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여울목의 전투
뻐엉! 뻐벙!
요란한 소리에 귓가가 찡하고 울린다. 일반 총보다 아주 약간 더 클 뿐인데, 포성은 역시 뼈를 울리는구나.
방금 포탄을 발사한 4문의 소형포가 하얀 흑색화약 연기를 뭉게뭉게 뿜어내고 있었다. 일반 총에 비해서 몇 배는 자욱하게 뿜어져 나온 것 같다.
발사한 포병들 역시, 너무나도 큰 소리에 당황한 것 같다. 이들 역시 실탄 사격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실탄 사격을 꼭 해 봐야 한다 생각해서 훈련용 화약에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탄’이 너무 부족했다. 물론 화약만 넣은 공포 사격을 하긴 했었지만... 역시 실사격은 무시무시하다.
"끄아아악!"
“사, 살려줘! 살려줘!”
“내 손? 으아아!”
아무리 소형, 경량의 포라고는 해도 4문의 일제사격에, 총기병 중대 하나가 200정의 권총 사격을 쏟아넣자 파멸적인 결과가 나왔다. 기즈 드 콜롬브가 이끄는 부대가 진출하는 순간, 나는 총기병 중대의 호위 속에 재빨리 경량포를 방렬했다.
그리고 우리 방어선의 왼쪽 끝이었던 석조 건물에 달라붙은 적 부대에 이 모든 화력이 집중된 것이다. 건물 안에 자리 잡은 총병 중대를 몰아내기 위해 기를 쓰던 적 보병이 문자 그대로 절반이 쓸려나갔다.
참혹하다.
“아아··· 아아아아!”
“눈이 안 보여, 나 좀···.”
말 그대로 시산혈해의 현장에 부상병들이 고통스럽게 몸부림친다. 참혹한 광경이다. 솔직히 적이지만 가슴 아프다.
물론 내가 명령한 것이다. 당연히 모르지는 않는다. 내가 저들을 뜨거운 납탄으로 찢어발기라고 우리 병사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가슴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에 아군이 이런 꼴이 되었다면 더더욱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책임이고, 앞으로도 수없이 같은 명령을 내릴 것이다.
‘트랑카벨의 승리’를 위해서.
"막생 경!"
내가 신호를 주자, 막생이 200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 생존자들을 향해 돌격한다. 각종 근접 무기로 무장한, 쌩쌩한 200여 명의 귀족 전사들이다. 운 좋게 살아남았어도 아군의 피를 뒤집어쓰고 당황해 있던 적들은 갑작스러운 측면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강력한 근접전 전문가들이 적을 죽죽 밀어내기 시작한다.
"재장전!"
포마다 딸린 두 명의 장전수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장전봉 한쪽 끝의 털 뭉치에 물을 적셔 포 내부를 닦는다. 이는 연소하고 남은 화약 찌꺼기를 닦아내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포신 자체를 식히려는 의도가 강하다.
카르카냑에 머무는 드워프 장인, 에오르크 레타일에게 발주했던 포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훈련 목적으로 출정하기 바로 직전으로, 빈 포가에 막대기만 가지고 장전 흉내 연습만 하던 포병들은 출정 당일에야 실제 포를 실을 수 있었다.
이 특이한 포는 금속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굳힌 갈색 가죽으로 표면을 감싼 형태이다. 무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가뜩이나 가느다란 포신을 최대한 얇게 만들고, 노끈을 최대한 단단하고 촘촘하게 감은 다음 가죽을 씌워 보강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구경은 매우 작고 사거리는 보잘것없을 정도지만, 이렇게 말 한 마리가 끌고 포병 두 명이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가볍다.
가벼우니까 순식간에 전개할 수 있고, 장전도 빠르게 된다. 갑작스럽게 부대 측면에 전개하고 쏴대도 대응을 못 할 정도로 신속하다는 소리지.
물론 위력이나 명중률은 문제가 심각하다. 조금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도 아마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바짝 대고 쏜 것이고, 지금까지 아낀 이유이다. 게다가 급하게 준비하느라 포탄이 포 당 세 발밖에 없다... 많이 쓰고 싶어도 쏘지도 못하는 상황.
"제10 카르카냑, 앞으로!"
"앞으로!"
우리를 지나쳐서, 방진을 이룬 제10 카르카냑 연대의 보병들이 전진을 시작한다. 상대의 측면 모서리를 부숴놓고, 그 배후를 위협하는 듯한 기동을 시작하면 상대는 어떻게 반응할까?
주도권을 이쪽에서 가진 채로, 상대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항상 전투에 임하는 나의 지론이다. 적 입장에서는 선택을 강요당하지만, 그중에 이득을 보는 선택지는 없다. 뭘 해도 잃고, 다만 어떤 손해를 먼저 볼지만 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선택을 안 하면 점점 불리해지다 파멸로의 길이 빨라지겠지.
“장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콘도티에레!”
1번 포의 포술장이 보고했다. 포가에 나무토막 하나 올려놓고, 장전하는 시늉만 하던 신병들이··· 벌써 이렇게 익숙해졌구나. 병사들의 빠른 성장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전부 포 돌려, 이번 목표는 적 기병이다!”
“목표 적 기병!”
쿠르르르륵, 소리를 내며 포가의 기름친 바퀴가 잡초를 짓밟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역시 포가 가벼워서, 포미 쪽의 견인용 결속 고리를 들고 움직이면 한 명의 조작으로도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다. 순식간에 포구가 적을 향한다.
“발사!”
“발사아!”
뻐벙! 뻐벙!
얼른 귀를 막은 사이, 네 문의 포가 일제히 발사됐다. 참 신기한 건, 포대 뒤에서 보면 날아가는 포탄의 꽁무니가 까맣게 보인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주먹보다 작은 포탄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긴 하지만. 하지만 포탄은 곧 굉음과 함께 어딘가에 명중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맞았다!”
한발은 너무 가까이 떨어지고, 한 발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지만, 나머지 두 발은 적 기병대 사이에 떨어졌다. 대기 중이던 기병들 사이에서 피안개와 흙먼지가 튀어 오르고, 말들이 날뛰고 난리가 난다. 아무리 작고 약한 포탄이라고 해도, 사람이든 말이든 처음 맞은 상대는 끔찍한 꼴이 되었을 것이다.
“세 발 째는 장전하지 말고 포신을 식혀!”
“예, 콘도티에레!”
미리 말해둔 대로, 포병들은 다시 털 뭉치에 물을 묻혀 포신 내부를 닦고 있었다. 아이디어가 있어서 가죽포를 만들기는 했으나, 냉정하게 말해서 가죽포는 실패한 병기였다.
퍼포먼스야 오늘 처음 써 보는 것이지만, 충분히 훌륭하다. 보병은 물론 기병과도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빠른 이동 속도, 순식간에 방열이 가능한 간편함, 보병 두 명이 들 수 있고, 말 등에 실을 수도 있는 가벼움까지. 사거리나 명중률이 좀 아쉽다지만 그만큼 가까이에서 쏠 수 있으니.
하지만 심각한 단점이 있다.
‘원래 포든 총이든 제때 제때 식혀줘야 한다고. 그런데 구리 관을 끈으로 칭칭 감아놓고 가죽까지 씌웠으니 열이 빠져나갈 수 있겠나?’
에오르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었다. 내가 포술은 전문이 아니지만 맞는 말이다. 괜히 쿨타임이라는 말이 일반 명사처럼 사용되겠나.
‘분명 가볍고 장전하기도 편하지만, 그 빠른 장전 속도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네. 연속 발사는 두 발까지, 최악의 경우 세 발이야! 명심해 둬! 그래도 아마 포신에 영구적인 손상이 남을 거라고!’
과도하게 뜨겁게 달궈진 포신은 포탄을 원하는 방향으로 쏘기 힘들게 만든다. 베테랑 포술장들은 그 오차도 계산해서 맞춘다고는 하지만···. 아니, 명중률보다도 제일 무서운 건 자폭 위험이다. 포는 물론이고 귀중한 포병들까지 잃게 될 것이다.
게다가 에오르크의 말에 의하면 한 번 과하게 사용해서 포신이 손상되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모양이다. 이래서는 역시 식혀서 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빠르게 식힐 수 있다면?
“레미, 3번포 부탁해!”
“갑니다!”
여기서 레미 라타니에가 혜성처럼 나타나는 거다. 카르카냑 출신의 신병 레미는 기프티드, 그중에서도 모리츠처럼 원소를 다루는 엘리멘탈리였다.
이 작은 체구에 얌전하게 생긴 어린 병사는 부모님의 가게를 도우며 부업으로 얼음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카르카냑 거리에서는 저렴하게 얼음이 들어간 음료를 마실 수 있었던 모양. 으음, 같은 얼음을 만들어 판다고 해도, 주디칼리였다면 귀족 취향의 아이스크림이나 샤베트를 만들어 팔았다면 떼돈을 벌었을 텐데··· 그랬다면 트랑카벨 영지군으로 지원하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젊은이다운 호기로 입대한 그는 마침 군 내 기프티드들을 조사하고 있었던 내 정보망에 걸려, 가죽포의 아이디어와 함께 포병대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참고로, 트랑카벨 영지군의 기프티드들은 특별 수당을 받는다! 절찬 대모집 중.
레미 자신은 자신의 기프트를 ‘물을 차갑게 식힌다’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내가 찬찬히 살펴보니 이는 ‘열을 옮기는’ 능력이었다. 모리츠도 그랬지만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이 세계의 기프티드들은 자기 능력을 명확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훈련을 통해 능력의 적용 범위를 액체에서 고체로 늘려나갔고, 서로 다른 성질의 물질 간의 열 이동도 가능해졌다. 즉, 물을 식혀 얼음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뜨거운 물체가 있었다면 열을 옮겨 물을 끓이는 것도 가능해진 것이다.
“...4번포도 완료!”
“수고했다 레미!”
“아닙니다, 콘도티에레!”
레미가 이마에서 땀을 흘리면서도 해맑게 웃었다. 자신이 기프티드 능력자로 포병대에 배속되었을 때, 기프티드 수당으로 어머니 가게 문짝을 고쳐드릴 수 있었다고 똑같이 웃으며 고마워하던 것이 생각난다. 으으, 수당을 준다고는 해도 열정페이 수준이라 조금 부끄럽긴 하다.
기프티드 연구가 활성화된 주디칼리나 그룬발트 북서부를 생각하면 블랑독은 기프티드들의 대우가 썩 좋지 않은 편이다. 그야, 연구가 되질 않았으니 부가가치를 생산하지도 못하는 것이고.
레미가 냉각 작업을 끝내놓은 포를 만져보니 적당히 기분 좋은 정도의 뜨뜻함이다. 발사 직후에는 맨손은 대기도 힘들 정도로 뜨거웠었지. 이 정도면 큰 문제 없이 발사할 수 있다.
곧 장전이 끝났다. 전장으로 가져온 마지막 포탄이다. 잘 써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당장은 마땅한 목표가 없다. 아까 쐈던 기병대는 이제 진격 중인 아군 제10 연대에 가려 쏠 수 없다.
어디에 쏴야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까. 나폴레옹이 ‘전쟁의 신은 최고의 포병을 가진 편의 곁에 서 있다’라고 했던가. 무슨 생각으로 했던 말인지 알 것 같다. 강력한 한 방을 가지고 있으니 이리 든든할 수가 없네.
내가 포병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전선이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가벼운 가죽포 4문으로 이루어진 포대가 딱 2번 일제사격 하는 것으로 흐름을 완전히 이쪽으로 가져온 것이다.
측면에서 우회를 시작한 제10 카르카냑 연대의 절반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척척 전진하고 있다. 그들을 막을 가능성이 있는 적 우익 끝의 소규모 기병 부대는 포탄 한 방 맞더니 스턴이라도 걸렸는지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 접근하더라도 로베르가 이끄는 기병대가 대기하고 있다.
포병의 첫 사격으로 측면을 붕괴시키고, 막생의 의용군을 돌격시킨 주 전선은 완전하게 적 측면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한쪽에 문제가 발생하면 당장 무너지지는 않더라도, 병사들이 무의식적으로 안전한 방향으로 이동하기 때문인지 라인이 한쪽으로 밀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딱 그렇다. 이게 쌓이면 전열이 붕괴하는 것이고.
그럼 이제, 전진한 제10 연대를 방향 전환해서 반포위망을 구축해볼까···.
“콘도티에레! 콘도티에레!”
익숙하지 않은 단어지만, 일부러 신경 써서 외치는 듯한 소리. 뒤편을 돌아보니, 석조 건물을 돌아 달려오는 전령이 보인다. 길쭉길쭉한 팔다리를 보니 아치요다! 달리기 빠른 방아깨비 청년!
“무슨 일이야? 모리츠가 보냈어?”
“예, 콘도티에레! 좌익 쪽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기병 약 1천 명! 파스칼과 합력해 교전하겠음!”
“오, 그래 수고했다. 전령에게 물 좀 주겠나?”
레미가 수통을 얼른 건네준다. 아치요는 물통을 받더니 조금 놀란 모양이다. 레미 녀석, 전령 고생했다고 물을 식혀서 준 모양이구나.
역시 어디론가 달려가 버린 기병대는 모리츠 쪽으로 갔구나··· 이유야 잘 모르겠지만, 여기가 편해진 만큼 그쪽으로 부담이 심한 것 같으니 걱정된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콘도티에레! 저기, 저쪽!”
레미의 호의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숨을 돌리던 아치요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적진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어라? 아까 가버렸던 기병대가 돌아오고 있네?
“아니··· 아치요, 네가 가져온 내용이 쟤들이 모리츠네와 교전 들어갔다는 것 아니었나?”
“맞습니다! 저도 분명 눈으로 봤는데··· 색색이 알록달록한 기사님들 맞습니다!”
그렇겠지, 저런 부대가 전장에 두 개 있지는 않을 테니까. 가자마자 다시 돌아온 것인가. 설마 그사이에 모리츠나 파스칼 부대에게 탈탈 털린거야? 그런 것 치고는 상태가 멀쩡해 보이기는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잘 모를 때는 신에게 기도하자.
그리고 내 곁에는 ‘전장의 신’이 있지.
“포 돌려! 저쪽이다!”
“네, 콘도티에레!”
쿠르르르, 병사 한 명이 바퀴를 잡아 축을 잡고, 나머지 한 명이 반대편, 견인용 결속 고리를 붙잡고 들어 올리자 다시 포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목표 전방에서 달리는 적 기병대!”
“한 칸 올리겠습니다!”
거리가 다소 멀다. 포술장은 이제 겨우 세 발 째지만, 제법 능숙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드워프 장인 에오르크가 포가에 달아준 반원 형태의 호형 가늠자를 보고 한 칸 포각을 높인다.
“마지막 포탄이다, 잘 쏘자!”
“넵!”
포술장이 외치자, 레미를 포함한 나머지 포대원들이 외친다. 각자 포가를 붙들고 적절한 각도를 찾아간다. 딱히 내가 시킬 것도 없다. 역시 좋은 병사들이야!
적 기병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다. 좀 무질서해 보이고, 대열도 아예 없는 것이 도망 오는 것 같기도 한데, 자의식 강한 기사들을 모아놓고 제대로 부대 편성을 안 해 두면 저딴 식으로 움직이기도 해서 확신은 못 하겠다.
뭐 아무튼 저 어리석은 자들에게 ‘전장의 신’이 내리는 심판을 먹여줄 순간이다.
“적은 사거리에 들어왔나?”
“그렇습니다, 콘도티에레!”
“좋아, 발사!”
“발사!”
뻐어엉!
이번에는 딱 기분 좋게, 전 포문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아군이 가진 마지막 포탄이 전장을 가로질러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