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여울목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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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 일이야 대체!”
어이가 없었다.
우측방에서 모리츠에게 측위 부대의 재편성과 우회 공격을 명령하고 반대편으로 돌아온 나는, 제10 카르카냑 연대의 부연대장 기즈 드 콜롬브와 함께 또 다른 측면 공격 부대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이쪽 전선, 쥐그 드 푸로니가 이끄는 제15 델레망드 연대에 거세게 몰아치던 적 귀족 군대의 공격은 한풀 꺾이고 있었다. 겁도 없이 몰아붙이던 중장병들이 총병들에게 저격당해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고, 의용군에서 보냈던 지원군이 활약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군 창병 대열은 차근차근 적을 몰아내고 있었고, 아까 위압적으로 느껴지던 대규모 방진 역시 전투 초반과 같은 힘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병사들은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잘 버텨 주었고, 적은 내 생각보다 더 빨리 힘이 빠졌다.
그러면 이 틈에 반격해야지, 하고 재빨리 재편성에 나선 사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저, 저 녀석들 어딜 가는 거지?"
적 최후방에 있던 기병들, 알록달록하고 고풍스러운 문장이 그려진 복장을 한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이 분명한 기사들이 갑자기 우르르 전장 반대편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방향은 내가 온 우익 쪽인데... 그 사이에 모리츠와 파스칼이 뭔가 사고라도 쳤나? 뭔가 보이나 고개를 내밀어 보지만, 정 반대편이라 거리가 먼 데다가 언덕과 중간의 다른 병력들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아 미니맵 땡긴다. 상태창은 필요 없고 미니맵 치트를 좀 제발.
전투할 때, 아니 게임이든 막싸움이든, 혹은 대화를 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상호 간에 이해를 할 수 있는 수준의 티키타카가 없으면 괴롭다. 나에게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어느 정도는 상대의 의도를 알아야 대응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상대가 이렇게 때리겠지, 하고 준비하던 예상 범위 밖의 행동을 하면 더 당황스럽다.
현재 박빙이던 주 전선의 전투가 차츰 아군에게 유리해지고 적군의 압박이 약해지는 상황, 적의 선택지는?
1) 예비 보병을 투입하고 기병은 대기
2) 공격하다 지친 병력을 빼고 예비 보병을 투입하고 기병은 대기
3) 공격하다 지친 병력을 빼고 예비 보병을 투입하고 기병은 정면 돌파나 측면 견제
그런데 실제로 발생한 상황은....
???) 기병이 다른 전선으로 떠난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냐. 게임이었다면 AI가 고장 났다고 생각했겠지.
우익의 반격을 맡은 모리츠와 파스칼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일단은 기회다.
거의 천명 가까이 되어 보이던 기병 예비대가 사라졌다.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예비대는 그냥 노는 존재, 혹은 전장에 투입되기 전까지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니다. 적 후방에 1천 기에 가까운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다.
실제로 전투 초기, 전선에 가해지는 압박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섣부르게 방어선 바깥으로 병력을 내보내지 못했던 것이 그 이유 때문이다. 팽팽한 상호견제로 인해 쉽게 내 수를 내보이지 못하던 것을 보고 적장의 수완이 상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나?
아니면 적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나?
이유야 어떻든 좋다. 완벽한 반격의 기회이다.
"선임 중대장! 재편성과 공격 임무를 맡기겠습니다."
"예, 콘도티에레!"
"무리는 하지 않으셔도 되니 적의 측면을 압박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기즈 드 콜롬브가 힘차게 대답했다. 카르카냑 성벽 경비대장 출신으로 아롱드 경에게 추천받은 인물인 기즈는 바위처럼 굳건한 인물이었다. 성의 경비대로 일하면서 가주의 눈에 들었을 정도니 얼마나 성실했을지 대략 상상은 간다. 솔직히 좀 적당히 해도 되는 교대 근무표를 10년 넘게 직접 작성하면서 한 번도 불공정한 경우가 없었다나 뭐라나.
다만 계속 전장의 상황을 계속 파악하며 때로는 기민한 임기응변이 필요한 연대장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됐었는데, 이렇게 대상과 역할이 명확히 정해진 임무는 충실하게 잘할 것이라 믿는다.
자, 나는 이번 전투에서 가지고 있는 카드를 거의 다 써버렸다. 다행히 헛되게 낭비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마지막 남은 카드들은 더 조심해서 써야 한다. 나에게 남은 병력을 점검해본다.
2개 중대 200명의 총기병. 파스칼이 남겨두고 간 정예 총기병들이다. 현재 내가 가진 으뜸 패라고 할 수 있지. 비슷한 숫자나 좀 더 많은 기병과 상대하더라도 절대 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약 200명의 의용군 보병과 60명의 기병. 모두가 좋은 집안 출신에, 전사로 훈련받았고 나름 중장갑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이다. 개활지에 덩그러니 있다면 총병의 밥이 되겠지만, 일단 적에게 붙이면 적병들의 멘탈 탈곡기로 대활약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아 그게 있었지. 각각 한 마리의 말이 끄는 4개의 작은 수레를 확인했다. 두꺼운 천이 덮여있는 길쭉한 수레. 이번이 데뷔전이니까 잘 써먹어야 한다.
“로베르 경, 막생 경, 기병은 로베르 경이, 보병은 막생 경이 지휘하도록 합니다."
"예, 콘도티에레."
막생 공은 사령관 공이라고 부르더니, 어느새 콘도티에레라고 부르네. 이미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솔직히 좀 쑥스러운 칭호야....
로베르 드 나뵈프는 아넥시 전투에도 참전했던 블랑독 출신의 기사이다. 복부에 총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마지막 카라콜 돌격에 참여해서 전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나중에 카르카냑에 따라와서는 기병대에 입대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장비 전환 훈련에 참여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을 열심히 가르치기도 했고. 아넥시 전투에서 경험했기 때문일지. 그래서 지금은 블랑독 출신 기병들로 이루어진 중대에서 중대장을 맡고 있다.
예비대는 준비 되었다. 약간의 균열만 생기면 꽂아 넣을 쐐기이다. 적 후방의 기병대가 달려간 우익 쪽이 걱정되긴 하는데... 아니, 걱정되니까 여기서 그 기병대가 빠진 아픈 지점을 찔러 줘야지.
나는 기즈 드 콜롬브가 천천히 적의 측면을 위협하며 전진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 계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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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어! 멍청이들!"
명목상 `이단 토벌 기사도 연합`의 맹주인 소베트르 드 랑두제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며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는 단정하게 생긴 청년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펄펄 뛰고 있었다.
"소베트르 경, 맹주께서는 이 귀족 집단의 우두머리가 아니신가요? 군령을 어긴 저들에게 엄중한 질책이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청년이 씩씩대며 말한다. 말쑥한 단망토 정장을 입고, 단정하고 깔끔한 외모의 청년은 갑주 차림의 기사들이 오가는 전쟁터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부자들을 상대하는 상회의 주인이나, 큰 도시에 있다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에... 네, 그렇죠. 그래야죠."
소베트르는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제 보니, 이단 토벌 기사도 연합은 그저 외부 출신인 과도하게 열정적인 귀족들이 블랑독에서 마음껏 날뛸 수 있게 하는 구실이었을 뿐이다. 소베트르라는 블랑독 토착 귀족에, 연장자이자 맹주의 존재는 편리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의 앞에서 분노하고 있는 청년은 기사도 연합의 참모장이었다. 기사도 연합 소속의 귀족 중 한 명이 데리고 있던 책사라는데 그룬발트의 유명한 책사 양성 가문 출신이라고 한다. 실제로 대화해보면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단 토벌에 대한 현실적인 계획에 대해서도 망설이지 않고 말하는 것을 보면 실제로 대단해 보였다.
덕분에 만장일치로 기사도 연합군의 참모장이 되었다. 참모장이 된 이후, 책사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출신지도 무기도 계급도 달라 오합지졸인 각 귀족이 데리고 온 병사들을 재편성했으며, 며칠 만에 하나의 부대로 엮어냈다.
그 위력은 오늘의 전투에서 발휘되었다. 기사도 연합의 보병 방진은 적의 얇은 방어선을 굉장힌 기세로 몰아붙였다. 비록 그 기세가 지금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아니, 기세가 곧 꺾일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 배치였다.
"이길 수 있었는데... 바로 지금 필요한데...."
책사 청년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 뜯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소베트르는 동병상련을 느꼈다. 자신도 방종한 기사도 연합 놈들이 제멋대로 맹주에 앉힌 뒤로, 책임만 지고 뒷바라지만 하는 입장이다. 별로 많지도 않은 집안 재산을 털어내어 먹고 마시는 귀족들을 대접하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위 군주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에게 찍힐 대로 찍히며 군수품을 보급하고....
문득 출전 직전에, 그의 주군과 무서운 표정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귀경이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소베트르 경은 현재 거대한 군세의 우두머리가 되었소. 하지만 저들이 소베트르 경을 진심으로 섬기지는 않을 것이오."
"네, 백작님...."
"분명 귀족들, 특히 어린 귀족들은 그저 전공이 가지고 싶어 날뛰는 원숭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미 가진 권세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공이나 명예 같은 것을 탐내는 부모만 잘 만난 어리석은 놈들!"
화가 났는지, 라몽의 살집 좋은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물든다. 소베트르는 의문이 갔다. 그야 보잘것없는 소영주 남작에 불과하지만, 드 레뮤즈 가문은 엘랑키아 왕국 전체에서 손꼽히는 대귀족이다. 그런 이가 `부모만 잘 만난 어리석은 놈`이라는 표현을 쓰다니,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을 가뜩이나 화가 난 주군에게 직접 물을 용기는 없었다. 다행히 주군은 진정한 듯,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여전히 찌푸린 인상이기는 했지만.
"레뮤즈의 군대는 필요한 군수품을 가지고 출발하느라 조금 늦을 거요."
원정군을 위한 병량을 부탁한 것은 소베트르 자신이었다.
"그래도 하루나 이틀 정도겠지. 그러니 너무 급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귀족들을 잘 조율하시오."
"알겠습니다, 백작님."
"트랑카벨의 인간들은... 뭔가 다르오. 당장 보기에 약해 보인다고 덤비지 말란 말이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음, 아니오. 내가 과한 이야기를 했군."
대화는 그렇게 끝났었다.
...소베트르는 주군의 말을 전혀 지키지 못한 상태이다. 귀족들은 전투 배치가 끝나기 무섭게, 힘들게 배치를 끝낸 책사가 말려도 듣지 않고 무리해서 공격을 시작했다. 그 바람에 동맹인 드라멜른 기사단 군세와의 협력도 어긋나기 시작했다. 겨우 그럭저럭 균형을 되찾았나 싶었더니 예비대로 기다리는 것이 지겨웠는지, 위기에 처한 동맹을 구한다며 우르르 달려가 버렸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장인어른! 어쩌면 저쪽에서부터 전투가 끝날지도 모르지만요!`
사위라는 놈이 우르르 몰려가는 귀족 기사대에 끼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에 분노가 차올랐다. 눈치도 없는 놈!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딸을 장가보낸 상대이다. 늠름하고 믿을만한 젊은이라 생각했었거늘.
"책사님."
모두들 권리만 행사하고 책임을 나 몰라라 하니, 좋든 싫든 맹주인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그가 보기에 지금 전황은 썩 좋지 않아 보인다. 이걸 방치하면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질 것이다.
"아인멜츠라 불러주십시오, 맹주님."
"아인멜츠 경, 이제 어떤 일을 해야... 되겠소이까? 적의 별동대가 측면 공격을 준비하고 있소."
트랑카벨 군의 좌측방을 지키던 제10 카르카냑 연대의 절반이 공격 위치로 이동하고 있었다. 초조해하던 아인멜츠는 소베트르의 말을 듣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평소의 자신만만한 말투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예비대로 측면을 보강하고 버티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귀족 분들 말대로 그들이 돌아오거나, 반대편에서 뭔가 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나마 아직 남아있는 소수의 기병으로 적의 반격에 대응합니다."
역시 명확하다. 소베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인멜츠 경, 보병 재배치를 부탁하겠소. 나는 남은 기병들을 모아보겠소."
"알겠습니다. 맹주님!"
맹주님이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거창한 칭호이다. 촌구석의 남작 따위에 불과한 자신에게는.
"항상 침착하시네요, 맹주님께서는. 잠시 당황한 제가 부끄럽습니다."
"아니 그건...."
칭찬을 들었지만, 소베트르는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빈정대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아인멜츠의 제법 잘생긴 얼굴에는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래... 저 막 나가는 귀족 나부랭이들과 비교하면 자신이 침착해 보이겠다 싶긴 하다. 너무 큰 부담에 잔뜩 쫄아 있을 뿐이었지만.
"명령은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믿겠소."
믿음직한 청년이다. 항상... 대체로 침착하고, 자신이 아는 바와 모르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바에 대해서는 항상 정확하고 조리 있게 말해준다.
만약에 귀족 녀석들이 좀 더 침착하게 청년의 말을 따랐다면... 순차적으로 보병을 투입하면서 소모된 적진을 대규모의 기사대로 돌파한다는 전술을 실제로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 핵심은 대규모의 기사대는 자기들 마음대로 전쟁터 반대편으로 달려가 버렸다. 현재는 있는 전력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아인멜츠가 보병대 쪽으로 달려가고, 소베트르 역시 말머리를 돌려 가장 우측 끄트머리의 기병 쪽으로 향한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뻐벙! 뻥!
타타타타탕! 타다당!
"끄아아악!"
"으악, 커헉!"
"우아아아아아!"
갑자기 콩 볶는 듯한 요란한 총소리가 울리더니, 총소리와는 명백히 다른 육중한 소리가 울린다. 공포에 질린 비명, 전쟁터에서 흔한 소리이긴 하겠으나 유난히 높고 밀도가 높은 비명이 들려왔다. 전장의 한쪽 끝, 기사도 연합군 선두 보병의 가장 오른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아군? 아군이 당하고 있는 것인가!"
팽팽하게 전선을 유지하고 있던 부대가 무너지고 있었다. 적을 향해 겨눠지거나, 대기 중에는 수직으로 서 있어야 할 창대가 어지러이 흔들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창대를 놓치는 병사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멀리서 보기에도 숫자가 많이 줄어 있다. 병사들이 갑작스럽게 공포에 질려 물러나고 있는 것이 멀리서도 느껴진다.
"대체 무슨 일이!"