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8화 (38/556)

8-8. 여울목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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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던 로데브 강 여울목의 북쪽에서 이틀거리 정도 떨어진 장소.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패배하고 도망쳐 간신히 안전을 확인한 군세. 경비를 서는 병사들 사이에도 패배한 무리 특유의 절망이 짙게 깔려있다.

그 한 가운데, 가장 크고 호화로운 막사가 서 있다.

커다란 막사에는 몇 개의 탁자를 이어 붙인 큰 식탁이 있었다. 그 위를 덮은 순백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장식이 들어간 식탁보는 전장에서 보기 힘든 것이다. 게다가 식기는 전부 은제, 어느 만찬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값비싼 명품들이다.

“으흠, 흠.”

탁자에 둘러앉은  20여 명의 참석자들 반응은 엄청나게 무거웠다. 실제로 식기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가장 상석에 앉아,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여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은 이 막사의 주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다.

하지만 나머지 참석자 대부분은 거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저 숟가락으로 음식을 뒤적거리며 먹는 척만 하는 이들도 있고, 아예 식기에 손도 대지 않고 침울하게 앉아있는 이들도 있다.

“왜들 안 드시는 거요? 입맛에 맞지 않으시오?”

라몽 드 레뮤즈가 입을 열었다. 만찬의 주인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 어쩔 수 없이 깨작깨작 음식을 입으로 가져간다. 하지만 이내 찌푸린 얼굴을 하더니, 억지로 몇 번 씹어 간신히 삼키는 눈치다.

거기에는 이 자리의 무거운 분위기가 원인인 점도 있겠지만, 음식의 질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모서리마다 화려하게 공들인 장식이 들어간 호화로운 은식기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귀리죽이었다. 귀리를 거칠게 빻아서 물에 불려 끓이기만 한 소박한 요리. 거기에 소금을 좀 뿌렸을 뿐이다.

엘랑키아 전역에서, 귀리죽은 전형적인 하층민의 음식이다. 이것을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 상황에서나 먹는 음식. 더 나아가 귀족으로서는 말을 비롯한 가축이나 먹는 곡식이다. 대부분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을뿐더러 인간이 먹는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그런 음식이다.

“여기는 전장이오. 그대들의 짐은 모두 트랑카벨 가문에게 약탈당해, 오늘 먹을 음식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뒤의 절반은 진실이지만 앞의 절반은 거짓말이다.

후방에 있던 이단 토벌 기사도 연합의 짐을 약탈해 숨겨놓은 것은 바로 그 말을 하는 당사자,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다. 전장 후방에 있는 야영지를 접수하자마자 짐을 훔쳐 어디론가 옮겨 놓고는 오리발을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도 연합의 귀족들에게는 항의할 근거가 없었다. 게다가 완전한 패배로 인해 항의하거나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기력조차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는데 어찌 드시지를 않는 것이오? 거참···.”

그렇게 식사를 한다고 주요 귀족들을 초대해 모아 놓더니, 전장치고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꾸며 놓고 내놓은 것이 귀리죽이다. 전장 한가운데서 뚜껑이 딸린 화려한 은식기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기대했었지만··· 뚜껑이 열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보기에도 역겹게 생긴 질척질척한 곡물 덩어리이다.

배가 고프기는 했으나, 귀족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조차 고역인 음식이었다. 정착 만찬의 호스트인 드 레뮤즈 백작은 똑같은 음식을 잘도 먹고 있으니···.

물론 모두가 먹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꾸역꾸역 어떻게든 먹고 있는 인물로 소베트르 드 랑두제 남작이 있었다. 명목상 이단 토벌 기사도 연합의 맹주인 그는 이마에 피가 배어 나온 붕대를 감고 있다. 여울목의 전투에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반격을 지휘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와중, 로베르가 이끄는 기병대의 돌격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반격이고 뭐고 살아남기도 바빴다. 그래도 맹주라고 주변에서 필사적으로 그를 돕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면, 투구가 조금만 덜 튼튼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부지런히, 조금씩 질척질척한 곡물 덩어리를 입으로 옮기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대군주인 드 레뮤즈 백작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의미도 있었으나, 기실 그는 평소에 귀리죽을 먹은 경험이 꽤 많았다. 랑두제 남작령이 가난한 영지였기 때문인지, 과도하게 큰 규모의 가신단을 유지했기 때문인지, 혹은 둘 다 때문인지 겨울철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하루 한 끼 정도는 귀리죽을 먹고는 했던 것이다. 물론 집안의 요리사가 그를 위해 꿀이나 우유 등을 곁들여 훨씬 먹을만하게 요리하긴 했지만.

아무튼 평소 먹던 음식에 비하면 거칠게 빻은 데다가 끓여서 대충 소금만 뿌린 지금의 귀리죽은 훨씬 부족한 음식이지만 그래도 도저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드라멜른 기사단 파견대의 대장 발란트 디아모프 폰 잘렌펠트였다. 그 역시 왼손을 붕대로 감은 것을 보면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드라멜른 기사단의 견습 수도기사였던 그로서는 특별히 적응하기 힘든 음식은 아니다. 기사단 내 서열 4위인 집행관이 된 현재에도 검소와 청빈을 강조하는 기사단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의 기준으로도 귀리죽은 맛없는 음식이 맞긴 했다.

“시장하지 않은 분들이 많은 모양이오.”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은수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는 벌써 접시를 깨끗이 비운 상태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그의 살집 좋은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으나, 말투에서는 분노를 간신히 참는 기운이 느껴진다. 적어도 그 자리의 참석자 대부분은 그것을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부는 할 말이 없는지 갑자기 먹지도 않을 귀리죽에 집중하기 시작하고, 갑자기 아무 문양도 없는 천막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도 있다.

“저희 드라멜른 기사단은 타비뇽으로 돌아가 추기경 예하의 지휘를 받을 예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은식기의 귀리죽을 다 비운, 드라멜른 기사단의 집행관 발란트가 말했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과 큰 덩치, 다소 무기질적이고 사납게 보이기도 하는 각진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울림이 깊은 목소리였다. 다수의 청중 앞에서 말하는 훈련을 받은 목소리이다.

“일전의 전투에서는··· 도움을 드리고 싶었으나 힘이 부족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드라멜른 기사단은 기사도 연합의 병력이 빠져나올 때 타이밍을 맞춰서 무사히 후퇴하기는 했으나, 그 전의 다소 무모한 돌파 시도로 인해 적지 않은 희생을 입고 있었다. ‘진실의 향’ 효과로 인해 각성상태에 빠져들었던 보병들의 희생이 특히 컸다.

기사단이 트랑카벨 영지군의 전선을 돌파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연합 전투에서 애초의 계획을 무시하고 멋대로 폭주했던 것은 기사도 연합 측이기에 굳이 책임의 소재를 따지자면 이쪽이 더 크긴 했다. 그래서 발란트가 먼저 사과했다는 것은 실제 미안해서라기보다는 우리는 빠질 테니 더 이상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컸다.

“기사단 분들은 다행히 돌아갈 곳이 있으시구려.”

라몽 백작이 말하자 발란트가 슬쩍 고개를 숙여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사실 백작의 말은 발란트가 아니라 다른 귀족들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그럼 나머지, ‘기사도 연합’의 공경 여러분들은···.”

그는 유난히 기사도 연합을 말할 때 강조해서 말했다. 어지간히 꼴 같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선 영지로 돌아가시오. 돌아가시기로 한 분들은 우리 드 레뮤즈 가문이 트랑카벨 가문과 협상해서, 약탈당한 짐들을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소이다.”

입 다물고 집에 간다고 하면 압류해둔 물건 돌려준다는 소리였다. 이 말을 들은 귀족들의 표정이 제각각으로 변한다. 그래도 짐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어서 그런지 화색이 도는 이들,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놀란 이들, 모욕당했다 느낀 듯 분노하는 이들.

"이대로 패배의 오명만 안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젊은 귀족이 외쳤다. 전장에서도 곱슬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콧수염을 멋지게 다듬은 것이, 몸단장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도르다쥬의 나크 경이시죠."

"그, 그렇습니다."

항의한 귀족은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알자 놀란 것 같다. 물론 자기소개 정도야 한 적 있지만, 인사하던 당시에 자신은 여러 귀족 중 한 명이었으니.

"오명이 싫다면 기회가 있을 때 왜 이기지 않았습니까."

라몽의 말투는 차갑다.

"이기려면 지난 전투에서 이겼어야죠. 좋은 기회를 날린 것은 여러분 아닙니까. 이제 적... 트랑카벨의 본대가 합류해 병력이 두 배가 됐는데,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지금 무슨 수로 복수를 합니까."

그 말투는 차갑고 침착했으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고 있었다. 적어도 소베트르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주군은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나서 간신히 참고 있다. 나크인지 뭔지 멍청한 녀석! 입이나 좀 다물고 있을 것이지.

"하지만! 만약 마지막 순간에 백작께서 전투에 참전하셨다면!"

눈치 없는 나크 드 도르다쥬는 말을 이어나갔다. 심지어 그의 말투에서는 분노와 적개심까지 느껴졌다. 놀라운 것은, 다른 귀족들 몇 명도 그런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 귀족들은 대체 어디까지 추해질 것인가. 소베트르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만약에 상관없이 참전했다면 말입니다."

여전히 시뻘게진 얼굴로, 라몽 백작이 말을 씹어 뱉는다.

"포로로 잡혔던 당신네 기사 양반들은 죄다 죽었을 겁니다. 여유가 없어진 트랑카벨의 기병들이 당신네를 살려 두었을 것 같습니까?"

"...."

다시 한번, 정론이다. 얼굴이 구겨진 나크는 이제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애초에 자기네가 잃어버린 승리를 남이 대신 찾아주지 않았다고 짜증을 부리는, 유아적인 발상이 아니었던가.

"트랑카벨이 꼴 보기 싫... 눈엣가시인 것은 여러분만이 아닙니다...."

마지막 말은 소리를 낸다기보다, 차라리 짐승이 고기를 씹어 삼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소베트르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라몽 백작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주었는지 깨달았다.

“친지를 잃은 분도 있고, 포로로 잡힌 분도 있을 것이오. 포로로 잡혔다면 빨리 몸값을 마련해 구해줘야 할 것이고, 돌아가셨으면 유품이라도 찾아야 할 게 아니오.”

실제로 친지를 잃거나 포로로 잡힌 귀족들의 표정이 흐려졌다. 정론이니까.

“참고로 트랑카벨 가문의 군대에는 명예를 모르는 천한 출신이 많소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로잡은 포로가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 모르고, 충동적으로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더이다.”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를 믿었는지 몇몇 귀족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포로로 잡힌 친지들이 걱정되는 것이겠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복수를 위해 돌아오시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겠으나, 지금 여러분들이 블랑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으로 보이는구려.”

아무도 라몽 백작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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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돼지들 치료는 끝났어요."

"푸웃!"

아쥬흐의 과감한 단어 선택에 나는 마시던 물을 뿜고 말았다.

"왜 그러시죠?"

"아, 아닙니다. 비싸게 팔리는... 돼지들 맞네요."

"좋은 돼지들을 많이 잡아다 주셨네요. 제가 최대한 비싸게 팔아 볼게요. 수고하셨어요."

"네네, 전부 아쥬흐 양께 맡기겠습니다."

머저리들, 이제 큰일 났다. 포로 된 가문원 찾아가려면 기둥뿌리 뽑히겠구만. 그러게, 누가 트랑카벨에 덤비래?

"그럼 그... 중저가 돼지들은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가요?"

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막사 안으로 모리츠가 들어왔다.

"허엇! 설마 포로들을 돼지라고 지칭하신 것입니까! 물론 콘도티에레의 인식에 저는 항상 동의합니다만, 명확하게 돼지라 지칭하시는 것은 주변 이미지상 조금 어떨까 싶네요!"

"어 아니, 그거, 아냐 그거."

"우후후후후."

내가 어버버거리자 아쥬흐가 입을 가리고 웃는다.

"괜찮습니다, 콘도티에레! 거친 전장에서 다소 비속어를 사용할 수도 있지요!"

"아 내가 한 말 아니라니깐?"

"부상병들은 적이라도 치료해야죠. 물론."

"으으으...."

더 이상 말하면 수렁에 빠지는 대화다. 다시 마음속 메모에 적어 놓자. 역시 나는 대화로 트랑카벨은 절대 못 이긴다.

아쥬흐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직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트랑카벨 가문의 야전 의무대를 구성한 모양이다. 막연히 필요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행하지 못하던 와중, 주디칼리 유학 시절 지인들에게 연락해 초빙하여 인력을 구성한 모양이다. 참 고마운 일이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모리츠?"

"녀석들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콘도티에레!"

"녀석들이 누구야?"

"용병단 말입니다!"

"아."

슈토르히 용병단... 드디어 도착했구나.

내 젊은 시절을 태워서 만들었던 용병단이다. 어영부영 하다 보니 내가 단장이 됐었더랬지. 그룬발트에서 시작해서 주디칼리까지... 옛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모리츠를 포함한 다른 녀석들에게 맡기고 떠났었는데... 오랜만에 도와달라고 요청했더니 도와주러 달려와 줘서 이제야 도착한 모양이다. 멀리 북방 전선에서 대륙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강행군이었을 텐데.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왠지 뒤통수가 땡기고 아랫배가 싸한데... 원인을 모르겠네. 분명 옛 친구들 만나는 건데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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