퇴되었다` 이따구로 소문을 냈더라고. 분명 고용주에게 털리기 싫어서 그랬겠지.
아니 시발 이틀 동안 잠을 못 자서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진짜. 솔직히 차라리 지금 죽어버리면 편해지지 않을까 이딴 생각밖에 없었다. 매복 공격이야 했지만, 시간차 사격을 했다면 아마 우리 애들도 졸려서 반응이 느려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인데. 그 와중에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우리 애들은 칭찬할 만하긴 해.
아무튼 사람은 딱 자기가 가진 만큼만 인정 받는 게 가장 좋지, 너무 고평가받아도 저평가받아도 괴로운 법이다. 다텐슈타트의 용병 놈들,
“전투가 끝이 없었고 많은 동료가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이틀 후에도 저희는 살아 있었고, 결국 추격자들은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우와아···.”
“전부 콘도티에레, 당시에는 연대장이셨지만요. 아무튼 콘도티에레께서 지휘하신 덕분입니다!”
애초에 그룬발트에서는 콘도티에레라는 말을 쓰질 않지 않냐···.
“황새 깃발, 황새 깃발은 어떻게 된 건가요?”
“아하! 그건 치열한 전투 와중에, 온갖 총탄과 포탄에 찢긴 저희 연대기가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그게 중간중간 찢겨나간 모습이 마치 황새 모양 같아서 제가 동료들에게 그렇게 말했었지요!”
“와! 깃발이 찢어질 정도로!”
“다음 용병들을 모병할 때, 슈토르히 용병단이라 광고를 했더니 지원자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모두 다텐슈타트의 소식을 들었던 거죠.”
“불패의 용병대네요.”
“저희는 대형 용병단이 되었고, 콘도티에레의 불패 전설도 그렇게 시작이 된 것입니다!”
“와, 저희는 그렇게 대단하신 분을 콘도티에레로 모시고 있는 거네요?”
“맞습니다! 블랑독에 오셔서도 연전연승 중이시죠!”
와··· 아무리 그래도 좀 오글거리지 않냐. 거의 무슨 프로파간다 수준인데. 순진한 아실의 동경하는 눈길이 괴롭게 느껴진다.
아니 고평가 받는 게 싫은 것은 아니다. 뭐 나도 사람인데, 누가 막 칭찬해주고 과장되게 좋아해 주고 하면 어깨도 으쓱하고 은근히 기분 좋아서 허파에 바람도 들고 하지. 하지만 그 기대감에 걸맞은 결과물로 돌려줘야 한다는 현실이 무서울 뿐이지.
아아, 빨리 카르카냑에 돌아가고 싶다. 나만의 좁은 숙소에서 상표도 보지 않고 대충 고른 싸구려 와인을 홀짝거리며 늘어지게 자고 싶다. 한 10시간 정도.
"카르카냑 귀환이 정말 기대됩니다! 항상 슈토르히의 친구들이 보고 싶었습니다!"
"모리츠 경은 함께 계시지 않았었나요?"
"저는 주디칼리의 용병단 본부 관리와 다른 금융 업무들 때문에 부대를 떠나 있었거든요!"
"아아, 그러셨구나. 금융 업무라니... 지금의 모리츠 경을 생각하면 상상이 가질 않네요."
"하하핫, 저도 지금이 좋습니다! 목숨 같은 전우들을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말 기쁘네요."
뭐 이녀석아. 목숨 같은 전우 첼레스티나를 주디칼리에 두고 온 건 모리츠가 아니었더냐. 그나저냐 첼레스티나는 대체 몇 달을 헤매는 거야. 길치도 정도가 있지.
아아 나도 기대된다. 이 녀석들 대체 어떻게 변해 있을까.
...맨 정신으로는 못 볼 것 같으니 포도주 좀 마시고 일단.
빨리 포도주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